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개인의 건강, 재산, 지위와 명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신중 409
요컨대, 개인의 건강, 재산, 지위와 명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신중(愼重)은, 비록 대단히 존중할 만하고, 심지어 온후하고 유쾌한 성품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모든 미덕들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거나 또는 가장 고상한 미덕은 아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존중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격정적인 사랑이나 감탄을 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살가운 정을 덜 느끼는 경향 418-420
어렸을 때 어떤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떨어졌다가 성인이 된 후에야 돌아온 자식에 대하여 그 아버지는 살가운 정을 덜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 아버지는 그 자식에 대하여 아버지로서의 따뜻한 애정이 덜하고, 그 자식은 부모에 대하여 자식으로서의 효경심이 덜하기 쉽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교육을 받은 형제자매들도 서로 간에 느끼는 애정의 정도가 이처럼 감소되기 쉽다.
그러나 책임감과 도덕심으로 앞에서 말한 일반법칙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러한 자연적 감정과, 비록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비슷한 감정을 만들어낼 것이다. 부모나 자식, 형제자매들은 그들이 비록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서로에게 결코 무관심하지 않다. 그들은 그처럼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그런 우애를 누릴 때가 언젠가는 오리라는 기대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이 서로 만나게 될 때까지 떨어져 있는 자식이나 형제는 종종 특별히 좋아하는 자식이나 좋아하는 형제가 된다. 그들은 서로를 헤친 적이 결코 없으며, 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억할 가치가 없는 어린 시절의 장난으로서 잊혀진 지 이미 오래다. 그들이 서로에 대해 듣는 소식들은, 만약 그 소식들이 상당히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전해진다면, 모두 매우 듣기 좋고 호의적인 것들이다. 곁에 있지 않은 아들이나 형제는 항상 가까이 있는 아들이나 형제들과 같지 않지만, 여전히 모두 완전한 아들이고 완전한 형제들이다. 가장 낭만적인 희망이 제공하는 즐거움은 그런 사람들과의 대화와 우애 속에서 누리게 될 행복이다. 그들이 서로 만났을 때에는, 그들은 가족들의 애정을 구성하는 요소인 습관적 동감(同感)을 인식하는 성향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 역시 마치 그들 사이에는 실제로 그러한 동감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하기 쉽다.
그러나 내가 우려하는 것은, 시간의 경과와 실제의 경험을 통해 그들은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더 친밀하고 서로를 잘 알게 됨에 따라 그들은 흔히 서로에게서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습관, 기질, 성향 등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습관적 동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가족들 간의 애정이라 불리는 그런 진실한 본성과 그 기초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서로에게 쉽사리 적응할 수 없다. 그들은 그동안 서로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상황에서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지금은 진지하게 서로 적응하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미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빈번한 일상적인 대화와 교제가 그들에게 주는 기쁨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그들은 서로 간에 필수적인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그리고 겉으로는 서로를 점잖게 대하면서, 계속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친근하게 함께 살아온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나 자연히 생기게 되는 것들, 즉 진심으로 만족하고 감미로운 동감을 느끼고, 서로 믿는 바탕 위에서 마음을 터놓고 편안함을 느끼는 것, 이러한 것들을 그들이 완벽하게 누리는 일은 거의 없게 된다.
(나의 생각)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난히 극성스럽게 확산되었던 '한국사회의 해외조기유학 열풍'과 그에 따라 파생된 '기러기 아빠'의 문제점을 갈파한 대목이다.
자기 가정에서 교육시켜라 421
아들을 멀리 있는 귀족학교에 보내서 교육시키고, 젊은 사람들을 멀리 있는 대학에 보내서 교육을 시키고, 젊은 딸들을 멀리 있는 수도원이나 기숙사제 학교에 보내서 교육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상류층 사회의 가정윤리와 도덕을 손상시키고, 따라서 양국의 상류층 사회의 가정의 행복을 손상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당신도 당신의 자녀들이 부모에 대하여 효도하고 형제자매에 대하여 친절하고 깊은 우애를 가지도록 교육받기를 원하는가? 그것을 원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친절하고 우애하는 자식이 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서 교육받도록 하라. 그렇게 하려면 자기 가정에서 교육시켜라. 부모의 집에서 살면서 편리하고 적절하면 공립학교에 매일 통학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항상 집안에서 살도록 하라. 당신에 대한 그들의 존중은 언제나 그들의 행위에 매우 유용(有用)한 제약을 가할 것이 틀림없고, 그들에 대한 당신의 존중은 가끔 당신 자신의 행위에 쓸모없지 않은 제약을 가할 것이다. 소위 공공교육을 통해서 얻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으로 인해 거의 확실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상실하게 되는 것에 대한 어떤 종류의 보상도 해줄 수 없다. 가정교육은 일종의 자연적 교육기관이며, 공공교육은 일종의 인위적 교육기관이다. 어떤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우정이라는 신성하고 존경할 만한 이름 427
젊은이들의 성급하고 맹목적이며 어리석은 친교(親交)는 통상 상격상의 사소한 유사성에 근거하고 있고, 품행과는 전혀 관계없이 서로 같은 학습, 같은 오락, 같은 취미, 또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특이한 원리나 관점에 대한 같은 의견에 근거하고 있다. 변덕이 죽 끓듯이 반복되는 이러한 친교들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비록 그것들이 아무리 좋은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결코 우정(友情: friendship)이라는 신성하고 존경할 만한 이름으로 불릴 가치가 없다.
황금률 428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비루한 행위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보편적인 분개는 심지어 때로는 시혜자(施惠者)의 공로에 관한 보편적인 감각을 증대시키기까지 한다. 은혜를 베푼 사람은 자신이 베푼 은혜의 결실을 전부 다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다. 만약 그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그 사람에게서 그 결실을 거두지 못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열 배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자혜(慈惠)는 자혜를 낳는다. 그리고 만약 우리의 형제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최대 목적이라면, 그것을 획득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플라톤의 신성한 잠언 442
인도주의나 인자(仁慈)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공익정신을 가진 사람은 이미 확립된 권력이나 특권을, 심지어 그것이 개인들의 특권이라 하더라도, 존중할 것이고, 만약 그 특권이 국가를 구성하는 주요 계층이나 사회단체의 것일 때에는 더욱 존중할 것이다. 그 중의 일부 특권들이 어느 정도 남용되고 있다고 생각되더라도, 만약 그가 그러한 특권들을 거대한 폭력의 행사 없이는 없앨 수 없을 때에는, 그는 자기 스스로 절제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이성(理性)과 설득(設得)을 통해서는 사람들에게 뿌리박힌 편견을 없앨 수 없을 때에도, 그는 그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려 하지 않고, 플라톤의 신성한 잠언(箴言)이라고 키케로(Cicero)가 정확하게 부른 것, 즉 자기 부모에 대해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자기 조국에 대해서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말을, 경건하게 준수할 것이다. 그는 공적인 일들을 가능한 한 국민들 속에 이미 단단히 뿌리내려져 있는 습관(習慣)과 편견에 적응시키려 할 것이고, 또 국민들이 복종하기 싫어하는 규제가 없음으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불편들을 최대한 제거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는 옳은 것을 건립할 수 없을 때에는 틀린 것을 개선하는 것을 무가치한 일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솔론(Solon)이 그랬듯이, 최선의 법률체계를 세울 수 없을 때에는 국민이 참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의 것을 세우려고 노력할 것이다.
군주들이 가장 위험한 인물 444
정치가의 관점을 지도하는 데에는 자신들이 제안하는 정책과 법률의 완전성에 대한 일종의 보편적이고 심지어 체계적이기까지 한 관념이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일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러한 관념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수립하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그것도 즉각 수립하고자 하는 것은, 흔히 최고도의 오만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 자신의 판단을 최고의 표준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총명하고 고상한 사람이며, 따라서 동포들이 자기에게 맞추어야지 자기가 동포들에게 맞출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모든 정치 이론가들 중에서 군주(君主)들이 가장 위험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이러한 오만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이 무한히 우월하다는 것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혁적인 황제나 국왕들이 자신들의 통치하에 있는 국가의 체제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실행하는 데 반대되는 장애물들만큼 잘못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플라톤의 신성한 잠언을 경멸하면서, 국가가 자신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자신들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총명한 사람이라면 449
최대의 국가적 재난(災難)을 당해서도 개인적 재난을 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총명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즉, 자기 자신과 친구들 및 동포들은 우주에서 생환(生還)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가장 절망적인 진지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리고 만약 전 우주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들에게 그러한 명령이 내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자신들의 임무는 이러한 지시를 체념하고 감수할 뿐 아니라 가볍고 기쁜 마음으로 이를 포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총명한 사람이라면 훌륭한 병사가 언제나 할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생각)
'리더가 보여야할 태도'라고 생각된다.
인간에게 배당되어 있는 일 450
그러나 우주(宇宙)라는 이 거대한 체계를 관리하고 모든 이성적이고 지각 있는 생물들의 보편적 행복을 돌보는 것은 신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다. 인간에게 배당되어 있는 일은 훨씬 하찮은 부문이지만, 그의 미약한 능력이나 편협한 이해력에 견주어 보면, 이러한 배당은 매우 적합한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의 행복, 자기 가족과 자기 친구와 자기 나라의 행복을 돌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가 더욱 숭고한 것을 사색하는 데 빠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사소한 부문의 일을 무시해도 된다는 핑계는 될 수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하여 아비디우스 카시우스(Avidius Cassius)가 했다고 전해지는 아마도 부당한 질책에, 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적 명상에 깊이 빠져 우주의 번영을 사색하면서도 로마제국의 번영은 무시했다고 하는 그러한 질책에, 자신을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 명상적인 철학자의 가장 숭고한 사색도 가장 하찮은 현행 의무(義務)를 소홀히 하는 것을 보상할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의 존엄과 지위를 지킬 필요가 있다. 463
질투(嫉妬)란,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우월한 것을, 그들이 정말로 그처럼 우월할 자격이 있는 경우에도, 그들의 우월함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혐오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격정이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에서, 어떤 우월함을 누릴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자신을 능가(凌駕)하거나 자기보다 앞서 가도록 순순히 용인하는 사람은, 비열한 소인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나약함은 통상 태만에 기원(起源)하고, 때로는 선량한 성품에, 싸우기 싫어하고 소란 떨고 사정하기 싫어하는 성품에 기원하며, 그리고 때로는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일종의 아량(雅量)에 기원하기도 하는데, 이런 아량은, 그 당시에 무시하는 이익들을 언제나 계속 무시할 수 있으며, 따라서 쉽게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나약함에는 통상 많은 후회와 회한이 뒤따른다. 그리고 처음에 보여주었던 어느 정도의 아량은 흔히 끝에 가서는 극도로 악의적인 투기(妬忌)로 변하게 되고, 그리고 자신이 아량을 베풀어 주었던 자의 우월함에 대한 증오로 변하게 된다. 일단 그의 아량 덕에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 된 사람은, 그의 아량에 의해 양보를 받아냈던 바로 그 환경에 의해, 정말로 그 우월한 지위를 누릴 자격을 갖추게 되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필요가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존엄(尊嚴)과 지위(地位)를 지킬 필요가 있다.
인간생활의 쾌락, 오락 및 환락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 467
인간생활의 쾌락, 오락 및 환락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과도(過度)하거나 혹은 부족함으로써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러나 두 가지 중에서 부족한 것보다는 과도한 것이 감정을 덜 상하게 하는 것 같다. 방관자에게 있어서나 당사자에게 있어서나, 환락(歡樂)에 대한 강한 성향은 오락과 기분전환에 대한 무감각보다는 분명히 더욱 즐거운 것이다. 우리는 청년의 쾌활함에, 그리고 심지어는 어린아이의 쾌활함에 매혹되지만, 그러나 노년에 너무나도 자주 수반되는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장중(莊重)함에는 곧 싫증을 내게 된다. 물론 이러한 성향들이 적정성에 대한 감각에 의해서 억제되지 않을 때, 시간, 장속, 자기의 연령이나 상황에 부적합할 때, 그것들을 마음껏 발산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이나 의무를 소홀히 할 때에는, 그것은 너무 지나치고 개인이나 사회 모두에 대하여 유해한 것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의 대부분에서 사람들이 질책(叱責)하는 것은 주로 기쁨에 대한 성향이 강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적정성이나 의무에 대한 감각이 약하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젊은이가 그의 연령에 자연스럽고 적합한 오락이나 유흥(遊興)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고 자기 책이나 일에 대한 것 이외에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는 딱딱하고 유식한 체하는 사람으로서 혐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가 이처럼 오락이나 유흥거리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좋게 보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가 부적절한 유흥에 빠지는 것을 (그런 성향은 별로 가지고 있어 보이지 않지만)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것조차 우리는 좋게 보지 않는다.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준 469
우리 자신의 장점(長點)을 평가하고 우리의 성품과 행위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가 자연히 이것들과 비교하게 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준이 있다. 그 하나는 우리가 각자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엄밀한 적정성(適正性) 및 완미성(完美性)의 관념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통상 도달할 수 있는 이 관념에의 접근(接近) 정도(程度)이다. 이 접근 정도는 또한 대부분의 우리 친구와 동료, 경쟁자들이 과거에 실제로 도달했을 수도 있는 그런 기준이다.
엄밀한 적정성(適正性) 및 완미성(完美性)의 관념 470
총명하고 도덕적으로 고상한 사람은 그의 주요 관심을 첫 번째 기준, 즉 엄밀한 적정성(適正性) 및 완미성(完美性)의 관념에 둔다.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이러한 종류의 관념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 관념은 장기간 자기 자신의 행위와 성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성품과 행위에 대하여 관찰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관념이 형성되는 것은 우리 가슴 속에 있는 위대한 반신반인(半神半人: demigod), 즉 우리 행위의 위대한 재판관이자 조정자의 완만하고 점진(漸進)하고 부단히 진전(進展)되는 작업이다. 이러한 관찰을 할 때 각 개인들이 투입하는 조심성과 관심, 각 개인들의 감수성의 섬세하고 예민한 정도에 따라서 다소 간에 차이는 있지만, 각 개인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이 관념을 정확히 묘사하고, 그 관념을 정확히 채색하며, 그 관념의 윤곽을 정확하게 그리게 된다.
수준낮은 예술가들 472
모든 문학예술의 영역, 즉 미술, 시, 음악, 웅변, 철학 등에서 이 위대한 예술가들은 항상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서도 정말로 불완전함을 느끼며, 그것들이 자신이 생각한 이상적인 완미함에 비해서 얼마나 모자라는지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더 민감하게 느낀다.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 그 완전성을 모방은 하지만, 그러나 그는 그것과 동등하게 되려는 기대는 포기한다. 자기 자신의 성취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는 것은 수준 낮은 예술가들뿐이다.
통상 다른 사람들이 도달하는 보통 정도의 탁월성(卓越性)에 쏟는 사람들 473
자신의 장점을 평가하고 자신의 성품과 행위를 판단할 때 자신의 관심의 거의 대부분을 두 번째 기준, 즉 통상 다른 사람들이 도달하는 보통 정도의 탁월성(卓越性)에 쏟는 사람들 가운데는, 실제로 그리고 정당하게 자신들이 이 정도의 탁월성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을 느끼며, 또한 모든 이성적인 그리고 공정한 방관자들에 의해서도 그렇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주로 언제나 이상적인 완미성의 기준이 아니라 일반적인 완미성의 기준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약점이나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거의 느끼지 못한다. 또 겸허하지도 않고, 잘난 체하고, 거만하고, 뻔뻔스럽고, 자신들에 대해서는 커다란 찬사를 보내면서 다른 사람들은 매우 경멸한다.
그들의 성품은 일반적으로 매우 비뚤어져 있고, 그들의 공적(功積)은 진실하고 겸허한 미덕을 지닌 사람들에 비해 훨씬 못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과도한 자화자찬(自畵自讚)에 근거한 과도한 자만심(自慢心)이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심지어 흔히 일반 군중들보다 지적 수준이 훨씬 높은 사람들까지 기만하기도 한다.
가장 무지한 돌팔이의사, 사이비교주 등 사기꾼들이 보통의 시민생활에서나 종교적인 신앙에서나 자주 그리고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성공하는 것을 보면, 군중들은 얼마나 과장되고 근거 없는 허풍(虛風)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허풍이 대단히 고도의 진실하고 구체적인 공적에 의해 뒷받침되고, 그러한 허풍이 자신들에게 부여하는 모든 화려한 광채를 띠고 나타나고, 거기에다 그것이 지위가 높고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의 지지를 받고, 그 허세(虛勢)가 종종 성공적으로 발휘되어 대중으로부터 커다란 환호를 받게 될 때에는, 심지어 냉정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조차 흔히 그것을 찬탄하는 일반 군중들의 대열에 함께 휩쓸리게 된다. 이 어리석은 군중들의 요란한 갈채(喝采) 소리 자체가 종종 그의 판단력을 헷갈리게 함으로써 그가 그러한 인물(사기꾼)들을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 때에는 그는 언제나 그들을 진지하게 숭배하게 되는데, 심지어 그들이 자기 스스로를 숭배하면서 보여주는 찬탄보다 더욱 강한 찬탄을 보내게 된다. 이러한 경우, 만약 시기심(猜忌心)만 없다면, 우리는 모두 이러한 인물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찬탄하고, 그 때문에 우리의 상상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많은 측면에서 매우 감탄을 받을 가치가 있는 그들의 성품을 모든 면에서 완전무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의 과도한 자화자찬은 그들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는 총명한 사람들에 의해 잘 이해되고, 그리고 아마도 어느 정도의 비웃음으로 간파되기도 한다. 이 총명한 사람들은, 그 인물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군중들이 흔히 존경심과 심지어 거의 숭배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거만한 행동을 속으로 조소한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 있어서 가장 떠들썩한 명성과 가장 널리 명예를 얻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러하였고, 아주 먼 후손에게까지 전해진 그들의 명성과 명예 역시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과도한 자만심과 자화자찬 때문 475
어느 정도 과장된 이러한 자화자찬이 없다면 세상에서의 대성공, 인류의 감정과 의견을 지배하는 위대한 권위(權威)를 획득하기 매우 어렵다. 가장 걸출한 인물들, 가장 빛나는 업적을 성취한 사람들, 인류가 처해 있던 상태(狀態)와 사상에 최대의 변혁을 가져온 사람들, 그리고 가장 성공한 장군들, 위대한 정치가와 입법자들, 소속된 사람 수가 가장 많고 가장 성공적인 종파나 정당의 언변(言辯)이 뛰어나 창시자와 지도자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뛰어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그들의 위대한 공로 그 자체 때문이기보다는, 그들의 위대한 공로와는 전혀 비례하지 않을 정도의 과도한 자만심(自慢心)과 자화자찬때문이다.
이러한 자만심은 더욱 냉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엄두도 내지 못할 사업들을 시작하도록 촉구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업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들을 지지하는 추종자들의 복종와 순종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마침내 결실을 거두어 성공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자만심은 그들로 하여금 거의 광기(狂氣)와 어리석음에 가까운 허영에 빠지도록 한다.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비판 476
알렉산더 대왕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신으로 생각하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자기 자신을 신으로 상상하는 경향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임종(臨終) 시에, 모든 상황들 중에서 불멸의 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상황에서, 자기 친구들에게 자기의 노모(老母) 올림피아(Olympia)를 신들의 명단에 넣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자신의 이름은 이미 오래 전에 그 명단에 올려 놓았었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비판 476
자기 추종자들과 제자들의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찬사를 받고, 대중들의 보편적인 갈채를 받으면서, 아마도 이러한 갈채에 뒤따라 나왔을 신탁(神託: oracle)에 의해 최고의 현인으로 선언된 후에도,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지혜는 그 자신을 신으로 환상하는 것은 용인(容認)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으로부터 종종 은밀한 계시를 받도 있다고 환상(幻想)하는 것까지 못하게 막을 정도로 그렇게 충분히 위대하지는 못했다.
시저에 대한 비판 476
시저(Caesar)의 건전한 두뇌도 충분히 완전하게 건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은 비너스(Venus) 여신으로부터 내려오는 신성한 가계의 한 사람이라면서 즐거워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의 자칭 증조모(曾祖母)라는 비너스 여신의 신전 앞에서 그가 로마 원로원들을 접견할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로마 원로원은 저명한 기구(機構)로서 당시 그에게 찾아온 것은 그에게 가장 존귀한 영예를 수여하는 법령을 증정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러한 오만(傲慢)은 아주 유치한 허영의 다른 행위들과 결합된 것으로, 이러한 오만은 사물을 한 순간에 아주 에민하고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오만은 많은 사람들의 시기심(猜忌心)을 격화시킴으로써 그의 암살자들을 대담하게 만들었고, 또 그들의 암살음모를 서둘러 실행하도록 촉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위대한 사람의 머리까지 상당히 돌아버리게 만듦으로써 477
현대의 종교와 풍속은 우리 시대의 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신이나 예언자로 환상하도록 고무(鼓舞)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커다란 민중적 환호와 결합되어, 흔히 이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의 머리까지 상당히 돌아버리게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중요한 인물이자 유능한 인물인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자만심은 그로 하여금 수많은 경솔한 모험에, 때로는 파멸적인 모험에, 뛰어들도록 한다.
(나의 생각)
카다피, 김정일, 문선명, 조용기 등과 같은 인물들이 생각난다.
진정으로 총명한 사람 480
진정으로 자신에게 속한 공적(功積)이 아닌 것을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 사람은 창피를 당할까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자신의 실체가 발각(發覺)될까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다만 자기 자신의 성품의 진실성과 견고성(堅固性)에 대하여 만족하고 느긋해할 뿐이다. 그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도 않고, 그렇게 요란하게 갈채를 보내는 것도 아니지만,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그를 가장 잘 아는 총명한 사람은 그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진정으로 총명한 사람에게는 총명한 한 사람의 사려 깊고 신중한 시인(是認)이 수천 명의 무지한 열광자들의 요란한 갈채보다 더욱 충심(衷心)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만족감을 준다. 파르메니데스가 아테네의 군중집회에서 한 편의 철학논문을 읽을 때, 플라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서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그것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플라톤 혼자만 들어줘도 자기는 충분히 만족한다고 했다.
성공에 도취된 알렉산더(파르메니오 장군의 경우) 482
성공에 도취된 상태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업적보다 자기 부친 필립(Philip)의 업적을 더 높이 평가하였다는 이유로 클리투스(Clytus)를 죽였고, 자신을 페르시아 식으로 숭배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칼리스테네스(Calisthenes)를 고문해서 죽였다. 또한 그는 자기 부친의 위대한 친구였던 덕망 있는 파르메니오(Parmenio)를 살해했는데, 그에 앞서서 이 노인의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아들에게 전혀 근거 없는 혐의를 덮어씌워 처음에는 고문하다가 나중에는 교수형에 처해 버렸다. 그의 다른 아들들은 파르메니오가 아직 봉직하고 있을 때 이미 죽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 필립은 항상 말하기를, 아테네인들은 매년 10명의 장군을 발굴해낼 정도로 매우 운이 좋았으나, 자신은 전 생애를 통해서 파르메니오라는 장군 한 명밖에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언제나 마음 놓고 안전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파르메니오의 경계(警戒)와 세심한 주의 덕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즐거운 연회가 있을 때마다 말하기를, '친구들이여 마시자! 파르메니오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 우리는 안전하게 즐겨도 된다'고 했다. 바로 이런 파르메니오가 있었기에, 그리고 그의 헌책(獻策)이 있었기에, 알렉산더도 그의 모든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며, 만약 그가 없었고 그의 헌책이 없었다면 자신은 단 하나의 승리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라고 알렉산더 자신도 말한 적이 있다. 바로 이런 사람을 알렉산더는 성공에 도취해서 살해하였던 것이다.
알렉산더 사후에도 권력의 자리에 남아서 제국을 다스리도록 하였던 저 비천하고, 찬양을 일삼고, 아첨하던 그의 친구들은, 그가 죽은 후 그의 제국을 분할해서 나눠 갖고, 알렉산더 대왕의 가족과 그의 친족들의 유산(遺産)을 강탈한 후, 그들 중 요행히 살아남은 유족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모두 죽여 없애버렸던 것이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사람 481
그러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매우 총명한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가장 적게 감탄한다. 그가 성공에 도취되어 있을 때 총명한 사람들의 그에 대한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는 그의 자기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대평가에 비해 너무나 낮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를 단지 악의(惡意)와 질투심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들을 의심하고, 그들과 교류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그들이 자기 앞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내쫓고, 또는 흔히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그들에게 보은(報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잔인(殘忍)하고 불의(不義)하게도 은혜를 원수로 갚기도 한다. 오히려 그는 아첨꾼과 배신자들을 신뢰하게 되는데, 이들은 그의 허영(虛榮)과 허세(虛勢)를 숭배하는 척 가장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어떤 면에서는 결함이 있을지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친근감도 있고 존경할 만하기도 하던 사람이 마지막에 가서는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운 인물로 변해 버린다.
우리는 그것을 오만 혹은 허영이라 부른다 483
인류의 보통 수준보다 위대하고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러한 걸출한 인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훌륭한 성품을 과대평가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철저히 공감(共感)할 뿐 아니라 동감(同感)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들을 용감하고, 관대하며, 고상한 사람들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러한 말들 속에는 상당한 정도의 칭찬과 찬사의 뜻이 들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 두드러지게 뛰어난 면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에는 공감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과도한 자아평가(自我評價)에 혐오감과 반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양해하거나 참아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오만(傲慢) 혹은 허영(虛榮)이라 부른다. 이 두 가지 단어 중에서, 후자는 언제나, 전자는 대부분, 그 속에 어느 정도의 비난의 뜻이 들어 있다.
오만(傲慢)한 사람 483
오만(傲慢)한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고, 마음속 깊숙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아맞히기는 흔히 어려울 수도 있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볼 그런 눈으로, 자기를 보아주기를 바란다. 그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공정(公正)함이다. 만일 그가 자기 자신을 존경하는 것만큼 당신이 자기를 존경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는 모욕(侮辱)을 당한 것 이상으로, 마치 그가 정말로 어떤 침해를 당한 것처럼 화를 내고 분개한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그는 자신이 당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에게 존경을 간청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런 행동을 경멸하는 척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우월함을 당신으로 하여금 느끼도록 하기보다는 당신 자신의 비천함을 스스로 느끼도록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상정(想定)한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당신의 존경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 자신에 대해 당신이 굴욕감을 느끼도록 자극하기를 더욱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허영심이 많은 사람 484
그러나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여, 자기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자신의 우월성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에게 그런 우월성이 있다고 당신이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당신이 알고 있을 때, 그가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의 그런 색채보다 더욱 찬란한 색채로 자기를 보아 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그것과는 다른 색채로 그를 보거나 또는 그가 지닌 본래의 색채로 그를 보아주게 되면, 그는 모욕을 당한 것 이상으로 침해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은 당신이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가장 거짓되고 가장 불필요한 수법들까지 동원하여, 때로는 그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나 또는 심지어 그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까지 거짓으로 자랑함으로써, 자신에게 어느 정도 있는 양호한 성품과 재능들을 자랑한다. 그는 당신의 존경을 경멸하기는커녕 당신의 존경을 얻으려고 전전긍긍한다. 그는 당신의 자아평가를 폄하(貶下)하여 상처를 주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기꺼이 존중해 주면서, 그 대신에 당신도 자신의 그것을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그는 아첨을 받기 위해 아첨을 한다. 그는, 공손하고 정중하게 행동함으로써, 그리고 때로는 당신에게 실제로 중요한 도움을 줌으로써(비록 흔히 그것을 쓸데없이 자랑하고 다니기는 하지만) 당신의 환심을 사려고 연구하거나 당신을 매수해서 당신이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하도록 하려고 노력한다.
자기보다 위대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에 487
오만(傲慢: proud)한 사람은 자기와 지위가 동등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언제나 마음이 편치 못하며,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자리에서는 그는 고상한 자기과시를 할 수 없으며, 그들의 얼굴표정과 대화가 그를 압도하기 때문에, 그는 감히 고상한 체 할 수가 없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자기보다 비천한 사람들과의 교제인데, 자신은 그들을 존경하지도 않고, 그들과 교제하고 싶어한 것도 아니므로, 그들은 결코 그를 유쾌하게 하지 못한다. 그와 교제하는 자들은 그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 그에게 아첨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에게 의지하려는 사람들뿐이다. 그는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이 거의 없는데, 만일 찾아간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그들과의 교제에서 누리게 될 진정한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도 그들과 교제할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클라렌돈 경(Lord Clarendon)이 애런델 백작(Earl Arundel)에 관해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애런델 백작이 때때로 궁정에 갔던 이유는 그곳에 가야만 비로소 자기보다 위대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 그곳에 거의 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곳에서 자기보다 위대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허영심이 많은 사람 487
허영심이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는 오만한 사람이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의 교제를 회피하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교제할 기회를 찾는다. 그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내뿜는 빛은 그들의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몸에도 빛을 반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궁정의 모임과 대신들의 접견에도 자주 참석하여, 마치 자신이 부(富)와 출세(出世)의 후보자라도 된 듯이 으스댄다. 그러나 그가 행복을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안다면, 그가 실제로 훨씬 더 값진 행복을 가지고 있을 때, 그런 일로 으스대서는 안 된다.
그는 상류층 사람들의 연회에 참석하도록 요청받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며, 영광스럽게도 그곳에서 상류층 사람들과 친하게 사귄다는 것을 남들에게 자랑하기를 더욱 좋아한다. 그는 가능한 한 사교계 인사들, 여론을 좌우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재치 있는 사람들, 학식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인기 있는 사람들과 교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일단 매우 불확실한 대중들의 호의(好意: favour)라는 조류(潮流)가 어떤 면에서건 그와 절친한 친구에게 불리하게 흐를 때에는 언제든지 그는 그 친구와의 교제를 회피한다.
그가 호감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수단들이 아낌없이 동원되는데, 불필요한 과시(誇示), 근거 없는 허세, 끊임없는 부화뇌동(附和雷同), 그리고 아첨(대부분 즐겁고 명랑한 아첨이고, 식객이나 어릿광대의 조잡하고 지겨운 아첨인 경우는 거의 없지만) 등 모든 수단들이 총동원된다.
이와는 반대로, 오만하거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결코 아첨을 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예의바르게 대하는 일이 거의 없다.
오만과 허영심의 결합 492∼493
오만과 허영심이 각각 그 자신의 특성에 따라서 행동할 때, 이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그러나 오만한 사람은 흔히 허영에 차 있으며, 허영에 찬 사람은 흔히 오만하다. 자신이 정당하게 받을 자격이 있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해 주기를 바라며, 마찬가지로, 자기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더 높게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신이 정당하게 받을 자격이 있는 것보다도 자신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결점은 흔히 동일한 성품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양자의 특징들도 필연적으로 서로 혼동되고 있다. 우리는 이따금 허영심의 천박하고 주제넘은 과시(誇示)가 오만의 가장 악독하고 유치하고 가소로운 무례함과 함께 결합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어떤 특정한 성품을 어떤 것에 귀속시켜야 할지, 즉 그것을 오만으로 간주해야 할지 아니면 허영심으로 간주해야 할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여 흔히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비하(卑下)보다는 약간 지나친 오만(傲慢)이 어떤 면에서든 더 좋다 497
거의 모든 상황에서, 자신에 대한 지나친 비하(卑下)보다는 약간 지나친 오만(傲慢)이 어떤 면에서든 더 좋다. 그리고 자아평가의 감정에서는 어느 정도 과도(過度)한 것이 어느 정도 부족한 것보다 그 자신과 공정한 방관자 모두에게 덜 불쾌한 것으로 보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