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그린란드에 수출한 물질적 상품만큼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이며 유럽인이라는 정체성이라는 심리적 수출품이었다. 여기에서 그린란드 사람들이 그린란드의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붕괴라는 비극을 맞게 된 이유가 찾아지는 듯하다. 또한 그들이 가혹한 조건에서도 450년 동안 기능적인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설명된다.-341쪽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 이외에, 그린란드 사람들은 유럽인이라는 정체성도 유지하려고 애썼다. ...... 빗과 의복 등 사소한 것에서도 예외 없이 유럽 모델이 모방되었다. 노르웨이 빗은 1200년경까지 한쪽에만 살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이런 빗이 사라지고 양면에 살을 가진 빗으로 바뀌었다. 그린란드의 빗도 거의 같은 시기에 이런 형태로 바뀌었다(헨리 데이비드 소로가『월든Walden』에서 멀리 떨어진 땅의 패션 디자이너가 최근에 발표한 스타일을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사람들을 "파리에서 왕 원숭이가 여행자 모자를 쓰면, 미국에서는 모든 원숭이가 따라한다"라고 빈정댔던 말이 떠오를 지경이다).-345쪽
그린란드 사람들이 유럽의 패션을 예의 주시하면서 세세한 부분까지 따라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모방에는 "우리는 유럽인이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다. 누구도 우리를 이누이트족과 동일시하는 것은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무의식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내가 1960년대 처음 방문했던 오스트레일리아가 영국보다 더 영국처럼 보였듯이, 유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그린란드도 감정적으로 유럽에 속해 있었다.-345쪽
그 감정의 끈이 양면의 빗이나 시신의 팔 위치로만 표현되었다면 애교로 보아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럽인이다"라는 집착은 그린란드의 기후에서도 고집스레 소를 키웠고, 건초를 수확해야 할 여름에 사람들을 노르드르세타 사냥터로 보냈으며, 이누이트족의 유용한 처세법을 끝까지 거부하면서 결국 굶어 죽는 비극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 요컨대 유럽인보다 더 유럽인처럼 처신한 까닭에, 그들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 생활 방식의 파격적인 변화를 거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리라.-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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