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든 개념들을 수반하는 단순한 의식

"나"는 모든 개념들을 수반하는 단순한 의식이다. 이 '나'로써 "사유의 초월론적 주체 외에 어떤 다른 것도 표상되고 있지 않다." "의식 자체는 표상이 아니고 ······ 표상 일반의 형식이다." 17) "나는 사유한다"는 "모든 경험에 붙어 있고 그것을 선행하는 통각의 형식"18)이다.

칸트는 "나"의 현상적 내용을 옳게도 "나는 사유한다"라는 표현으로 파악하거나 또는 "실천적 인격"이 "지성[예지]"에 연관되고 있음을 함께 고려해서 "나는 행위한다"로 파악한다. '나는 말한다'는 칸트의 의미로는 '나는 사유한다고 말한다'로 파악되어야 한다. 칸트는 '나'의 현상적 내용을 '사유하는 사물(res cogitans)'로서 파악하려고 한다. 그는 이때 이 '나'를 "논리적 주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 일반이 논리적 방법으로 획득된 순전한 개념에 불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논리적 행동관계의, 즉 결합함의 주체이다. "나는 사유한다"는 나는 결합한다를 말한다. 모든 결합함은 "나는 결합한다"이다. 모든 한데 모음과 연관지음에는 언제나 이미 '나'가 밑바탕에 놓여 있다. 나는 곧 휘포케이메논(기체, 실체)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의식 자체"이고 표상이 아니며 오히려 표상의 "형식"이다. 이것이 말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사유한다'는 표상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써 표상된 것과 같은 것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그런 표상함 그 자체의 형식적 구조이다. 표상의 형식은 어떤 테두리나 또는 어떤 보편적인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에이도스(형상)로서 모든 표상된 것과 표상함을 그것이 무엇인 그것으로 만드는 바로 그것이다. '나'는, 표상의 형식으로 이해될 때, 나는 "논리적 주체"이다라는 것과 동일한 것을 말한다.(423쪽∼424쪽)

17) 『순수이성비판』제2판, S.404 참조
18) 같은 책, S.354.

 



'나'는 "나는 사유한다"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이다.

칸트의 분석에서 긍정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 첫째, 그는 '나'를 존재적으로 실체로 환원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았으며, 둘째, '나'를 "나는 사유한다"로서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나'를 주체로 파악하며 그로써 존재론적으로 부적합한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체의 존재론적 개념은 자기로서의 '나'의 자기성을 성격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눈앞에 있는 것의 동일함과 지속성을 성격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존재론적으로 주체로 규정함은 '나'를 일종의 언제나 이미 눈앞에 있는 것으로 단초지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는 '사유하는 사물'의 실재성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칸트가 진정한 현상적 단초를 "나는 사유한다"에서 존재론적으로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주체"로, 다시 말해서 실체적인 것으로 되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는 사유한다"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이다. 그러나 칸트 자신은 언제나 거듭, '나'는 나의 표상과 연관된 채 남아 있고 표상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지 않는가?(425쪽∼426쪽)

 

 

 

칸트는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의 존재론적 "전제"가 '자기'의 근본규정성임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 표상들이 그에게는 '나'에 의해서 "수반되는" "경험적인 것", 즉 '내'가 거기에 "붙들려" 있는 현상들이다. 그러나 칸트는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붙들림"과 "수반함"의 존재양식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것은 근본에서 '내'가 나의 표상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함께 눈앞에 있음으로 이해되고 있다. 칸트는 분명히 '나'를 사유에서부터 끄집어내는 일은 피했다. 그렇지만 "나는 사유한다" 자체를 그 완전한 본질구성에 있어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로서 단초짓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의 존재론적 "전제"가 '자기'의 근본규정성임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라는 단초도 존재론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여기에서 "어떤 것"이 규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종의 세계내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 경우 거기에는 말없이 세계가 전제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만일 실제 '내'가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와 같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어야 한다면, 바로 이 현상이 '나'의 존재구성틀을 함께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고 - 말함'은 각기 그때마다 "나는 하나의 세계 안에 있다"로서의 '나'인 그런 존재자를 의미한다. 칸트는 세계라는 현상을 보지 못했고, "표상"을 "나는 사유한다"의 선험적 내용과 떼어놓을 정도로 충분히 결론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써 '나'가 다시 존재론적으로 전혀 규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표상들을 수반하는 고립된 주체로 도로 갇혀버리고 만다.
(426쪽)

 

 

 

나는, 개념으로서 현존재[=있음]에 도달한 순수 개념 자체이다

정신의 실현과 더불어 정신이 부정의 부정으로서 규정된 시간 안으로 떨어져들어가는 것이 정신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정신 자체가 어떻게 이해되어 있어야 하는가? 정신의 본질은 개념이다. 헤겔은 개념을 사유된 것의 형식으로서의 종이라는 직관된 일반자로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스스로를 사유하는 사유 자체의 형식으로 이해한다. 즉 자신을 ― 비-자아의 파악으로서 ― 개념파악하는 것이다. -자아의 파악이 일종의 구별을 나타내고 있는 한, 이러한 구별의 파악으로서의 순수 개념에는 구별을 구별함이 놓여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정신의 본질을 형식적-서술적으로 부정의 부정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절대적 부정성"은 데카르트의 '나는 내가 사물을 사유한다는 것을 사유한다(cogito me cogitare rem)' ― 그는 의식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 를 논리적으로 형식화한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념은 자기를 개념파악하고 있는 이 자기의 개념파악되어 있음이다. 자기는 그러한 그것으로서 그가 있을 수 있는 바와 같이 본래적으로, 다시 말해서 자유롭게 있는 것이다, "나는, 개념으로서 현존재[=있음]에 도달한 순수 개념 자체이다."31)  "그러나 나는 첫째로 자기를 자기에게로 연관시키는 순수한 통일성인데, 직접적으로 그것[통일성]이 아니라, 내가 그 모든 규정성과 내용에서 추상되어 자기 자신과의 제한 없는 동일함의 자유 속으로 돌아감으로써 그런 것[통일성]인 것이다." 이렇듯이 자아는 "보편성"이지만 마찬가지로 직접적 ― "개별성"이다.
(562쪽∼563쪽)

31) Hegel, Wissenschaft der Logik(『대논리학』), 제2권(Lasson 편집, 1923), 제2부, S.220 참조.

 


 

정신의 전개의 목표는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도달하는 것"

정신은 그의 "진보"의 매 발걸음에서 "자기 자신을 그의 목적을 진실로 막는 적대적인 장애로서 극복해야 한다."34)  정신의 전개의 목표는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도달하는 것"35)이다. 전개 자체는 "자기 자신과의 끝이 없는 고달픈 투쟁"36)이다.

자신을 자신의 개념으로 데려오는 정신의 전개의 동요가 부정의 부정이기 때문에, 자기를 실현하면서 부정의 직접적인 부정으로서의 "시간 안으로" 떨어져들어오는 것이 정신에게 적합한 것으로 남아 있는다. 왜냐하면 "시간은, 거기에 있는, 텅 빈 직관으로서 의식에 표상된 개념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신은 필연적으로 시간 안에 나타나며, 그가 그의 순수 개념을 파악하지 못하는 동안은, 다시 말해서 시간을 말살해버리지 않는 동안은, 시간 안에 나타난다. 시간은 자기에 의해서 파악되지 않은 외적으로 직관된 순수 자기, 즉 단지 직관되기만 한 개념이다." 37)
(563쪽)

34) Hegel,『역사 속의 이성. 세계사 철학 입문』,G.Lasson 편집, 1917, S.132 참조.
35) 같은 곳.
36) 같은 곳.
37) Hegel,『정신 현상학』, 글로크너 판 전집 제Ⅱ권, S.60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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