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본기』에 등장하는 여태후와 효문황제는 서로 성씨도 다르고, 권력을 물려주고 물려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제위를 이어받은 경우인데, 두 사람의 권력 사용 방식이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놀랍다.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이 죽고 나자 효혜제가 황제 자리를 이어받았다. 효혜제는 여덟 명이나 되는 유방의 아들 가운데 둘째였다. 그런데 효혜제가 태자로 있는 동안에 고조의 셋째 아들인 여의에게 태자 자리를 빼앗길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고조가 여의를 낳아준 척 부인을 몹시 총애했기 때문이다. 고조가 죽고 효혜제가 제위에 오르자 황제의 어머니인 여후는 기어이 척 부인의 아들 여의를 불러들여 독살한다. 그리고 늘상 눈엣가시로만 여겨왔던 척부인을 '사람 돼지'로 만들어 역사에 길이 자신의 이름을 빛낸다.
태후는 끝내 척 부인의 손과 발을 절단 내고 눈알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돼지우리에 살게 하며 '사람 돼지'라고 이름 불렀다. 며칠이 지나 혜제를 불러서 '사람 돼지'를 구경하게 했다. 효혜제는 보고 물어보고 나서야 그녀가 척 부인임을 알고 큰 소리로 울었고, 이 일 때문에 병이 나 1년이 지나도록 일어날 수 없었다. [혜제는] 다른 사람을 보내 태후에게 간청해 말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태후의 아들로서 결국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혜제는 이날부터 술을 마시고 음란한 즐거움에 빠져 정사를 듣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병까지 생겼다.(385∼386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여태후 본기> 중에서
효혜제가 젊은 나이인 스물셋에 죽고 나자 드디어 '여씨 천하'가 되었다. 황제의 어머니인 여태후가 권력을 틀어쥐고 여씨 집안 사람들 중심으로 친정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여태후는 실권을 장악한 후 8년 동안 '고황후'로 불리며 나라를 다스렸다. 그녀가 죽자 유씨들이 다시 '여씨 일족'을 몰아냈다. 그리하여 다시 유씨 가문이 황제를 잇게 되었으니, 고조 유방의 아들들 가운데 어진 마음과 덕망을 갖춘 넷째 아들 유항이 효문제로 등극했다.
효문제가 황제가 되어 다스린 23년 동안은 그의 아들인 효경제 시대와 함께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불릴 정도로 태평성대였다. 두 황제가 오로지 백성들만 바라보며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이다. 효문제가 취임 첫 해에 펼친 개혁 과제는 '적폐 청산'이 아니라 악명 높은 '연좌제'부터 폐지한 일이었다.
"법이란 다스림의 바른 도이며 포악함을 금지해 선한 사람으로 이끄는 것이다. 지금 법을 어긴 후 이미 죄를 처벌받았는데도 죄 없는 부모나 아내, 자식이나 형제가 연좌되어 잡혀서 함께 벌을 받고 있다. 이를 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법을 의논해 보라."
담당 관원들이 모두 말했다.
"백성들은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법을 만들어 금지한 것입니다. 친족까지 연좌해 벌을 받게 하는 것은 그 마음을 무겁게 해 그들이 법을 범하면 이를 엄중히 처벌하려는 것으로 시행된지 오래되었습니다. 예전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짐이 듣건대 법이 바르면 백성들은 충성스럽고, 형벌이 합당하면 백성들이 순종한다고 하오. 게다가 백성을 다스려 선으로 인도해야 하는 사람이 관리이거늘, 인도하지도 못하고 또 바르지 않은 법으로 죄를 다스린다면, 도리어 백성들에게 해가 되고 난폭한 짓을 하는 것이오. 어떻게 하면 이를 막을 수 있는가? 또한 짐은 연좌제의 이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깊이 생각해 보시오."(415쪽)
- 사마천, 『사기 본기』, <효문 본기> 중에서
효문제의 눈부신 치적은 날이 갈수록 빛났다. 백성들이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과감하고도 훌륭한 덕치의 연속이었다. 집권 13년차에는 (오늘날까지 경극의 주제로도 널리 공연되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제나라의 태창령 순우공이 죄를 지어 처벌을 받게 되자 죄수를 관장하는 관원들이 그를 체포해 장안으로 이송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태창공은 아들은 없고 딸만 다섯이었다. 태창공이 막 체포되어 가려고 할 즈음에 딸들에게 욕을 하면서 말했다.
"자식을 낳아도 남자를 낳지 못했으니 급박한 일을 당해도 도움이 안 되는구나!"
그러나 막내딸 제영은 절로 마음이 상해 울면서 아버지를 따라 장안에 와서 황제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소첩의 아버지는 관리가 된 후 제나라 땅에서는 모두 아버지를 청렴하고 공정하다고 칭찬했으나 지금 법을 어겨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형을 받은 자는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어서, 비록 잘못된 행실을 고쳐 스스로 새사람이 되려 해도 할 수 있는 길이 없어 마음 아프옵니다. 소첩이 죄인의 몸으로 관아의 노비가 되어 아버지의 죄를 갚겠으니 아버지가 스스로 새사람이 될 수 있게 해 주시길 원하옵니다."
글을 천자에게 올리니 천자는 그 마음을 슬프고 가련하게 여겨 조서를 내려 말했다.
대체로 듣건대 유우씨 때에는 죄를 지으면 의관에 그림을 그리고 특이한 복장을 입게 해 치욕으로 삼게 했을 뿐인데도 백성들은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들었다. 무슨 까닭에서 그랬겠는가? 지극하게 잘 다스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법은 육형肉形이 셋이나 있어도 간악함이 멈추지 않으니, 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짐의 덕이 각박하고 밝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짐은 참으로 스스로에게 부끄럽다! 교화의 방법이 순수하지 못해 어리석은 백성들이 죄로 빠져드는구나. 『시』에 말하기를 "다정하고 자상한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라고 했다. 지금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교화를 베풀지도 않고 형벌을 먼저 가하니, 간혹 잘못을 고쳐 선을 실천하려 해도 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짐은 이 점을 참으로 가련하게 생각하노라. 무릇 형벌이란 사지를 잘라 버리고 피부와 근육을 도려내 죽을 때까지 고통이 그치지 않으니 얼마나 대단히 아프고 괴로우면서도 부덕한 것인가. 어찌 이것이 백성의 부모 된 자의 뜻에 걸맞은 것이겠는가. 육형을 없애도록 하라!
(425∼427쪽)
- 사마천, 『사기 본기』, <효문 본기> 중에서
황제가 자리에 오른 지 23년째가 되었으나 궁실과 동산, 개, 말, 의복, 거마에 늘어난 것이 없었고, 생활에 불편함이 있으면 즉시 법령을 느슨하게 해 백성들을 이롭게 했다고 한다. 그의 성품이 어떠했는지는 다음의 인용문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황제는 항상 수수한 옷을 입었다. 또한 총애하던 신 부인에게 옷을 땅에 끌리지 않게 하고 휘장을 수놓지 못하게 해 마음이 돈후하고 소박한 것을 나타냄으로써 천하의 모범이 되게 했다. 또한 패릉覇陵(문제의 능묘)을 지을 때, 모두 와가瓦器를 사용하게 하고 금, 은, 구리, 주석으로 장식하지 못하게 하고 분묘를 높이 올리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비용을 줄이고 백성을 번잡하게 하지 않으려 함이다. …… 신하들 중 원앙 같은 이들은 진언할 때마다 칼로 써는 것 같았지만 황제는 한결같이 관대하게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또 신하들 중 장무 등은 뇌물을 받거나 금돈을 주다가 발각되었는데도 황제는 오히려 왕실 창고에서 금돈을 꺼내 그들에게 내려 그 마음을 부끄럽게 했을 뿐, 법을 집행하는 관리에게 넘기지 않았다. 오로지 덕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힘썼으니, 이 때문에 전국은 재물이 넉넉하고 번영했으며 예의가 일어났다.(432∼433쪽)
- 사마천, 『사기 본기』, <효문 본기> 중에서
23년 동안의 덕치 끝에 세상을 떠날 때 그토록 어진 황제가 남긴 조서는 과연 남달랐다.
짐이 듣건대 천하 만물 중 싹이 나서 죽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한다. 죽음이란 천지의 이치요, 만물의 자연스러운 규율이니, 어찌 유달리 슬퍼할 수 있으리오! 지금 처한 시대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 있음을 기리고 죽음을 미워해, 장례를 후하게 치러 가업을 무너뜨리고 상 치르는 일을 중시하여 산 사람을 상하게 하는데, 나는 정말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노라. 게다가 짐은 본래 부덕해 백성들을 돕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세상을 떠남에 더구나 복상을 중시해 오랜 기간 상기喪期를 지키게 하고, 추위와 더위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하고, 백성들의 아버지와 자식을 슬프게 하고, 어른과 아이의 뜻을 상하게 하고, 그들의 먹을거리에 손실을 입히고,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중단하게 한다면, 내 부덕함을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이니 천하에 무슨 말을 하리오! 짐이 종묘를 손에 넣고 보전하며 미천한 몸으로 천하의 군왕 자리에 의탁한 지 스무 해가 넘었다. 그사이 천지의 신령과 사직의 복에 힘입어 온 나라가 편안하고 전란이 없었노라. 짐은 본래 영민하지 못해 그릇된 행실로 선제가 남기신 덕을 욕되게 할까 봐 늘 두려워했으며, 세월이 지날수록 끝이 좋지 못할까 걱정했다. 지금 비로소 다행히 타고난 수명을 다하고 고묘高廟에서 공양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짐이 명철하지 않은데도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이 어찌 슬퍼할 수 있으리오. 그러니 천하의 관리와 백성들은 이 조령을 받고 나서 사흘만 상례를 치르고 모두 상복을 벗으라.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 제사와 음주와 고기 먹는 일을 금지하지 말라! 장사 지내는 일에 참가하거나 복을 하는 자들도 전부 맨발을 드러내지 말라! 질대絰帶는 세 치를 넘지 말고 수레와 무기를 늘어놓지 말며 백성들 가운데서 남녀를 뽑아 궁궐에서 곡하게 하지도 말라. 궁 안에서 상을 치르는 자들도 모두 아침저녁 각 열다섯 번씩만 곡소리를 내고 예가 끝나면 그만두라. 아침저녁으로 곡을 할 때가 아니면 제멋대로 곡하지 말라. …… 이 명령 가운데 있지 않은 다른 것들은 모두 이 명령에 의거해 처리하라! 천하에 널리 포고해 백성들에게 짐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라! 그리고 패릉의 산천은 원래 모습을 따라야지 고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부인 이하에서 소사少使(황제의 후궁은 부인 밑에 미인美人, 양인良人, 팔자八字, 칠자七字, 장사長使, 소사가 있음)까지는 그 집으로 돌려보내라.
(433∼434쪽)
- 『사기 본기』, <효문 본기> 중에서
(나의 생각)
『사기 본기』의 <효문 본기>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효경 본기>에는 효경제의 무덤에 관한 무척 흥미로운 주석이 붙어 있어 눈길을 끈다.
"최근 발굴 작업 도중에 토용이 대량으로 발견되어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왜냐하면 그 숫자가 진시황의 병마용 숫자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황제가 죽으면 후궁들도 생매장되는 순장殉葬 습관까지 있었으니, 효문제가 죽으면서 내린 조서가 얼마나 절절히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쓰여진 것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효문제에 얽힌 미담들은 일일이 소개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이토록 마음씨가 어진 황제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의 일대기를 다 읽고 나면 사마천이 그를 칭송하는 말이 도리어 부족해 보일 정도다.
태사공(사마천을 말함)은 말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어진 정치가 이루어진다.' 또 '선한 사람이 1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려야 난폭한 정치를 없애고 사형을 제거할 수 있다.'라고 했다. 진실로 옳은 말이구나! 한나라가 일어나 효문황제에 이르기까지 40여 년이 되니 덕이 지극히 성대해졌다. 점차 역법을 고치고, 의복의 색깔을 바꾸고, 봉토를 쌓아 지내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나, 문제의 겸손하고 사양하는 정치는 오늘날까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아아, 어찌 어질지 않다고 하겠는가!"(436∼437쪽)
- 『사기 본기』, <효문 본기> 중에서
이런 글을 읽다가 문득 '현실'로 돌아 오면 우리나라의 갑갑한 정치 현실 때문에 너무 서글퍼진다. 새로운 법무장관 후보자는 자신과 가족들을 둘러싼 숱한 의혹들로 인해 수많은 국민들로부터 분노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도, 거의 매일같이 카메라 앞에 서서 자신만이 '검찰 개혁의 적임자'라고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버티고 있다. 이미 10여 건의 고소·고발까지 검찰에 접수되어 중앙지검 특수부까지 나서서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였는데도 그는 오늘도 여전히 '포기는 없다'고 외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집념이 그토록 끈질긴가? 그게 정녕 '검찰 개혁'을 위한 진정어린 호소가 맞는가? 그게 혹시 권력을 향한 끈질긴 욕망의 다른 표현은 아닌가? 설사 그렇게 해서라도 기어코 법무장관에 잠시 동안 올라앉는다고 치자. 과연 그렇게 잡은 권력이 얼마만큼 떳떳하고 올바르게 행사될 수 있을까? 혹여나 그가 지난날에 저질러온 숱한 과오를 덮는데 그런 권력이 부당하게 행사될 가능성이 없을 거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그 숱한 '언행불일치' 만으로는 부족하여 아직도 새로운 업적을 기어코 더 쌓아 올려야만 만족하겠다면 그렇게 하라. 예로부터 권력을 붙잡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무모한 일도 서슴치 않고 저질러 왔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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