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아담 스미스의 경우 662

아담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국부론(國富論: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로서 근대경제학의 창시자로서만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는 결코 인간사회의 경제활동의 측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협의(狹意)의 경제학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근대 시민사회 형성기에 있어서 인간과 사회의 기본문제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노력하였던 사회철학자(社會哲學者)였다. 그는 과학 방법론, 수사학(修辭學), 신학, 문학, 윤리학, 법학, 역사 이론, 국가론, 정치경제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하나의 거대한 학제적(學際的) 체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던 철학자였다. 당시는 학문이 아직 각각의 독립분야로 완전히 분화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근대 사상가들의 경우 학제적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아담 스미스의 경우처럼 거대한 학제적 체계수립에 어느 정도 성공한 예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하겠다.


도덕감정의 기초는 동감의 능력 672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의 기초 내지 내용은 인애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가 속한 계층이나 계급에 관계없이 가지고 있는 동감(sympathy)의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의 『도덕감정론』의 서두에서, <아무리 인간이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행·불행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요인·원리가 인간의 본성 속에 명백히 내재하여 있다. ······ 타인의 슬픔을 보고 슬픔을 함께 느끼는 감정의 존재는 증명을 요하지 않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고, 그 사람이 얼마나 선하냐 유덕하냐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본원적 감정의 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동감(同感)이란 자기를 타인의 입장과 동일한 입장에 놓고, 타인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 환언하면 상상에서의 역지사지(易地思之: imaginery change of situation) 능력을 전제한다.


상호동감의 즐거움 673

상호동감(相互同感)의 즐거움(pleasure of mutual sympathy)은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감정과 동일한 이웃의 동감(fellow-feeling)을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고, 그 반대로 이웃의 동감의 부재(不在)를 느끼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없다.>


보통 사람들이 정의를 판단하는 근거는 효용이 아니라 동감 681

아담 스미스는 결코 일상의 부정의에 대한 처벌을 시인하는 근거가 정의의 공공적 효용성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은, 가장 우매하고 사려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사기·배신·부정을 혐오하고 그런 자들이 처벌받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고 하면서, 보통 사람들이 정의를 판단하는 근거는 효용(效用)이 아니라 동감(同感)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동감정의론(同感正義論)이 실은 중상주의적인 각종 정책·법에 대한 비판이라는 실천적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은 지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공공복리, 효용이 정의의 근거라고 하는 사고야말로 국가에 의해 강제할 만한 법의 범위를 부당하게 확대시켜, 중상주의적인 각종 정책·법의 존재를 지지하는 근거가 될 수 있고, 종국적으로 <자유의 체계>에 대한 부정을 결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부론』에 나타난 아담 스미스의 사상적 특색과 특징 689-690

『국부론』은 경제학의 고전으로서 그 내용이 이미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 상론은 피하기로 한다. 다만, 『국부론』에 나타난 그의 두 가지 사상적 특색과 특징만을 강조하고 지적해 두고자 한다.

첫째의 사상적 특색은 『도덕감정론』에서 전개한 그의 <동감(同感)의 원리>와 『국부론』에서 전개한 그의 <교환(交換)의 원리>=<경쟁(競爭)의 원리>=<시장(市場)의 원리>가 실은 동일한 논리구조 위에 서 있다는 사실과, 두 원리가 모두 중세적 속박에서 인간의 이성뿐 아니라 본능까지 해방된 사회에서 이기심이 사회적 선(즉, 公益)이 될 수 있게 하는 메커니즘 내지 조건임을 밝힌 것이라는 사실이다.

두 원리가 동일한 논리구조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은 양자가 공히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하는 자연적 성향에서 출발함을 의미한다. 동감의 원리란, 이미 본 바와 같이, 인간은 상호동감(mutual sympathy) 속에서 큰 희열을 느끼는 성향이 있다는 경험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고, 교환의 원리는 인간의 본성 속에는 거래·교역(交易)·교환하려는 성향 내지 충동이 내재하고 있다는 경험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스미스는 교환성향은 동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에게만 독특하게 발견되는 성향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원인 모두 인간의 이기적 충동을 사회적 선(善)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기적 충동을 중립적 제3자 혹은 공정한 방관자의 동감을 얻어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제하려는 성향이, 상호동감이 인간에게 주는 희열 때문에 자연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동감의 원리는 곧 이기심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원리가 된다. 왜냐하면, 도덕적 판단의 기준은 행동의 동기(動機)에 있지 않고, 그 행위에 대한 중립적 제3자의 동감(同感)의 성립 여부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성에 내재하는 교환성향도 실은 그 성립의 계기가 인간의 이기적 동기에 있다. 아담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거의 모든 동물류에서 각 동물은 성숙하면 완전 독립하며, 자연상태에서는 다른 동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다른 동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단지 그들의 선심에만 기대해서는 그 도움을 얻을 수가 없다. 그가 만약 그들 자신의 자애심(自愛心: self-love)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발휘되도록 할 수 있다면, ······ 그들의 도움을 얻으려는 그의 목적은 더 효과적으로 달성될 것이다. ······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될 것이오, 하고 ······.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자애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유리함을 말한다.> 이와 같이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적 동기가 교환을 통하여 쌍방 모두에게 유리한 소위 공익(公益)으로 교환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교환성향이 없으면 공업이 성립될 수 없고, 분업이 없으면 부(富)와 재(財)의 해마다의 증대가 달성될 수 없기 때문에, 교환성향 자체는 이기적 동기에서 출발하지만 교환과정 자체는 공익의 증대, 즉 사회적 선(善)을 결과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 교환성향이 뒤에 상론할 공정·자유경쟁적 시장질서 하에서 작동할 때 공익에의 기여(자원의 효율적 배분)는 더욱 커진다. 예컨대, 교환질서가 경쟁적일수록 제조업자는 보다 양질의 상품을 보다 저가로 공급하려고 노력하게 되므로, 노력의 동기 자체는 이윤추구(利潤追求)라는 이기적 동기일지라도 그 사회적 결과는 소비자 이익의 증대라는 공익(公益)에의 봉사를 가져온다.

이상과 같이 인간의 이기심, 자애심(自愛心)은 동감의 원리에 의해 인간 내부에서 견제를 받으며, 동시에 교환의 원리, 특히 경쟁적 교환의 원리에 의해 외부적으로도 공익에 유리한 방향으로 작동하도록 인도되는 것이다.

두 번째의 그의 사상적 특징은, 그가 단순한 자유방임론자(自由放任論者)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흔히들 아담 스미스는 자유방임론자로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두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사회적 공공선(公共善)이 결과로 나온다고 주장한 듯이 이해하고 있으나, 이러한 주장을 <소극적 자유방임론>이라고 부른다면, 그는 결코 소극적 자유방임론자가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적극적 자유방임론자>라고 부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스미스의 <방임(放任)>은 인간과 인간 사회에 내재하는 자연법칙의 해방, 중세적 또는 중상주의적 각종 규제로부터의 인간의 활동력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지, 오늘날 통상적으로 이해되고 있듯이, <현실>을 그대로 방임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오늘날 신고전학파(新古典學派)의 주류경제학자들 중에서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러한 오해의 주된 요인은 아담 스미스의 자연법적 세계관의 배경, 환언하면 그의 체계에서의 자연신학과, 윤리학, 『도덕감정론』에 대한 이해 부족에 있다고 보인다. 또한 아담 스미스는 현실의 경제·시장행태 및 구조에 대한 자세한 관찰, 경험적·실증적 분석을 중시했는데 반하여, 오늘날의 신고전파 경제학의 주류는 다분히 현실에 대한 추상적 인식 위주로 나아가고 있는바, 이러한 방법론의 차이에서도 위와 같은 오해가 발생하는 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담 스미스의 적극적 자유방임론은 자유스럽고 공정한 경쟁시장의 메커니즘의 작동을 전제로 한 방임이고, 자유·공정경쟁이 제한·방해되는 현실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의미의 방임은 아니다. 그는 동업조합의 배타적 특권들을 보증하는 법령들을 맹렬히 공격했을 뿐 아니라, 상인의 독점이윤 추구 본능이 정치권력과 유착하여 생기는 각종 비능률, 불공정을 크게 경계·반대하고 있다. 주의할 것은 그는 결코 이기심, 사적 이익추구의 동기에 대한 예찬론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다만 그러한 동기의 강력성을 인정하고, 그러한 동기가 일정한 경우, 즉 자유·공적 경쟁시장 하에서는 공익·공적 복지의 증대로 연결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자유·공적 경쟁시장을 전제하지 않는 이기심, 환언하면 사적 이윤추구 동기는 결코 사회적 선이 될 수 없다. 그는 『법학강의』제2부에서 이미 <독점은 공공의 풍요를 파괴한다(Monopolies destroy public opulence)>, <기업의 배타적 특권을 인정하는 것도 동일한 효과가 있다>라고 주장하고, 『국부론』의 제1편 11장 결론에서도 경쟁을 제한하는 것은 항상 상인과 제조업자의 이익이 된다. ······ 경쟁을 제한하는 것은 항상 공공의 이익과 충돌한다. 왜냐하면, 경쟁을 제한하면 상인과 제조업자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동료 시민들에게 불리한 세금(예: 상품의 가격인상)을 부과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상인과 제조업자의 이윤은 자연적인 수준 이상으로 증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급이 제안하는 어떤 새로운 상업적 법률·규제들에 대해서는 항상 큰 경계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하며, 그것들을 매우 진지하고 주의 깊게 오랫동안 신중하게 검토한 뒤에 채택해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결국 이러한 의미에서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의 주장은 <반독점(反獨占)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방임은 경제에 대한 정부의 무조건적 불개입(즉, 放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개입과 불개입(不介入)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다.

즉, 독점을 결과하는 기존의 각종 정부 규제에 대해선 불개입 원칙(규제철폐), 자유방임의 원칙이 준수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경쟁을 제한하는 기존의 독과점구조(즉, 동업조합의 자율규제)에 대해서는 개입원칙, 즉 반독점정책(反獨占政策)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스미스적 자유방임론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담 스미스야말로 역사상 최초의 질서정책론자(질서정책론자: Ordnungspolitikust)라 하겠다.


아담 스미스 이론 체계의 취약점 696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살던 시대적 상황, 역사적 발전단계에 의해 그의 인식의 범위가 규제되고 한계지어진다. 아담 스미스도 예외는 아니다. 지나간 200여년의 시민사회의 변화·변모 과정을 돌이켜볼 때, 그의 체계에서 하나의 취약점이 쉽게 발견된다. 그것은 배분적(配分的) 정의에 관한 문제이다. 즉, 만일 중세적 속박, 중상주의적 규제에서 해방된 자유경제가 심대한 배분적 부정의(즉, 소득분배상의 不公正)를 양산한다면 과연 시민사회의 질서·조화·발전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배분적 정의를 하나의 미덕(virtues)으로 보았고 배분적 정의에 대한 요구를 하나의 불완전한 권리(imperfect right)로 파악하고 있다. 즉, 요구는 할 수 있으나 강제할 수는 없는 권리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정의론을 과정적 정의 = 교환적 정의(完全 權利)에 엄격히 국한하여 전개하고 있다.


당면 문제
698

단순상품생산 양식의 시대가 끝나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본격화되면서, 한쪽에는 노동만을 가지고 생산에 참가하는 노동자와 다른 쪽에는 생산수단만을 제공하며 생산에 참가하는, 즉 노동하지 않는 자본가(資本家)가 등장하여, 자본과 노동의 완전분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재화는 더 이상 노동의 생산물이라고만 보기 어렵게 되고, 노동가치설은 더 이상 자유(自由)와 공정(公正)의 양립을 증명하는 이론으로서의 설득력을 잃게 된다. 결국 아담 스미스의 낙관론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 그리하여 아담 스미스 이후 200여년의 역사는 실은 자유와 공정(즉, 配分的 正義)의 양립 문제를 둘러싼 고뇌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고, 오늘날에도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자유인의 창의를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존중하고, 자유경쟁 시장질서의 조화와 효율을 믿는, 모든 <자유의 체계>의 신봉자들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당면 문제가 바로 자유(自由)와 공정(公正)의 양립을 가능케 하는 사회구성 원리, 사회조직 원리의 제시이다. 이는 방법론적으로는 아담 스미스의 경우와 같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및 탐구, 새로운 시각의 정립에서 출발해야 하고, 사회의 현상들에 대한 경험적·실증적 연구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와 공정의 양립(兩立) 원리가 명쾌히 제시될 때,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국가독점자본주의·  탈공업화·자원 부족과 환경위기의 시대에 충분히 합리성과 현실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아담 스미스의 <자유의 체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고, 비로소 우리는 사상사적으로 근대를 극복하고 현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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