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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ㅣ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쇼펜하우어, 레싱, 몽테뉴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쇼펜하우어의 거칠고 약간 곰같이 미련한 영혼은 훌륭한 프랑스 작가의 유연성이나 궁정풍의 우아함이 없지만, 이를 한탄하기보다 오히려 경멸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에게서는 독일 작가들이 좋아하는 척하는 모방된, 은도금한 사이비 프랑스풍을 찾아볼 수가 없다. 쇼펜하우어의 표현은 군데군데 괴테를 연상시키는 것 외에는 독일의 본보기를 상기시키지 않는다. 그는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을 단순하게, 감동적인 것을 수사학 없이, 엄격하게 학문적인 것을 현학성 없이 말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그가 어떤 독일인에게 배울 수 있었겠는가? 또 그는 억지를 부리거나 지나치게 민첩하고 ㅡ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ㅡ 상당히 비독일적인 레싱의 수법에서도 자유롭다. 이는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가. 왜냐하면 레싱은 산문적 표현에 있어 독일인들 가운데 가장 유혹적인 작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묘사법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단적으로 말하려면, "철학자는 어떤 시적인 또는 수사학적인 보조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정직해야 한다"라는 그의 명제와 그를 연관시키면 된다. 정직함이 중요하고 더욱이 미덕에 속한다는 것은 여론의 시대에는 금지된 사적 의견이다. 따라서 내가 쇼펜하우어가 정직하며, 작가로서도 정직하다고 거듭 말한다면, 그것은 그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특징을 규정하는 것이다. 정직한 작가는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단 글을 쓰는 인간들을 모두 불신하는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정직이라는 문제에서 쇼펜하우어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정직한 작가 한 사람을 알고 있는데, 바로 몽테뉴다. 그런 사람이 글을 썼다는 사실로 인해 이 지상에 사는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이 가장 자유롭고 가장 힘찬 영혼을 알게 된 이후, 적어도 나로서는, "그를 한번 보자마자 내게 발이나 날개가 돋아났다"라고 그가 플루타르코스에 관해 한 말을 그대로 그에 대해 해야만 할 정도가 되었다. 이 지상을 고향으로 삼고 살라는 과제가 주어질 경우, 그와 함께라면 나는 견뎌나갈 것이다.
정직함 외에 쇼펜하우어와 몽테뉴의 공통점이 또 있다. 그것은 정말 기분을 즐겁게 만드는 명랑함이다. 타인에게는 명랑함을, 자신에게는 지혜를. 그것은 명랑함에도 두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상가는 그가 진심을 말하든 농담을 하든, 또는 인간적 통찰을 표현하든, 신적인 관용을 표현하든, 항상 흥겹게 하고 생기를 북돋아준다. 불만이 잔뜩 밴 몸짓, 떨리는 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아니라 확실하고 단순하게, 용기와 힘을 가지고, 기사처럼 강하게, 어쨌든 승리자로 행동한다. 가장 깊고 가장 은밀한 즐거움을 주는 것은 그가 싸웠던 모든 괴물들 옆에서 바로 승리하는 신의 모습을 보는 일이다. 그에 반해 평균치 작가들이나 퉁명스러운 사상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명랑함은 책을 읽는 우리 독자들을 비참하게 만든다. ……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승리가 있는 곳에만 명랑함이 있다. 이는 진정한 사상가의 작품이나 모든 예술 작품에 해당된다. 물론 그 내용은 현존재의 문제가 항상 그렇듯이 무섭고 진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쪽 사상가와 반쪽 예술가가 자신들의 불만의 증기를 작품 위에 널리 퍼뜨릴 때, 그 작품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고통을 줄 것이다. 저 승리자 중 한 사람의 가까이에 있다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즐겁고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승리자들은 가장 깊은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가장 생동적인 것을 사랑할 것이고 현자로서 결국 아름다운 것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그들은 진실로 말을 하지, 더듬지 않으며 흉내 내어 지껄이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로 활동하고 살지,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가면을 쓰고 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 곁에 있으면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기분이 되고 괴테처럼 소리치고 싶어진다. "살아 있는 것은 얼마나 멋지고 귀한 것인가! 그 상태에 얼마나 꼭 들어맞고 얼마나 진실되고 얼마나 실재적인가!"
- 『반시대적 고찰 Ⅲ』,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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