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은 각기 각자의 본성에 있는 저 데코룸을 보다 더 쉽게 유지하게 해주는 자신의 특정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인간 본성의 보편적인 법칙들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시느이 고유한 본성을 따르는 것이 되며, 심지어 다른 어떤 더 중대하고 좋은 것이 있다 해도, 우리가 추구하는 바를 우리 자신의 본성이 명하는 규범에 따라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 즉 인간 본성에 대항하여 싸운다든다, 네가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가보려고 하는 것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 데코룸이란 어떤 것인지가 더 잘 나타난다. 그 까닭은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의 뜻에 반하는 것, 즉 성격에 맞지 않는 것 모두가 데코룸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것은 본성에 위배되며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 본성의 차이는 그토록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어떤 자는 자살을 해야 할 운명인가 하면, 어떤 자는 자살이 범죄가 되기도 한다. 소 마르쿠스 카토가 처했던 상황과 아프리카에서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던 나머지 다른 자들이 처했던 상황은 확실히 서로 달랐겠느냐? 물론 아니다. 만약 그러나 만약 카토 이외의 사람들이 자살을 했다면 그것은 본성에 어긋났을 것이다. ㅙ냐하면 그들의 생활은 카토에 비해 더 온건했고, 그들의 성격은 더 유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토의 경우는 달랐다. 자연은 카토에게 선천적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엄격한 성격을 부여하였는데에다, 카토 자신이 후천적으로 그것을 영구불멸의 지속적인 성격으로 강하게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공화국을 부활시키려는 의도와 계획된 목적으로 고수하고자 했기 때문에, 참주인 카이사르의 얼굴을 쳐다보기 보다는오히려 죽음을 택해야 했던 것이다.
울리섹스가 저 오랜 기간의 방황 중, 키르케와 칼립소를 여자라 칭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여자들을 위해 봉사하였고, 모든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상냥스럽게 말을 하고 또 유쾌하게 하려고 했을 때 그 얼마나 많은 애를 썼던가! 또 집에 돌아와서는 장차 소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서라긴 하지만, 그는 심지어 노예들과 하녀들의 모욕까지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악스라면 분에 못이겨 그런 것들을 참기보다는, 차라리 천번이라도 죽으려고 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각자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가를 꿰뚫어보고, 이를 잘 조절해야지, 공연히 다른 사람의 특성이 자신에게 얼마나 데코룸한지 시험해 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각자에게 가장 고유한 것이 각자에게 가장 데코룸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