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스완이 그토록 좋아하던 소악절이 포함된 뱅퇴유 소나타 일부를 그녀가 내게 연주해 준 것도 바로 이런 날들 가운데 하루였다. 그러나 약간 복잡한 음악을 처음 들을 때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나중에 이 소나타 연주를 두세 번 들었을 때, 나는 그 곡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처음 듣는다."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 첫 번째 듣기에서 아무것도 구별하지 못한다면, 두 번째, 세 번째도 처음과 같을 것이므로, 열 번 들었다 해더 더 잘 이해하리라는 법은 없다. 아마도 첫 번째 듣기에서 결핍된 것은 이해가 아니라 기억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이란 상대적으로 우리가 듣는 동안 마주치는 인상들의 복잡성에 비하면 아주 미미해서, 잠을 자며 수많은 걸 생각하고는 즉시 잊어버리는 인간의 기억만큼이나, 또는 이제 막 들은 것을 조금 후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반쯤은 어린애로 돌아간 사람의 기억만큼이나 짧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인상에 대한 추억을, 기억은 즉시 제공해 주지 못한다. 하지만 추억은 점차적으로 우리 기억 속에서 두세 번 들었던 작품에 의해 형성된다. 마치 중학생이 자러 가기 전에는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학과를 여러 번 읽어서 다음 날 아침에 암송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나는 그날까지 소나타의 어떤 부분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스완과 스완 부인이 뚜렷이 알아본 악절은 내 명료한 지각과 거리가 멀었다. 마치 기억해 내려고 애쓰지만 대신 빈 허공만을 발견하게 되는 이름처럼, 그러나 이 허공으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 그렇게도 헛되이 찾던 이름의 음절은 단번에 스스로 떠오른다. 그리고 진정으로 드문 작품이란 우리가 즉시 기억하지 못하며, 뿐만 아니라 그런 작품들 가운데서도 내가 뱅퇴유 소나타를 들었을 때처럼,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부분을 먼저 인지한다. 스완 부인이 가장 유명한 악절을 연주했으므로(그래서 오랫동안 소나타를 들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나는 이 작품에 나를 위해 남아 있는 건 거의 없다고 잘못 생각했다.(이 점에 있어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 앞에 섰을 때 이미 사진을 통해 돔 지붕을 잘 안다고 생각하며 별다른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나 또한 어리석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소나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을 때에도, 이를테면 거리감이나 안개 탓에 어렴풋한 부분밖에 들어오지 않는 역사 기념물처럼 내게는 소나타 전체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 시간 속에서 구현되는 다른 작품도 다 마찬가지지만, 이런 작품의 인식과 관계된 우수가 연유한다.(183∼185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제3권의 182쪽에서 시작된 문단은 189쪽까지 한 호흡으로 길게 이어지는 '하나의 문단'이다. 굳이 이 부분을 '읽는 흐름'을 살리기 위해 통째로 한꺼번에 인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 멋대로' 중간 중간에 끊어서 인용할려니 그게 도리어 고역이다. 아무튼 이 문단에 담긴 프루스트의 생각들은 음악, 미술, 철학, 작품, 천재 등등에 관한 매우 중요한 통찰들을 담고 있어서 몹시 흥미롭다. 이 문단에서 프루스트가 펼쳐 놓은 생각들은 특별히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비록 프루스트가 직접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소나타 안에 가장 깊숙이 감추어졌던 부분이 내게 드러나면서 내가 처음 알아보고 좋아했던 것이 습관에 의해 내 감성 영역 밖으로 끌려가면서 나로부터 빠져나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나타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지만, 난 한 번도 소나타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 소나타에는 우리 삶과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삶보다 덜 환멸스러운 이 위대한 걸작은 처음부터 작품이 가진 최상의 것을 주지는 않는다. 뱅퇴유 소나타에서 가장 먼저 발견하는 아름다움도 가장 빨리 싫증 나는 아름다움으로, 아마도 그런 아름다움이 우리가 이미 아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동일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이 멀어지면 그 구조가 너무도 새로워 우리 정신에 혼란을 야기하며, 그래서 우리가 식별하지도 못하고 손도 대 보지 못한 채 그대로 간직해 왔던 악절을 좋아하는 일만 남는다.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채 매일 그 앞을 스쳐 가던 악절, 그 유일한 아름다움의 힘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던 악절이 이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악절을 떠나는 것도 우리가 맨 마지막일 것이다. 그 악절을 좋아하는데 그토록 많은 시간이 걸렸으므로 다른 악절보다는 바로 그 악절을 더 오래 좋아할 것이기에. 그리고 다른 작품들보다 더 심오한 작품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란 ㅡ 이 '소나타'에 대해 내게 필요했던 시간처럼 ㅡ 일반 대중이 진정으로 새로운 걸작을 좋아할 수 있을 때까지 흘러가는 수십 년 혹은 수 세기의 축소판이자 일종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중의 몰이해를 피하려는 천재는, 어쩌면 동시대인들에게는 작품 이해에 필요한 거리가 부족하므로 후대를 위해 쓰인 작품은 후대에 의해서만 읽혀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마치 너무 가까운 시대의 그림이라 우리가 잘못 판단하는 몇몇 그림들처럼. 그러나 현실에서 잘못된 평가를 피하려는 모든 비겁한 노력은 헛된 짓이며 이런 평가는 피할 수 없다. 천재의 작품이 즉각적인 찬미를 자아내기 어려운 이유는 작품을 쓴 자가 예외적인 인물로서 그와 비슷한 인물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185∼187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프루스트는 음악가들 가운데 특별히 바그너와 슈만, 그리고 베토벤을 좋아했다고 한다. 바그너는 한때 니체와 절친이었고, 니체와 바그너 모두 쇼펜하우어를 열렬히 추종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프루스트는 뱅퇴유의 소나타를 여러 곳에서 자세하고도 길게 묘사하는데, 마치 쇼펜하우어로부터 방금 '음악 수업'을 받고 돌아온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느낌이 든다. 천재의 작품이 후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원리 또한 쇼펜하우어의 설명을 빼닮았다. 191쪽의 주석에 딸린 설명처럼, 프루스트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자연과 인생에서 직접 이끌어 낸 참다운 작품만이 자연이나 인생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젊고 언제까지나 근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참된 작품은 특정한 시대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은 그 시대에 영합하는 것을 경멸하고 시대로부터는 냉담한 대우를 받으며, 그때그때의 잘못이 그 작품에 의해 간접적이고 소극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나중엔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또 이러한 작품은 진부해지지 않고, 시대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언제나 새롭게 사람의 마음에 호소한다. 이렇게 인정받은 이상, 이제는 무시되거나 오인받을 염려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판단력이 출중한 소수의 사람들의 칭찬으로 영광의 왕관을 쓰고 진가를 인정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 소수의 출중한 사람들은 백 년 동안에 아주 적게 나타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의견은 점차 권위가 확립되는데, 이 권위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이 작품들의 진가를 후세에 호소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잇따라 나타나는 위대한 개인이야말로 이 유일한 전거이다. 왜냐하면 동시대의 대중이 언제나 어리석고 우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후세의 대중도 여전히 어리석고 우둔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위인들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한 말을 읽어 보라. 인간은 언제나 같기 때문에 위인들의 탄식도 지금이나 옛날이나 변함이 없다. 어느 시대에나 또 어떠한 예술에서도 작풍이 정신을 대리하며, 정신을 소유하는 것은 언제나 위대한 개인뿐이다. 그러나 작풍이란 모든 시대에 존재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은 정신의 현상이 벗어 버린 낡은 의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후세의 갈채는 동시대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며, 또 동시대의 갈채는 후세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다.(764쪽)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플라톤의 이데아, 예술의 대상' 中에

 

 

니체는 '정선된 귀'를 갖지 못한 동시대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후대 사람들을 위해 쓴다고 말했다.

 

하나의 정신이 이해되는 데는 몇 세기가 필요한 것일까?

 

가장 위대한 사건과 사상은 ㅡ 그러나 가장 위대한 사상이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ㅡ 가장 늦게 이해된다. 동시대의 세대는 그러한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다. ㅡ 그들은 그것을 스쳐 지나가며 살아간다. 거기에서는 별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어떤 일이 일어난다. 가장 멀리 떨어진 별빛이 인간에게 가장 늦게 이른다. 그 별빛에 이르기 전에는, 그곳에 별이 있다는 것을 인간은 부정한다. "하나의 정신이 이해되는 데는 몇 세기가 필요한 것일까?" ㅡ 이것 역시 정신과 별에게 필요한 순위와 예법을 만들어내기 위한 척도인 것이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중에서

 

 

 

 

천재를 이해할 수 있는 드문 지성을 생산하고 또 배양하고 증식하는 것은 바로 작품 자체다. 베토벤의 사중주곡(12번, 13번, 4번, 15번 사중주곡) 자체가 오십 년이나 걸려 그 작품을 이해하는 청중을 낳고 길렀으며, 그리하여 모든 걸작이 다 그렇듯이, 예술가의 가치가 아니라면 적어도 지식인 사회에서(걸작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폭넓게 구성된, 즉 그 작품을 좋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발전해 나간다. 우리가 후대라고 부르는 것은 작품의 후대를 말한다. 작품 자체가 이런 후대를 창조해 나가야 한다.(이야기를 간단히 하기 위해 동시대에 배출된 몇몇 천재들이 함께 더 나은 미래의 대중을 준비하고 그러한 대중으로부터 다른 천재들이 혜택을 받는 경우는 고려하지 않기로 하자.) 그러므로 작품이 보존되었다 후대에 가서야 알려지는 경우, 그 후대는 작품의 후대가 아니라, 단지 오십 년 뒤에 사는 동시대인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ㅡ 바로 뱅퇴유가 그랬던 것처럼 ㅡ 자신의 작품이 제 갈 길을 가기 원한다면, 작품을 아주 깊은 곳으로, 아주 먼 미래의 한복판을 향해 내던져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미래의 시간, 걸작의 진정한 전망이라 할 수 있는 미래의 시간을 참조하지 않는 것이 서투른 비평가들이 범하는 실수라면, 미래의 시간을 지나치게 참조하는 것 역시 훌륭한 비평가들이 범하는 위험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187∼188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베토벤의 사중주곡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마르셀 프루스트와 엇비슷한 시대를 살았고, 현대소설의 쌍벽을 이루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생각난다. 소설도 현악 4중주처럼 난해할 수 있다는 게 묘하게 닮았다. 

 

"그 모태가 되는 『오뒷세이아』와는 다르게, 이 책은 읽으면 알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곡들이 오래 듣고 연구할수록 그 풍부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듯이, 오로지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비밀스러운 뜻을 드러낸다."(클리프턴 패디먼)

 

 

 

아마도 지평선 위로 모든 물체를 균등하게 만드는 착시 현상과도 유사한 현상에 따라 그림이나 음악에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혁명은 그대로 어떤 일정한 규칙을 존중하며, 그러나 현재 우리 앞에 있는 인상파나 불협화음의 추구, 중국 음계의 배타적 사용, 입체파, 미래파는 전 시대 것과 완연히 다르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전 시대 것을 우리 정신이 오랜 시간의 동화작용을 통해 동질적인 실체로 ㅡ 물론 다양하기는 하지만 19세기의 위고가 17세기의 몰리에르와 나란히 하는 ㅡ 전환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앞으로 올 시간과 그 시간이 가져다줄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어린 시절에 치는 별자리 점이 보여 주는 성인이 된 우리 모습처럼, 어떤 충격적인 괴리감이 나타날지 한번 상상해 보라. 단지 별자리 점은 모두 사실이 아니며 또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에 시간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일은 우리 판단에 뭔가 우연성을 부여하여 그 결과 모든 예언처럼 진정한 흥미를 반감하겠지만, 그러나 예언이 실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예언자의 초라한 지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삶에 가능성을 불러들이거나 배제하는 일은 반드시 천재의 능력에만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재이면서도 철도나 비행기의 미래를 믿거나 믿지 않을 수 있으며, 위대한 심리학자이면서도 자기 정부나 친구의 위선을 ㅡ 가장 평범한 사람도 그들의 배신을 예측할 수 있는데 ㅡ 깨닫지 못할 수 있다.(188∼189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여기까지가 길게 이어지던 문장들이 하나의 문단으로 끝맺는 종착점이다. 이토록 긴 장광설을 늘어놓은 다음에 프루스트는 또다시 태연스레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속으로 옮겨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소나타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스완 주인이 연주하는 걸 들으며 황홀해했다. 그 연주는 그녀의 실내복처럼, 그 집 계단의 향기처럼, 그녀가 입은 망토처럼, 그녀의 국화처럼, 이성으로 재능을 분석할 수 있는 세계보다 무한히 높은 세계에서 개별적이고 신비로운 전체를 이루는 듯했다.* "이 뱅퇴유 '소나타', 아름답지 않은가?" 하고 스완이 내게 말했다. "나무들 밑에 어둠이 깃들고 바이올린의 아르페지오가 싱그러움을 떨어뜨릴 때면 얼마나 아름답게 들리는지 인정하게나. 거기에는 달빛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정태적인 면이 있네. 내 아내가 받는 광선치료가 근육에 효과를 보이는 것도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닐세. 달빛이 나뭇잎의 움직임을 가로막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네. 소악절에 그토록 잘 묘사된 것도 바로 그 점이라네. 마비 상태에 빠진 불로뉴 숲. 바닷가라면 더 인상적이지. 왜냐하면 나머지 다른 것은 전혀 움직이지 않아 미세한 바다 물결의 파동이 더 잘 들리니까. 파리에서는 이와 반대라네. 기껏해야 역사 기념물 위에 비치는 기이한 미광, 빛깔도 위험도 없는 불길로 밝혀진 듯한 하늘, 우리 모두가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거대한 삼면기사 같은 것뿐이라네. 그러나 뱅퇴유 소악절, 더욱이 소나타 전곡을 통해 묘사된 것은 그런 게 아닐세. ……"(189∼190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주석)

 

* 음악에 대한 쇼펜하우어적 성찰의 영향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의 무한한 언어로 의지를 표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생각)

 

음악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성찰은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자세하게 다뤄지고 있다. 그 가운데 프루스트의 생각과 비슷한 대목이라 여겨지는 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음악은 의지의 적절한 객관성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모사

음악이 모든 사물의 참된 본질에 대해 갖는 이러한 긴밀한 관계에서 다음의 것도 설명할 수 있다. 즉 어떤 장면, 행위, 사건, 환경에서 적절한 음악이 울리면, 그로 인해 우리는 이것들의 가장 심오한 의미가 명백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그 음악을 가장 옳고 명백한 해설로 생각한다. 또 교향악의 인상에 젖어 있는 사람은 자기 앞의 인생과 세계의 모든 가능한 사상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 음악과 자기 눈앞에 떠오른 사상 사이의 유사성은 무엇 하나 열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음악은 현상,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의지의 적절한 객관성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모사이며, 세계의 모든 형이하학적인 것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것을 나타내고, 현상에 대해 물자체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과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는 의지를 구체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음악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음악이 어떻게 실제 생활과 세계의 모든 양상과 장면을 의미 있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이것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음악의 선율이 주어진 현상의 내적인 정신과 유사하면 할수록 그러한 작용은 증가된다. 시를 노래로, 또는 직관적인 모사를 무언극으로, 또는 이 양자를 가극으로 음악에 맞추어 만들 수 있는 것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795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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