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한낱 2펜스짜리 내기에 불과 534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이에 수반될 수 있는 많은 유익한 것들에도 불구하고 한낱 2펜스짜리 내기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어떤 심각한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전혀 없는 소소한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내기에 걸린 판돈의 액수가 아니라 게임의 적절한 방법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내기에 걸린 판돈을 따는 데 둔다면, 결국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원인(原因)에 맡기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영원한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빈번한 비통과 수치스러운 실망에 맡기는 셈이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훌륭하게, 공평하게, 그리고 영리하고 능숙하게 게임을 치르는 데 둔다면,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행위의 적정성에 둔다면, 우리는 그것을 적절한 규율(規律), 교육, 그리고 주의력에 의해 우리의 능력과 통제 범위 내에 두는 것이 된다. 우리의 행복은 완전히 안전하고, 운(運)과는 무관하게 된다.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우리의 능력의 범위 밖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우리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 되고, 따라서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해 어떤 두려움이나 걱정을 할 필요도 없고, 또한 어떤 비통한 실망이나 심각한 절망으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노년기의 허약함과 노쇠함 550

선량한 성격의 로마황제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세계의 문명화된 지역 전체의 절대적인 통치자로서 자신의 운명(運命)에 대해 불평할 어떤 특수한 이유도 분명히 없었으며, 그는 사물의 일상적인 진행과정에 대해 만족을 표시하는 것을, 그리고 평범한 관찰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그런 부분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꼈음에 분명하다.

그는, 노년기에도 청년 시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행위의 적정성(適正性)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으며, 노년기의 허약함과 노쇠함은 꽃이 피어나듯 하는 청년기의 생기발랄함과 마찬가지로 천성(天性)에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Marcus Aurelius, 『명상록(Meditations)』제3장 2절, 제9장 3절), 청년이 소년 시절의 종말(終末)인 것처럼, 혹은 성년이 청년의 종말인 것처럼, 사망 역시 노년의 종말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의 쾌락과 고통 564

정신의 쾌락과 고통은, 비록 궁극적으로는 육체의 그것에서 기원하지만, 원래의 육체의 감정보다 훨씬 더 크다. 육체는 단지 현재 순간의 감각만을 느낄 따름이지만, 정신은 과거나 미래의 감각까지도 느낀다. 과거는 회상(回想)에 의해서, 미래는 예상에 의해서 그것을 느끼게 되는데, 따라서 정신은 육체보다 쾌락도 고통도 훨씬 더 많이 느끼게 된다. 우리가 최대의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우리를 주로 괴롭히는 것은 현재 순간의 고통이 아니라 과거의 고통에 대한 괴로운 회상이거나 또는 더욱 무서운 미래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에피쿠로스는 주장한다.

매 순간의 고통은, 만약 그 자체만을 생각하고 이전에 있었던 고통과 이후에 있게 될 고통으로부터 단절시킨다면, 그것은 사소한 것이 되고 관심을 기울일 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다. 육체가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고통은 이것이 전부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최대의 쾌락을 누리고 있을 때, 우리의 육체적 감각, 현재 순간의 감각은 우리의 행복 중에서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을 뿐이며,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주로 과거에 대한 유쾌한 회상이나 미래에 대한 더욱 즐거운 기대(期待)에서 생겨나며, 그리고 언제나 쾌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임을 발견하게 된다.


인류 전체의 행복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감정 579

어느 한 거대한 공동체의 행복을 목표로 한 행동들은 더 작은 단체의 행복만을 목표로 하는 행동들보다 더욱 큰 자애(慈愛)를 표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그에 비례해서 그만큼 더 큰 미덕(美德)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감정들 중에서 최대(最大)의 미덕은 모든 지적(知的) 존재, 즉 인류 전체의 행복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감정이다. 이와 반대로, 어떤 점에서든 미덕의 성품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감정들 중에서 최소의 미덕은 한 개인의 행복, 예컨대 한 아들, 한 형이나 아우, 한 친구의 행복 이외에 그 이상의 어떤 행복도 목표로 삼지 않는 감정이다.


미덕의 완전성 580

미덕의 완전성은 우리의 모든 행동들을 가능한 최대의 이익(利益)을 촉진하도록 지도하고, 우리의 모든 저급한 감정을 인류공동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종속시키고, 우리 자신을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우리 자신의 번영이 전체의 번영과 일치하거나 혹은 전체의 번영에 기여하는 범위 내에서만 우리 자신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에 존재한다.


자애심 :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는 천성
580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즉 자애심(自愛心: self-love)은 어떤 정도로도, 어떤 방면에 있어서도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는 천성이다. 그것이 공동의 이익(利益)을 방해할 때에는, 그것은 언제나 악덕(惡德)이 된다. 그것이 각 개인으로 하여금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돌보도록 할 때에는, 그것은 단지 무죄(無罪)일 따름이며, 따라서 그것은 칭찬받을 가치도 없지만, 그렇다고 어떤 비난을 받아서도 안 된다. 자애적(慈愛的)인 행동들에는, 비록 그것이 다소 강한 자리(自利: self-interrst)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이런 이유에서 더 많은 미덕(美德)이 있다, 그들은 자애적(慈愛的)인 천성의 힘과 활력을 나타낸다.


맨더빌 박사의 철학 체계 590

악덕과 미덕의 구분을 완전히 없애버린 듯이 보이는 또 다른 철학체계가 있는데, 그 때문에 이 철학체계의 경향은 전체적으로 유해하다. 맨더빌(Mandeville) 박사의 철학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 학자의 견해는 거의 모든 방면에서 틀렸기는 하지만, 우리가 어떤 특정한 태도로 인성(人性)의 일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상들을 관찰하면, 처음에는 그의 견해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비록 거칠고 촌스럽기는 하지만 생동하고 유머감각이 풍부한 멘더빌 박사의 말솜씨로 묘사되고 과장되어 있는 이 표면적 현상들은 그의 학설에 일종의 진실성과 가능성의 분위기를 제공해주고 있는데,
숙맥(菽麥)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장 속아 넘어가기 쉬운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번영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591

그가 관찰한 바로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행복보다는 자신의 행복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며, 진심으로 자신의 번영보다 다른 사람들의 번영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동기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언제나 우리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해도 좋다는 것이다.


모든 공익정신은 단지 인류에 대한 기만이자 속임수에 불과 591∼592

인간의 다른 모든 이기적인 격정들 가운데 허영심(虛榮心)이 가장 강렬한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박수갈채에 의해 쉽사리 우쭐해지고 기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동료들의 이익을 위해 자기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 그는 자신의 행동이 그들의 자애심(自愛心: self-love)에 대해 매우 유쾌하게 느껴지고, 따라서 그들은 반드시 자신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냄으로써 그들의 만족감을 표시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자신의 그런 행동으로부터 기대하는 쾌락은, 그의 생각에도, 이것을 얻기 위해 그가 포기하는 이익을 능가한다. 따라서 이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행동은 사실상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것이고, 또한 천박한 동기에서 나온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행동은 전혀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믿으면서 우쭐대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런 무사(無私)의 동기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의 행동은 그 자신의 눈에나 또는 다른 사람의 눈에나 어떤 칭찬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시하는 모든 공익정신은 단지 인류에 대한 기만(欺瞞)이자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처럼 자랑을 많이 하는 인류의 미덕이라는 것은, 그리고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서로 많이 갖추려고 노력하는 인류의 미덕이라는 것은, 사실은 단지 자존심에서 생겨난 아첨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허영의 과오
592∼593

나는 다만, 영예롭고 숭고한 것을 행하려는 갈망(渴望)과, 스스로를 존중과 시인(是認)의 적절한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갈망을 허영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적정성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노력할 것이다. 심지어 충분한 근거와 이유가 있는 명예와 평판에 대한 애호, 진정으로 존중받을 만한 수단을 통해 존중받고자 하는 애호까지 허영심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전자는 미덕(美德), 즉 인성(人性)에서 가장 숭고하고 가장 위대한 격정에 대한 애호이고, 후자는 진정한 영광에 대한 애호로서, 이것은 앞의 것보다는 분명히 열등하지만 그러나 그 고상한 정도에 있어서는 앞의 것 바로 다음가는 격정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허영(虛榮)의 과오(過誤)가 있다. 전혀 칭찬받을 가치가 없거나 또는 그가 기대하는 정도로 칭찬받을 가치가 있지도 않은 특성에 대해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즉 자신이 착용하는 옷이나 장신구의 시시한 장식 또는 동등하게 천박한 표현인 자신의 일상적인 행동거지에 근거하여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확실히 칭찬받을 자격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님을 그 자신이 완전히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도 허영의 과오가 있다. 자신이 어떤 일에 전혀 중요한 인물이 아니면서 마치 자신이 그 일에 매우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으스대는 골빈 멋쟁이(coxcomd), 자신이 결코 한 적이 없는 모험을 한 척하면서 그것에 대한 공로를 차지하려는 미련한 거짓말쟁이(liar), 자신에게 아무런 권리도 없는 책의 저자인 양 자처하는 우매한 표절자(剽竊者: plagiary), 이들 모두도 허영심이란 격정을 가진 사람들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분명히 표현되지 않는 존중과 시인(是認)의 감정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그런 감정 자체보다는 자신에게 행해지는 시끄러운 칭찬의 표현과 환호를 더 좋아하는 사람, 자신에 대한 칭찬이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직함(職銜)을 좋아하고, 인사받기 좋아하고, 방문 받기 좋아하고, 시중 받기 좋아하고, 존경받고 주목받고 있다는 모양새를 갖추어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의 이목(耳目) 끌기를 좋아하는 사람, 이들 역시 허영의 과오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경박한 감정들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경우(즉, 진정한 미덕에 대한 애호와 진정한 영광에 대한 애호)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앞의 두 가지가 인류의 가장 고상하고 가장 위대한 격정들이라면, 이것은 인류의 가장 천박하고 가장 가져서는 안 될 격정들이다.



인간의 덕행은 우리 격정의 감춰진 방종(放縱)에 불과 598

맨더빌 박사는 경박한 허영의 동기를 통상 유덕한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행위의 근원으로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덕행이 기타 많은 점에서도 불완전함을 지적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덕행은 그것이 자칭(自稱)하는 바의 완전한 자아극복(自我克服:self-denail)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며, 그리고 그것은 우리 격정의 정복이 아니라 통상 우리 격정의 감춰진 방종(放縱)에 불과하다고 한다. 쾌락에 대한 우리의 자제(自制: reserve)가 최고의 금욕적 절제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그는 그것을 순수한 사치(奢侈)와 육욕(肉慾)으로 취급한다. 그에 의하면 인성(人性)의 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초과하는 모든 것은 사치이며, 따라서 깨끗한 셔츠나 편리한 주택의 사용도 일종의 악이라는 것이다. 남녀가 가장 합법적으로 결합되는 경우의 성욕(性慾)의 충족까지 그러한 격정을 가장 유해(有害)한 방법으로 충족시키는 경우의 육욕(肉慾)과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는 이처럼 아주 저렴하게 실행될 수 있는 절제나 정결(貞潔)을 비웃는다.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의 설명 속에 들어있는 교묘한 궤변은 언어의 애매모호함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꿀벌들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 개인의 악행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결론 599∼600

맨더빌 박사의 저서(『꿀벌들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의 큰 오류는, 모든 감정들은, 그것의 정도 및 그것이 향하는 대상 여하를 불문하고, 전부 악덕(惡德)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실제의 감정, 혹은 다른 사람들의 당위적 감정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 허영심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결론, 즉 개인의 악행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결론을 확립한 것은 바로 이러한 궤변에 의해서이다. 장엄(壯嚴)한 것에 대한 애호, 우아한 예술품과 생활수준을 제고하는 것들에 대한 취향, 복장과 가구와 마차 등 사람을 유쾌하게 하는 일체의 것들에 대한 취향, 건축·조각·미술과 음악에 대한 취향이, 어떤 불편도 없이 이러한 격정에 빠져들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사치·육욕(肉慾)·겉치레로 간주된다면, 분명히 사치와 육욕과 겉치레는 공공의 이익이다. 왜냐하면, 이처럼 상스러운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그가 생각한 이러한 특성들이 없으면 우아한 예술은 결코 장려될 수 없을 것이고, 또한 그것은 쓸모가 없어서 틀림없이 시들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맨더빌 시대 이전에 유행했던,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격정들을 완전히 근절시키고 없애버리는 데 미덕이 있다고 본 일부 금욕주의 학설들은 이 방종적(放縱的) 체계의 진정한 기초였다. 맨더빌 박사가 다름과 같은 명제(命題)를 증명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첫째, 인간은 결코 실제로 이러한 격정을 완전히 정복한 일이 없었다. 둘째, 만약 인간이 그 자신의 격정을 보편적으로 정복하게 되면, 그것은 모든 산업과 상업을 종지(終止)시키고, 또한 어떤 방식으로 인류생활의 모든 업무를 종지시킴으로써, 그것은 사회에 대하여 유해(有害)하다.

그는 이 두 가지 명제 중에서 첫 번째 것을 통해서, 진정한 미덕이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소위 미덕이라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사기(詐欺)이자 기만(欺瞞)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을 통해서는, 개인적인 악행이 없으면 어떤 사회도 번영할 수 없으므로, 개인적인 악행은 공중의 이익(利益)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맨더빌 박사의 체계이다. 비록 이 체계 때문에 이것이 없었을 경우에 비해 더 많은 악행이 야기되었던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적어도 다른 원인에서 생겨난 악행들로 하여금 더욱 뻔뻔스럽게 행동하도록 가르쳐 주었으며, 그리고 이전에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함으로 그 부패한 동기(動機)를 공개적으로 선언(宣言)하도록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경험도 없는 독자에게까지도 황당하고 가소롭게 보일 것 602∼603

자연철학을 연구하는 저자가(이하는 맨더빌 박사를 지칭한 말이다. 맨더빌은 본래 의사로서 자연과학자이다-역자) 우주의 위대한 현상들의 원인을 규명한다고 자처하거나,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설명한다고 자처하는 경우, 그런 것들에 관해서는 그는 자기 좋을 대로 이야기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이야기가 그럴 듯한 범위 내에 있는 한, 그는 우리가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을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갈망(渴望)과 감정이 생겨나는 근원이나 우리의 시인(是認)과 부인의 감정이 생겨나는 근원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하겠다고 제안하는 것은 마치 그가 우리가 살고 있는 교구의 여러가지 사정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설명해주겠다고 자처하는 것과 같다.

비록 이런 경우에조차, 게으른 주인이 자신을 속이는 집사(執事)를 믿는 것처럼, 우리 역시 속아 넘어가기 쉽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그의 설명을 그대로 다 믿고 넘어갈 수가 없다. 적어도 그 중의 일부 내용들은 정당해야 할 것이고, 매우 과장된 내용들마저 약간의 근거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소에 늘 그래 왔듯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슬쩍 한번 살펴보는 정도의 관찰에 의해서도 그의 사기행각(詐欺行脚)은 들통 나고 말 것이다.
천연적인 감정의 원인으로서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천성(天性)이나 또는 그것과는 어떤 유사성도 전혀 없는 원리(原理)를 제시하고 있는 저자는, 가장 분별력도 없고 가장 경험도 없는 독자에게까지도 황당하고 가소롭게 보일 것이다.


배반(背叛)과 기만(欺瞞) 641

배반(背叛)과 기만(欺瞞)은 극히 위험하고 극히 두려운 악덕이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용이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매우 안전하게 빠져들게 되는 악덕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어떤 악덕들보다 이것에 대해 더 많은 경계심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은 모든 사정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들에 대하여 치욕의 관념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여성에게 있어서의 정절(貞節)의 상실과 유사하다. 정절은,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극도로 조심하는 미덕이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양쪽 모두에 관해서 똑같이 민감하다. 정절의 파기는 회복할 수 없는 불명예를 준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유혹도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어떠한 슬픔이나 또는 어떠한 후회도 그것을 속죄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민감하기 때문에, 심지어 강간(强姦)당한 것까지도 수치스럽게 여기며, 마음속으로 스스로 무고(無辜)함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상상 속에서 더럽혀진 육체를 씻어 주지는 못한다.


맹세의 위반, 신의의 파기
641

맹세(faith)의 위반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 맹세가 엄숙하게 선서된 후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비록 그것이 가장 무가치한 인간에 대하여 이루어진 것일지라도 그렇다. 신의(信義: fidelty)는 너무나도 필요한 미덕이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른 어떤 것도 빚진 일이 없는 사람이나, 우리가 합법적으로 죽여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조차 신의는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정도이다. 신의를 파기한 사람이, 자신이 약속을 했던 이유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거나, 그 약속을 지키는 것과 다른 어떤 존경할 만한 의무의 이행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파기했다고 주장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이러한 사정들은 그 불명예를 경감시켜 주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완전히 씻어 주지는 못한다. 그는 어느 정도의 수치심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사람들이 상상하는 어떤 떳떳치 못한 행동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스로 엄숙하게 지키겠다고 공언(公言)했던 약속을 어겼다, 그리고 그의 성격은, 비록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오점을 갖게 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조롱거리가 되는데, 그것을 완전히 지워버리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의 모든 본능적인 욕망들 중에서 가장 강한 것들 중의 하나
648

신뢰를 받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고 지휘하고 싶은 욕망은 우리의 모든 본능적인 욕망들 중에서 가장 강한 것들 중의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욕망들은 아마도 본능(本能)으로서, 이 본능 위에 언어(言語)의 관능(官能), 즉 인성 특유의 관능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동물도 이런 종류의 관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다른 어떤 동물들에게서도 자기 동류(同類)들의 판단과 행위를 지도·지휘하고 싶어 하는 어떤 욕망도 발견할 수 없다. 위대한 야심, 남들보다 우월하고자 하는 욕망, 남들을 지도·지휘하고자 하는 욕망은 전적으로 인류 특유(特有)의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언어는 야심을 위한, 남들보다 우월하기 위한, 남들의 판단과 행위를 지도·지휘하기 위한 위대한 도구이다.


대화와 교제의 큰 즐거움
651

대화와 교제의 큰 즐거움은 감정과 의견이 어느 정도 일치하고 속마음들이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는 데서 생겨나는데, 그것은 수많은 악기(樂器)들처럼 서로 조화를 이루고 또한 서로 박자가 맞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쾌한 조화는 감정과 의견의 자유로운 교류(交流)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모두는 서로 어떻게 느끼는지 알고자 하고, 서로의 가슴속 깊이 들어가서 그 진실한 감정과 정서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 천연의 격정에 탐닉하게 하는 사람, 자신의 가슴 속으로 우리를 초대해 주는 사람, 말하자면 자신의 가슴의 문을 활짝 열어 주는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더 즐겁게 해주는 일종의 후한 대접을 베풀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양호한 기질(氣質)을 가진 사람은, 만약 그가 자신이 느끼는 진실한 감정을, 그리고 그가 그것을 느끼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용기가 있다면, 그는 언제나 사람들을 유쾌하게 할 수밖에 없다.


고대의 도덕철학자들 659

고대의 도덕철학자들 중에서는 정의(正義)의 준칙(準則)들을 일일이 열거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을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키케로(Cicero)는 그의 『의무론(Offices)』에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학(Ethics)』에서, 기타 모든 미덕들을 다룬 것과 동일한 일반적인 방식으로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키케로와 플라톤의 법학 중에서 우리는, 그들은 모든 나라의 실정법(實定法)에 의해 강제로 실행되어야 할 천연적 공평(公平: equity)의 준칙들을 열거하려고 어느 정도는 시도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법학 중에서는 이런 종류의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의 법률은 치안법(治安法: laws of police)이지 정의의 법률(laws of justice)은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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