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05-02-04 18:15:19]
"천체의 운동을 계산할 수 있는 나도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계산할 수 없다." 1720년 영국을 휩쓴 남해주식회사(South Sea Company) 투기 붐에서 큰 손해를 본 후 물리학자 뉴턴이 한 말이다.
뉴턴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과학자가 아니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조폐공사격인 왕실 주조국(Royal Mint)의 사장을 30여년간 역임할 정도로 경제를 알던 사람이다. 그런 그도 투기의 광풍 속에서 판단력이 흐려져 당시 중산층 가족 1년 생활비의 100배에 해당하는 2만파운드를 잃었던 것이다.
그러나 뉴턴의 실패도 1997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숄스.머튼 교수의 경우에 비하면 약과다. 98년 러시아 금융위기 직후 파생상품을 전문으로 하는 대규모 헤지펀드 LTCM (Long Term Capital management)이 파산해 세계 금융시장을 붕괴시킬 뻔했는데, 이 두 교수가 이 회사의 이사로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들이 노벨상을 받은 분야가 바로 파생상품이었으니, 경제학자들이 주식시장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가 짐작이 가는 일이다.
예외없는 법칙은 없다고 현대 거시경제학의 아버지 케인스는 주식시장에서 돈을 많이 번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주식시장이 너무 발달하면 경제에 해롭다고 경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보면 케인스의 경고가 너무도 잘 들어맞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는 국가-은행-재벌을 축으로 짜인 과거의 경제체제를 해체하고 주식시장 중심의 새로운 체제를 도입했다. 주식시장이 발전하면 자금 공급이 늘어 우리 경제의 고질병으로 진단된 차입경영이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 특히 강조되었다.
외환위기 후 2~3년은 이러한 논리가 맞는 듯 싶었다. 기업공개.유상증자 등을 통해 주식시장에서 기업으로 흘러들어간 돈은 외환위기 직전인 96~97년에는 연평균 4조원에 그쳤으나 98년에는 13조5000억원, 99년에는 35조1000억원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주식시장에서 기업으로 유입되는 자금은 연평균 (2000~2004년) 6조2000억원 수준으로 다시 줄었고, 동시에 현금배당이나 자사주 매입 등을 통해 기업에서 주식시장으로 유출되는 자금의 규모는 계속 늘어났다. 98년 1조5000억원가량에 그쳤던 현금배당이 2004년에는 8조3000억원까지 급증했고, 자사주 매입도 2001년 3조5000억원에서 시작해 2003년 7조4000억원, 2004년 5조8000억원 등으로 큰 증가세를 보여 왔다.
그 결과 2001년부터는 주식시장을 통해 기업에서 유출되는 자금이 유입되는 자금보다 많아졌고, 그 규모는 2001년 2조원, 2002년 3조원, 2003년 6조9000억원, 2004년 9조2000억원 등으로 급증했다.
우리나라의 주식시장이 후진적이어서 기업의 부채비율이 높다고 하던 70~80년대에도 우리나라 기업 자금의 13.4%가 주식시장을 통해 조달되었다. 그런데 우리 주식시장은 그때보다도 지금 더 발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기보다 빼가는 역할을 하는 것인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최근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주식시장의 지나친 발달에 따른 결과다. 우리 주식시장의 규모가 미국의 1~2%에 불과한 상황에서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적대적 인수합병을 자유화하고 주주권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기업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투자는 삼가고 주주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배당을 늘리며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사주 매입을 늘리다 보니 주식시장에서 가져오는 돈보다 갖다 바치는 돈이 많아진 것이다. 주식시장이 가장 발달한 미국의 경우도 70~80년대에 주식시장은 기업 자금수요의 4.9%에 해당하는 돈을 뽑아갔다.
케인스는 주식시장이 너무 성하여 기업가 활동(enterprise)이 투기(speculation)의 부속물이 되면 경제발전에 해롭다고 설파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을 잘 요약해 주는 이야기다. 주식시장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