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책인데 서지 번호가 달랐다. 관외 대출중이던 도서가 제자리로 돌아와 확인해보니 음식과 의학 쪽에 따로 꽂혀있었다. 같은 뱃속에서 나온 쌍둥이를 태어난 시간이 다르다고 언니 동생으로 부르는 것만큼(서양에서는 먼저 낳는 아이를 동생이라고 한다. 늦게 수정됐다는게 이유다.) 생뚱맞았다.

 데스크에 있는 남자 직원에게 서지 번호가 다르단 말을 해줬다. 여자 직원에게 말해도 될 것을 굳이 남자에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자 직원이 성실하고 전문적이지만 무뚝뚝한 반면에 남자 직원은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왠지 상냥한 남자가 이 책의 서지 번호를 바꿨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당장 해결해야할 불편 사항이 아니고서야 선뜻 도와줄지도 알 수 없었다. 꺼려할 인상을 갖을 것 같은 건 남자 쪽보다는 여자 쪽이 더 할 것 같은 이유도 있었다. 나란 여자 그런 여자

 - 저기, 같은 책인데 서지번호가 달라요.

 가까이서보니 멀리서 보던 인상이 지워지고, 좀 흐릿하고 평범한 특징만 남는다. 뭐랄까, 이목구비며 성품이 무난해 보인달까. 남자는 뻥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약간 무안했다. 유난스럽단 생각이 들었고, 괜한 짓을 했구나 싶기도 했다. 그냥 내가 의학과 음식 쪽에서 책을 찾거나 혹은 두 권을 환경 쪽에 꽂아놓으면 될 것을. 

 남자가 도서관 규정상 그런건 용납할 수 없다던가, 자신이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던가, 이게 도서관이 책을 분류하는 방식이라고 단호하게 말할까봐 약간 쫄았다. 쫄았기 때문에 서지 번호와 도서관 책 분류, 사서와 도서관 이용자의 입장차에 대한 실없는 소리를 꺼내는 대신 황급히 자리로 돌아왔다.

 책을 더 읽으려다 괜히 겸연쩍어 나갈 준비를 했다. 책을 대출하려고 도서 대출대에 서 있는데 남자가 다가왔다.

- 아까 무슨 말 한거에요?
- 같은 책인데 서지번호가 다르다구요.

 그래서 어쩌라고 되물으면 어쩌지, 이 남자 인상과는 다른 성격인걸까?

- 출판년도가 달라서 그래요.

호의적이다. 한번 더 들이대봤다.

- 같은 책인데 사람들이 찾을 때 불편하지 않을까요.

남자가 ‘알겠습니다’라며 씽긋 웃는다. 남자의 인상을 바꿔놓을 정도로 아주 선하고 질감이 풍부한 웃음이었다. 얼굴에 손을 갖다 대면 뭉쳐진 웃음 반죽이 묻고 말 것 같은 웃음. 나도 같이 웃으며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나 왠지, 도서관에 갈 때마다 짧은 치마를 입고, 은은한 화장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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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7-09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여자야.
나 어쩐지 백수 되고 싶잖아요! 백수 되서 도서관좀 다녀야 할 것 같잖아요.
난 Arch님이 도서관에서 일어난 일 페이퍼 쓸 때마다 대체 사무실에서 내가 뭘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어요. 흑 ㅠㅠ

Arch 2010-07-09 14:08   좋아요 0 | URL
아, 이 다락방님아!(소심해서 다락방이라고 막 못부른다)
그럼 다락방은 사무실에서 누구 대리랑 누구 과장이랑 있었던 일 쓰면 되지. 나 회사 다닐 때도 막 J씨며 깐죽씨 얘기 쓴 것처럼. 그땐, 회사 다니는거 부러웠죠? ^^

무스탕 2010-07-0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도서관에 그런 풍류가 흐른단 말이에요 +_+

Arch 2010-07-09 14:09   좋아요 0 | URL
얼쑤 우리 가락 한마당도 나와요 ^^ 오늘 그 남자, 향수 뿌렸어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