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세트 - 전6권 - 개정판 사기 (민음사)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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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상이 틀리지 않았소? 사슴을 말이라 하니 말이오."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 * *

 

 - 사마천(BC 145∼86)

 

사마천이 지은 『사기』는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하다. 동서양의 온갖 역사를 기록한 방대한 책들 가운데 『사기』만큼 풍부하고도 뛰어난 기록을 찾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한무제 때 태사령이라는 직책으로 근무했던 공무원이었다. 태사령의 직무는 공식 문서를 보관하고 왕의 언행을 기록하면서 천상과 지상의 조짐과 징조를 관찰하고 해석하고 기록하는 게 주된 임무였다. 그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훌륭한 역사가로 탈바꿈하여 '제왕학' 분야에 크게 이름을 남겼다는 점에서는 마키아벨리를 닮았고, 역사가이면서도 하늘의 뜻을 살폈다는 점에서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를 닮은 듯한 인상을 준다. 플루타르코스도 무려 30년 동안이나 델포이 신전을 지키는 신관으로 지내면서 아폴론의 신탁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사기』라는 방대한 역사책을 남기게 된 까닭은 몹시 흥미롭다. 우선, 진시황의 분서갱유(BC 213∼212)가 한 원인이 되었다. BC 221년에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중앙집권적인 통치 방식에 비판적인 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던 제자백가의 저서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460여 명의 학자들을 생매장했다. 다행스럽게도(?) 진나라는 그런 비극이 있고 나서 불과 7년도 지나지 않아 멸망(BC 206년)하고 만다. 진나라 말기에 진승과 오광이 난을 일으키고, 뒤이어 항우와 유방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치면서 진나라는 멸망하고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차지한다. 새롭게 출범한 한나라가 차츰 안정되자 분서갱유 사태로 인멸된 책자를 체계적으로 되살리는 복원 작업이 진행되면서, 태사령에게 완벽하고 체계적인 역사책을 집필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과거의 역사와 문헌들을 발굴하고 체계적으로 복원하고 기록하는 일은 사마천보다 앞서 태사령 직책을 맡았던 부친 사마담에게 주어졌다. 그가 생전에 미완성인 채로 남겨놓은 역사 기록 작업은 사마천에게 유업으로 남겨졌다. 사마담이 BC 110년에 사망하고, 사마천에 의해 마침내 BC 97년에 『사기』가 완성되었다.

 

사기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2,100년 전에 쓰여진 역사책이며,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 오로지 개인의 힘으로 이룩한 거대한 성과다. 당시만 하더라도 책은 종이에 쓰여진 게 아니라 죽간(가로3cm, 세로 30cm 정도의 대나무쪽)에 쓰여졌고, 소가죽 끈으로 일일이 엮어 매는 형태였는데, 전체 52만 6,500자에 이르는 분량이 얼마만큼 많은 대나무쪽에 쓰여졌을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득하다.

 

『사기』는 전체 130장으로 이루어진 웅편거작이다. 황제들의 역사를 기록한 『사기 본기』는 12장이다. 제후들의 역사를 기록한 『사기 세가』는 30장이다. 황제와 제후들을 보좌했던 영웅적인 인물들을 다룬 『사기 열전』은 70장이다. 각 시대의 연표를 기록한 『사기 표』가 10장이고, 제도와 문화를 다룬 『사기 서』가 8장이다. 인물 전기로만 따진다면 모두 112장인 셈인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단지 50명의 영웅들을 다루는 데 비해『사기』가 얼마만큼 더 풍부하고도 방대한 인물들을 다룬 저술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사기 본기』, 『사기 세가』, 『사기 열전』은 '인물 중심'의 역사 기록이다. (네 권을 합하면 3,314쪽)

 

사기가 다루는 역사의 범위는 무려 2,600년에 이른다. 사마천이 이미 2,100년 전의 인물이니만큼 그가 기록한 역사가 얼마나 까마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아주 먼 옛날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가 다스리던 시절 만큼이나 아득한 '신화의 세계'까지도 역사로 다루는 셈이다. 그런 까닭에 『사기 본기』의 초반부인 <오제 본기>, <하 본기>, <은 본기>, <주 본기>는 신화와 전설과 역사가 혼재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은 본기>에 실린 사마천의 기록들은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덕분에 구체적으로 실증되었으며, 『사기』의 기록이 얼마만큼 사실을 바탕으로 정확하게 쓰여졌는지를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기』는 그 규모만으로도 엄청나게 놀랍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2,1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읽어도 여전히 흥미롭다는 점이다. 사마천이 그만큼 뛰어난 문장가였고, 그의 역사관이 그만큼 현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양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만큼이나 부지런했다. 그는 고문서의 기록이나 풍문 또는 전설로만 존재했던 희미한 과거를 찾아서 중국 전역의 숱한 도시들과 고문서 보관소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또한 자신이 살던 시대와 가까운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 한나라 왕실의 도서관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과거의 역사를 최대한으로 꼼꼼하고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 애썼던 그의 노력은 『사기』의 전편에 고루 스며들어 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에 '묘비명 수집가'로 맹활약했던 포조 브라치올리니를 떠올리게 만든다.(그는 1,000년 이상이나 먼지 속에 묻혀 있던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발굴해냈다.) 그가 직접 발로 뛰어 찾아낸 금석문의 글들이 『사기』의 곳곳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했던가를 알려주는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다. 20세기 초에 일부 중국 학자들이 사마천의 <은 본기>에 기록된 여러 왕들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논쟁이 벌어진 이후 고고학적 발굴팀이 사마천이 옳았음을 입증한 것이다. 사마천이 자신이 살았던 시대보다 1,000년이나 앞선 통치자들에 대하여 그토록 정확하게 기술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사기』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록뿐만 아니라 위대한 역사가인 동시에 탁월한 문장가였던 사마천의 혜안이 담긴 책으로도 유명하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기 이전부터 육경六經을 비롯한 제자백가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장안에 와서 고문을 배웠기 때문이다. 20세 때부터 황제를 따라 순행하면서 중국 전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고적을 탐방하고 자료를 수집한 경험이 『사기』 편찬의 귀중한 바탕이 되었다. 태사령으로 일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3년이 지나자 사마천도 태사령이 되어 무제를 시종하는 한편,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국가의 장서가 있는 석실금궤를 드나들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고 수집하면서 4년의 준비기간을 거친 뒤 기원전 104년에 정식으로 사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집필에 열중한지 5년이 지났을 때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흉노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어떤 장군을 옹호하다가 황제로부터 극도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해 1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끝내 거세형에 처해졌다. 황제가 신하들의 불충에 대해서는 몹시도 포악하게 대응하는 폭군임을 뻔히 알면서도 큰 잘못이 없는 장군을 위해 충언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옳은 일이라면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직언을 서슴치 않는 사마천의 강직하고도 대담한 성격이 엿보이는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고 예상했지만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업이었던 『사기』 편찬의 대업을 위해 환관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사마천의 『사기』가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흥미로운 이유는 여럿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치 않는 인간 심리에 대한 탁월한 통찰 때문이다. 사마천이 다룬 역사는 크게 나눠서 온갖 군웅들이 할거하던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에 의해 중국이 최초로 통일되는 시대,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세워지는 시기, 한나라의 건국부터 한무제의 통치기까지다. 이 시기에 활약했던 인물들이 얼마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고, 그들의 삶이 얼마만큼 놀라웠던지는 『사기』로부터 비롯된 고사성어가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기 본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는 <진시황 본기>에 등장하는 분서갱유(焚書坑儒)와 지록위마(指鹿爲馬)를 빼놓을 수 없다. <항우 본기>에 나오는 사면초가(四面楚歌)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한 대목을 떠올릴 만큼 강렬하다. <오제본기>에 나오는 고복격양(鼓腹擊壤)은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누리는 모습을 묘사한 사자성어다.

 

『사기 세가』에서 비롯된 고사성어 중에는 <월왕 구천 세가>에 나오는 와신상담(臥薪嘗膽)과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유명하다. <초 세가>에 나오는 득국오난(得國五難)은 '나라를 통치하는 데 따르는 다섯가지 어려움'을 일컫는 말이다.  <공자 세가>에 나오는 상가지구(喪家之狗)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고국을 떠나 이웃 나라들을 떠돌던 무렵의 공자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을 빗댄 말이다. 같은 편에 나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은 책이 닳고 닳을 때까지 여러 번 읽었던 공자의 독서습관에서 비롯된 말이다. <진 세가>에 나오는 할고봉군(割股奉君)은 충신 개자추가 허벅지 살을 베어 임금을 섬긴 일화에서 유래된 말이다. 한식()은 개자추를 기리기 위한 행사에서 비롯된 관습이다.

 

"진나라 문공은 옛날에 현명한 군주로서 나라 밖으로 망명하여 19년이나 지내면서 지극히 곤궁하였으니 군주의 자리에 오르고서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면서 오히려 개자추를 잊어버리기도 하였으니 하물며 교만한 군주이겠는가. …… 따라서 군주가 된 자가 그의 신하를 부리는 것은 정녕 쉽지 않구나!"(338쪽)

 

 - 사마천, 『사기 세가』, <진 세가> 중에서

 

고사성어의 보고는 무엇보다도 『사기 열전』이 으뜸이다. <관 · 안 열전>에 나오는 관포지교(管鮑之交), <계포 · 난포 열전>에 나오는 계포일락(季布一諾), <맹상군 열전>에 나오는 계명구도(鷄鳴狗盜), <소진 열전>에 나오는 현량자고(股), <염파 · 인상여 열전>에 나오는 교주고슬(膠柱鼓瑟),  완벽귀조(趙), <평원군 · 우경 열전>에 나오는 낭중지추(囊中之錐)와 모수자천(毛遂自薦), <회음후 열전>에 나오는 배수지진(背水之陣)과 천려일실(千慮一失),  <평진후 · 주보 열전>에 나오는 토붕와해(土崩瓦解), <유림 열전>에 나오는 곡학아세(曲學阿世)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지금껏 소개한 고사성어들은 『사기』라는 거대한 숲에 담겨 있는 무수한 이야기에서 들춰낸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일설에 따르면, 『사기』에서 유래된 사자성어만 하더라도 무려 600여 개에 이른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두툼한 책을 따로 엮을 정도이다. 『사기』에는 사자성어만큼이나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주역급 인물들만 하더라도 대략 200명에 이르며, 전체 등장인물은 대략 4,000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는 중국과 같은 문화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물들이 꽤나 많다. 황제급 인물로는 진시황, 항우, 유방, 여태후가 대표적이다. 제후급 인물로는 강태공, 월왕 구천, 진섭(진승), 소하, 장량, 진평 등을 꼽을 만하다. 제후들과 동급으로 볼 수 있는 성인급 인물로는 공자, 맹자, 노자, 묵자, 손자, 한비자가 자주 등장한다. <열전>에 실린 인물들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만큼 많다. 굳이 고르자면 백이, 숙제, 관중, 포숙, 오자서, 소진, 장의, 사공자(맹상군, 평원군, 신릉군, 춘신군), 여불위, 굴원, 이사, 회음후 한신, 편작 등을 꼽을 수 있다.

 

『사기』는 출간되자 말자 베스트 셀러가 되지는 않았다. 사마천이 생존할 당시의 황제였던 한무제와 부친인 경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당대(唐代)부터 관리 임용 과목으로 채택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당송 팔대가로부터 문장 학습의 기본서로 인정받았다. 송대의 구양수를 비롯한 숱한 문장가들이 『사기』 애호가가 되었으며, 중국 근대화의 공헌자인 양계초는 사마천을 '역사계의 조물주'라고 치켜세웠다. 위대한 문학가인 루쉰은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요, 운율이 없는 『이소』'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오랜 세월동안 공을 들여 『사기』 전체를 완역한 김원중 교수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사기 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역시 적지 않다.

 

이러한 열전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사마천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사기 열전』을 생명력 넘치는 산 역사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 본위의 역사를 읽게 만든 작가의 각고의 노력 덕분이다. 사마천은 역사의 뒤안길로 살아져 간 인물들을 현재에 살아 있는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24쪽)

 

 - 사마천, 『사기 열전』, <작품 해제> 중에서

 

인류는 사마천으로부터 큰 신세를 졌다. 그가 남긴 『사기』 덕분에 '역사 서술의 훌륭한 모델'을 얻었기 때문이다.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인 24사는 모두 사마천을 모범으로 삼았고, 각 왕조는 바로 앞 왕조의 역사를 기록하는 걸 신성한 의무로 삼았다. 중국이 기원전 2세기부터 20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공식 역사서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사마천 덕분이다. 우리나라와 일본 역시 사마천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중국과 같은 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의 독자들은 서양 사람들에 비해 『사기』를 읽는 일이 훨씬 더 쉬운 형편에 놓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군다나 고등학교 때 고문(古文)과 한문(漢文)을 배운 독자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 손자와 한비자, 관중과 포숙, 오왕 합려와 월왕 구천, 진시황과 여불위, 항우와 유방 등등을 한꺼번에, 그것도 위대한 역사가가 남긴 명문장으로 만날 수 있다는 건 몹시 특별한 경험이다.

 

사마천은 70장으로 이루어진 『사기 열전』의 맨 마지막에 <자서전>을 한 편 끼워 넣었다. 『사기』 전체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글이기도 한데, 작품의 구성 체제뿐 아니라 자신의 집안 내력과 학문적 배경 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아무래도 <집필 동기> 부분이다. 발분저서()라는 말이 여기서 태어났는데, 마치 그의 유언을 듣는 기분이 든다. 그 대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맺는다.

 

그로부터 칠 년 뒤에 태사공은 이릉의 화를 입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했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

 

그는 물러나 깊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시경』과 『서경』의 뜻이 은미하고 말이 간략한 것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펼쳐 보이려 했기 때문이다. 옛날 서백西伯(주나라 문왕)은 유리羑里에 갇혀 있으므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를 잘림으로써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좌천되어 세상에 『여람呂覧(여씨춘추)』을 전했으며, 한비는 진秦나라에 가서 감옥에 갇힌 중에 『세난說難』과 『고분孤憤』 두 편을 남겼다. 『시』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882쪽) 

 

 - 사마천, 『사기 열전』, <태사공 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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