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봐. 슈퍼맨은 지겨워. 하는 일마다 다 잘 되잖아. 그러니 재미가 없지. 스토리도 없고. 너무 잘나셨단 말이야... 배트맨은 최고의 인간이야. 결점이 없지만 결점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인간이지. 닌자의 방식을 터득했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이자 탐정 중 하나야. 배트맨은 자기 몸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유지해. 결코 꿰뚫을 수 없는 강인한 정신력도 가지고 있고. 그러니 완벽한 인간상이자 르네상스맨인 셈이지. 돈이 억수로 많고 불타는 복수심을 가진 일반인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그를 더 위대하게 만드는 거라고. … 배트맨에게는 초능력이 필요없어. 그에겐 또다른 자아가 있고, 배트맨 의상이 있지. 그는 몸을 요상스럽게 변형시키지 않고도 이 모든 것을 해낸다고. 단지 굳게 결심만 하면 되지. 그래서 바로 배트맨이 흥미있는 거야. 충분한 헌신과 강렬한 소망만 있다면 누구든 배트맨이 될 수 있어. 한 명의 배트맨이 아닌 배트맨들, 배트맨족이 가능해진다고나 할까. 바로 그 점 때문에 배트맨이 최고인 거라고.-89-94쪽
슈퍼맨은 자기가 절대로 다치치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 그러니 용감해질 필요가 없는 거야. 다치치 않는 걸 알고 총알에 맞서는 게 용감한 거냐? 배트맨은 달라. 배트맨은 보통 사람이거든. 위험에 처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그런 보통 사람 말이야. 슈퍼맨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그를 해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하지만 배트맨은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존재지. 그렇기에 우리와 똑같이 공포심을 가지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배트맨의 용기가 최고라는 거야. 그런 장애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싸우니까. 잃을 것이 많을수록 용기가 더 많이 필요한 법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배트맨이 슈퍼맨보다 우월하고 내가 너보다 무한정 똑똑하단 말씀.-89-94쪽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가슴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 삶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이다. 하나의 비극을 떠나보내고 또 새로운 비극을 맞이하며 평생을 눈물로 보내겠지. 그렇게 살다가는 만신창이가 되겠지. 코리건 사람들도 그게 두려워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눈을 가린 채 모른 척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덜 알수록, 더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어깨 한 번 으쓱하고 혀 한 번 끌끌 차고는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코리건은 따개비 마을이 된 것이다. 딱딱한 껍데기들이 다닥다닥 모여 서로에게 꽉 달라붙은 채로 죽음에 대해서 모르고 사는 편을 택한 것이다. 지금 내 기분으로는 그들을 탓할 수도 없다. -209쪽
장황하도다. 장황하도다. 장황하도다. 부모를 죽이고 아이들을 고아로 만든 후 크리켓 공 날리듯 내던지고는 얄팍한 거짓말이나 해대는 세상. 남들보다 가난하고, 피부색이 어둡고, 또 부모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멀쩡한 사람이 평생 스스로를 쓰레기로 여기도록 만드는 세상. 삼십억이나 되는 사람을 초청해 놓고 전부 외롭게 만드는 세상. 사분의 삼이 물로 이루어졌다면서 아무도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할 수 없는 세상.-210쪽
내 생각엔 말이야. 바로 그 고독한 기분을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인 것 같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고 느끼는 게 싫은 거지. 기도가 그래서 있는 것 같아. 자기 종교가 무엇이든 누구나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어. 지구 바깥으로 줄이라도 던지듯이 말이야. 어딘가에 연결을 해서 우리보다 뭔 좀 더 안다는 존재로부터 위로라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말이지. 그렇게 하면 자기 자신이 더 넓고 알 수 없는 큰 공동체에 소속된 것 같고 든든한 마음도 들 수 있으니까 말이야… 신이나 예수 따위를 믿으면 분명 마음이 편안해질 거야. 빈자리가 다 메워지니까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외풍이 분다고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나 다름 없잖아? 밖은 여전히 추운데 방이 따뜻하기 때문에 추위를 모르는 것과 같다고. -247쪽
신 같은 건 없어, 찰리. 적어도 사람들이 말하는 식의 신은 없어. 우리는 그냥 혼자야. 그렇게 생각하면 외롭기도 하지만 힘이 생기기도 해. 우리는 태어날 때 운을 갖고 태어나기도 하고 그렇게 않기도 하잖아. 제비뽑기 같은 거지.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모두 우리 자신한테 달린 거야. 나 혼자서도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있어. 걷고 말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우리는 각자의 운을 만들어 나가는 거야.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줄 하늘의 영 따위는 필요 없어. 혼자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부분에서 나는 신이 정말 있다고 생각하기도 해. 더 강하고 더 단단한 무언가가 내 안에 있거든. 나는 기도란 그 존재를 믿는 것이라고 생각해. 믿고, 내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야. 바벨탑 따위나 배나 홍수 이야기, 죄에 대한 율법 따위의 헛소리는 필요 없어. 네 안에 있는 그곳에 도달하는 길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야. 정직한 방법도 아니고. 누군가 듣고 있다며 내 자신을 속일 필요도 없고 신경을 쓸 필요도 없지. 그런 건 상관이 없기 때문이야. 상관이 있는 건 나지. 난 괜찮을 거라는 것을 알아.-252쪽
지금 이 기분이 기쁨인가 보다. 이런 행복감을 맛본 것은 정말 오랜 만이다. 이번 경기는 사람들의 기억에 아주 오래 남을 사건이다. 몇 달, 아니 몇 년이 지나도 화제가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흔적을 남길 중요하고도 멋진 사건이다. 사진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사건이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사건이다. 지글거리는 운석들과 우주 파편들과 떠다니는 잔해들과 아름다운 빨간 공이 부딪히면서 우리의 몸 속에 거대한 불꽃을 일으킨 사건이다. 흩어졌던 렌즈의 초점이 하나로 모아지며 그림이 명쾌해지는 순간이다. 우리 안에서 진흙 속의 진주로 남을 사건이다. 언제고 필요할 때면 끄집어내어, 지워버리고 싶은 기분을, 그 얄팍한 껍질을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듯 벗겨버릴 수 있는 그런 힘을 가진 기억이다. 감사의 맛이다. 우리는 제프리 루의 전설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311쪽
미안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내 고통은 물론 상대방의 고통도 같이 느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하는 것은 그 고통을 나누고자 함에 있다. 그렇게 우리를 하나로 묶어 상대방처럼 짓밟히고 물에 흠뻑 젖도록 해주는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다시 채워진 빈 구멍과도 같다. 빌린 돈을 갚는 것과 같다. 미안하다는 말은 잘못한 행동의 결과물이다. 이는 심하게 상처입은 결과가 수면 위로 보낸 잔물결일 수도 있다. 미안하다는 말은 슬픔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때로 자기 연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로 미안하다는 말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상대방을 위한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 자신을 연다는 뜻이다. 껴안건 조롱하건 복수하건 간에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용서를 구하는 말이다. 착한 사람의 메트로놈은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가거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진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앞으로 나아가게는 할 수 있다. 틈을 메워 주는 역할을 한다. 미안한다는 말은 성찬식과 같다. 제물이며 선물이다.-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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