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어느 날 우편물 오는 시간에 엄마는 내 침대에다 편지 한 통을 두고 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편지를 열었다. 내게 행복을 안겨 줄 유일한 서명, 샹젤리제 외에는 어떤 교류도 없었던 그 질베르트의 서명이 씌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구 쓴 기사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 '페르 위암 렉탐(Per viam rectam)'이라는 경구로 둘러 싸인 은색 봉인이 찍힌 종이 하단에 커다란 필체로 쓰인 편지 아래서, 거의 모든 t자의 가로획이 단어 사이가 아니라 바로 윗줄에 있는 단어 밑에 놓여 있어 모든 문장에 밑줄이 쳐진 것처럼 보이는 편지 아래서, 내가 본 것은 바로 질베르트의 서명이었다. 하지만 내게 온 편지 중 질베르트의 서명이 든 편지가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아, 편지를 봐도 전혀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동안 이 서명은 날 에워싼 모든 것에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 사실 같지 않은 서명은 현기증이 날 것 같은 속도로 내 침대, 내 난로, 내 벽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나는 말에서 떨어진 사람처럼 모든 게 흔들거리는 듯 느껴졌고 내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 내가 아는 것과는 모순되지만 진정한 삶이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닌지, 마치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조각가들이 다른 세계의 문턱에서 깨어난 망자들에게 주었던 그런 망설임과 더불어 날 채워 준 게 아닌지 묻고 있었다. "사랑하는 친구에게."라고 편지는 말했다. "네가 많이 아파 더 이상 샹젤리제에 오지 못한다는 걸 알아. 나 역시 그곳에 환자들이 너무 많아 이제는 거의 가지 않아. 하지만 내 친구들이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 간식 먹으러 우리 집에 온단다. 네 몸이 회복되는 대로 방문해 주면 아주 기쁠 거라고 엄마가 전해 달라고 했어. 그럼 우리가 샹젤리제에서 나누던 즐거운 이야기들을 집에서도 다시 나눌 수 있을 거야. 안녕, 내 사랑하는 친구, 네 부모님이 우리 집에 간식 먹으러 자주 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내 우정을 전하면서, 질베르트."(133∼134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첫사랑의 연인으로부터 받은 첫 번째 편지만큼 우리의 정신을 잃게 만드는 대상도 드물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소설 속 화자'를 순식간에 '독자인 나 자신'으로 뒤바꾸고, '소설 속 첫사랑인 질베르트의 필체' 대신에 까마득한 옛날 나에게 부쳐진 편지 봉투의 겉면을 온통 신비롭고도 희귀한 보석처럼 장식하던 '첫 사랑 그녀의 이름과 필체'를 떠올리지 않을 독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동안 내 신경계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내게 큰 행복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 영혼, 즉 나 자신, 요컨대 주 당사자인 나는 아직 이 소식을 깨닫지 못했다. 행복, 질베르트를 통한 행복이야말로 내가 줄곧 생각해 왔던, 내 마음을 완전히 차지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회화에 대해 '코사 멘탈레(cosa mentale)'라고 했던 것 아닌가. 우리 생각은 글자로 덮인 종이 한 장을 단번에 소화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나는 이내 편지를 생각했고 편지는 내 몽상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코사 멘탈레'가 되었으며, 그래서 오 분마다 다시 읽고 어느새 키스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편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내 행복을 깨달았다.(134∼135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내가 첫사랑을 만난지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의 어느 봄날이 생각난다. 지방 중소도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했던 터라,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교의 학과 우편함에는 늘상 다른 대학교에 다니던 고교 동창들이 보내준 '대학 학보'가 자리잡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비교적 잘 아는 과친구가 불쑥 내 앞에 내민 건 그저 따분하기만 했던 '다른 학교의 학보'가 아니라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첫사랑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이제 막 파릇파릇한 새싹을 내민 잔디밭을 내려다 보며 봄이 오는 캠퍼스의 계단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민끽하던 나는, 그때 느닷없이 내 턱앞까지 디밀어진 편지 탓인지 그날따라 잔디밭 위로 유난히 어지럽게 피어오르던 아지랭이 마냥 정신이 어지러웠다. 물론 그 편지는 오래도록 거듭 읽혀졌으며, 이듬해 여름에 내가 몸을 실었던 '입영열차' 안에서도 내 품을 떠나지 않았고, 입대한 그해 가을에 유난히도 자주 내 귓가를 스치던 <잊혀진 계절>이나 <바람, 바람, 바람>과도 늘 함께 했다. 아, 그런데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눈물까지 흩뿌렸던 그 편지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우리 삶에는 사랑하는 이들이 늘 소망하는 이런 기적이 곳곳에 뿌려져 있다. 이 기적은 어쩌면 며칠 전부터 살아야 할 이유를 완전히 상실한 나를 보고 어머니가 질베르트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부탁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마치 내가 수영을 처음 시작했을 때 숨이 막혀 무척이나 하기 싫었던 잠수에 재미를 붙이게 하려고 어머니가 몰레 수영 교사에게 멋진 조가비 상자와 산호 가지들을 가져다주어 내가 그것들을 물 바닥에서 스스로 발견했다고 믿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우리의 여러 대조적인 삶과 상황에서 사랑과 관계되는 사건에 대한 최선의 태도는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건들은 피할 수 없는 뜻밖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합리적인 법칙이 아니라 오히려 마법의 법칙에 지배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부자인 데다가 매력적이기까지 한 남자가 함께 살던 어느 가난하고 매력 없는 여인에게서 이별을 통보받고 절망한 채 자신의 모든 재력과 지상의 온갖 영향력을 행사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애인의 완강한 고집 앞에서 논리적인 설명을 찾기보다 차라리 '운명'이 자신을 짓누르며 마음의 병으로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최선이다. 연인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장애물, 고통 때문에 지나치게 예민해진 상상력이 헛되이 간파하려고 애쓰는 이러한 장애물은, 때때로 자신의 품에 다시 불러들일 수 없는 여인의 어떤 성격적인 특징에, 그녀의 어리석음에, 얼굴조차 모르는 이들이 그녀에게 미친 영향과 넌지시 불어넣은 정의감에, 그녀가 일시적으로 삶에 대해 요구하는 쾌락인 연인도 연인의 재력도 충족해 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쾌락에 있다. 어쨌든 연인은 여인의 술책이 그에게 숨기고, 또 왜곡된 판단력 때문에 정확히 식별할 수 없는 이런 장애물의 속성을 알아내기에는 나쁜 위치에 있다. 이런 장애물은 의사가 끝내 그 원인을 모른 채 작게 만드는 종양들과도 비슷하다. 종양처럼 이 장애물은 신비롭지만 일시적이다. 다만 이 장애물은 일반적으로 사랑보다 오래 지속된다. 또 사랑이란 비타산적인 열정이 아니므로, 더 이상 연인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자신이 사랑했던 그 가난하고 경박한 여인이 어째서 자기로부터 부양받기를 여러 해 동안 완강하게 거절해 왔는지 그 이유조차 알려고 하지 않는다.(135∼136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프루스트가 이야기하는 방식은 매번 이런 식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이에 아주 조그마한 틈이라도 엿보이면 어김없이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으로 아낌없이 채워넣는다. 소설 속 이야기가 '개별화'라면, 거기에 덧붙여지는 프루스트의 설명은 '일반화'인 셈이다. 개별화에서 일반화로, 일반화에서 다시 개별화로, 끊임없는 변전이 일어나는 게 프루스트 소설 읽기의 매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펼치다가 느닷없이 '자신의 철학'을 아주 길게 늘어놓은 작가 가운데 『전쟁과 평화』의 톨스토이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철학은 '삶과 죽음'이나 '우연과 필연' 혹은 '전쟁과 평화'처럼 너무나 묵직한 주제를 '소설 속 이야기' 사이사이에 펼쳐 놓음으로써 독자들을 지치게 하지만, 프루스트의 방식은 훨씬 더 경쾌하고 날렵하다는 점에서 독자들을 즐겁게 만드는 듯하다.

 

 

 

그런데 자주 파국의 원인을 우리 눈앞에 숨기는 것과 같은 신비로움이 사랑의 경우에는 종종 느닷없는 행복한 해결책으로 감싸이기도 한다.(질베르트의 편지가 내게 가져다준 것처럼.) 행복한 해결책이라고? 아니, 어쩌면 그렇게 보일 뿐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에 부여하는 만족감이란 그게 어떤 종류든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잠시 비켜 가게 할 뿐, 실제로는 결코 행복을 주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잠시 유예기간이 주어지면 우리는 얼마 동안 치유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136쩍)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질베르트가 보유한 편지지 시리즈가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드디어 몇 주가 지나자 나는 그녀가 처음으로 보내왔던 편지지와 같은, 그은 은메달 투구를 쓴 기사 위에 '페르 위암 렉탐'이라는 경구가 새겨진 편지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각각의 편지지가 이런저런 날에 알맞게 어떤 의식에 따라 선택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질베르트가 편지를 받는 사람에게, 또는 적어도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가능한 시간 차를 많이 벌려 같은 편지지를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으려고 이미 사용했던 편지지를 애써 기억해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41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그토록 색깔과 재질과 느낌이 서로 조금씩 달랐던 그 수많은 편지지들은 다들 어디로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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