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 나는 광주에 있었다.
난생 처음 총소리를 들어보고, 탱크가 굴러다니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무서워서 집 밖에는 잘 나갈 수도 없었다. 열흘 여의 휴교기간이 끝나고 학교에 다시 등교하는 날. 선생님들은 아무일 없었던 듯 침묵하고 있었다. 단지 모두들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이야기, 가족들 중 다친 사람은 없는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질문 등이 전부였던 것 같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떠들고 다니면 잡혀간다"는 주의를 부모님께 들었던 것도 같다. 그렇게 모두들 침묵을 강요당해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시 시위대가 외치던 구호속의 이름. 목놓아 부르짖으며 타도하자던 낯선 이름의 인물 "전두환"은 뉴스에 몇번 오르내리더니 대통령이 되었다.
80년 대 초반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던 망월동 공원 묘지는 명절때 마다 총을 든 군인들이 늘어서 있었고, 저 쪽 언덕배기 너머에 있던 희생자들의 묘역에서는 숨죽인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희생자의 가족들은 목청껏 울지도, 소리 높여 가해자들을 원망하지도 못했다.
가해자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무소 불위의 권력을 휩쓸던 그 시절, 방송도, 신문도, 사람들도 그 사건을 "광주사태"라고 불렀다.(아직도 일부 인사들은 공공연히 스스럼없이 그 사건을 "사태"라고 부른다.) 누구에 의한 "사태"였을까. 그들의 주장처럼 혼란스러운 국가 상황을 틈타 침투한 북의 간첩들이 순진한 민중을 선동해서 일으킨 무정부 상태의 혼란이었을까. 몇몇 과격 분자에 의한 반정부 유혈 난동 사태였을까.
아무것도 모르던 초등학교 3학년 생 어린 아이는 25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30대 중반의 아저씨가 되었다.
묘역도 새롭게 꾸미고, 관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정치인이 대통령까지 지내고 난 지금. 사람들은 아직도 부상자들과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묻는다. 모든것을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냐고.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없는데 도데체 누구를 용서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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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에서 희생되고, 그 일로 고초를 겪었던 모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자유의 숨을 쉴 수 있고, 하고 싶은 말들을 이렇게 인터넷에라도 끄적이며 살 수 있게 된 것은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열사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