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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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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2012년은 아주 기묘한 한 해가 될 것 같다. 한미 FTA의 발효로 인해 사회 곳곳에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가속화 될 것이면서, 동시에 총선과 대선으로 인해 (실제로 실현되건 안 되건) 각종 복지 공약이 넘쳐나게 될 것이니 말이다. 한쪽에선 사람들을 무한 경쟁의 정글로 몰아넣으면서 다른 한쪽에선 잘먹고 잘살게 해주겠다고 큰소리쳐대는 기묘한 풍경, 이것이 우리가 아마도 2012년에 맞이하게 될 모습일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후자보다는 전자가 더 힘이 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풍경은 기묘하면서도 우울한 풍경이 될 것이다.

 

현실이 우울할수록 사람들은 자꾸 다른 곳을 쳐다보게 된다. 그래서 취업이 힘들고 가진 일자리를 지키기도 힘들고 결국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지자, 사람들이 자연스레 복권 같은 것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 책 역시 그러한 눈돌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그 어느 곳보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팽배한 미국, 그곳에서도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가장 많이 접하고 있는 노동전문 변호사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소개하는 미국의 우울한 풍경 하나를 보자.

 

나는 어떤 흑인 전기공을 대리해서 소송을 진행했다. 그는 경력과 기술에 흠잡을 데가 없었으나 응급 복구 작업을 하다 피자를 먹었다는 이유로 전력 공급 업체 컴에드(ComEd)에서 해고되어 해고 철회 소송을 냈다. 당시 단전 사태가 발생해 응급 복구에 매달리느라 끼니도 거른 채 연장 근무 중이었고, 그 혼자만 피자를 먹었으면 모르되 현장에 있던 동료 직원과 함께 나눠 먹었다. 또 현장을 오래 비웠던 것도 아니었다. 한 조각만 겨우 입에 집어놓고 곧바로 현장에 복귀했다. 그런데도 해고되고 말았다. 컴에드의 설명에 따르면, 배를 채우기 위해 현장을 잠깐 비워도 무방한 다른 직원과 달리 그는 작업 중에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분류돼 있었단다. 이제 판사들은 경영자들 무서워하기 때문에 당연히 해고의 효력은 그대로 인정되었다.”(264)

 

현장을 잠깐 비워도 무방한 사람과 작업 중에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되는 사람의 구분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떠오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혹은 경영자들을 무서워하는 판사들의 모습에서 수백억 대의 부당이득에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회장님들과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벌인 파업임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끼친 손실금을 보장하라며 수억의 배상판결을 받게 된 노동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과도한 연상일까. 이처럼 몰상식한 현실에 대해 분노와 좌절감을 느꼈다면 자연스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눈에 들어온 나라가 독일이다. 미국에서 노동전문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토머스 게이건은 이 책에서 자신이 독일에 잠시 체류하면서 경험하게 된 사회보장체계의 장점들과 그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듣는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제도는 세금 폭탄수준의 높은 세율로 인해 노동의욕 하락과 생산성 저하를 불러올 수밖에 없고, 공공 부분이 비대화되어 사회적 비효율성이 증가하게 되며, 그래서 결국 총체적 침체로 인한 국가경쟁력 약화와 GDP의 감소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저자가 보기에 이는 반만 맞는 얘기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나머지 절반을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미국은 전세계에서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나라이지만 현실은 어떠한가.유럽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500시간 정도이다. 이에 비해 미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800시간이다. 하지만 실상을 따져 보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2300시간 이상을 일한다.”(32) 게다가 “GDP 증가분의 3분의 2 이상이 부자에게 돌아갔다. 예를 들어 2005년 미국 생산직 노동자의 시간당 실질임금은 1973년에 비해 약 8퍼센트 하락한 반면 시간당 산출량은 55퍼센트 상승했다.”(33) 다시 말해 높은 GDP란 결국 더 많은 시간 일한 결과일 뿐인데다 그 상승된 GDP의 대부분도 부자들이 가져가고 있는 것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가 어쩌구 하는 우리나라에서도 눈여겨봐야 될 대목이다.

 

더구나 이는 명목상의 차이일 뿐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뭇 다른 모습을 알 수 있다. 유럽인이 누리는 6주 휴가의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할 경우 유럽인의 1인당 GDP는 대폭 올라가기 마련이다. 이러면 굳이 공공재 혜택까지 계산에 넣지 않아도 유럽인이 미국인보다 물질적으로도더 잘 산다고 할 수 있다. () 유럽인은 연간 700시간 이상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가 있다. 다른 언어를 하나 더 익히거나 스리랑카를 여행할 수도 있고 독서를 할 수도 있다. 지금의 GDP로는 측정할 수 없는 여가의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34~35) 이처럼 널리 알려진 교육이나 의료, 공적 연금과 같은 공공재 혜택뿐만 아니라 경제적, 물질적 측면에서도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자신이 노동전문 변호사인 이유도 있겠지만, 저자는 그 이유를 노동 관련 제도에서 찾는다. 저자가 보기에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은 바로 직장평의회, 노사공동결정, 지역별임금결정제도이다.

 

직장평의회는 노동자의 대표로 선출된 위원이 노동 여건 등과 관련된 사안을 경영자와 합의해야 하는 제도로, 직장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된 사람은 직장 동료의 복지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기업 경영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142) 또한 노사공동결정제도는 회사 이사회를 구성하는 데 있어 이사회의 이사는 주주와 헤지펀드 쪽에서 절반을 뽑고 사원 쪽에서 그 나머지 절반을 뽑아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하는 제도를 말한다.(143) 이처럼 직장평의회와 노사공동결정제도는 노동자가 직접 경영에 참여함으로써 경영자를 감시하고 노사 간의 자연스러운 합의를 유도할 수 있는 제도이다. 물론 이 두 제도는 저자도 인정하듯이 독일이라는 지역적 특수성, 즉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와 이로 인해 기술자를 우대하는 풍토 등이 반영되어 오랜 시간 정착되어온 제도이기에 다른 나라에 곧바로 적용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세 번째 제도인 지역별임금결정제도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제도는 산별노조와 유사한 형태의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는 노동자로 구성된 노동조합이 “1평방마일(1.6제곱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동일 업종 노동자의 임금을 일괄적으로 정하는 단체교섭”(146)을 할 수 있는 제도로서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이 최대로 실현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의 의미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역별임금결정제도의 핵심은 어떤 기업도 임금을 놓고 다른 기업과 경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과 똑같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사회민주주의 제도이다. 이 제도가 있기에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되는 와중에도 (지금까지) 독일이 상대적으로 평등한 것이다.”(147)

 

특히 이는 우리나라처럼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심각한 사회에서 주목해봐야 할 제도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생각을 잠시 덧붙이자면, 나는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장 시급히 고려해야 할 것이 바로 동일 노동 동일 임금원칙의 현실화라고 생각한다.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2010년 현재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은 54.8%라고 한다. 물론 이는 전체 직종별 단순 비교이기 때문에 동일 노동에서는 그 비율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얼마 전 한 잡지에 현대자동차나 모 중공업의 경우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연봉은 절반을 받고 있다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정규직이 받는 4대 보험이나 상여금, 자녀학비지원 등 각종 복지제도를 고려하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계에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주장하는데 이는 세계 경제의 급격한 변화와 같은 현실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당장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중간 단계로서 동일 노동 동일 임금제도가 도입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실질적 임금 상승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제도는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는다.’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쉬운 주장이면서도 동시에 정규직과 비정규식의 연대를 이끌어내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처럼 탄탄한 독일의 사회복지체계가 세계적인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독일 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끌어온 원동력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이 책은 독일 모델의 한계나 단점에 대한 언급보다는 예찬 일색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또한 저자가 항변하고 있듯이 독일 모델의 한계나 단점은 미국 언론에서 지겹도록 떠들어대고 있기에 굳이 이 책에서 균형을 맞추려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예찬 자체가 편향된 언론에 대한 균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아무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돈을 더 많이 벌려고 애쓸수록 우리의 삶의 질은 하락한다.”고 저자는 단호하게 주장한다.

 

한 때 한 카드 회사의 광고로 인해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아마 다가올 새해에도 올해에는 돈 많이 벌어라와 같은 이야기들이 오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 그리고 과연 열심히 일한 만큼 그 대가나 나에게 돌아오는 것인지, 그리고 과연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결국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잘못이야라는 자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어떤 나라로 만들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심화와 정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의 집중이 동시에 진행될 2012년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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