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먼지와 오자에 언젠가는 비참하게 눈이 멀 알렉산드리아적 인간
소크라테스의 문화는 두 측면으로부터, 즉 차후에 예감하기 시작한 자신이 빚은 결과에 대한 공포에서, 그리고 자기 토대의 영원한 타당성을 과거처럼 소박하게 신뢰하고 확신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충격을 받고 무오류성의 왕홀(王笏)을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붙잡고 있다. 그래서 이 문화의 춤추는 사유가 언제나 새로운 인물에게로 돌진하여 끌어안고 있다가는 갑자기 메피스토펠레스가 유혹적인 라미엔을 단념했듯이 몸서리치며 밀어내는 것은 슬픈 연극이 아닐 수 없다. 이론적 인간이 자신으로 말미암은 결과에 놀라 실존의 무서운 빙하에 감히 몸을 담그지 못하고, 강가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바로 저 "단절"의 특징이다. 누구나 이 단절을 현대 문화의 원초적 고통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는 이제 어떤 것도 온전히, 즉 사물의 온갖 자연적인 잔인함을 포함해 온전히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의 낙천적인 관점은 그 정도로 나약해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비논리적이 되려고 하면, 다시 말해 자신의 결과로부터 도피하기 시작하면, 학문의 원칙 위에 세워진 문화처럼 파멸할 것임을 예감하고 있다. 우리의 예술은 이런 보편적인 위기 상황을 드러낸다. 온갖 위대한 생산의 시대와 인물을 모방하면서 그들에게 의존해도 소용없다. 현대인을 위로하기 위해 온갖 "세계 문학"을 그 주변에 수집하고 그를 모든 시대의 예술 양식과 예술가들 가운데 세워서 아담이 동물을 명명하듯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는 영원히 굶주린 자이며, 즐거움과 힘이 없는 '비평가'이고, 근본적으로 사서이며 교정자이고, 책의 먼지와 오자에 언젠가는 비참하게 눈이 멀 알렉산드리아적 인간인 것이다.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