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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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아니겠지만, 옛날 일본인들은 죽음이 가까워지면 대개 여행을 떠났다고 해. 그 중 한 부류는 벚꽃이 필 때 남쪽에서부터 열도를 따라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는 거야. 벚꽃을 따라 벚꽃이 질 때까지 말이야.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해. 또 한 부류는 베옷을 입고 죽음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까지 무작정 걷는 거야. 그날 내가 본 무리는 스님들 같았어. 순간 나는 무엇에 씐 사람처럼 나도 모르게 그들의 뒤를 따라갔지. 아마 반나절 정도는 걸었던 것 같아. 마치 죽음에 입문하듯이 말이야. 그때 난 겨우 스물아홉 살이었어. (대설주의보)-89쪽

늘 그리워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가 있다. (대설주의보)
사람을 만나다 보면 변하지 않는 관계가 있고 또한 변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이를테면 그녀와 나는 둘 다에 해당하는 관계였다. (오대산 하늘 구경)-101, 169쪽

왜 우리는 늘 비석 없는 무덤들처럼 공허한 것일까. 여름 한낮 햇빛에 뜨겁게 타고 있는 빈 마당을 볼 때처럼. 다만 혼자일 뿐인데, 실은 나도 그게 견디기 힘들어.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148쪽

장점이 상대방에게는 단점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아요. 누가 봐도 99점이지만 바로 그 점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나는 80점 정도면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나머지는 유동적으로 비워놓는 거죠. 그 유동성이 실은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부분이잖아요. (오대산 하늘 구경)-172쪽

세상에 아무 뜻도 없는 돈이 있군요. 그런 건 없는 줄 알았는데. (오대산 하늘 구경)-184쪽

이건 순전히 내 느낌이지만, 시는 여자와 같은 것이더군.
한 번 배신당하면 두 번 다시 울어주지 않더군. 시는 또 물질적으로 눈물과 성분이 같거든. 그것이 굳어 고요한 새벽에 푸르른 돌로 변하게 되지. (도비도에서 생긴 일)
-229쪽

……토지 문화관에서 남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귀래라는 마을이 나옵니다.
원주의 가장 남쪽이면서 충청도와 맞닿아 있는 마을이죠. 꽃집에 팔려고 집단 재배를 하는 건지, 그 동네에 가면 달리아밭이 곳곳에 펼쳐져 있습니다. 해뜰 무렵 가보면 일대가 온통 숯불을 피워놓은 듯 장관이죠.
늘 혼자 가서 보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마음의 불이 식어간다고 느껴질 때마다. (여행, 여름)-259쪽

일상성과 진정성의 긴장 속에서 후자 쪽으로 투신하던 인물들이 어느덧 일상성 속으로 완전히 포섭된 삶을 직시하면서 희미한 구원의 순간을 기다리는 쪽으로 변해온 것이 그간 윤대녕 문학의 경로라고 한다면, 이제는 바뀐 세계 속에서 그만큼 바뀐 주체로 서서, 다시 한번 문학만이 넘볼 수 있는 ‘바깥’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결국은 다시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간 그가 이룩해놓은 숱한 상징들이 여전히 휘황하지만, 이제 또다른 구원의 상징을 찾아서, 그는 어쩌면 다시 은어가 되어야만 하겠다. (신형철)-298쪽

만나기로 한 이가 30분 정도 늦는다고 한다. 이 30분은 선물이다. 그 선물을 가장 아름답게 받는 방법 가운데 하나를 알고 있다. 아름다운 단편소설 한 편을 읽는 일. 자기 문장을 갖고 있는 작가의 좋은 단편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시간은 음악처럼 흐르고 풍경은 회화처럼 번져갈 것이다. 다 읽고 나면, 기다린 그 사람이 온다. 윤대녕의 책이면 좋을 것이다. 그의 책은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 하염없이 날아가는 새를 닮았다.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바람이 불고 있어 아프고, 하릴없이 그 바람 맞으며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어 아리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우리 문학 특유의 서정과 애상이 자욱하다. 모국어로만 표현되는 아름다움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좀 감격스러운 일이다. 그런 아름다움에 헌신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평론가가 되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된 데에는 1990년 이래의 윤대녕도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천지간에 상춘곡 가득한 이 시절에 그를 읽는다. 시를 엿보는 소설도 있지만 시를 통과한 소설도 있다는 것을,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만날 수도 완전히 헤어질 수도 없다는 것을 나는 그의 소설에서 배웠다. (신형철)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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