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편의점이 있다.
 
 편의점의 효율적이고 편리한 시스템과는 별개로 편의점에 자주 가진 않는다. 물건이 비싸기도 하지만 돈만 된다면 뭐든 팔 수 있을 것처럼 빠삭하게 구는 전략과 빈틈없이 관리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CCTV 가동중'-에어컨도 아니고- 이란 우스꽝스러운 푯말, 정말 딱 최저임금으로 고용된 알바생들을 24시간 풀로 부려먹으면서 소비자들에게 '언제나 살 권리'를 주는 방식 때문이다. 뭐, 그래서 편의점이라지만.

 하지만 가끔씩 컵라면에 김밥을 먹고 싶을 때면 편의점에 들르곤 한다. 도서관 근처 편의점 아가씨는 갓 스무살이 됐을까 싶은 어린 알바생이다. 탈색한 머리칼을 부스스하게 늘어뜨리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젊은 사람의 감출 수 없는  생기는 감출 수 없는 법이다.

 그녀는 포스로 계산을 하고, 입고된 아이스크림을 정리하느라 바쁘다. 그 사이 사이 전자렌지에 삼각김밥도 데워주고, '안녕하세요'와 '현금 영수증 필요하세요?'란 말도 빠짐없이 한다.

 스무살 무렵에 나도 알바를 한적이 있다. 레스토랑에서 12시간씩 서서 서빙과 설겆이를 하는 일이었다. 서빙이야 사람 구경하는 재미라도 있지, 설겆이는 같은 자세로 끝없이 밀려드는 그릇을 남김없이 닦아내느라 손과 발을 넘어 등뼈까지 아플 정도로 고되었다. 물론 이 일을 평생하지 않을거란 맘과 나와 성이 비슷한 직원의 과하지 않은 친절이 그 일을 견디게 해줬다. 사장은 처음부터 일하는만큼 댓가를 지불할 생각이 없었다. 사장만은 아니었다. 서비스업에서 남는건 인건비란 얘기가 있을 정도로 여차하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는 일에 돈을 쓸 사람은 별로 없었다. 최저 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월급을 받고서 그날로 레스토랑을 그만뒀다.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돈에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처지라는게 싫었고, 내겐 더 많은 가능성이 있을거란 착각을 했었다.

 그녀의 꿈은 뭘까. 알바비를 받아서 뭘 하고 싶은 걸까. 일 하는건 할만 할까.

 서툴지만 큰 실수 없이 그녀가 일을 하고 있다. 라면을 다 먹고 양동이에 국물을 버리다 문득, 아침에 약국에 들렸다 받은 비타민 생각이 났다. 카운터 쪽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내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두번째 인사다. 포스에 있는 홈에 비타민을 놓고, '수고하세요'라고 말하고선 편의점을 나왔다. 그녀는 비타민과 나를 번갈아 보면서 토끼처럼 땡그랗게 눈을 떴다. 그러고보니 참 예쁘장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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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7-0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대학시절 내내 편의점 알바를 했었어요. 마지막에 Arch님은 그녀의 꿈은 뭘까, 라고 쓰셨는데, 그 때 제 꿈은 편의점을 하나 차리는거였어요. 왜냐하면 대학시절 내내 알바를 했기 때문에 편의점 일을 다 제 손 안에 있었거든요. 발주부터 매장관리 그리고 단골까지 다 제가 관리할 수 있었죠. 전 딱히 할 줄 아는 일도 없었고, 전공도 적성에 맞질 않아서(공부를 못해서..) 편의점이 저한테 딱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물론 편의점을 차릴 돈도 없었으면서 말이죠.

그러고보니 참 예쁘장한 얼굴이다, 라고 쓰시니까 또 생각나는게,

저 편의점에서 일할 때 늘 같은시간에 오던 손님이 있었어요. 남자어른이었는데 단골이구나, 뭘 마시는구나, 하는걸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거의 매일 같은시간에 오던 그런 손님이요. 하루는 학생이냐 묻고, 그 다음엔 머리를 푸는게 더 예쁘다는 시덥잖은 농담을 하더니, 그 다음에는 영화표를 줬어요. 그래서 저는 그 티켓으로 영화를 봤죠, 친구와 함께. 그리고 나중에 그 사람이 편의점에 왔길래 잘 봤다고 인사를 했더니, 아니 왜 자기 쉬는날 오냐며 자기가 그 극장에서 일을 한다는 거에요. 그러더니 표를 두장 또 주더군요. 주면서 이번에는 자기를 보고 가래요. 그래서 알았다고 했는데 저는 또 영화만 보고 왔어요. 그랬더니 다음에 표를 또 줬어요. 그래서 또 봤는데 이제는 안되겠다 싶어 잘봤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러 갔더니, 자기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퇴근시간인데 기다려 줄 수 있냐고, 같이 저녁을 먹고 싶다더군요. 하하하하 전 싫다고 하고 왔는데 그 다음에는 놀이공원 절반할인티켓을 줬어요. 전 식구들 다 끌고 놀이공원 다녀왔어요. 하하하하.

엄마한테 이 얘길 다 했더니 저 못됐다고 그러셨어요. 그 남자 만나기 싫으면 앞으로 표를 받지 말라고도 하셨어요. 그런데 그때 저는 이십대 초반이었고, 솔직히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러나 놀이공원 표를 주고 나서 그는 더이상 제가 어떤 티켓도 주지 않았고 음, 편의점에도 오질 않았어요.

Arch 2010-07-09 15:30   좋아요 0 | URL
제가 아직 정복하지 못한 분야가 편의점계예요. 다락방님이 편의점 사장이라면 갈 곳 없는 여자 남자들을 편의점에서 짝지어줄 것 같아요. 아니면,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를 해달라고 사람들에게 부탁할 것 같기도 하고. 딸기우유나 초코우유, 아메리까노 주면서! (나란 여자 맞춤법 일부러 틀리는 여자 <--이거 재미있어요. 나란 여자!) 꼭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나오는 작가의 아버지처럼 말이죠.(조르바의 아버지였나?)

그 남자의 한계는 딱 놀이공원 반값할인 티켓까지였나봐요. 갑자기 하이킥에서 사은품 나눠주던 남자도 생각나고. 다락방은 왜 이렇게 남자들한테 인기 많았나 싶기도 하고. 전 다종다양한 서비스업계에서 종사했지만 티켓은 구경도 못했는데.

왜 이건 '나는 예쁘다'에 안 썼어요? 왜죠? ^^

다락방 2010-07-09 16:40   좋아요 0 | URL
편의점 이야기는 반전이 없었으니까. 놀이공원 티켓까지가 한계였으니까요. 그리고 사실 그 페이퍼 쓸 때 이 남자는 생각도 안났어요. 지금 Arch님 페이퍼 읽다가 불현듯 생각난거죠.

인기는 없었어요. (편의점에서 4년 일했는데 저런 남자는 한명이었어요. ㅎㅎ)

나란 여자, 이성한테는 통 어필을 못하는 여자 orz

마그 2010-07-09 21:29   좋아요 0 | URL
뜬금없이..끼어들기.... ^^;;;;
다락방님 진짜 미인이신가봐요. _ _ ; 남자가 그런걸 주시는걸 보니!

다락방 2010-07-09 23:23   좋아요 0 | URL
아, 마그님.
4년 일했는데 딱 한번 이었다니깐요. orz

Arch 2010-07-10 10:09   좋아요 0 | URL
나란 여자, 살면서 한번도 공짜 티켓 받아본적 없는 여자.

미인인거 맞아요^^ 마그님이 잘 보신거에요.

비로그인 2010-07-0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그저 젊음은 아무리 감추어도 좋고, 챙겨주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리 갑작스러워도 좋을 것 같아요.

Arch 2010-07-09 16:24   좋아요 0 | URL
그렇죠? 아, 쥬드님은 확실히 뭔가 알고 있어요. 그쵸?

비로그인 2010-07-10 00:55   좋아요 0 | URL
그럴 땐 그저 아무 말 없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아요. 말은 필요 없어요. 아치님, 그랬죠?

Arch 2010-07-10 10:09   좋아요 0 | URL
히~

무스탕 2010-07-1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로맨스 소설 보는거 같아요. 아치님이 남자였으면 뭔가 어떻게든 더 진전이 있었을것 같은..
역시 도서관은 그 주변까지도 풍류가 흐르는군요 ^^

Arch 2010-09-11 23:47   좋아요 0 | URL
^^ 저는 소심한 아치라 남자였어도 별게 없었을거에요.
기회가 된다면 도서관 주변에 흐르는 풍류 코스라도 만들어봐야겠어요. 히히(맨날 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