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정확하진 않지만 프랑스어로 '버릇없이 자란'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블로크의 결점이었는데, 따라서 그는 자신의 결점을 깨닫지 못했고, 남이 그 때문에 마음 상하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모든 인간에게서 동일한 미덕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우리 각자의 고유한 결점의 다양함만큼이나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이 세상에 가장 널리 퍼진 것'은 상식이 아니라 착한 마음씨일 것이다. 우리는 아주 먼 외딴 곳에서도 착한 마음이 스스로 피어나는 걸 보면서 감탄하는데, 이는 마치 외진 산골짜기에서 나머지 다른 곳에 핀 꽃과 마찬가지로, 이따금 그 외로운 붉은 모자를 파르르 떨게 하는 바람밖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홀로 피어 있는 개양귀비와도 같다. 설령 어떤 이해관계로 마비되어 실행에 옮겨지지 않을 때에도 그 착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어떤 이기적인 동기로 방해받지 않을 때에도, 이를테면 소설이나 신문을 읽는 동안 그 착한 마음은 실제 생활에서는 살인자지만 대중소설 애호가인 한 마음씨 다정한 사람의 마음에까지 꽃을 피워, 약자와 의인 그리고 박해받는 사람 편으로 기운다. 그러나 결점의 다양성도 미덕의 유사성 못지않게 경이롭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대방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언짢게 하는 결점이 있다. 어떤 사람은 지성이 뛰어나 만사를 고상한 관점에서 바라보며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험담하는 법이 없지만, 자청해서 직접 건네주겠다고 한 중요한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는 잊어버려 그 편지에 적힌 당신의 약속을 망쳐 놓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으며 단지 시간관념이 없다는 점만을 자랑으로 내세우며 미소를 짓는다. 또 어떤 사람은 매우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자상해서 당신에 대해 당신이 기뻐할 말만 하지만, 실은 마음속에 다른 생각을 숨기고 침묵하고 있어 그 점이 당신을 화나게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그 자신은 당신과 만나는 기쁨을 너무도 소중히 여겨 당신을 놓아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진력나게 한다. 세 번째 사람은 보다 진지하지만 그 진지함이 지나쳐 당신에게 모든 걸 알리지 않고는 못 배기며, 이를테면 당신 건강 상태가 그를 만나러 가는 걸 허락하지 않아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극장에 있는 당신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느니, 당신 안색이 좋아 보인다느니, 아니면 당신이 그를 위해 한 노력이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이미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첫 번째 친구라면 당신이 극장에 갔다는 사실과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같은 일을 해 줄 수 있다고 하는 두 경우에도 모른 척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친구로 말하자면 당신을 매우 불쾌하게 하는 말을 누군가에게 되풀이하거나 폭로하지 않고는 못 배기므로, 자신의 솔직함에 만족해서는 힘주어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또 다른 친구들은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거나, 반대로 아예 호기심이 없어 당신을 귀찮게 하는데, 당신이 그들에게 깜짝 놀랄 만한 사건에 대해 말해도 무슨 말인지 짐작도 하지 못하거나, 당신이 쓴 편지가 당신과는 관련이 있지만 그들과는 관련이 없는 경우 당신을 몇 주나 기다리게 하기도 하고, 또는 부탁이 있어 찾아오겠다는 편지를 보내온 친구를 헛걸음시킬까 봐 외출도 못 하는 데도 찾아오지도 않고 몇 주일이고 기다리게 하는 일도 있다. 그러고는 답장을 받지 못해 당신이 화난 줄 알았다는 이유를 대는데, 사실 그들의 편지는 답장을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 또 몇몇 사람은 자기 생각만 하고 당신은 전혀 배려하지 않아, 자기 기분이 좋아서 만나고 싶을 때는 당신에게 할 급한 일이 있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떠드는 반면, 자신은 날씨나 좋지 못한 기분 탓에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무기력하고 지친 모습만 보여 주면서,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 당신 말에 짧은 음절로도 대답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 친구들에겐 이처럼 저마다 여러 결점이 있기에 그런 친구들을 계속 좋아하려면 ㅡ 그들의 재능이나 선함과 다정함을 생각하면서 ㅡ 그 결점을 받아들이거나, 우리 모든 선의를 다해 그 결점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 친구의 눈이 멀거나 친구가 상대방 눈이 멀었다고 여기면서 끈질기게 결점을 버리지 않는 집요함은 불행하게도 친구의 결점을 보지 않으려는 우리의 관대한 집요함을 능가한다. 친구는 자신의 결점을 보지 못하며 또는 상대방이 자신의 결점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위험은 특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는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구별하기 어려운 데서 연유하므로, 적어도 우리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자신에 관해서는 결코 남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야말로 다른 사람의 견해와 우리 견해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게 해 준다. 겉으로는 평범하지만 집 안에 들어가 보면 보물이나 자물쇠를 열 때 쓰는 지렛대와 시체로 가득한 집을 발견하면서 느끼는 놀라움이 눈에 보이는 세계 아래서 다른 사람의 진정한 삶과 실제 세계를 발견할 때의 놀라움 못지않다면, 사람들이 우리가 없는 데서 지껄이는 말로 우리가 자신에 대해 만들어 내는 이미지와 사람들이 우리나 우리 삶에 대해 가진 이미지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 때의 놀라움도 이에 못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할 때마다 우리가 하는 무해하고도 조심스러운 말을 그들은 겉으로는 예의를 갖추어 동의하는 척하며 듣지만, 이러한 말이 가장 과격한 평이나 가장 듣기 좋은, 또는 어쨌든 가장 덜 호의적인 비판의 빌미가 되는 건 확실하다. 이러한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우리 자신에 대한 관념과 우리가 사용하는 말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으로 상대방을 짜증 나게 하는 것인데, 이 불균형은 보통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말을 우스꽝스럽게 여기게 하는 것으로, 마치 가짜 음악 애호가가 자기가 좋아하는 곡을 콧노래로 부르고자 불분명한 속삭임의 부족함을 활기찬 몸짓과 감탄하는 표정으로 보충하면서도 그 찬사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은 채 우리 귀에 들리게 하는 것과도 같다. 또 자신과 자신의 결점에 대해 말하는 나쁜 습관에 그것과 짝을 이루는, 자기 결점과 유사한 결점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다는 걸 지적하는 또 다른 나쁜 습관을 덧붙여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는 항상 타인의 결점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자신에 대해 우회적으로 말하는 방법으로서, 죄를 용서받는 기쁨과 죄를 고백하는 기쁨이 합쳐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성격을 특징짓는 데만 늘 관심 있는 우리 주의력은 타인에게서도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특징에 주목한다. 눈이 나쁜 사람은 상대방에 대해 "그분은 겨우 눈만 뜰 수 있을걸요."라고 말하고, 폐결핵 환자는 건강한 사람의 온전한 폐에 대해 의심을 품으며, 더러운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목욕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냄새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악취를 풍긴다고 우기며, 배신당한 남편은 도처에서 배신당한 남편만 보고, 바람기 많은 아내는 바람기 많은 아내만을 보며, 속물은 속물만을 본다. 게다가 각각의 악덕은 각각의 직업처럼 전문 지식을 요하고 발전시키는 법이어서 사람들은 그 지식을 과시하는 걸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도착자는 성도착자를 알아보며, 사교계에 초대받은 양재사는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벌써 당신이 입은 의상의 질감을 높이 평가하고 손가락으로 만져 보고 싶어 애를 태우며, 치과 의사와 조금 대화를 나눈 후에 진심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당신 충치가 몇 개인지만을 말한다. 치과 의사에게야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겠지만, 그의 이런 점을 주목하는 당신에게는 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다. 게다가 우리는 자신에 대해 얘기할 때만 타인을 장님으로 여기지 않고 항상 타인이 장님인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 각자는 어떤 특별한 신이 존재해 우리 결점을 감추어 주어서 남들 눈에 그 결점이 띄지 않는다고 약속하는데, 이는 씻지 않은 사람에게 그들 귀지와 겨드랑이에서 발산되는 땀 냄새에 눈과 코를 막게 해 주고, 사교계에서 별 탈 없이 그 냄새를 끌고 다닐 수 있게 하여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주는 것과도 같다. 가짜 진주 목걸이를 하거나 선물로 주는 사람들은 그 목걸이가 진짜로 보이리라고 상상한다. 블로크는 버릇없이 자랐고 신경증 증세가 있는 데다 속물이며, 거의 존경밪지 못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마치 바다 밑바닥에서처럼 무한한 압력을 버텨 왔는데, 표면에 있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그의 집안보다 신분이 높은 겹겹이 쌓인 유대 계급이 바로 아래 있는 계급을 경멸로 짓누르면서 압력을 행사해 왔다. 따라서 이 유대인 가문에서 저 유대인 가문으로 상승하며 그 자유로운 대기권까지 뚫고 들어가려면, 블로크에게는 몇천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으리라. 그러니 그보다는 차라리 다른 쪽에서 출구를 개척하는 편이 나았다.(171∼176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2부 고장의 이름 ㅡ 고장>

 

(나의 생각)

 

이토록 미세한 감정의 결들을 낱낱이 파고 들면서 - 6페이지에 걸쳐서,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 욕심껏 나열하는 프루스트의 문장들은 솔직히 너무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화자의 친구인 '버릇없이 자란' 블로크의 결점 하나를 두고 이토록 '다양한 인간의 감정들'을 여느 철학자 못지 않게 세세히 묘사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다.

 

이 대목을 읽는 동안에 여러 인물들이 떠올랐다. 내 주변에서 자주 마주치는 인물에서부터 그저 익명 속에 숨어 지내면서 얼굴조차 모른 채 지내 온 다른 많은 인물들까지도. 그 많은 인물들 가운데서도 '책 속에서 만난' 인물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몽테뉴를 내세울 만하다. 몽테뉴만큼 '남을 비난하는 결점'을 프루스트처럼 정확하게 지적한 인물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루스트는 분명 몽테뉴를 읽었을 법한데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4권까지 읽는 동안에도 그런 흔적이 '주석' 등을 통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혹시나 싶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프루스트와 함께 하는 여름』이라는 책자의 목차에 이런 게 나온다.  제7장 프루스트와 철학자들 … 1. 독자의 초상 | 2. 프루스트와 몽테뉴 | 3. 프루스트와 쇼펜하우어 | 4. 프루스트와 니체 | 5. 프루스트와 카뮈 ……  내 예감과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듯해서 기쁘다.)

 

몽테뉴가 '타인의 결점에 대한 비난'에 관해 남겼던 문장들을 찾아내어 '프루스트의 생각들'과 비교해 본다.

 

멈출 줄 모른다

사람은 어떤 일에서도 자기에게 필요한 정도에서 멈출 줄 모른다. 탐락이건 재산이건 권력이건, 그는 자기가 품어 안을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의 탐욕은 절제가 불가능하다. 알고자 하는 욕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자기가 해야 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스스로를 위해 끌어 내며, 지식의 유용성을 그 재료가 있는 한 확대시킨다. "우리는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연구에도 무절제 때문에 고생한다."(세네카)

아그리콜라의 모친이 그 아들의 맹렬한 학문 연구 의욕을 억제하였다고 타키투스가 칭찬한 것은 옳은 일이다. 확고한 눈으로 보면, 학문은 다른 재물과 같이 인간이 타고난 고유의 약점과 허영이 많이 섞여 있는 값비싼 것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나의 생각)

 

몽테뉴도 정말 말이 많았지만 그에게는 꼭 필요한 말만 골라 쓰는 절제미가 있었다. 그런데 프루스트는? 솔직히 프루스트에게 '절제미'가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건 도리어 그를 모욕하는 말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는 조그마한 티끌이라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속에 모조리 끌어담으려고 애쓴 느낌이 든다.

 

 

자신을 안다는 문제

어느 학문에서나 이해하기 어려운 성질과 어둡고 어려운 성질은 그 학문을 닦는 사람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까지에는, 역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이 닫혀 있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문을 밀어 보아야만 한다. 그래서 아는 자는 알기 때문에 물어 볼 필요가 없고, 모르는 자는 무엇을 물어 보아야 할까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물어 볼 거리가 없다는 플라톤식의 묘한 논법이 나온다. 그래서 자신을 안다는 문제에서, 각자가 자기를 만나고 혼자 단정하고 만족하는 것, 각자가 자기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고 소크라테스는 크세노폰의 문장에서 에우티데모스에게 가르친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너무 명령조로만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진리가 어느 누구의 손에서 발견되었다 해도 기꺼이 환영하며, 그것이 아무리 멀리서 오는 것일지라도 마음 편하게 항복하고 무기를 그 앞에 내놓는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식으로 너무 명령조로만 나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내 문장에 대해서 하는 비평에 한 팔 빈다. 글을 고쳐야 할 필요에서가 아니라 예절상의 필요에서 고쳐 본 일도 흔히 있다. 쉽사리 양보해서 남에게 좋은 일도 해 주어, 아무라도 내게 알려 주고 싶은 일을 자유로이 알려 주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정히 내게 손해가 되더라도 그렇게 한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그렇게 하도록 끌어오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들의 생각을 고쳐 볼 용기가 없기 때문에, 남을 고쳐 줄 용기도 갖지 못하고 서로 늘 숨겨 가며 말한다. 나는 남의 판단을 받아 이치를 알게 되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기 때문에, 내 판단이 두 형태 중의 어느 편에 있어도 무방하다. 내 생각 자체가 나의 생각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남이 반대하는 것도 매한가지이다. 하기는 나는 그의 책망에 대해서 내가 주고 싶은 권위밖에는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자기 의견을 좇아 주지 않으면 모욕으로 생각하고, 자기를 믿어 주지 않으면 자기가 일을 공연히 알려 주었다고 후회하는 자들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너무 고압적으로 나오는 자와는 인연을 끊는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누구에게나 자기의 방귀는 구수하다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수작을 나는 날마다 말하고 대답하는 것인가! 그러니 남의 생각을 따라서는 얼마나 더 자주 할까! 내가 그 때문에 꿍꿍 앓고 있다면 다른 자들은 어찌할 것인가? 결국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하며, 냇물은 우리가 걱정할 것 없이 또는 적어도 우리를 휩쓸어 가게 하지 말고, 다리 밑으로 흘려 보내야만 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몸이 비틀어졌거나 못생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있어도 충격을 받지 않으면서, 어째서 정신이 비뚠 사람에게는 화내지 않고 볼 수가 없단 말인가? 이런 악덕스런 거친 마음씨는 잘못 자체보다도 판단하는 자에 매여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 말을 항상 입에 담아 두자. "내가 무엇을 불건전하게 보는 것은 나 자신이 불건전한 까닭이 아닌가?" 자신에게 잘못은 없는가? 남의 잘못을 알려 준다는 것이 도리어 내가 비난받을 일이 아니던가? 정히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잘못을 힐책하는 것은 현명하고도 거룩한 훈계이다. 우리가 서로 맞대놓고 하는 책망뿐 아니라 모순된 일에 관해서 따져 보는 이치와 논법까지도 대개는 우리에게 되걸어 올 수 있으며, 우리는 칼로 자신을 찌른다. 이런 일에 관해서 옛 사람은 무게 있는 예를 상당히 남겨 주었다. 다음 어구를 생각한 사람은, 여기에 들어맞게 아주 묘한 말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방귀는 구수하다.                                                                       (에라스무스)

 

우리 눈은 뒤의 것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하루에 백 번은 이웃 사람들의 문제로 자신을 비웃으며, 우리 속에서 더 분명히 보이는 결함을 다른 사람들 속에서 보며 미워한다. 그리고 뻔뻔스럽고 부끄럼이 없는 그들의 일에 놀란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격에 맞지 않는 분노

사람들은 대개 힘이 부족하면 얼굴빛과 목소리가 달라진다. 그리고 격에 맞지 않는 분노는 앙갚음보다 자기 약점과 참을성 없음을 한꺼번에 폭로한다. 우리는 가끔 침착한 기분으로 모욕을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이라도, 이 흔쾌한 잡담에서 상대편의 불완전하고 숨겨진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다. 그래서 피차 유익하게 우리의 결함을 서로 알려 준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내 잘못을 보고 알려 주는 자에게

나는 확실하지 않은 일을 누구건 비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가는 아무도 비평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종류의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내 말은 우리의 판단력이 당장 문제에 오른 자를 공격해 본다고 해서, 그것이 내적 비판으로 우리 자신의 잘못의 책임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자기 속의 악덕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자가, 다른 사람의 악덕에는 그 근본이 덜 모질고 덜 악질이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없애 주려고 애쓰는 일은 자비로운 봉사이다.

그런데 내 잘못을 보고 알려 주는 자에게, 그도 역시 그 결함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격에 맞는 대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하여튼 알려 준 일은 진실하고 유익하다. 우리 코가 멀쩡하다면 우리 은 그것이 우리 것인 만큼 더 구려야 할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와 자기 아들과 다른 한 사람이 어떤 폭력이나 부정 행위로 죄를 지었을 경우, 자기가 맨 먼저 재판소에 가서 형 집행인의 손으로 자기 죄를 씻어 달라고 간청할 것이고, 둘째는 자기 아들을 내보내고, 마지막에 다른 사람을 내보내야 할 일이라고 하였다. 이 교훈은 그 어조가 매우 고매한 것으로서, 적어도 자기 양심이 하는 처벌에는 자기가 먼저 나서야 할 일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강인한 귀, 특별한 우정의 표시

우리는 자기를 솔직하게 비판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강인한 귀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속이 쓰리다고 느끼지 않고 남의 비판을 참고 듣는 자는 드문 까닭에, 우리에게 감히 비평을 시도하는 자는 특별한 우정의 표시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좋게 해 주려고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모욕을 주는 일을 한다는 것은 건전하게 사랑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못된 소질이 착한 소질보다 강한 자를 비판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플라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하는 자에게 지식과 호의와 과감성이라는 세 가지 소질을 가지라고 명령한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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