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랑 새로 생긴 국수집에 가서 국수를 먹고 누룽지 짬뽕에 사케를 마시는 중이었다.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얘기가 지루할 일도 없었고, 국수의 매운 육수맛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 뭔가 눈길을 화악 잡아끄는게 있었다. 저건 뭐지? 10시 방향에서 어떤 남자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끔 이 동네에도 괜찮은 남자 한둘쯤 지나가긴 한다. 자석으로 잡아끌 듯 쭉 시선을 사로잡는, 인간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켰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꽃남들 말이다. 도서관에도, 술집 거리에도 가끔씩 진을 치다보면 나타나는 예쁜 사람들. 예쁜걸 좋아하는건 미디어의 비현실적인 수준과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미의 기준으로 삶의 고단함을 더 가중시키려는 수작이란걸 모르는건 아니다. (웃기는군) 그렇지만, 그렇지만 탐미주의자가 아님에도 예쁜 여자 남자를 보고 눈길이 가는건 어쩔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은 행동거지 하나하나 거울을 보면서 예뻐보이는 연습을 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아하다. 얼굴만 예쁘장하다고 꽃남일 수는 없는거다. 그날 봤던 남자가 딱 그랬다. 매끄러운 얼굴과 단발보다 조금 긴 머리를 가끔씩 쓸어내리는 길고 곧은 손, 흰 티셔츠 하나로 완성된 듯 보이지만 세심하게 신경썼을 법한 패션까지. 꽃남은 꽃보다 아름다웠다. 그 밤에 남자를 볼 수 있는 각도에 앉을 수 있었던건 정녕 행운이었다.

 행운은 그 속성상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 밤의 기억은 차츰이랄 것도 없이 옅어졌다. 그런데 오늘 작가 레지던스 오프닝 행사를 보러 갔다가 이 남자를 다시 만난거다. 

 낮에 봐도 당신은 어쩜 그렇게 예쁜가요.

 남자가 웃는다. 치열이 고르다. 남자가 옆 사람에게 말을 건다. 목소리가 차분하고 다정다감하다. 온통 그 남자에 정신이 팔려서 정작 캐비넷 전시는 뒷전으로 미루고 이 사람이 어디에 있나 두리번 두리번. 그러면서도 이렇게 값싸게 찾다간 값어치 없는 관심으로 전락할거란 나름 같잖은 생각도 하느라 그와 눈이 마주칠 때면 괜히 시큰둥 해보이고. 뭐 암튼 그랬다. 나란 여자 없어보이는 여자.

 행사 한참 무렵에 목욕탕 신발장으로 쓰이던 캐비넷으로 같은 물건 들어있는 번호 맞추기 게임을 했다. 30개나 되는 번호에다 기억력 가물가물한 한낮에 사람들 모아놓고 할만한 게임은 아니었지만 모두들 한정판 부채를 타기 위해 열심이었다. 나도 적극적으로 번호를 불러대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번호를 알려주는거다. 노름판에 타짜가 신입에게 기술을 전수하듯 소근거리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을까. 꽃남은 자기가 물건 넣을 때 있었다며 그 번호가 확실하다는 말을 하며 나를 쳐다봤다.

 선물로 받은 책을 갖고 나오는데 그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자기도 책 받고 싶었는데 자기는 주체측이라 어쩌고 저쩌고. 얼굴에 살짝 주름이 있네, 어디 하나 특별히 예쁘지 않은데 참 예쁜 사람이네, 그리고, 그리고

 만화였다면 그가 다가와 말을 거는 순간 바닥에 누워서 으앙으앙 부앙부앙 게거품 물고, 뭐 이런 그림이라도 가능할텐데 나는 만화 속 밝고 희망찬 소녀가 아니라 아치인지라 가만히 웃는걸로, 가볍게 인사하며 안녕하는걸로 끝맺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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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7-11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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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인사하며 안녕하는걸로 끝맺어야 하다니, 아웅, 살 빠진 Arch는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요! 물론 살 빠지기 전의 Arch도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흐음 그렇지만 나였어도 딱히 어떤 액션을 취할수 없었을 것 같아요. 뭘 대체 어떻게 한담? 연락처 줄까요? 연락처 줄래요? 시간 있으면 커피나 한잔? 아아아아 정말이지 그 어떤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나 역시 가볍게 인사하며 안녕하는걸로 끝맺어야 했을거에요. 나란 여자, 수줍음이 많은 여자. 흑.

새벽이에요, Arch!

Arch 2010-07-11 17:40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가만히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눈치 안 주고 가만히 있어야해요. 이 좁은 동네에서 다시 만날 확률을 기다려보는거죠.

다락방은 새벽에 잠도 안 자고,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