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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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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칼 포퍼는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보지 않는 자는 바보요, 나이가 들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자는 더 바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포퍼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가 나중에 자유주의자로 전향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이 얘기를 볼 때마다 (물론 그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스스로 나는 결코 바보였던 적이 없어.’라고 거만하게 말하는 듯해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어쨌든 마르크스주의를 닫힌 사회의 전형이라 맹렬히 비판했던 포퍼조차도 마르크스주의에 젊은 열정을 휘어잡는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사실 지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 중 단 한순간도 마르크스주의에 매료된 적이 없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전 세계의 3분의 1에 가까운 이들이 거의 한 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를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다는 사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지금도 여전히 현실의 위기가 심각해질 때마다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마르크스의 이름이 끊임없이 다시 호출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마르크스주의를 단순히 철지난 사상으로 치부하고 무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공산주의 프로젝트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1917년 이후의 세계 전반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하거나 쓸 수 없”(19)는 것이다.

 

도대체 마르크스주의에 무엇이 있기에 그토록 젊은 열정들을 사로잡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개인적인 경험을 밝히자면, <공산주의당 선언>에 실려 있던 한 구절,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라는 표현이 나를 끌어당겼다. 우리나라처럼 각 개인의 개성과 자유가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교육 체계에 몸서리쳤던 나에게, ‘가족을 위해, 학교를 위해, 국가를 위해와 같은 말들이 끔찍하게 싫었던 나에게,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사회, 그리고 그것이 서로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은 마치 천국에 대한 묘사처럼 들렸던 것이다.

 

나는 무슨무슨 주의자가 되기에는 대단히 게으른 인간이기에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청할 깜냥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이상과 마주한 후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여러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저술들을 찾아 읽게 되었고, 그들이 설명하는 자본주의의 현실과 모순, 그리고 극복 방향에 대해 많은 부분 공감을 하였다. 물론 지금은 그들의 사상들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철저하게 무너져 내렸는지도 알고 있고, 현실의 조건에 비추어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는 나에게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점에서 <코뮤니스트>는 매우 반가운 책이다. 여기저기서 단편적으로 습득했던 공산주의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상적 토대와 소련이라는 현실적 구현물, 이 두 중심을 양 극으로 하여 초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부터 최근의 사파티스타에 이르기까지, 시간적·지리적으로 넓게 퍼져있는 공산주의라는 이념적·현실적 자기장의 세밀한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 특히 기원-실험-도약-확산-변형-종언으로 이어지는 각 부의 제목은 공산주의 역사의 흥망성쇠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시종일관 비판적인 자세로 공산주의의 역사를 검토한다. 물론 저자가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폐기해야할 철지난 사상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기초에 대한 치밀한 검토를 수행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저 역사가로서 그 사상이 현실에 이루어 놓은 구현물들인 여러 현실적 공산주의 국가들의 모습을 차근차근 파헤침으로써, 어떻게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기획이 실패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가의 사멸을 예측했다. 공산주의 역사는 그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국가 권력은 급속도로 강화되었다. 노동수용소는 확산되었다. 공산주의에 적대적인 개인과 집단을 억압하는 일은 현상 유지를 위해 계속 필요했다. 시민 사회는 분쇄되었다.”(23)

 

이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뼈아픈 지적이다. 물론 현대의 어떤 공산주의 옹호자들은 역사상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실현한 국가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식으로 이러한 지적을 회피하기도 한다. 레닌이나 스탈린과 같은 독단적 인물의 문제로, 혹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파상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로 현실 사회주의가 보여준 전체주의적 모습을 애써 평가절하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유명한 한 논객의 말을 잠시 비틀어 인용하자면, 하나의 사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가 현실 속에서 만들어 놓은 사태이지 그 사상의 내심이 아니다. 하나의 사상이나 이념은 그 자체의 내적 정합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현실과의 적합성도 중요하다. 그렇기에 한 사상을 현실적으로 구현해 보려는 다양한 시도가 대부분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간단히 무시하고 외면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의 역사적 실패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저자는 결론에서 한 가지 딜레마를 지적한다. 공산주의 정부들은 레닌과 스탈린이 개발한 소련식 모델을 시행할수록 점점 강력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소련식 모델의 근본적인 특징들을 복제할 수 없었거나 복제하려 하지 않았던 국가들은 내부의 해체나 외부의 개입에 취약했다.”(741)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대부분의 국가들은 직면한 내적 외적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체제를 수립해야 했고, 이를 위해 전체주의적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은 더 큰 반발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강력한 체제를 위해 도입한 전체주의가 결국 체제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선택이 일종의 조급증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는 조급증. 그러한 조급증이 다양한 반대와 비판의 목소리로부터 귀를 막게 만들고, 현실적 문제들에 눈감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현실적 급박성을 볼모로 삼아 비판과 성찰의 여지를 무시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억압했던 태도가 전체주의 사회로 귀결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여 더 많은 비판과 토론, 더 많은 실험과 성찰, 결국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도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급증을 버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랬을 때 더 많은 의견들이 서로 조율을 이루면서 하나의 안정된 지향점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 나는 그 과정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라 믿는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했던 말도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성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止揚)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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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기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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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탈근대 담론들이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근대, 아니 전근대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러저러한 사건 사고나 혹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합리한 일처리를 경험하게 되면,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말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궁금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전근대적 사고는 도대체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많은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군대와 가족에 그 혐의를 두고 있다.

 

먼저 군대란 일상적 폭력을 체험하고 체화함으로써 폭력에 대한 생래적 거부감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상명하복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에 자신을 끼워 맞춤으로써 사회적 서열체계와 나이주의(ageism)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 윗사람의 권위와 폭력, 아랫사람의 충성과 복종이 자연스레 체화되는 것이다. 물론 군대가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것은 이미 우리 사회에 유교적 가부장문화가 뿌리깊이 퍼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굴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가족이란 대개 구성원들이 서로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주고 독립성을 인정해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절대적 책임과 의무를 가진 존재로 여기고 서로 의존하는 관계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합리한 처사들, 즉 아내에 대한 남편의 폭력, 자식에 대한 부모의 폭력뿐만 아니라 결혼이나 진로 등 개개인의 미래에 대한 간섭과 같은 일들이 가족의 의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것이다.

 

결국 가족-군대로 이어지는 시스템, 아니 보다 세분화하자면 가족의 연장인 학교, 군대의 연장인 직장까지 포함하여, 가족-학교-군대-직장-다시 가족으로 이어지는 순환체계는 급격히 발전된 물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근대적 시스템이 유지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최근 등장하고 있는 1인 가족이나 무자녀 가족 혹은 비혈연 가족과 같은 탈가족의 풍경들이 단지 경제적 여건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기보다 완고한 가부장 시스템을 벗어나고자하는 힘겨운 몸부림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 사회에 탄탄하게 뿌리내린 전근대의 흔적을 우리 고전에서 찾아낸다. <가족 기담>이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그림동화와 같은 서구 전래 동화의 원본, 즉 어린이용으로 순화되기 이전의 잔혹한 내용들을 재발굴해서 보여주려는 시도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책에 새로운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고전들이 내용 그대로 다뤄지고 있다.

 

그런데 왜 기담인가? <장화홍련전>이나 <여우누이>, <쥐 변신 설화> 등을 제외한다면 다들 평범한 내용들이 담긴 고전들 아닌가. 그러나 저자는 그저 우리가 얼핏 읽고 지나갔던 내용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들여다보고 다시 생각해보자고 권한다. 그러면 평범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내용 밑으로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현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조리를 건져올릴 수 있다. 그렇게 가족을 둘러싼 뒤숭숭하고 불온하고 끔찍한 것들이 우글우글한 우리 옛이야기들”(7)에서 건져 올린 날 것의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오싹함을 느끼지 않겠는가, 라고 묻고 싶은 것이다.

 

물론 오싹하진 않다. 저자는 짐짓 과장된 어투로 옛날에는 이렇게 살았었다니까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단지 옛이야기만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근대적 요소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가족체계 안에서 나고 자라왔기에 새삼스러울 게 없는 것이다. 저자는 평범한 것에서 오는 공포가 그 무엇보다 무섭다고 말한다. 타자화시킬 수 없는 영역에 속한 자에 대한 불안과 공포, 그것은 본원적 공포다.”(203) 즉 타자화시킬 수 없는 존재로서의 가족이 주는 공포. 그러나 일상화된 공포는 더 이상 공포가 아니다. 그건 그저 현실일 뿐이다.

 

때문에 내가 궁금했던 것은 그러한 체계를 벗어나려는 일탈의 시도가 있었는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깊이 있게 다루질 않는다. 아마도 그런 사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일탈의 모습을 보여준 홍길동 역시 저 먼 섬나라 율도국에 가서 비슷한 나라를 세우지 않았던가. 불합리한 체계 속에 갇혀 있음을 알면서도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순응해버리는 모습, 혹은 강자가 되었을 때 오히려 부조리한 시스템을 적극 이용하는 모습. 나는 이것이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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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9-28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학교-군대-직장-가족의 순환고리에 대한 관점이 좋네요. 다행이 저는 군대를 대신한 공익근무여서 이 사슬을 조금은 끊은 듯ㅋㅋ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nunc 2012-09-29 15:53   좋아요 0 | URL
어떤 식으로든 순환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고정된 직장이나 새로운 가족을 안 만드는 쪽으로 노력하고 있어요.^^;
추석 잘 보내세요.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 - 우리는 왜 부정행위에 끌리는가
댄 애리얼리 지음,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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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한 친구로부터 열라 원칙주의자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융통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뜻으로 한 말일 텐데, 스스로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어떤 면에서 그렇게 보였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원칙과 융통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융통성이란 원칙이나 규칙을 약간 벗어나지만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일 경우를 지칭하는 용어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좀 생각이 달랐다. 적용할 원칙이 있다면 무조건 원칙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안의 경우 적용해야할 원칙이 분명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이 때 관련 있는 여러 원칙 중 어떤 것을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유연한 판단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융통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 역시 큰 틀에서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그간의 경험을 통해 예전처럼 쉽게 단정짓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원칙을 적용해야할 사안인지 융통성을 발휘해야할 사안인지 명쾌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또한 지켜야할 원칙이란 것도 대개 추상적이거나 혹은 현실과 맞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 원칙을 지키는 것이 꼭 옳은 일이라고 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테면 차도 사람도 없는 한적한 새벽 도로에서 굳이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와 같은 문제에서부터 불법으로 규정된 파업이라면 무조건 그만두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쉽게 결론내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내리기가 어렵다고 해서 실행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행위가 심사숙고를 거친 완전한 결론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못한 채 굶어죽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대개 실행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에 대한 검토가 뒤따르는 식이 된다. 이를 우리는 반성 혹은 성찰이라고 부른다. 반성 혹은 성찰을 통해 자신이 행한 행위의 득과 실, 옳고 그름을 판단한 후, 다음 번 행위의 지침으로 삼기 위해 기억의 창고에 저장해 두는 것이다. 문제는 앞서 원칙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득과 실, 혹은 옳고 그름을 나누는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판단될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듯이 자의적 기준은 대체로 반복될수록 완화되기 마련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자의적 기준의 완화와 일상화를 구체적 실험을 통해 보여준다. 저자인 댄 애리얼리가 기준으로 삼고 있는 실험은 단순하다. 주어진 문제를 풀고 스스로 채점한 후 자신이 획득한 점수에 해당하는 보상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 보상을 받기 전 자신의 답안지를 스스로 파기하는 조건을 덧붙인다. 즉 자신이 획득한 점수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보상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얼마나 정직하게 자신의 점수를 제시할 것인가.

 

실험결과는 예상했던 대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점수를 부풀려 말한다. 부정행위가 불가능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경우 20문제 중 평균 7문제를 맞추었지만, 부정행위가 가능한 상황이 되자 12문제로 상승한 것이다. 게다가 남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목격하고 나면 이 수치는 15문제로 치솟는다. 저자는 다양한 조건과 상황을 덧붙인 변형된 실험들을 통해 이 같은 부정행위가 대단히 일반적으로 벌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재밌는 사실은 이러한 부정행위가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대부분 자신이 맞춘 개수에 몇 개를 덧붙일 뿐, 최대치의 보상을 노리고 극단적으로 정답의 개수를 부풀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인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 혹은 착한 사람들일지라도 어느 정도는 사소한거짓말을 하고 산다. (물론 책의 원제는 <부정직함에 대한 (정직한) 진실>로 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사소한 거짓말. 여기서 사소함이란 원칙이나 규칙이 한정하고 있는 테두리를 약간 벗어나는 정도를 의미할 것이다. 물론 엄격히 따지면 잘못된 행위이지만 누군가에게 불쾌할 정도로 큰 해를 끼치지 않기에 들통난다면 서로 겸연쩍게 웃고 넘어갈 정도의 벗어남.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약간의 벗어남을 융통성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어떤 경우 이 정도의 융통성은 그 개인의 대범함이나 삶의 여유를 보여주는 표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소한 일이기에 그저 웃어넘기고 말아야 할까. 저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사소한 부정의 누적은 사회적으로 더 큰 손실을 불러온다.

 

  “우리는 수많은 실험을 하면서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테스트했다. 때로 기회가 닿는 대로 최대한 많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봤다. 예를 들어 매트릭스 실험에서 전체 스무 문제 중 열다섯 문제 이상 정답을 맞혔다고 주장한 사람을 거의 못 봤다. 그러나 스무 문제를 모두 맞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나타났다. 이들은 비용편익분석을 한 다음 자신들이 챙길 수 있는 돈을 최대한 챙기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보지는 않았다. 이런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외적인 사람들이 우리가 이들에게 빼앗긴 돈은 몇백 달러에 불과했다(바람직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한편 우리는 겨우몇 문제만을 부풀리는 사람은 수만 명이나 봤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나머지 우리가 이들에게 빼앗긴 돈을 모두 합하면 수천 달러 규모에 이르렀다. 우리가 이들에게 빼앗긴 돈은 적극정인 부정행위자들에게 빼앗긴 돈보다 훨씬 더 많았다.”(299~300)

 

그렇다면 이런 사소한 부정행위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저자가 밝히는 사소한 부정행위의 메커니즘을 다음 세 가지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남들도 다 하는데 뭐.’ 먼저 약간의 자의적 기준 완화가 이루어지고(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러한 행위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면 반복적으로 행해지며(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남들도 나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면 자기합리화가 완성되는 것이다(남들도 다 하는데 뭐). 어찌 보면 대단히 상식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말에 뜨끔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암시하는 대안도 대단히 사소하다. 부정행위가 저지러질 가능성이 높은 곳에 윤리적 각성을 불러일으킬만한 사소한 장치만 추가해도 부정행위의 정도가 대폭 감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인자판기 앞에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로 사람 눈을 그려 넣음으로써, 설문 내용이 진실이라는 서약을 설문 후에 하는 게 아니라 설문 전에 하게 함으로써, 테스트 전에 십계명과 같이 윤리적 기준이 되는 내용을 암송하게 함으로써 부정행위를 줄일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부정행위의 사회적 전염을 막기 위해 정치인, 공무원, 사회 저명인사, 기업 경영자 등과 같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의 부정행위에 대한 엄격한 처벌도 필요하다.

 

여기까지 저자의 논의를 따라오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 사회로 눈을 돌리게 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유명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더 관대한 처벌을 받는 것이 점점 당연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소한 부정행위에 대해 엄한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 얼마나 허탈한 일로 여겨질 것인가. 오히려 사회적 지위나 재산을 갖지 못해서 당하는 억울한 감정만을 증폭시키게 될 뿐이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묻지마 범죄역시도 이런 억울함이 차곡차곡 누적되어 폭발한 결과가 아닐는지.

 

결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우리가 지켜야할 윤리적 기준을 다시 한 번 확립하고 계속해서 재확인하는 것이다. 윤리적 기준의 모호함 속에서 융통성이라는 이름의 자의적 일탈이 횡행하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끊임없는 반성과 성찰을 통해 우리들이 세운 원칙과 규칙들을 지켜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일 것이다. ‘원칙주의자란 말이 비아냥보다는 존경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사회, 이것이 바로 <부정직함에 대한 정직한 진실>을 마주한 이들이 만들어 갈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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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이 책 읽기 좋은 시간이 돌아왔다.

 

 

1. <화풀이 본능>

최근 "묻지마 범죄"와 같은 범죄현상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자연스레 불심검문제도의 부활이나 사형제의 실시와 같은 강경한 대처를 주장하는 입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엄벌주의가 범죄자에 대한 심리적 만족감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범죄 자체를 예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범죄란 대개 충동적으로 일어나거나 계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충동적인 경우 처벌에 대해 고려할 새 없이 발생할 것이며, 계획적인 경우 처벌을 회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특정 시기에 각종 범죄가 더욱 증가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범죄를 사회의 병리적 징후로 이해하고 이런 징후를 야기하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묻지마 범죄"에 대한 시의적절한 책이라 생각된다. 책임전가와 화풀이라는 인간에게 흔히 나타나는 행위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그간 진화론과 관련된 책들에서 동물의 공격성 일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종종 보았지만 화풀이라는 구체적 형태를 다룬 것은 보지 못했는데 이 책을 통해 두 설명방식을 비교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2. <우리와 그들, 갈등과 협력에 관하여>

물론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범죄들은 사적인 화풀이 형식으로 발생하는 것이지만, 이런 화풀이가 집단적 형태로 발전하게 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특히 대선이라는 큰 정치일정을 앞두고 대립하고 있는 각 정치집단간의 갈등이 점점 고조되고 있는 지금, 그래서 누군가 지적한 '증오의 정치'가 더욱 심화될 수 있기에 집단 갈등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 책은 그 유명한 오클라호마의 로버스 케이브 주립공원에서 진행된 집단 간 관계 실험에 대한 보고서이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데이비드 베레비 지음, 에코리브르)이라는 책에서 간단하게 접한 적 있는데, 이 책을 통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읽어보고 싶다.

 

 

 

3. <고전으로 읽는 폭력의 기원>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제노사이드로 물든 폭력의 역사다." 우리는 살인이나 전쟁과 같은 폭력적 행위의 부도덕성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문명화된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지금 이 순간도 세계 어딘가에선 전쟁과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 최근 시리아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책소개의 첫구절이 과거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을 상기시켜준다. 특히 이 책은 "개인 간의 사적인 폭력이 아니라 집단 간의 폭력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요즘 독도 문제를 중심으로 점차 고조되고 있는 반일감정이나 경제 위기의 심화로 인해 이주노동자에 대한 반감의 증가는 언제든 집단적 갈등의 형태로 표출될 수 있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4. <누가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가>

범죄, 폭력, 전쟁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한 성찰로 이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 책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훌륭한 안내서이다. "현대 사회의 주요한 특징(모더니티)을 이루는 근대화와 세계화의 영역에서 우리의 일상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사람과 도시, 시대의 형태를 이끌어온 기업을 관찰한 결과"를 읽어보면서,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조작되는지 살펴보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5.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이해했다면 다음 질문은 당연히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한 철학자의 조언이 담긴 책이다. 책소개에서처럼 이를 단지 한 개인의 문제로 한정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들 자신이 각자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사실은 함께 해결하지 않으면 완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처럼 공동의 문제라는 걸 인식하고 함께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들이 처한 이 불안한 유동하는 근대라는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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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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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미국 드라마 <뉴스룸>의 오프닝 시퀀스는 매우 인상적이다. (혹시 못보신 분들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http://youtu.be/zqYnSuLLIkE) 한 대학의 토론회에 참여한 민주당, 공화당, 그리고 주인공인 뉴스앵커에게 한 여대생이 질문을 던진다. “왜 미국이 가장 위대한 국가라고 생각하시나요?” 민주당측 인사는 다양성과 기회라고 답하고, 공화당측 인사는 자유 그리고 자유라고 답한다. 자신이 진행하는 방송의 인기를 위해 중립인 척 빠져나가려던 주인공은 진솔한 답변을 요구하는 사회자의 계속된 추궁에 결국 본심을 털어놓는다. 암울한 통계치들을 나열하며 미국은 결코 위대한 국가가 아님을 실토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잘 하는 건 딱 세 가지밖에 없어. 인구당 감옥에 가는 비율, 천사가 진짜라고 믿는 성인 비율, 그리고 국가방위비.”

 

가끔 저 장면의 배경을 우리나라로 옮겨 놓으면 주인공의 대사에 무엇이 들어가게 될까 생각해본다. 교통사고율? 자살률? 연간 노동시간? 얼마 전 여기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바로 저임금 비정규직 비율이 세계최고라는 소식. 기사는 IMF 이후 노동시장 양극화가 꾸준히 진행됨으로써 임금 불평등이 점차 심화되고 있으며, 그 원인은 비정규직의 증가, -중소기업간 임금 격차 확대, 대기업 일자리의 감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양질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그나마 남은 일자리들도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이다. 언제부턴가 하우스 푸어, 워킹 푸어와 같은 신빈곤층에 대한 얘기가 언론에 자연스럽게 오르내린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 때문인지 아니면 올해 치러질 대선을 의식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이러저러한 복지 정책에 대한 얘기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그저 올해 4,580원이던 최저임금이 내년에는 4,860원으로 인상되었다는 소식뿐이다. 법정노동시간인 주당 40시간으로 계산하다면 한 달에 80만원도 채 안 되는 금액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 돈으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긴 4인 가족 최저생계비용을 약 144만원(2011년 추정)으로 산정하는 정부입장에서는 부모 2인이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면 매달 20만원은 저축할 수 있다고 큰소리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인이라면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잘 알고 있다.

 

2.

저자인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이런 터무니없는 인식을 폭로하기 위해 실험을 실행한다. 과연 비숙련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만으로 실제 생활이 가능할까?”(11) 실험 결과는 참담한 실패의 연속이다. 웨이트리스, 청소부, 요양원 보조, 대형마트 매장 판매원 등으로 지역과 직군을 바꿔가며 실험을 하지만, 시작하기 전 자신이 세웠던 규칙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으며 어떤 곳에서는 계획했던 기간(한 달)을 채우지도 못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실패하게 된 과정과 그를 통해 깨달은 내용을 솔직하게 기록해 나간다.

 

저자가 이 실험과 실패를 통해 깨닫게 된 내용의 핵심은 각 장의 제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시간당 7~8달러정도에 불과한 임금으로는 집세를 지불하기 어렵다. 가난한 이들은 목돈이 없으므로 보증금을 내고 입주해야만 하는 집은 구할 수 없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싼 월세를 내고 보증금이 없는 집을 찾을 수밖에 없다. 번 돈의 절반 이상을 집세로 내야하고 그러다보니 음식과 의복과 같은 다른 필수품을 줄일 수밖에 없게 되고 자연히 일상생활은 피폐해지게 된다.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1장 가난하기에 돈이 더 든다)

 

직장에서 다른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만 증가할 뿐이다. 우리가 하는 일 자체가 왕따의 일로 눈에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역겹기까지 했다. 경비원, 청소부, 단순노동자, 성인의 기저귀를 갈아 주는 사람들. 이들은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는 민주 사회의 불가촉천민들이었다.”(163) 한 가정이 그리고 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노동들이지만, 정작 그 노동을 하는 당사자들은 최악의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는 것이다. (2장 모두가 우리를 무시한다)

 

이처럼 적은 월급에 온갖 무시를 당하면서도 왜 그들은 그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가? 당신은, 우리는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가? 왜 떠나지 않는가?”(242) 대답은 뻔하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벗어나봐야 지금과 비슷하거나 더 안 좋은 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을 테고, 새 직장을 구하는 동안의 집세와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참고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다. 혹시 아는가, 관리자의 눈에 잘 보여 조금이라도 임금이 오르게 될지. 그렇게 점점 길들여지게 된다. (3동료라는 이름의 노예)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자본주의 민주 국가에 속한 자유로운 노동자인 저임금 노동자들이 늘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전혀 자유롭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임금, 그리고 중간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대다수는 직장에 들어설 때 시민으로서 누리는 자유권을 모두 다 문 밖에 두고 와야 한다.”(283) 더 나아가 책 말미에 추가된 10년 후의 후기에서 저자는 상황이 오히려 나빠지고 있다고 덧붙인다.

 

3.

이제 이것이 단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전체 노동인구의 절반을 넘어섰고, 저임금 비정규직 비율이 세계 최고라는 우리나라도 저자가 묘사하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나쁠 수도 있다. 이 책과 비슷한 기획의도로 출간된 <4천원 인생>(안수찬/전종휘/임인택/임지선 지음, 한겨레출판, 2010)이나 <한국의 워킹푸어>(프레시안 특별취재팀 지음, 책보세, 2010)에 실려 있는 생생한 진술들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가 과연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물론 기획의도 자체가 현장보고에 중심을 두고 있기에 이 책에서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저자가 경험을 통해 얻게 된 몇 가지 통찰은 이 문제를 풀어나갈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수 있는 적정한 임금을 지급하도록 법정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 현재의 최저임금은 물가수준과 비교했을 때 터무니없이 낮다. 또한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주거의 안정을 위해 공공임대주택 건설이나 주택 보조금과 같은 빈곤층을 고려한 주택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집을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집이 없는 자들을 위한 정책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자율권을 보장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 이것이 오히려 작업의 효율성도 높이면서 박탈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노동에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자율적으로 일하게 내버려두면 노동자들은 나름의 협력 체계와 작업 분배 체계를 고안해 위기 상황이 닥칠 때 훌륭하게 대처할 줄 안다. 솔직히 말해서 복종을 요구하는 것 외에 관리자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285)

 

저자가 강조하듯이, 자기의 시간을 1시간당 얼마라고 판다는 것은, 처음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겠지만 사실은 인생을 파는 것이다.”(252) 누군가를 고용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인생을 구입하는 일이라는 엄중한 인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글 서두에 언급한 <뉴스룸> 오프닝 장면에서 주인공은 긴 설교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첫 번째 방법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거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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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9-0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느끼는거지만 명료하게 그리고 이지적으로 참 잘쓰시는듯. 뒷북이지만 잘읽고 갑니다.

nunc 2012-09-11 02:58   좋아요 0 | URL
항상 좋게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참, 지난달 좋은 리뷰 선정도 축하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