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Piece... Love Peace...
문흥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문흥미의 만화는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별 각색작업 없이도 화면에 그대로 옮길 수 있는 만화인것 같다.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확실하고 연출력도 뛰어난 편이다. 그래서 그녀의 만화는 쉽다. 만화란 다 쉬운게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내 경우를 볼 때. 난 어찌된 일인지 분량이 많거나 등장인물이 많거나 혹은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픈지에 대해 명확하지 않은 경우 만화를 읽는것이 어렵다. 그래서 늘 중도에 포기를 해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문흥미의 만화는 쉽다. 내가 충분하게 읽어낼 수 있을만한 코드이다.


언젠가 냉장고 광고에서 '여자라서 행복해요' 라는 시리즈 광고를 낸 적이 있었다. 워낙에 남자들 위주의 세상에서 살다가 보니 나는 그 광고에서마저 반감을 느꼈었다. 집에서 하기는 부담스러운 퐁뒤 요리를, 어떤 고급 식당 못지 않게 근사하게 차려내면서 남자의 방문을 기다리는 여자가 뭣 때문에 여자라서 행복한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자꾸 살아보니까 내가 똑같다고 생각했던 남자와 여자는 참 달랐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단 두가지 특성으로 그들을 모두 뭉뚱그려 설명할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기질 같은건 있는것 같다. 여자로 길러져서 여자이고 남자로 길러져서 남자인 것도 있겠지만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언가도 분명히 있다. 이 만화의 경우 여자라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겠지만 남자라면 혹시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사는게 왜 이렇게 짜증스러울 만큼 디테일하냐고. 어쩌면 그런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느끼는건 비슷라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아니면 여자라서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남자라서 드러내지 못하는 것. 문흥미는 여자라서 드러낼 수 있는 것을 한껏 드러냈다. 그래서 이분법적 논리를 상당히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만화를 여자 만화라고 말해야겠다.


총 4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이 만화는 모두 여자들이 주인공인.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야기에 얼마나 공감을 하는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나는 공감은 아니더라도 이해는 가는 만화라고 말하고 싶다. 친구의 얘기를 들을때. 내가 그렇지는 않지만 '그래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 말이다. 마지막 단편인 그여자 사람잡네를 빼면 모두 사랑에 관한 얘기이다. 첫번째 Love Piece...Love Peace...는 육체적인 쾌락과 정신적인 사랑에 대한 한 여자의 경험을 그렸고 두번째 자장...우ㄹ면 은 처음과 점점 달라지는 남자의 사랑을 바라보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며 세번째 사랑은 있었다는 여고시절에 여자들만 한군데 몰아넣고 있는 현실에서 생길법한 동성애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문흥미는 심각한 결론은 내지 않는다. 처음 시작은 꽤나 심각하지만 대부분은 다른 대안을 찾아내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첫번째 단편같은 경우 여자는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남자로 지운다. 오직 육체만 탐했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첫번째 남자에대한 상처를 두번째로 만난 남자에게서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두번째 역시 남자가 점점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급기야는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방법으로 배신을 하는 남자를 역시 다른 남자가 가르쳐주는대로 복수하고 그와 새로운 만남의 시작을 암시하는 듯한 결론을 맺는다. 세번째는 심각한 동성애 코드는 아니지만 어찌되었건 분명 여자친구에게 여자 이상의 감정을 느꼈던 주인공. 그리고 그 주인공이 사랑했던, 절대 여자가 되기 힘들것 같았던 여자는 세월이 흘러 친구로 만난다. 그건 여자로 살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주인공의 친구가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문흥미 만화에서 단 하나 불만이 있다면 그건 여자 주인공들이 문제가 닥쳤을때 스스로 찾아낸 해결이 아닌 다른 남자로 인해 저절로 형성되어 버리는 소극적인 대안으로 결말이 난다는 것이다. 세 편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이 좀더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다면 좋을텐데 그녀들은 마치 '난 여자니까요' 라는 듯이 모두 남자의 손을 빌린다. 벽에 못질을 하고 무거운걸 드는 일에는 남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인생 자체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는걸 그녀들은 모르는걸까 아니면 알고싶지 않은걸까?


어떤 성을 가지고 태어났건 간에 변함이 없는것은 자기 인생과 그에 따른 모든 문제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끔 도피처로 결혼을 선택하고 남편이 될 남자가 지금까지의 자기 인생과는 다른 인생을 살게 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는 여자들을 보면 나는 동조도 이해도 할 수 없다. 문흥미의 단편에는 저 밑바닥에 그런 생각을 깔고 출발하는 것 같아 재밌게 읽으면서도 약간 씁쓸한 기분이 든다. 이런게 여자라서 행복한걸까? 하다가 안되면 남자라는 존재에게 기대고 그들이 어떤 식이건 결말을 맺어주길 기대할 수 있으니까? 어떤게 여자라서 행복한건지는 각자가 알아서 할 문제지만 내가 생각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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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2004-12-05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책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님의 글을 보니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플라시보 2004-12-05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디 멕베스님. 저도 여동생 덕분에 예전에는 유명한(?) 만화를 꽤나 봤었는데 요즘에는 잘 안보게 됩니다. 그땐 월간지를 많이 봤었는데 문흥미도 그때 알게 된 작가 중 한사람입니다. 제가 워낙 드라마같은 만화를 좋아하니까 님도 감안하시고 보시길^^

2004-12-05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4-12-05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분 추천 날려주셔서 감사합니다.^^

kleinsusun 2004-12-05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라서 행복해요' 그 광고의 copy를 보고 저도 반감을 느꼈어요.

동생이 학교 다닐 때 여성학 강의를 들었었는데, 제가 대신 report를 써 준 적이 있었거든요. " 가구는 여자예요" 광고 copy의 문제점에 대해서.... 강사가 잘 썼다고 읽어줬다는데...ㅋㅋ 근데....재미있는 만화 소개 좀 해주세요! 아주 웃기는걸로...

플라시보 2004-12-05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leinsusun님 뭐 여자라서 행복할수도 있지만 그게 남을 위해 식탁을 차리는게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즐거운 순간이면 더 좋을뻔 했다는 아쉬움이 남더라구요.

아주 웃기는거요? 글쎄요. 전 '빨강머리 앤' 이랑 '사각 사각' '야 이노마' 같은게 아주 웃기던데. 님의 취향에는 맞을지 어떨지 모르겠네요.^^

kleinsusun 2004-12-05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 이노마! 주문했어요. 기대 만빵!

요즘 우울해서 굶주린 것 처럼 웃기는 책들이 필요해요.

플라시보 2004-12-05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leinsusun님. 저는 무척 재밌었는데 님은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부디 웃기시길 바래요. 흐흐.

픽팍 2004-12-17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요새 문흥미 님 활동을 접으신 것 같아서 많이 아쉽더군요;;;만화계의 엄청난 불황으로 인하여;;;;;;잇힝 저는 문흥미님도 좋아하지만 한혜연님도 역시나 드라마틱하게 만화를 그리시는 분 같더라구요;;ㅋ


플라시보 2004-12-17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픽팍님. 한혜연도 무척 좋아하는 만화가입니다. 단편중에 '그집 딸기빙수' 인가 그거 되게 좋아했었어요^^ (근데 문흥미가 활동을 접었나요? 저런...불황이 이래저래 사람 잡네요.)

픽팍 2004-12-20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활동을 접었다기 보다는 요샌 눈에 띄게 활동을 하시진 않으시는 거 같더라구요;;;

왕년엔 서울만화대상도 수상하시고 왕성히 활동하셨는데;;;;;;

한혜연님은 지금도 도처에서 많이 볼 수 있어요 ㅋㅋ넘좋아요 그래서 ㅋ

 

얼마전 너굴님의 인터넷 샵에서 주문하여 받은 목걸이이다. 이름은 '러블리 바이올렛' 자수정과 기타 원석 그리고 은을 사용해서 만든 핸드메이드 제품이다. 받아보니 역시 환상의 퀄리티를 자랑한다. 샵을 열기 이전부터 개인적으로 부탁을 해서 악세사리를 하나 둘씩 장만했는데 어찌나 하나같이 이쁜지. 거기다 흔치 않은 디자인이라는 점이 더더욱 마음에 든다. 공장에서 찍어낸 천편일률적인 악세사리들과 달리 세상에서 오직 나만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악세사리. 악세사리라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예술품에 가깝지 않나 싶다. 요 며칠 수면 부족으로 기분이 좀 다운되어 있었는데 너굴님의 악세사리를 받고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못생겨도 여자는 여잔가보다. 예쁜 목걸이 하나에 기분이 이렇게 확 바뀌니 말이다. 너굴님이 직접 손으로 만드는 악세사리는 http://blogshop.isavezone.com/personshop/main/main.jsp?memId=nugool 에서 구입할 수 있다. 이 제품 말고도 아름다운 아이템들이 그득그득 하다. 제품은 목걸이와 팔찌 귀걸이 이렇게 3가지 종류이며 원하는 디자인으로 주문을 받기도 하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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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12-03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이뿌당 ~~ 제가 좋아하는 바이올렛 색이네요 !!! 우와 우와 우와~~~~~~~

물만두 2004-12-03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헉... 너무 이쁘네요^^

플라시보 2004-12-03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weetmagic님. 흐흐. 겁나게 이쁘죠? 실물은 더 아름다워요. 올해 유행하는 색이 퍼플계열이라던데 후훗. 사진은 좀 크게 나왔는데 사이즈는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입니다. 특히 팬던트가 예술이여요^^

플라시보 2004-12-03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으헉 그 자체입니다.^^

플라시보 2004-12-03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수정해서 다시 올렸습니다.^^

sooninara 2004-12-03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있지요^^ 전에 이벤트 당첨되서 받았어요..

사진보다 작고 깜찍해서..너무 귀여워요..

플라시보 2004-12-03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ooninara님. 어머, 우린 같은 목걸이를 가지고 있군요. 저도 사진에 비해 작고 깜찍한 사이즈랍니다. (사진에서 보면 어쩐지 팬던트가 두둥 하고 커보이죠)

nugool 2004-12-03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플라시보님..^^ 수니나라님과 플라시보님 두분만 가지고 계시는 목걸이 되겠습니다. ^^

비연 2004-12-0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누굴님께서 이런 걸 운영하고 계셨군요...몰랐슴다^^;; 어쩐지 이벤트 상품이 남다르다 했어요...오호~ 저도 한번 들어가 봐야겠슴다~

플라시보 2004-12-04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한번 들어가보세요. 너굴님이 그쪽으로 아주 재주가 많으시답니다.^^

biseol 2004-12-06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선물하고 싶어도 발품 판 것에 비해 그닥 맘에 들지 않았는데 추천해주신대로 정말 눈이 동그래집니다.. 전 금부치보다 천연석이나 비즈가 더 눈에 들어 오더라구요..

플라시보 2004-12-07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미레님. 저 역시 그래요. 금딱지나 다이아보다는 천연석이랑 비즈가 더 좋아요^^ 혹시 선물하실 일 있으시면 참고하시면 좋을듯. 저도 한해동안 고마웠던 분 한테 저 사이트 말해줬답니다. 하나 고르시라구요.^^ 제 손으로 만든건 아니지만 너굴님이 워낙 꼼꼼하게 잘 만들어 주시거든요. 아직 너굴님께 구입한 악세사리 고장나거나 끊어지거나 그런게 하나도 없어요^^
 

메이컵 브랜드인 바비 브라운에서 나온 트레블 케이스. 매장에 전화를 해 보니 12월 10일부터 출시가 되며 가격은 13만원이란다. (사이즈는 밑바닥의 가로가 25. 세로가 15. 높이가 17)


실물을 안봐서 모르겠지만 트레블 케이스라고 하나 가로가 25cm정도이면 그냥 들고다니는 가방으로 써도 무관할것 같다. 초콜렛 색에 인조 악어가죽으로 된 제품이며 여행용인 만큼 안에는 자잘한 수납공간들이 있다.


예전에는 저런 모양이나 제질의 가방을 보면 할머니들이나 가지고 다니기에 딱 맞겠군 했었는데 요즘은 저런게 가끔씩 땡긴다. 악어 가죽이 웬말이냐 싶긴 하지만 꽤 심플하고 멋스러워 보인다. (사진의 힘인지는 모르겠다만)


얼마후 매장가서 저 실체를 한번 확인 해 봐야겠다. 그 자리에서 미쳐버리면 확 지르는 것이고 아니면 침을 닦은다음 집으로 돌아가겠지. (앞의 확률은 소숫점 이하이다. 가격을 보라. 13만원이 웬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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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12-02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맘에 들어요. 그러나 저는...침만 흘리겠습니다. 왕년에(?!) 쌈지에서 나온 저런 스타일의 가방을 들어봤다는 걸로 위로 삼으며... 통장에 잔고를 쌓아두기 위함도...^^:;

플라시보 2004-12-02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저님. 전 한번도 저런 타입의 가방을 가진적이 없기에 확 저지르고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침만 흘리지 싶습니다. 처음에는 가격을 5만원으로 잘못 알았는데 다시 확인해 보니 13만원 이더라구요. 5만원으로 알았을때만 해도 '잘하면 미쳐서 저지르겠군' 싶었는데 13만원이라고 하니 싸늘해지더군요. '그럼 그렇지 바비브라운이신데 어련 하시겠어?' 하고 말이죠^^

이루카 2004-12-02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무겁지 않을까요? 나이가 드니 무거운 가방이나 옷은 감당이 안되더라구요. 진짜 악어가죽이래요? 혹시 악어 무늬 합성피는 아닐지?

플라시보 2004-12-02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루카님. 조 위에 인조 악어가죽이라고 적어뒀는데요.^^ 무거울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들어보질 않아서..하지만 저도 역시 무거운 가방은 별롭니다.^^

이루카 2004-12-0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플라시보 2004-12-02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죄송씩이나..흐흐. 괜찮아요. 그런거가지고 뭘^^

sweetmagic 2004-12-02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방, 메이크업 케이스용 일겁니다. 별로 안 크구요,,, 사진도 참 잘 찍은것 같습니다, ㅎㅎ 그리고 무겁다고 봅니다. 흐흐흐

플라시보 2004-12-02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그런것 같아요. 안에 어떤식으로 공간분할이 되어있는지 모르겠지만요. 정말 무거울까요? 이잇 매장가서 함 들어봐야겠어요.^^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이 책을 선물을 받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아마 나는 이 책에 아무리 많은 찬사가 쏟아졌어도 결코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식이라는 말을 들어도 수학과는 거리가 몇억광년이나 떨어진 내가 헉겁하기에 충분한데 거기다 그 수식은 일반인도 아닌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란다. 초등학교때 엄마에게 등짝이 시뻘개지도록 맞아가면서 배웠어도 겨우 80점을 받았던,(당시 그 산수 시험은 백점짜리가 수두룩하게 나온, 비교적 쉬운 챕터였다.) 더구나 그게 내 생에 있어 최고의 산수 혹은 수학 성적이었던 나. 산수도 하기 싫은 마당에 중학교 올라가서 배우는 수학은 더더군다나 왜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막말로 천원내고 200원짜리 껌하나 사고 아줌마가 날 바보로 보고 거스름돈 700원을 줄때 '100원 더 주세요' 라고 할 수만 있으면 그만이고 여동생과 8각짜리 피자 한판을 먹을때 각자 몇 조각을 먹을 수 있는지만 계산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뭣하러 저렇게 어려운걸 배우나 싶었다. 내게 있어 수학은 그렇게 하등 필요도 없는 주제에 어이없이 어렵기만 한 학문이었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이 아무리 재밌다고 소문이 난들 읽고 싶었겠는가. 사실 선물을 받고도 은근히 걱정했었다. 내가 모르는 온갖 수학이 난무해서 결국은 중간에 포기를 하게 되는건 아닐까? 혹은 책의 절반도 이해를 못하면 어쩌지? 하고 말이다. 허나 결론부터 말 하자면 그건 기우였다. 물론 내가 이 책에 있는 수학 공식들을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학교 다닐때 수학책을 보는 것 처럼 아무 느낌이 없진 않았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풀 수는 없지만. 뭘 말하고 싶은지 혹은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는 정도였다.



교통사고로 기억이 멈춘 노 수학자. 그는 형수와 함께 살고 있으나 형수는 안채에 그는 안채에서 조금 떨어진 집에서 산다. 형수는 노 수학자를 위해 가정부를 부른다. 이 책은 그집에 10번째로 가게 된 파출부 나의 시점에서 쓰여져 있다. 주인공인 나는 교통사고를 당하기 이전의 기억만 살아있고 그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기억은 80분 밖에 지속되지 않는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인 노 수학자의 집에 가서 일을 하게 된다. 그녀는 나 만큼이나 수학을 애진작에 팽겨친 타입인데 자기도 모르게 점점 수학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박사가 생각을 하고 세상과 소통을 하는 방식인 수식에 대해 그저 어렵고 딱딱하기만 한 학문이 아니라는걸 알게 된다. 거기다 주인공의 아들인 루트 (박사가 지어준 별명) 까지 합세해서 이 책은 세 사람의 우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무리없이 이끌어내고 있다.



좀 솔직하게 말 하자면 나는 가슴이 따뜻한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에 어울리지도 않게 라디오 코너 작가를 하면서 따뜻해서 다 죽어봐라 류의 글을 1년간 정말 죽어라 써댄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월간 좋은생각에 나올듯한 얘기들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인간의 심성이란 비슷비슷한지 읽기 전에는 약간 거부감을 느끼지만 막상 또 읽게 되면 남들과 똑같이 감동을 받고 때로는 질질 짜기까지 한다. 그런 글들을 써대느라 내 머리로는 질렸을지도 모르겠지만 하도 삭막한 세상을 살다 보니 가슴으로까지 질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가끔 힘들었던 예전 기억들이 떠올라서 싫을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내 기억이 일정 부분은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은 싹 접어 버렸다.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는것. (요즘 영화에서고 어디에서고 너무 흔하게 써먹어서 좀 진부해진 맛은 있지만) 그건 내가 나라는 것을 믿을 수 없는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가 나 일수 있는 것은 어쩌면 육신이 아닌 기억의 힘 때문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80분의 녹화시간을 가지고 있는 테잎처럼 박사의 기억은 늘 80분을 넘지 못한다. 80분 전에 아무리 감동적인 일이 있어도 80분이 지나버리면 박사의 머릿속에는 아예 일어나지 조차 않은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박사는 80분마다 가정부와 루트를 새롭게 사귀고 새롭게 느낀다. 기억의 힘 없이도 그들 사이가 점점 더 돈독해지는 것은 순전히 주인공 가정부와 그의 아들 루트의 결코 오바스럽지 않은 사랑과 보살핌 덕분이다.



끝으로 이 책에 나오는 수식은 내 수준에서는 한없이 어려웠지만 남들은 별 무리가 없었으리라 본다. 나로 말하자면 중1때 수학을 탁 하고 놓아버린 보기 드문 인간이니까 내 수학 실력은 국졸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 내가 읽어도 대충 감으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 있었고 스토리를 넘기는데 있어 전혀 무리가 없었으니 수학의 '수'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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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eol 2004-12-01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올리셨군요.. 읽고 나니 다시 책을 들추고 싶어요..

플라시보 2004-12-01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미레님. 이 자리를 빌어 좋은 책 선물해 주신거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정말이지 전 님 아니었으면 이 책 못읽었을껍니다. 수식에 박사라니 하면서 말이죠. 흐흐 고마워요. 꾸벅.^^

마냐 2004-12-01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두 누군가 선물해주실때까지 기둘려야지..ㅋㅋㅋ

플라시보 2004-12-0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저 책은 선물하기도 좋고 받기도 좋은 책인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렸을때 나는 영화 속에서 남자 주인공들이 양복 품에서 꺼내어 마시는 저 휴대용 술병이 너무나도 가지고 싶었다.


무슨 술을 휴대용 병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까지 마셔야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피우는 굵은 시가와 함께 저 휴대용 술병을 한모금 들이키는 포즈에는 뭔가 모르게 낭만이 깃들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나는 한번도 저 휴대용 술병을 들고 다니는 남자를 보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못 봤을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영화에서 저 술병이 가장 감동적이었을때는 리빙 라스베가스에서 여자 주인공이 알콜 중독자인 남자 주인공에게 휴대용 술병을 선물했을때가 아닌가 싶다.


처음 만났을때 남자가 여자에게 그런다. 술끊으라는 얘기만 하지 말라고.


여자는 남자의 그런 마음을 너무도 잘 헤아리다 못해. 급기야는 휴대용 술병을 선물하기 까지 한다. 알콜 중독자에게 휴대용 술병을 사 준다는건. 빨리 퍼마시고 죽으라는 소리라는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그녀는 정말로 그를 사랑하고. 그래서 그가 사랑하는 것 마저도 그래도 인정을 해 주는 것이다. 자고로 사랑하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내 마음에 들도록 혹은 세상 잣대에 비추어 보았을때 똑바르지 않은 부분을 뜯어 고치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해 주는것. 현실적으로는 조금 불가능 한 일이지만 멋있기는 더럽게 멋있는 사랑이 아닌가 싶다. 근데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변화할수도 있고 또 상대방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에이 잘 모르겠다. 휴대용 술병 얘기하다가 왜 이쪽으로 빠졌을까? 삼천포도 이런 삼천포가 없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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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12-0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적으로 하다고 믿습니다. 저는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이 모두 약간의 중독성은 있지만...
그것이 옳은 일이 아닐 때는 그냥 말없이 사랑으로 지지해 주는 것 - 술병을 사주는 것 처럼요-. 만으로 정화가 될거라고 믿습니다. 가능성도 충분히 보았구요.

물론 그렇게 하기 힘들긴 하겠죠. 왜냐면 혹시나 이걸 받는 그 사람이 알콜 중독이 되거나 죽어버리거나 하면 어쩔까 하는 또는 이 사람의 건강을 해치는데....나중에 홀로 남으면 어떻하지 등등등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상이 만들어낸 두려움 때문에요.
하지만 두려움은 두려움 뿐이고......

받는 사람이 주는 사람의 말없는 지지를 힘으로 만들어 스스로 변화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그런 방식의 사랑은 받을 자격이 조금은 없고 , 어쨌든 그럼 으로 인해 알콜 중독이 원인이 되어 죽어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 눈에는 알코올이 더 좋았을 뿐이니까 알콜과 죽을 이유 충분하지요.
설사 그런 일이 있더라도 옆에 있다는 이유로 쓸데없는 앙탈은 안 부렸음 좋겠습니다. 술이 좋아 내가 좋아 ? 선택해 뭐 그런 따위의 유치한........
왜 ? 바로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니까요....


플라시보 2004-12-0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weetmagic님. 흐... 그건것 같네요. 그사람의 선택마저 존중해 주는것. 그것도 사랑의 한 방법인것 같습니다. 설사 그게 알콜중독이라고 하더라도요. 님 말씀처럼 내가 좋아 술이 좋아 혹은 날 택하던지 아님 술을 택하던지의 강요는 어찌되었건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것 같습니다. 남녀 사이건 인간 관계건 오래 가려면 일단은 편해야 하거든요.^^

mannerist 2004-12-0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매너는 저기에 커피 넣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마십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넣은-이러면 겨울에도 일정 온도는 따뜻하게 유지되지요-저녀석 꺼내들고 입에 물면 꼭 주변에 '젊은놈이 벌써부터...'라는듯,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눈빛으로 찔러보시는 어르신들 꼭 몇몇씩 있답니다. 그거 즐기는 것도 은근히 재밌답니다 -_-;

플라시보 2004-12-01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너님. 저기다 커피를 넣어 다니시다니 참으로 기발하십니다.^^ 그리고 따뜻한걸 넣으니 정말 보온 효과도 있겠군요. 그리고 님은 술이 아닌 커피를 마시는데 단지 통 모양만 보고 사람들은 '젊은놈이 대낮부터..??' 하는 눈빛으로 보는것도 재밌네요^^



보슬비님. 흐..감사합니다. (삼천포로 빠지는걸 좋아하시는군요^^)

marine 2004-12-0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커피를 저기다 넣으면 보온 효과가 있겠네요 저는 심각한 커피 중독인데 테이크 아웃은 나같은 사람을 위해 생긴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길거리 가면서도 마십니다 앞으로 저도 한 번 이용해 봐야겠네요 그런데 이거 정말 삼천포로 빠진 기분인데요?

mannerist 2004-12-01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매너 탓입니다. -_-;;; 아, 그리구요... 저 통 자체는 보온 효과가 없습니다. 그저 쇠로 만튼 통이라 금방 식어버려요. 그렇지만 대개 바지 뒷주머니 - 남자 청바지 뒷주머니에 딱 들어갑니다 -에 껴놓고 다니면 내용물의 온기를 36.5도 정도로 유지할 수는 있습니다. 어떤 날씨에서도. 장갑 잊고 나온 날 가끔 꺼내면 온기. 를 느낄 수 있답니다. 근데, 대개 여자바지는 뒷주머니가 작아서 이건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아, 그리고... 예전에 수업할때 저거 꺼내놓고 마시면서 하다가 고용주에게 취중수업한다고 의심받은 적도 있답니다. -_-;


플라시보 2004-12-01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너님. 저도 님이 말씀하신 그런 의미의 보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흐흐. 그리고 취중수업이라...님은 오해에서 그쳤지만 저는 진짜로 점심먹고 반주로 쏘주 한잔 걸치고 수업들은 기억이 얼큰하게 떠오르는군요.

nugool 2004-12-01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너님의 커피병 목격했지요. 흐억 했다가.. 에개~~ 했다지요? ㅋㅋ 그래도 저 병은 멋집니다요.

2004-12-01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2-01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4-12-01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굴님. 문제의 그 커피병을 목격하셨군요. 흐흐.^^ (근데 혹시 커피를 가장한 술 아니던가요? 하하)

nugool 2004-12-01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맛을 보진 못했어요.. 커피라고 확신하면 안되겠군요. ㅋㅋ

2004-12-01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4-12-01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굴님. 그럼요. X인지 된장인지는 찍어 먹어봐야 아는거지요.^^

2004-12-01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nnerist 2004-12-01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맘같아서야 커티샥(가격대 성능비가 탁월하여 군생활 당시 애용) 내지는 젝다니엘(매너가 심하게 열광하는 양줍니다)을 매일같이 넣어다니고싶죠. 그렇기만 하다면 반팔차림으로 눈보라 맞으며 싸돌아다니다가도 입안에 한모금 털어넣고 우워워~ 하면 추위가 싹 가시지 않겠어요? (원래 러시아에서 저런 용도로 쓴다고 하더군요. 물론 도수 70도 이상의 보드카-_-를 넣어서 말이죠. 헤헤... 그나저나... 이거 매너 알라딘 마을에서 신용도가 이거밖에 안되던가요 ㅜㅡ)

흰 바람벽 2004-12-0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두나두 리빙라스베가스 영화가 생각났는데요. 술병을 선물한거 보고서 정말 진심으로저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어찌나 슬프던지...

저는 술은 못하지만. 술병 요거 괜찮네요. ^^;;

플라시보 2004-12-0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흰 바람벽님. 술을 못하시는군요^^ 그래도 저 술병은 꽤 탐나지 않습니까? 흐흐. 술이 아니라 매너님처럼 커피를 담아 다니더라도 말입니다.^^

거닐기 2004-12-02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산을 좋아하는 저는 산에서 봤지요 그래도 저리 멋지구리한 것은 못봤구요. 저두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요 정상에서 저 술병을 꺼내 마시면 크아~~

플라시보 2004-12-02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닐기님. 알딸딸하게 취해서 산 정상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신선이 된 듯 할것 같은데요?^^ 전 게을러서 워낙 몸 움직이는걸 싫어하는지라 등산을 좋아하진 않지만 산 정상에서 보는 세상은 멋질것 같습니다.

플라시보 2004-12-02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쥴님. 흐흐 이 글을 보고 낼부터 님 집에 휴대용 술병이 차례로 배달되는거 아닐까요?^^ 저 역시 말씀하신 장면을 무척 좋아합니다. 감동적이기도 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