(밑줄긋기)

『농담』에서 세 학생으로 구성된 법정은 루드비크가 여자 친구에게 보낸 문장 하나 때문에 그를 심판한다.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급히 쓴 문장이라며 변명한다. 그의 변명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로써 우리는 적어도 너 안에 숨어 있는 것을 알게 됐어." 피고인이 말하고 중얼거리고 생각하는 모든 것, 그가 자기 안에 숨기고 있는 모든 것이 법정의 처분에 맡겨지기 때문이다.

 

소송은 피고인 삶의 경계들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절대적이다. 숙부가 K에게 말한다. 네가 만약 소송에 지면 "너는 사회에서 지워지게 돼. 너의 친인척 전부와 함께 말이야." 어떤 유대인의 유죄는 모든 시대 유대인들의 유죄를 내포한다. 고급 혈통의 영향력에 관한 공산주의 교의는 부모와 조부모의 과오까지 피고인의 과오에 포함한다. 식민지 개발이라는 죄목으로 유럽에 소송을 제기한 사르트르는 식민지 개척자들을 고소하는 게 아니라 유럽을, 유럽을, 모든 시대의 유럽을 고소한다. "식민지 개척자는 우리 개개인의 내면에" 있고, "우리 모두가 식민지 착취로 득을 보았으므로, 우리에게 인간이란 곧 공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송 정신은 어떤 시효 대상도 모른다. 먼 과거가 오늘의 사건 못지않게 생생하게 살아 있다. 한 번 죽었더라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무덤에도 정보원들이 있다.

 

(중략)

 

불청객들이 그를 체포하러 오기 전부터 이미 K는 맞은편 저택에서 "아주 이상한 호기심으로" 그를 살피는 한 노 부부를 인지한다. 이처럼 소설 시작부터, 고대의 수위 합창단이 게임에 합세한다. 『성』의 아말리아는 고소당하거나 선고받은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보이지 않는 법정이 그녀 탓에 감정 상했다는 사실이 명백히 알려져, 그것만으로도 마을 주민 모두가 그녀를 멀찌감치 피한다. 법정이 한 나라에 소송 체제를 강제하면, 그 나라 국민 전체가 소송의 거대 책략들에 가담하여 소송의 효율성을 백배로 증가시킨다. 국민 모두가 자신이 언제라도 고소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며, 그래서 미리부터 자아비판을 되새김질한다. 자아비판이란 고소인에 대한 피고인의 굴종이요, 자기 자아의 포기다.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폐기하는 한 방식이다. 1948년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부유한 집안 출신 한 체코 아가씨가 유복한 자녀로 누린 특혜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 위해 그녀는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부인할 정도로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공산주의가 사라진 지금, 그녀는 다시 심판받고 있으며 또다시 죄책감을 느낀다. 결국 소송 두 번과 자아비판 두 번이라는 분쇄기를 거친 그녀에게 남은 것은 부인당한 한 인생의 사막뿐이다. 그 사이, 옛날에 아버지(부인된) 소유였던 몰수된 옛집들을 모두 돌려받았지만, 오늘날 그녀는 그저 하나의 폐기된 존재, 두 번이나 폐기된 존재, 스스로 자기 자신을 폐기한 존재일 뿐이다.

 

 -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8부 」, <법정과 소송> 중에서

 

 * * *

 

이라 불리는(흔히, 그리고 모호하게) 음악이 이십여 년 전부터 일상 생활의 음향 분위기를 온통 지배하고 있다. 이 음악은 20세기가 혐오스러워하며 자신의 역사에 구역질을 느끼던 바로 그때 이 세계를 사로잡았다. 자꾸만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 일치는 우연일까? 아니면 금세기 마지막 소송들과 록이라는 엑스터시의 이 만남에 어떤 숨은 의미가 있을까? 엑스터시의 아우성 안에서 금세기는 자신을 망각하고 싶은 걸까? 공포 속에 가라앉아 버린 자신의 유토피아들을 잊어버리고 싶은 걸까? 자신의 예술을 잊어버리고 싶은 걸까? 그 섬세함과 괜한 복잡성으로 민중을 자극하고 민주주의를 모독하는 예술을?

 

록이란 말은 모호하다. 그래서 나는 이 음악을 내 생각대로 묘사하는 편을 택한다. 우선 사람의 목소리가 악기들보다 우위에 있으며, 고음이 저음보다 우위에 있다. 강약법에는 콘트라스트가 없으며, 노래를 아우성으로 변화시키는 한결같은 포르시티모다. 재즈에서처럼, 리듬은 소절 두 번째 박자를 강조하지만 그 방식이 더 상투적이고 더 시끄럽다. 하모니와 멜로디는 너무나 단순해서 이 음악의 유일한 창조적 구성 요소인 음향의 색조를 중시한다. 세기 전반의 유행가들이 가엾은 대중을 울린 (또한 말러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아이러니를 황홀하게 만든) 멜로디들을 지녔다면, 이 록이라는 음악은 그런 감상성의 원죄로부터 면제되어 있다. 이 음악은 감상적이지 않다. 엑스터시요, 한 순간의 엑스터시의 연장이다. 엑스터시란 시간에서 뽑힌 한 순간, 기억 없는 짧은 한 순간, 망각에 에워싸인 순간이므로, 멜로디의 모티프는 전개될 공간이 없으며, 단지 전개도 결론도 없이 그저 되풀이되기만 할 뿐이다.(록은 멜로디가 지배적이지 않은 유일한 '경(輕)' 음악이다. 사람들은 록의 멜로디를 흥얼거리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음 재생 기술 덕택에 이 엑스터시 음악은 도처에서 끊임없이 울린다. 엑스터시 상황들을 벗어나 울린다. 엑스터시의 음향 이미지가 우리 권태의 일상적 장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를 어떤 광연(狂宴), 어떤 신비로운 체험에도 초대하지 않는 이 세속화된 엑스터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익숙해지라고, 그 특권적 지위를 존중하라고, 그것이 명하는 도덕을 준수하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엑스터시의 도덕은 소송의 도덕과는 정반대다. 그것의 보호 아래 이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한다. 이미 사람들은 누구나 유년기에서부터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마음껏 빨 수 있으며, 누구도 이 자유를 포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라. 앉았건 섰건 사람들은 저마다 손가락을 자기 얼굴의 어느 한 구멍, 귀나 입이나 코 속에 들이밀고 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이 본다고 느끼지 않으며, 모두가 코를 청소하는 자신의 모방할 수 없는 유일한 자아를 말하기 위해 책을 쓸 생각을 한다. 아무도 타인에게 귀 기울이지 않으며, 록을 춤추듯 모든 사람이 글을 쓰고 각자 자기 글을 쓴다. 혼자, 자기에 대해, 자기 자신에 집중하여, 그렇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동작을 하면서 말이다. 이 획일화된 자기중심주의 상황에서는, 죄의식이 더는 옛날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다. 법정들은 여전히 일하지만, 노년이나 죽은 세대들만 겨냥한다. 카프카의 등장인물들에게 죄의식이 부여된 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의해서다. 『판결』의 주인공이 강에 투신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는 끝났다. 록의 세계에서는 그런 죄의식의 무게를 아버지가 짊어지게 되었고, 이미 오래 전부터 그는 모든 것을 허락하고 있다. 죄의식을 부여할 수 없는 자들이 춤춘다.

 

최근에 두 젊은이가 신부님 한 분을 살해했다. 텔레비전의 논평을 들어 본다. 한 신부님이 관용을 베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다 희생된 그 신부님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은 특히 젊은이들을 위하셨습니다. 하지만 불행한 두 젊은이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 역시 희생자입니다. 자신들 충동의 희생자입니다."

 

사상의 자유, 말, 입장, 농담, 성찰, 위험한 이념, 지적 선동 등의 자유가 전반적 관례주의 법정의 감시를 받으며 점차 줄어들수록 충동의 자유가 확대되고 있다. 사상의 원죄들에 대해서는 엄벌을 권하나, 감동의 엑스터시 상태에서 범해진 죄과들에 대해서는 용서를 권한다.

 

 -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8부」, <죄의식을 부여할 수 없는 자들이 춤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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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안개 속을 나아가는 자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뒤돌아볼 때는 그들의 길 위에서 어떤 안개도 보지 못한다. 그들의 먼 미래였던 그의 현재에서는 그들의 길이 아주 선명하게 보이고, 펼쳐진 길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뒤돌아볼 때, 인간은 길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잘못을 본다. 안개가 더는 거기에 없다. 하지만 모든 이들, 하이데거, 마야코프스키, 아라공, 에즈라 파운드, 고리키, 고트프리트 벤, 셍존 페르스, 지오노 등, 모든 이들이 안개 속을 걸어갔으며,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다. 누가 더 맹목적인가? 레닌에 대한 시를 쓰면서 레닌주의가 어떤 귀결에 이를지 몰랐던 마야코프스키인가? 아니면 수십 년 시차를 두고 그를 심판하면서도 그를 감쌌던 안개는 보지 못하는 우리인가?

 

마야코프스키의 맹목은 영원한 인간 조건에 속한다. 마야코프스키가 걸어간 길 위의 안개를 보지 않는 것, 그것은 인간이 뭔지를 망각하는 것이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는 것이다.

 

 -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8부」, <안개 속의 길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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