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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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없다면

 

자신이 심미적 청중과 비슷한지 또는 소크라테스적이고 비판적인 인간의 공동체에 속하는지 스스로 정확하게 시험해보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무대 위에 표현된 기적을 어떤 감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물어보면 된다. 즉 엄격하게 심리학적인 인과성을 지향하는 역사적 감각이 모욕당했다고 느꼈는지, 아니면 기적은 아이들은 이해하지만 자신에게는 낯선 현상이라고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였는지 또는 다른 종류의 모욕감을 느꼈는지 물어보면 된다. 그것을 척도로 그는 자신이 신화라는 압축된 세계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지를 측정할 수 있다. 이 신화는 현상의 축도(縮圖)로서 기적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엄격하게 따져볼 경우 거의 누구나 학문의 길을 통해서만, 즉 매개적인 추상을 통해서만 과거에 존재했던 신화의 모습을 믿기에 우리는 교양의 비판적, 역사적 정신으로 인해 너무 분열되어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 가장 개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신화가 없으면 모든 문화는 건강하고 창조적인 자연의 힘을 상실한다. 신화로 둘러싸인 지평이 비로소 전체 문화 운동을 통일시키고 완성시킨다. 상상력과 아폴론적 꿈의 힘은 신화를 통해 정처 없는 방랑에서 구원된다. 신화의 형상은 눈에 띄지 않지만 어디서나 현존하는 다이몬과 같은 파수꾼이어야 한다. 그 보호를 받고 젊은 영혼은 성장하고, 그 기호를 보고 남성은 자신의 삶과 투쟁을 해석한다. 국가조차 신화적 토대보다 더 강력한 불문법을 모른다. 이 법은 국가와 종교의 관계, 국가가 신화적 관념으로부터 자라나왔음을 보증해준다.

 

우리는 이제 그 옆에 신화의 인도를 받지 못한 추상적인 인간, 추상적인 교육, 추상적인 윤리, 추상적인 법, 추상적인 국가를 세운다. 어떤 향토적 신화에 의해서도 제어되지 않은 예술적 상상의 무질서한 방황을 머릿속에 떠올려본다. 확고하고 성스러운 본거지도 없이 모든 가능성을 남김 없이 다 소모하고 비참하게 온갖 문화로부터 빌어먹으면서 연명할 운명에 처한 문화를 상상해본다 ㅡ 그것이 바로 현재, 신화의 파괴를 지향한 소크라테스주의의 결과인 현재의 모습이다. 이제 신화를 잃은 인간은 영원히 굶주린 채 모든 과거들 사이에 서서, 설령 가장 멀리 떨어진 고대에서 뿌리를 캐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땅을 파헤치고 뒤져서 뿌리를 찾는다. 충족되지 못한 현대 문화의 강렬한 역사적 욕구, 무수한 이질 문화의 수집벽, 불타는 인식욕이 신화의 상실, 신화적 교양과 신화적 모태의 상실을 지시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지시하겠는가? 열에 들뜨고 그래서 너무나도 엄청난 문화의 활약이 굶주린 자가 탐욕스럽게 손을 뻗어 먹을 것을 찾는 것과 무언가 다른 점이 있는지 자문해본다. 어느 누가 그런 문화에게, 아무리 집어삼켜도 배부르지 않고 손에만 닿으면 가장 강력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도 "역사와 비판"으로 변해버리는 그런 문화에게 여전히 뭔가를 주고 싶어 하겠는가?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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