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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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구원과 치료의 마술사로서 다가온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등불의 빛이 대낮의 빛에 의해 사라지듯이 문명은 음악에 의하여 그 빛을 상실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의 문화인은 사티로스 합창단 앞에서는 자신이 제거되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와 사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극이 강력한 통일 감정에 밀려나고 이 감정은 자연의 심장부로 되돌아간다는 디오니소스적 비극의 직접적 영향이다. 사물의 근저에서 생명은 현상들의 온갖 변화 속에서도 파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즐거움에 가득 차 있다는 ㅡ 내가 이미 여기서 암시한 바와 같이 모든 진정한 비극이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수단인 ㅡ 형이상학적 위안, 이 위안은 사티로스 합창단으로서, 자연 존재의 합창단으로서 구체적으로 명료화되어 나타난다. 이 자연 존재는 말하자면 모든 문명의 배후에서 부단히 살아 있어 근절할 수 없으며, 세대와 민족사의 온갖 변천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

 

몹시 섬세한 고통과 몹시 강렬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유별난 능력을 지닌 사려 깊은 그리스인은 이러한 합창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는 예리한 시선으로 소위 세계사의 무시무시한 파괴충동과 자연의 잔인성을 꿰뚤어 보았고, 의지에 대한 불교적 부정을 동경하는 위험에 처해 있다. 예술이 그를 구원한다. 그리고 예술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은 ㅡ 삶이다.

 

실존의 일상적 제한과 한계를 파괴하는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황홀은 다시 말해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 일종의 무감각적 요소를 함축한다. 과거에 개인적으로 체험한 모든 것은 이 상태 속으로 침잠해버린다. 이렇게 망각의 심연에 의하여 일상적 현실의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현실의 세계가 서로 구분된다. 그러나 저 일상의 현실이 다시 의식 속에 되살아나면, 그 현실은 구토를 느끼면서 현실로서 지각된다. 금욕적이고 의지를 부정하는 심정이 그와 같은 상태의 결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햄릿과 유사하다. 양자는 우선 사물의 본질을 올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인식했다. 그리고 행위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구토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는 사물의 영원한 본질을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지리멸렬한 세계를 다시 정돈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우스꽝스럽거나 치욕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식은 행위를 죽인다. 환영에 의해 베일이 드리워진 상태가 행위에 속한다 ㅡ 이것이 햄릿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너무 많이 반성하여, 말하자면 가능성의 과잉 때문에 행위에 이르지 못하는 몽상가 한스의 진부한 지혜가 아니다. 반성이 아니라, 그렇다 이것은 아니다! ㅡ 진젇한 인식, 무서운 진리에 대한 통찰이, 햄릿뿐만 아니라 디오니소스적 인간에게서도, 행위를 재촉하는 모든 동기를 압도한다. 이제 위안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동경은 사후의 세계와 신들까지도 뛰어넘는다. 실존은, 신들 속에서 혹은 불멸의 피안에서 빛나는 자신의 모든 반영들과 함께, 부정된다. 한번 관조된 진리를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 인간은 어디에서나 존재의 공포와 불합리를 보게 된다, 이제 그는 오필리아의 운명 속에 있는 상징을 이해한다. 이제 그는 숲의 신 실레노스의 지혜를 인식한다. 그것이 그를 구역질 나게 한다.

 

여기, 이러한 의지의 최고 위험 속에서 예술이 구원과 치료의 마술사로서 다가온다. 오직 예술만이 실존의 공포와 불합리에 관한 저 구역질 나는 생각들을 그것과 더불어 살 수 있는 표상들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 표상들은 공포를 예술적으로 통제할 경우 숭고한 것이고, 불합리의 구역질로부터 예술적으로 해방시킬 경우 희극적인 것이다.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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