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여행자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예담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존 업다이크의 평가에 백번 동감, 참 좋은 작가의 참 좋은 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연한 여행자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예담 / 2007년 7월
품절


"정신을 차려보니 녀석이 나를 보며 이빨을 드러내고 서 있더군요. 그러자 도기두에서 배운 내용이 생각났어요. ‘어느 한쪽만 대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이었죠. 그래서 개한테 말했어요. ‘어림없지’라고요. 처음 떠오른 말이 그거였거든요. 엄마는 내 잘못을 봐주지 않을 때 그렇게 말하곤 했어요. ‘어림없지’라고 말하면서 부러진 오른팔 대신 왼팔을 뻗었지요. 손바닥을 내밀고 눈을 똑바로 보면서-개들은 눈을 빤히 보면 못 견디거든요-천천히 일어났어요. 개가 당장 궁둥이를 대고 앉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죠." -167쪽

메이컨은 그녀가 가장 좋은 부분을 주고 싶어한다고 느꼈다. 또 그녀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좋은 부분’은 셜리 템플처럼 머리를 한 모습이 아니었다. 가장 좋은 부분은 뮤리엘의 톡 쏘는 맛이었다. 턱을 비스듬히 들고 단호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는 톡 쏘는 맛, 싸움꾼 같은 통렬함이 가장 좋은 부분이었다. -346쪽

뮤리엘은 펼쳐놓은 책과 같았다. 그에게 무슨 말이든 했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가 불편할 정도였다. 그녀는 완벽과는 거리가 먼 자신의 본래 모습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성격이 거칠고 말버릇도 나빴다. 또 자기혐오에 빠지면 몇 시간이고 아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알렉산더에 대한 태도도 미쳤다 싶을 정도로 일관성이 없었다. 한순간 과보호하다가 금방 냉담하게 손을 놓아버렸다. 분명히 영특했지만 메이컨은 그녀만큼 미신을 신봉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지칠 정도로 자세하게 꿈 얘기를 하지 않고 지나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꿈에 나온 일이 앞으로 일어난다고 믿었다…전생에 패션 디자이너였고, 적어도 한 번의 죽음은 기억난다고 장담했다. 그녀는 특정 종교와 상관없이 신앙심이 깊었고, 신이 그녀를 보살펴준다고 믿었다. 작은 것이라도 얻으려면 힘들게 싸워야 하는 형편인데 그렇게 믿다니 메이컨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354쪽

하지만 둘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아이가 슬그머니 메이컨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정말로 분명하고, 정말로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이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났다. 알렉산더의 손을 꼭 잡으니 슬픔 같은 감정이 마음에 스르르 젖어 들었다. 예전에 느꼈던 위험이 다시 그의 삶 속으로 파고 들었다. 핵전쟁과 지구의 미래에 대해 다시 걱정해야 하게 생겼다. 이던이 태어난 후 ‘지금부터 다시는 완전히 행복해지지 못할 거야’라는 은밀하고 죄책감이 드는 생각을 자주 했다. 물론 그 전에도 완전히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388쪽

메이컨은 그녀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싸움꾼을 본 적이 있을까?... 뮤리엘은 놀라지도 않은 눈치였다. 그녀는 여기서는 이웃 사람을 만나고, 저기서는 집 없는 개를 보고, 그 너머에서는 강도를 만나리라 예상하고 길을 활보했던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똑같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메이컨은 그녀에게 경외심을 느꼈고, 쪼그라든 기분이 들었다. 뮤리엘은 콧노래를 흥얼대면서 걸음을 옮겼다. 특별히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노래를 흥얼댔다.-423쪽

그는 흥미가 느껴졌다. 그런 커플이 왜 생기는지 이제야 알았다. 전에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그들이 어처구니없이 무얼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남들이 짐작하지 못할 이유 때문에 하나로 엮였음을 이제 알았다. -53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삶이 내게 왔다
정성일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2월
절판


글을 쓰고 산다는 것은 일종의 '곶감 빼먹는 삶'인 것 같다. 말하자면 자신이 글쓰는 삶을 살지 않은 시절의 경험들을 곶감 빼먹듯 글에다 빼먹는 삶 말이다. 이전의 삶을 소모한다는 느낌 없이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가질 수 있는 '글쓰기 하는 삶'을 살 수는 없을까. 그래서 생각해낸 게 스스로 정한 안식년제다. 내가 정한 안식년은 글을 쓰느라 소모될 대로 된 경험과 사유의 창고들을 채워넣기 위해 '삶의 현장'으로 가서 글 쓴 기간만큼 일하는 것이다. 물론 생활방편으로서의 일이다. 스코트 니어링 부부나, 리 호이나키 같은 사람들은 그래서 내게는 인생의 좋은 지침을 주는 스승들이다.-15쪽

영화의 구체적인 순간 앞에서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시청각적 체험을 기꺼이 삶 속의 세계에 복종시키고서야 비로소 내가 알고 있던 영화의 개념들과 삶의 기호들을 함께 껴안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 영화를 한다는 문제가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와 완전하게 동일한 질문으로 다가왔다. 이제 나에게 영화에서 그 장면을 찍는가, 마는가라는 문제는 그 세상이 거기 있는가, 없는가의 질문이 되었다. -36쪽

번역자는 번역하는 책을 국내에서 맨 먼저, 그리고 가장 정밀하게 읽는 사람이다. 번역자는 때로 저자보다도 더 그 책을 내밀하게 읽는다. 저자가 무심코 쓴 대목까지도 번역자는 일일이 신경을 써가며 우리말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의 내용에 관해서는 저자의 권위가 우선하겠지만 책의 '함량'에 관해서는 번역자의 판단이 한몫한다.-104쪽

무릇 책이라면 둘 중 하나는 되어야 한다. 좋은 책이라는 평을 듣거나 아니면 잘 팔리거나. 거꾸로 말하면 양서도, 베스트셀러도 되지 못하는 책은 출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104쪽

지식을 생산하고 검토하는 작업이 아카데미즘이라면 생산된 지식을 대중에게 보급하는 작업은 저널리즘이다...연구자는 지식을 생산할 뿐 보급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구자가 생산한 지식이 궁극적으로 소비되는 곳은 바로 대중의 영역이며, 소비되는 과정은 대개 트리클다운과 같은 '흘러넘침'의 형태를 취한다...출판사는 예나 지금이나 '대중적 글쓰기가 가능한 연구자' 혹은 '전문적 내용을 다룰 능력을 가진 대중적 필자'를 원한다. 둘 다 책이라는 매체를 통한 소통을 중심으로 한다는 면에서 같다. 발원지는 달라도 목적지가 같은 만큼 양자는 서로 만나야 하고 또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은 소통하고 교호하며, 서로에게 자극을 줄 수 있다. -107쪽

예전과 달리 지금은 정보가 중요해서 출판물을 인쇄하지는 않는다...바꿔 말하면 프레스(인쇄술)를 이용한다는 것은 곧 상업적 목적을 가지는 대량생산이라는 이야기다. 현대의 출판은 모두 상업 출판이다. -108쪽

"선생님께서 단어 하나 고칠 때마다 전 세계의 독자 백만 명이 늘어난다고 생각하십시오." 스티븐 호킹, <시간의 역사> -10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의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7월
구판절판


교사와 학생의 관계라는 건 착각 위에 성립되는 거야. 교사는 무언가를 가르치고 있다고 착각하고 학생은 뭔가를 배우고 있다고 착각하지. 그리고 중요한 건 그렇게 착각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행복하다는 거야. 진실을 알아봤자 좋을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거든. 우리가 하는 일은 말하자면 교육놀이에 지나지 않는 거야-83쪽

적극적으로 남을 비난하는 인간이란 주로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을 통해 희열을 얻으려는 인종이고, 어디 그럴 만한 기회가 없는지, 늘 눈을 번득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는 누가 됐건 상관없는 것이다.-252쪽

그가 특히 끔찍하다고 생각한 것은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이 발하는 음의 에너지였다. 그는 지금껏 이 세상에 그런 악의가 존재한다는 건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피해자 쪽에서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불합리한 폭력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270쪽

학교폭력에는 결코 끝이라는 게 없어요. 당사자가 같은 학교에 있는 한, 언제까지고 이어지는 것입니다. 교사가 '왕따는 없어졌다'라고 말할 때, 그건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과합니다.-338쪽

...작품을 평하는 말 중에 독특한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간을 묘사한다'라는 말입니다. 한 인물이 어떤 인간인지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글을 써서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뜻일 텐데, 그건 단순한 설명문으로는 어렵다고 하더군요. 아주 작은 몸짓이나 몇 마디 말 같은 것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그 인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도록 쓰는 것이라던데요?-34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구판절판


나는 브라우니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본 순간 그 즉시 사로잡혔다. 마치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 개의 이미지로 시야를 좁힐 수 있어 주위 모든 사물을 다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한 여섯 살짜리 꼬마를 가장 만족시킨 건 렌즈 뒤에 몸을 숨긴 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꼬마는 카메라 렌즈를 자기 자신과 세상 사이를 가로막는 벽처럼 사용했다.-12쪽

"제법 위트는 있지만 뛰어난 사진은 아니야. 너무 머리를 쓴 티가 나니까. 내 사진은 지나치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게 드러나. 자기가 찍은 인물사진들과 다른 점이야. 자기 사진들은 우연히 찍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장 한 장 찍을 때마다 철저하게 계산하고 심사숙고한 게 분명하지. 그럼에도 마치 우연히 찍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야. 그건 아마도 대단한 기술에 속할 거야."-373쪽

죽음에 가까이 가보고 나서야 목전에 임박한 위험이 사진가에게는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인 상황이란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사진가는 모든 장면을 뷰파인더를 통해 보기 때문에 위험에는 어느 정도 면역이 된다. 카메라가 방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카메라 뒤에 있으면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을 듯 느껴진다. 카메라 덕분에 위기 상황에 대한 면책특권을 얻는 것이다.-397쪽

...기자는 청소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장면의 세세한 부분들을 모은다. 그 세세한 것들이 한데 모이면 '큰 그림'이 완성된다. 사진가는 늘 상황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확실한 영상 하나를 원하지만 작가는 작은 일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세밀한 묘사가 없는 이야기는 맥없고 심심할 수밖에 없으니 좋은 글을 쓰려면 균형감을 유지해야 한다. 글 전반에 작가의 시각이 담기지 않으면 독자는 작가가 관찰한 바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다.-404쪽

나는 미국 생활의 자명한 진리 중 하나를 깨닫게 됐다. 일단 인기를 얻으면 어디서나 그 사람을 찾는다. 미국 문화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은 늘 무시된다. 고군분투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취급되기 일쑤다. 발행인, 잡지 편집자, 제작자, 갤러리 주인, 에이전트들을 설득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사람은 낙오자로 취급될 뿐이다. 성공할 수 있는 길은 각자 찾아내야 하지만, 그 누구도 성공을 이룰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다. 명성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 기회를 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더라도, 자기 판단만 믿고 무명의 인물에게 지원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런 까닭에 무명은 대부분 계속 무명으로 남는다. 그러다가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온다. 행운의 밝은 빛에 휩싸인 후로는 갑자기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고 반드시 써야 할 인물이 된다. 이제 모두 그 사람만 찾는다. 모두 그 사람에게 전화한다. 성공의 후광이 그 사람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41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