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 스님에게는 몇 차례 예지 적중 내력이 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이들은 이미 아는 일이다. 그 하나는 6·25 직전, 스승 한암 스님의 만류도 뿌리치고 양산 통도사로 남하했던 이력이다. 그 둘은 울진, 삼척 지방에 무장공비가 몰려들기 직전 《화엄경》의 번역 원고를 월정사에서 영은사로 옮겼던 이력이다.
그러나 탄허 사상과 예지의 매력은 더욱 깊은 곳에 있다. 그는 예언한다. 지구에 잠재하는 화질火質이 북방의 빙산을 녹이기 시작한 것은 지구의 규문閨門이 열려 성숙한 처녀가 되는 과정이라고 비유하는 것이다. 지구의 초조初潮 현상은 소멸이 아니라 성숙의 모습이라는 낙관론이다. 그는 또한 머지않아 민중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믿는다. 땅의 민중이야말로 핵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리라는 것을 역학의 산리算理로 헤아려 내는 것이다.(14쪽)
6·25 동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 당시 나는 오대산에서 한말韓末 이래로 가장 존경받던 고승 한암漢岩 스님을 모시고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한암 스님을 10년 이상 모신 상좌上座가 없었는데 황송하게도 나는 22년을 모셨다. 한암 스님께 가르침을 받으면서 존경하는 마음은 날로 더해 갔다.
기축년己丑年인 1949년 어느 날, 개미 떼가 자기들끼리 싸움을 해서 법당과 중대 뜰에 수백 마리씩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난亂을 예감했다.
‘남북 간에 큰 싸움이 벌어지겠구나!’
하늘은 하늘의 상象을 보이고, 땅은 땅의 상을 보이고, 꼭 사람의 상만 보는 것이 관상이 아니다. 짐승들도 지진을 예지하는데, 하물며 그런 큰 난리는 다 미리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그동안 공부를 통하여 얻은 역학 원리易學原理로 분석해 보니 곧 난이 일어날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일단 어려운 상황을 피하자는 생각이었다.
“스님, 오대산을 떠나 남행南行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한암 스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한암 스님은 30년 이상을 살아온 오대산을 떠날 수 없다며 완강하게 거절하셨다.
당시 내 나이 서른네 살, 인생에서 가장 혈기왕성한 시기여서 어떻게든 남행을 관철시키려고 애썼다. 더욱이 당시 스물셋, 스물넷이었던 젊은 상좌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닥칠 난을 피해 오대산을 떠나려는 결심을 굳혔다.
내 결심이 굳건하다는 사실을 안 한암 스님은 어쩔 수 없이 남행을 허락하고, 양산 통도사 백련암으로 가서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라고 하셨다. 한암 스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오대산의 중대암에 기거하다가 3일 만에 짐을 챙겨 몇몇 상좌와 함께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기축년己丑年 봄, 통도사 백련암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시 통도사 주지는 우리에게 암자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 한암 스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말로 겨우 암자를 얻어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한암 스님은 끝내 백련암에 오시지 않았다. 30년 이상을 오대산에 머무르셨으니 움직이지 않겠다고 하신 그분의 결의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여든 살의 고령이었던 한암 스님은 오대산에서 6·25 동란을 고스란히 겪으셨다.
그때 상원사를 불태우려고 군인들이 들이닥쳤는데, 한암 스님은 가사 장삼을 갖춰 입으시고 법당에 의연히 앉아 그대로 태우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노승의 의연함에 놀란 군인들이 차마 불태우지 못하고 떠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한암 스님은 1·4 후퇴 무렵에야 오대산을 떠나 천리가 넘는 남행길을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겪은 고생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 다른 일을 이야기하자면 어느 해인가 동해안을 통해서 울진·삼척 지방에 공비 120여 명이 침투한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월정사의 한 암자에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을 번역하고 있었는데, 어떤 직감에 의해 공비 침투가 있기 한 달 전에 장서藏書와 번역 원고들을 모두 삼척 영은사靈隱寺로 옮겨 두었다.
갑자기 짐을 몽땅 싸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작은 소동이 일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몸은 떠나지만 마음은 여기 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
《신화엄경합론》 번역 원고들을 모두 옮기고 난 후 15일 만에 울진과 삼척 지역에 공비 침투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거의 모든 공비가 소탕되었지만, 일부 남은 공비들이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오대산으로 도주했다. 그 바람에 월정사를 중심으로 오대산 일대에 소탕작전이 벌어졌다. 이때 공비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동원된 군대가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필이면 군단 사령부가 월정사에 소탕작전 본부를 설치했다.
그동안 나는 강릉에서 한달가량 머물다가 공비 소탕작전이 끝난 다음 월정사 암자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살던 암자 주변에 사방으로 참호를 파 놓아 암자는 완전히 폐허 상태였다. 만약 그때 필생의 노력과 심혈을 기울여 온 《신화엄경합론》 번역 원고들을 다른 장소로 옮겨 놓지 않았더라면 이 번역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35∼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