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이 책을 선물을 받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아마 나는 이 책에 아무리 많은 찬사가 쏟아졌어도 결코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식이라는 말을 들어도 수학과는 거리가 몇억광년이나 떨어진 내가 헉겁하기에 충분한데 거기다 그 수식은 일반인도 아닌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란다. 초등학교때 엄마에게 등짝이 시뻘개지도록 맞아가면서 배웠어도 겨우 80점을 받았던,(당시 그 산수 시험은 백점짜리가 수두룩하게 나온, 비교적 쉬운 챕터였다.) 더구나 그게 내 생에 있어 최고의 산수 혹은 수학 성적이었던 나. 산수도 하기 싫은 마당에 중학교 올라가서 배우는 수학은 더더군다나 왜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막말로 천원내고 200원짜리 껌하나 사고 아줌마가 날 바보로 보고 거스름돈 700원을 줄때 '100원 더 주세요' 라고 할 수만 있으면 그만이고 여동생과 8각짜리 피자 한판을 먹을때 각자 몇 조각을 먹을 수 있는지만 계산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뭣하러 저렇게 어려운걸 배우나 싶었다. 내게 있어 수학은 그렇게 하등 필요도 없는 주제에 어이없이 어렵기만 한 학문이었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이 아무리 재밌다고 소문이 난들 읽고 싶었겠는가. 사실 선물을 받고도 은근히 걱정했었다. 내가 모르는 온갖 수학이 난무해서 결국은 중간에 포기를 하게 되는건 아닐까? 혹은 책의 절반도 이해를 못하면 어쩌지? 하고 말이다. 허나 결론부터 말 하자면 그건 기우였다. 물론 내가 이 책에 있는 수학 공식들을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학교 다닐때 수학책을 보는 것 처럼 아무 느낌이 없진 않았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풀 수는 없지만. 뭘 말하고 싶은지 혹은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는 정도였다.



교통사고로 기억이 멈춘 노 수학자. 그는 형수와 함께 살고 있으나 형수는 안채에 그는 안채에서 조금 떨어진 집에서 산다. 형수는 노 수학자를 위해 가정부를 부른다. 이 책은 그집에 10번째로 가게 된 파출부 나의 시점에서 쓰여져 있다. 주인공인 나는 교통사고를 당하기 이전의 기억만 살아있고 그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기억은 80분 밖에 지속되지 않는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인 노 수학자의 집에 가서 일을 하게 된다. 그녀는 나 만큼이나 수학을 애진작에 팽겨친 타입인데 자기도 모르게 점점 수학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박사가 생각을 하고 세상과 소통을 하는 방식인 수식에 대해 그저 어렵고 딱딱하기만 한 학문이 아니라는걸 알게 된다. 거기다 주인공의 아들인 루트 (박사가 지어준 별명) 까지 합세해서 이 책은 세 사람의 우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무리없이 이끌어내고 있다.



좀 솔직하게 말 하자면 나는 가슴이 따뜻한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에 어울리지도 않게 라디오 코너 작가를 하면서 따뜻해서 다 죽어봐라 류의 글을 1년간 정말 죽어라 써댄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월간 좋은생각에 나올듯한 얘기들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인간의 심성이란 비슷비슷한지 읽기 전에는 약간 거부감을 느끼지만 막상 또 읽게 되면 남들과 똑같이 감동을 받고 때로는 질질 짜기까지 한다. 그런 글들을 써대느라 내 머리로는 질렸을지도 모르겠지만 하도 삭막한 세상을 살다 보니 가슴으로까지 질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가끔 힘들었던 예전 기억들이 떠올라서 싫을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내 기억이 일정 부분은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은 싹 접어 버렸다.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는것. (요즘 영화에서고 어디에서고 너무 흔하게 써먹어서 좀 진부해진 맛은 있지만) 그건 내가 나라는 것을 믿을 수 없는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가 나 일수 있는 것은 어쩌면 육신이 아닌 기억의 힘 때문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80분의 녹화시간을 가지고 있는 테잎처럼 박사의 기억은 늘 80분을 넘지 못한다. 80분 전에 아무리 감동적인 일이 있어도 80분이 지나버리면 박사의 머릿속에는 아예 일어나지 조차 않은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박사는 80분마다 가정부와 루트를 새롭게 사귀고 새롭게 느낀다. 기억의 힘 없이도 그들 사이가 점점 더 돈독해지는 것은 순전히 주인공 가정부와 그의 아들 루트의 결코 오바스럽지 않은 사랑과 보살핌 덕분이다.



끝으로 이 책에 나오는 수식은 내 수준에서는 한없이 어려웠지만 남들은 별 무리가 없었으리라 본다. 나로 말하자면 중1때 수학을 탁 하고 놓아버린 보기 드문 인간이니까 내 수학 실력은 국졸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 내가 읽어도 대충 감으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 있었고 스토리를 넘기는데 있어 전혀 무리가 없었으니 수학의 '수'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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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eol 2004-12-01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올리셨군요.. 읽고 나니 다시 책을 들추고 싶어요..

플라시보 2004-12-01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미레님. 이 자리를 빌어 좋은 책 선물해 주신거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정말이지 전 님 아니었으면 이 책 못읽었을껍니다. 수식에 박사라니 하면서 말이죠. 흐흐 고마워요. 꾸벅.^^

마냐 2004-12-01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두 누군가 선물해주실때까지 기둘려야지..ㅋㅋㅋ

플라시보 2004-12-0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저 책은 선물하기도 좋고 받기도 좋은 책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