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를 타는 옥찌는 아름답다. 자아도취에 이어서 조카도취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정말 아름답다. 너무 높거나 낮지 않은 높이에서 앉았다 섰다를 촐싹 맞지 않게 오간다. 무릎을 굽혔다 폈다하기에 정성을 들이고, 가끔 나를 보며 한번씩 웃는다. 그네는 원래 그 아이 몸에 딱 맞는 옷 같다. 게다가 옆에서 참견한다며 신발을 벗어라, 좀 더 높이 올라가라, 내가 신발을 맡겠다 하며 뛰어다니다 엎어지는 방자 같은 동생이 있으니 우아함이야말로 더 돋보일 수 밖에.

 이제 아이들은 그네 바닥에 배를 깔고 발로 구르며 그네를 탄다. 까르르거리며 웃는 소리가 오후의 놀이터에 퍼진다. 오랜만에 즐겁다.

 벤치에 누워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를 보다가 자기 객관화와 자존감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 에 골똘한건 아니고 그냥 좀 졸려서 뒤척이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왜 모래를 뿌리느냐로 시작한 악 소리는 아이가 갖고 있는 모래삽을 들어다 아이를 때리고 모래를 던지는 연속 동작으로 이어졌다. 여자는 아주 성이 나 있다. 금세라도 아이를 분지르고 아이 자체를 지워버릴 것처럼 화가 나 있다. 조마조마했다. 더 폭력적인 상황이 되면 어쩌지. 아직은 여자가 지켜보는 사람들 눈을 의식해 좀 자중하길 바라며 그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여자의 아들일까, 아니면 자기 아이에게 모래를 던진 남의 아이를 저렇게 몰아세우는걸까. 남의 아이라면 내가 나서도 되고, 자기 아이면 나서기 그렇겠단 생각이 들었고, 그래도 저건 좀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옆에 할머니들은 왜 수군거리면서 나서지 않나 싶어 서운했다. 생각만 하는데도 머리에서 쥐가 날 것 같았다.

 여자가 인상을 쓰며 다시 아이에게 모래를 던지고 발로 아이를 찼다. 다가가서 아이의 모래를 털어줬다. 여자에게 뭐라고 할까하다 내가 과연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는 둘째치고 자격이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니라 폭력인데 자꾸 내가 관여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여자가 다시 아이에게 다가와선 화난 목소리로 왜 그랬냐고 자꾸 물으며 아이의 모래를 털어줄 때까지 아이의 모래를 털어줬다. 거친 손매무새로 아이의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준 여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벌어진 일의 성격과 달리 자격 얘기가 나온건 다른 사람 앞에서 안 했다 뿐이지 나도 숱하게 저지른 일이었다는 의미에서였다.

 어제는 자책감과 미안함에 전전긍긍했다. 방학이라고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진 옥찌들이 싸울 때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르고 화를 주체하지 못해 아이들을 때렸다. 때리고 상처를 주는 말을 했으며 그래놓고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해낼 수 있는 아주 심한 말을 해버렸다.

 차라리 아이들이랑 떨어져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공감해야하는지 알면 뭐하나.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걸. 아이들이 투정을 부리고, 우는걸 상대할 때마다 이런 감정노동은 하기 싫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네가 그래서 슬펐구나, 그래서 정말 즐거웠구나, 그래서 맘이 상했구나란 말 대신 '왜'라고 묻는다. 너는 대체 왜 그러니? 마치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의문이라는 듯 왜라고 묻는다.

 어제의 자책에서 벗어나고 싶어 오늘은 잘하려고 애썼다. 물론 맘처럼 쉽진 않았지만, 옥찌들은 내가 여지를 두는 만큼 덜 싸웠고, 재잘거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미안할 정도로 즐거웠다. 놀이터에 다녀온 뒤, 몸이 끈적거리다며 지민이가 짜증을 냈다. 지민이가 짜증을 내면 이모도 짜증나고, 속상하단 말을 했다. 어느 순간 아이가 자신을 끌어올려 짜증에서 벗어나려고 하는게 보였다. 활달한 목소리로 내게 뭔가를 물어보는데 그제서야 알았다. 나만 감정 노동을 한다고 생각했고, 나만 다 희생하는 것처럼 느꼈던 맘이 문제란걸. 분명히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맘 속 깊숙이에선 정말 그렇게 믿었다. 이 생각은 언제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라질까. 6살 아이에게 이모한테 맞추라는 미숙함에선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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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es24.com/chyes/ChyesColumnView.aspx?title=005009&cont=1581

 듀게에 갔다가 이 분이 예스에서 칼럼을 쓴다는걸 알았다.

 엄정화를 다른 누구보다 참 좋아하는데 9집을 들으며 그 맘이 좀 더 깊고 단단해졌다. 바람의 노래는 글쓴 분 말처럼 중독성이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같은 춤은 어떻게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어어'스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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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랑 새로 생긴 국수집에 가서 국수를 먹고 누룽지 짬뽕에 사케를 마시는 중이었다.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얘기가 지루할 일도 없었고, 국수의 매운 육수맛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 뭔가 눈길을 화악 잡아끄는게 있었다. 저건 뭐지? 10시 방향에서 어떤 남자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끔 이 동네에도 괜찮은 남자 한둘쯤 지나가긴 한다. 자석으로 잡아끌 듯 쭉 시선을 사로잡는, 인간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켰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꽃남들 말이다. 도서관에도, 술집 거리에도 가끔씩 진을 치다보면 나타나는 예쁜 사람들. 예쁜걸 좋아하는건 미디어의 비현실적인 수준과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미의 기준으로 삶의 고단함을 더 가중시키려는 수작이란걸 모르는건 아니다. (웃기는군) 그렇지만, 그렇지만 탐미주의자가 아님에도 예쁜 여자 남자를 보고 눈길이 가는건 어쩔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은 행동거지 하나하나 거울을 보면서 예뻐보이는 연습을 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아하다. 얼굴만 예쁘장하다고 꽃남일 수는 없는거다. 그날 봤던 남자가 딱 그랬다. 매끄러운 얼굴과 단발보다 조금 긴 머리를 가끔씩 쓸어내리는 길고 곧은 손, 흰 티셔츠 하나로 완성된 듯 보이지만 세심하게 신경썼을 법한 패션까지. 꽃남은 꽃보다 아름다웠다. 그 밤에 남자를 볼 수 있는 각도에 앉을 수 있었던건 정녕 행운이었다.

 행운은 그 속성상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 밤의 기억은 차츰이랄 것도 없이 옅어졌다. 그런데 오늘 작가 레지던스 오프닝 행사를 보러 갔다가 이 남자를 다시 만난거다. 

 낮에 봐도 당신은 어쩜 그렇게 예쁜가요.

 남자가 웃는다. 치열이 고르다. 남자가 옆 사람에게 말을 건다. 목소리가 차분하고 다정다감하다. 온통 그 남자에 정신이 팔려서 정작 캐비넷 전시는 뒷전으로 미루고 이 사람이 어디에 있나 두리번 두리번. 그러면서도 이렇게 값싸게 찾다간 값어치 없는 관심으로 전락할거란 나름 같잖은 생각도 하느라 그와 눈이 마주칠 때면 괜히 시큰둥 해보이고. 뭐 암튼 그랬다. 나란 여자 없어보이는 여자.

 행사 한참 무렵에 목욕탕 신발장으로 쓰이던 캐비넷으로 같은 물건 들어있는 번호 맞추기 게임을 했다. 30개나 되는 번호에다 기억력 가물가물한 한낮에 사람들 모아놓고 할만한 게임은 아니었지만 모두들 한정판 부채를 타기 위해 열심이었다. 나도 적극적으로 번호를 불러대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번호를 알려주는거다. 노름판에 타짜가 신입에게 기술을 전수하듯 소근거리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을까. 꽃남은 자기가 물건 넣을 때 있었다며 그 번호가 확실하다는 말을 하며 나를 쳐다봤다.

 선물로 받은 책을 갖고 나오는데 그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자기도 책 받고 싶었는데 자기는 주체측이라 어쩌고 저쩌고. 얼굴에 살짝 주름이 있네, 어디 하나 특별히 예쁘지 않은데 참 예쁜 사람이네, 그리고, 그리고

 만화였다면 그가 다가와 말을 거는 순간 바닥에 누워서 으앙으앙 부앙부앙 게거품 물고, 뭐 이런 그림이라도 가능할텐데 나는 만화 속 밝고 희망찬 소녀가 아니라 아치인지라 가만히 웃는걸로, 가볍게 인사하며 안녕하는걸로 끝맺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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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7-11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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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인사하며 안녕하는걸로 끝맺어야 하다니, 아웅, 살 빠진 Arch는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요! 물론 살 빠지기 전의 Arch도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흐음 그렇지만 나였어도 딱히 어떤 액션을 취할수 없었을 것 같아요. 뭘 대체 어떻게 한담? 연락처 줄까요? 연락처 줄래요? 시간 있으면 커피나 한잔? 아아아아 정말이지 그 어떤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나 역시 가볍게 인사하며 안녕하는걸로 끝맺어야 했을거에요. 나란 여자, 수줍음이 많은 여자. 흑.

새벽이에요, Arch!

Arch 2010-07-11 17:40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가만히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눈치 안 주고 가만히 있어야해요. 이 좁은 동네에서 다시 만날 확률을 기다려보는거죠.

다락방은 새벽에 잠도 안 자고, 응?
 

 도서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편의점이 있다.
 
 편의점의 효율적이고 편리한 시스템과는 별개로 편의점에 자주 가진 않는다. 물건이 비싸기도 하지만 돈만 된다면 뭐든 팔 수 있을 것처럼 빠삭하게 구는 전략과 빈틈없이 관리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CCTV 가동중'-에어컨도 아니고- 이란 우스꽝스러운 푯말, 정말 딱 최저임금으로 고용된 알바생들을 24시간 풀로 부려먹으면서 소비자들에게 '언제나 살 권리'를 주는 방식 때문이다. 뭐, 그래서 편의점이라지만.

 하지만 가끔씩 컵라면에 김밥을 먹고 싶을 때면 편의점에 들르곤 한다. 도서관 근처 편의점 아가씨는 갓 스무살이 됐을까 싶은 어린 알바생이다. 탈색한 머리칼을 부스스하게 늘어뜨리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젊은 사람의 감출 수 없는  생기는 감출 수 없는 법이다.

 그녀는 포스로 계산을 하고, 입고된 아이스크림을 정리하느라 바쁘다. 그 사이 사이 전자렌지에 삼각김밥도 데워주고, '안녕하세요'와 '현금 영수증 필요하세요?'란 말도 빠짐없이 한다.

 스무살 무렵에 나도 알바를 한적이 있다. 레스토랑에서 12시간씩 서서 서빙과 설겆이를 하는 일이었다. 서빙이야 사람 구경하는 재미라도 있지, 설겆이는 같은 자세로 끝없이 밀려드는 그릇을 남김없이 닦아내느라 손과 발을 넘어 등뼈까지 아플 정도로 고되었다. 물론 이 일을 평생하지 않을거란 맘과 나와 성이 비슷한 직원의 과하지 않은 친절이 그 일을 견디게 해줬다. 사장은 처음부터 일하는만큼 댓가를 지불할 생각이 없었다. 사장만은 아니었다. 서비스업에서 남는건 인건비란 얘기가 있을 정도로 여차하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는 일에 돈을 쓸 사람은 별로 없었다. 최저 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월급을 받고서 그날로 레스토랑을 그만뒀다.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돈에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처지라는게 싫었고, 내겐 더 많은 가능성이 있을거란 착각을 했었다.

 그녀의 꿈은 뭘까. 알바비를 받아서 뭘 하고 싶은 걸까. 일 하는건 할만 할까.

 서툴지만 큰 실수 없이 그녀가 일을 하고 있다. 라면을 다 먹고 양동이에 국물을 버리다 문득, 아침에 약국에 들렸다 받은 비타민 생각이 났다. 카운터 쪽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내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두번째 인사다. 포스에 있는 홈에 비타민을 놓고, '수고하세요'라고 말하고선 편의점을 나왔다. 그녀는 비타민과 나를 번갈아 보면서 토끼처럼 땡그랗게 눈을 떴다. 그러고보니 참 예쁘장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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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7-0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대학시절 내내 편의점 알바를 했었어요. 마지막에 Arch님은 그녀의 꿈은 뭘까, 라고 쓰셨는데, 그 때 제 꿈은 편의점을 하나 차리는거였어요. 왜냐하면 대학시절 내내 알바를 했기 때문에 편의점 일을 다 제 손 안에 있었거든요. 발주부터 매장관리 그리고 단골까지 다 제가 관리할 수 있었죠. 전 딱히 할 줄 아는 일도 없었고, 전공도 적성에 맞질 않아서(공부를 못해서..) 편의점이 저한테 딱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물론 편의점을 차릴 돈도 없었으면서 말이죠.

그러고보니 참 예쁘장한 얼굴이다, 라고 쓰시니까 또 생각나는게,

저 편의점에서 일할 때 늘 같은시간에 오던 손님이 있었어요. 남자어른이었는데 단골이구나, 뭘 마시는구나, 하는걸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거의 매일 같은시간에 오던 그런 손님이요. 하루는 학생이냐 묻고, 그 다음엔 머리를 푸는게 더 예쁘다는 시덥잖은 농담을 하더니, 그 다음에는 영화표를 줬어요. 그래서 저는 그 티켓으로 영화를 봤죠, 친구와 함께. 그리고 나중에 그 사람이 편의점에 왔길래 잘 봤다고 인사를 했더니, 아니 왜 자기 쉬는날 오냐며 자기가 그 극장에서 일을 한다는 거에요. 그러더니 표를 두장 또 주더군요. 주면서 이번에는 자기를 보고 가래요. 그래서 알았다고 했는데 저는 또 영화만 보고 왔어요. 그랬더니 다음에 표를 또 줬어요. 그래서 또 봤는데 이제는 안되겠다 싶어 잘봤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러 갔더니, 자기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퇴근시간인데 기다려 줄 수 있냐고, 같이 저녁을 먹고 싶다더군요. 하하하하 전 싫다고 하고 왔는데 그 다음에는 놀이공원 절반할인티켓을 줬어요. 전 식구들 다 끌고 놀이공원 다녀왔어요. 하하하하.

엄마한테 이 얘길 다 했더니 저 못됐다고 그러셨어요. 그 남자 만나기 싫으면 앞으로 표를 받지 말라고도 하셨어요. 그런데 그때 저는 이십대 초반이었고, 솔직히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러나 놀이공원 표를 주고 나서 그는 더이상 제가 어떤 티켓도 주지 않았고 음, 편의점에도 오질 않았어요.

Arch 2010-07-09 15:30   좋아요 0 | URL
제가 아직 정복하지 못한 분야가 편의점계예요. 다락방님이 편의점 사장이라면 갈 곳 없는 여자 남자들을 편의점에서 짝지어줄 것 같아요. 아니면,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를 해달라고 사람들에게 부탁할 것 같기도 하고. 딸기우유나 초코우유, 아메리까노 주면서! (나란 여자 맞춤법 일부러 틀리는 여자 <--이거 재미있어요. 나란 여자!) 꼭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나오는 작가의 아버지처럼 말이죠.(조르바의 아버지였나?)

그 남자의 한계는 딱 놀이공원 반값할인 티켓까지였나봐요. 갑자기 하이킥에서 사은품 나눠주던 남자도 생각나고. 다락방은 왜 이렇게 남자들한테 인기 많았나 싶기도 하고. 전 다종다양한 서비스업계에서 종사했지만 티켓은 구경도 못했는데.

왜 이건 '나는 예쁘다'에 안 썼어요? 왜죠? ^^

다락방 2010-07-09 16:40   좋아요 0 | URL
편의점 이야기는 반전이 없었으니까. 놀이공원 티켓까지가 한계였으니까요. 그리고 사실 그 페이퍼 쓸 때 이 남자는 생각도 안났어요. 지금 Arch님 페이퍼 읽다가 불현듯 생각난거죠.

인기는 없었어요. (편의점에서 4년 일했는데 저런 남자는 한명이었어요. ㅎㅎ)

나란 여자, 이성한테는 통 어필을 못하는 여자 orz

마그 2010-07-09 21:29   좋아요 0 | URL
뜬금없이..끼어들기.... ^^;;;;
다락방님 진짜 미인이신가봐요. _ _ ; 남자가 그런걸 주시는걸 보니!

다락방 2010-07-09 23:23   좋아요 0 | URL
아, 마그님.
4년 일했는데 딱 한번 이었다니깐요. orz

Arch 2010-07-10 10:09   좋아요 0 | URL
나란 여자, 살면서 한번도 공짜 티켓 받아본적 없는 여자.

미인인거 맞아요^^ 마그님이 잘 보신거에요.

비로그인 2010-07-0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그저 젊음은 아무리 감추어도 좋고, 챙겨주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리 갑작스러워도 좋을 것 같아요.

Arch 2010-07-09 16:24   좋아요 0 | URL
그렇죠? 아, 쥬드님은 확실히 뭔가 알고 있어요. 그쵸?

비로그인 2010-07-10 00:55   좋아요 0 | URL
그럴 땐 그저 아무 말 없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아요. 말은 필요 없어요. 아치님, 그랬죠?

Arch 2010-07-10 10:09   좋아요 0 | URL
히~

무스탕 2010-07-1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로맨스 소설 보는거 같아요. 아치님이 남자였으면 뭔가 어떻게든 더 진전이 있었을것 같은..
역시 도서관은 그 주변까지도 풍류가 흐르는군요 ^^

Arch 2010-09-11 23:47   좋아요 0 | URL
^^ 저는 소심한 아치라 남자였어도 별게 없었을거에요.
기회가 된다면 도서관 주변에 흐르는 풍류 코스라도 만들어봐야겠어요. 히히(맨날 말만)
 


 
 같은 책인데 서지 번호가 달랐다. 관외 대출중이던 도서가 제자리로 돌아와 확인해보니 음식과 의학 쪽에 따로 꽂혀있었다. 같은 뱃속에서 나온 쌍둥이를 태어난 시간이 다르다고 언니 동생으로 부르는 것만큼(서양에서는 먼저 낳는 아이를 동생이라고 한다. 늦게 수정됐다는게 이유다.) 생뚱맞았다.

 데스크에 있는 남자 직원에게 서지 번호가 다르단 말을 해줬다. 여자 직원에게 말해도 될 것을 굳이 남자에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자 직원이 성실하고 전문적이지만 무뚝뚝한 반면에 남자 직원은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왠지 상냥한 남자가 이 책의 서지 번호를 바꿨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당장 해결해야할 불편 사항이 아니고서야 선뜻 도와줄지도 알 수 없었다. 꺼려할 인상을 갖을 것 같은 건 남자 쪽보다는 여자 쪽이 더 할 것 같은 이유도 있었다. 나란 여자 그런 여자

 - 저기, 같은 책인데 서지번호가 달라요.

 가까이서보니 멀리서 보던 인상이 지워지고, 좀 흐릿하고 평범한 특징만 남는다. 뭐랄까, 이목구비며 성품이 무난해 보인달까. 남자는 뻥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약간 무안했다. 유난스럽단 생각이 들었고, 괜한 짓을 했구나 싶기도 했다. 그냥 내가 의학과 음식 쪽에서 책을 찾거나 혹은 두 권을 환경 쪽에 꽂아놓으면 될 것을. 

 남자가 도서관 규정상 그런건 용납할 수 없다던가, 자신이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던가, 이게 도서관이 책을 분류하는 방식이라고 단호하게 말할까봐 약간 쫄았다. 쫄았기 때문에 서지 번호와 도서관 책 분류, 사서와 도서관 이용자의 입장차에 대한 실없는 소리를 꺼내는 대신 황급히 자리로 돌아왔다.

 책을 더 읽으려다 괜히 겸연쩍어 나갈 준비를 했다. 책을 대출하려고 도서 대출대에 서 있는데 남자가 다가왔다.

- 아까 무슨 말 한거에요?
- 같은 책인데 서지번호가 다르다구요.

 그래서 어쩌라고 되물으면 어쩌지, 이 남자 인상과는 다른 성격인걸까?

- 출판년도가 달라서 그래요.

호의적이다. 한번 더 들이대봤다.

- 같은 책인데 사람들이 찾을 때 불편하지 않을까요.

남자가 ‘알겠습니다’라며 씽긋 웃는다. 남자의 인상을 바꿔놓을 정도로 아주 선하고 질감이 풍부한 웃음이었다. 얼굴에 손을 갖다 대면 뭉쳐진 웃음 반죽이 묻고 말 것 같은 웃음. 나도 같이 웃으며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나 왠지, 도서관에 갈 때마다 짧은 치마를 입고, 은은한 화장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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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7-09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여자야.
나 어쩐지 백수 되고 싶잖아요! 백수 되서 도서관좀 다녀야 할 것 같잖아요.
난 Arch님이 도서관에서 일어난 일 페이퍼 쓸 때마다 대체 사무실에서 내가 뭘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어요. 흑 ㅠㅠ

Arch 2010-07-09 14:08   좋아요 0 | URL
아, 이 다락방님아!(소심해서 다락방이라고 막 못부른다)
그럼 다락방은 사무실에서 누구 대리랑 누구 과장이랑 있었던 일 쓰면 되지. 나 회사 다닐 때도 막 J씨며 깐죽씨 얘기 쓴 것처럼. 그땐, 회사 다니는거 부러웠죠? ^^

무스탕 2010-07-0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도서관에 그런 풍류가 흐른단 말이에요 +_+

Arch 2010-07-09 14:09   좋아요 0 | URL
얼쑤 우리 가락 한마당도 나와요 ^^ 오늘 그 남자, 향수 뿌렸어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