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영화의 한국 개봉 제목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고 붙인 카피라이터에게 정말 존경스럽다는 말을 하고 싶다. 예전에 존 쿠삭이 나온 영화 High Fidelity를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라고 붙인것 이후로 최고의 걸작이 아닌가 싶다.(같은 인간이 아닌가 몹시 의심스럽다.) 원래 영화의 느낌을 표현 해 낼 자신이 없으면 그냥 영어 제목을 그대로 둬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게 안된다면 최소한 영화의 느낌만이라도 제대로 전달하는 제목을 붙여야 할텐데 이건 뭐하자는 플레이인지 모르겠다. 카피라이터가 영화를 보지 않고 제목을 막 달았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스토리 소개에 앞서 이 영화에 대해 잠깐 얘기를 하자면 보통 영화들과 같은 대본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주 디테일한 대본없이 감독은 배우들에게 즉흥연기를 요구했고 그 결과 이 영화의 주인공 빌 머레이는 생애 최고의 연기를 뽑아냈다. 또한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감독은 저 유명한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이다. 100% 일본에서 해외로케로 촬영이 되었으며 여배우는 나이 19살의 신인이다. 이 영화는 올해 골든글로브에서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남우주연상,각본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 전미 비평가협회 남우주연상도 차지했다. 아카데미 영화제에도 현재 여러부문에 후보로 올라 있다.
사진작가인 남편의 일본출장에 따라온 샬롯은 도쿄 호텔에서의 하루 하루가 공허하고 지루하다. 늘 일에 빠져있는 남편과는 왠지 점점 더 겉도는것 같기만 하고 자신은 혼자 버려진것 같은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한편 한때 잘나가던 배우 밥 해리스는 일본 위스키 광고를 찍기 위해 이 호텔에 머물러 있다. 그는 돈 때문에 광고를 찍기는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일본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어느날 바에서 이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리고 샬롯의 남편이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가는 동안 둘은 자주 만나서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신다. 일본에서의 촬영 일정이 모두 끝난 밥 해리스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한다. 그러던중 길을 걷고 있는 샬롯을 만나 포옹을 하면서 안아준다. 샬롯과 밥의 눈은 모두 젖어있다. 밥은 공항으로 향하고 샬롯은 걷던 길을 계속 걷는다.
솔찍하게 말 하자면 이 영화를 본 관객들(그나마 몇명 되지도 않았지만)은 전부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혹은 그래서 어쨎다는 건데 하는 반응을 보였었다. 영화의 전개도 느리고 갈등 구조도 없으며 스토리의 변화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샬롯과 밥 해리스가 정분이라도 나서 함께 일본을 도망쳐서 새로운 로멘스를 이뤄 나가길 바랬나보다.
영화 내내 일본이라는 나라는 외국인의 눈으로 그려진다. 낮설고 이상한 곳. 사람들은 전부 지나치게 쾌활하거나 병적으로 어딘가에 몰입하는 오타쿠적인 모습을 보이고. 일본의 문화 역시 이상하게 그려진다. 밥은 위스키 광고를 촬영하는 내내 주먹구구 식의 일에 염증을 느낀다. 그리고 호텔에서 자신이 예전에 출연한 영화에 일본어로 더빙된 것을 보다가 채널을 돌려 버린다. 통역관인 여자는 듣는 그대로 통역하지 않고 자기가 말 하기 편한대로 통역을 한다. 앞뒤 다 잘라먹은 통역을 들으며 일을 하는 밥은 일본의 사진작가나 CF감독을 전혀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그리고 일본식 발음으로 하는 영어는 도저히 알아 들을수가 없다. 그는 이 땅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막상 미국에 있는 가정이 애타게 그리운 것도 아니다. 결혼한지 30년이 지난 아내는 집에 새로 깔 카펫 모델이나 왕창 보내고 밥이 일본에서 어떻게 지내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카펫을 하나 고르라고 조를 뿐이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샬롯 또한 삶의 회의를 느끼고 있다. 사랑하지만 예전처럼 함께라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남편은 늘 일때문에 바쁘다. 호텔에 홀로 남겨지는 샬롯은 거의 매일 혼자서 호텔의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거나 호텔방에 처박혀서 창밖을 바라본다. 남편의 동료들과 어울려서 간혹 술도 마시지만 그들과의 대화에 섞이지 못한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앞으로의 진로도 결정하지 않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질문은 하지만 답은 찾지 못한 상황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얼마나 외롭고 공허한지를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쉽게 친구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서로 이성으로의 이끌림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호감은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절제를 한다. 마치 일본이라는 나라가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것 처럼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냥 일본 호텔에서의 심심한 하루 하루를 같이 할 뿐이다. 어쩌면 이 두사람의 로멘스가 전개되었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이 영화는 지극히 평범한 영화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처럼 뻔하고 뻔한 영화(나쁘다는게 아니라 그냥 뻔하다는 얘기다.)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낀 남녀가 서로에게 이끌리는 것을 느끼고 잠시건 지속적이건 사랑하게 되는것. 감독은 그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왜냐면 그건 영화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마치 영화가 아닌 다큐멘타리 처럼 느껴진다. 만약 나라도 저 상황에서는 저렇겠구나 하고 말이다. 늘 영화가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대리만족을 하게 해 주었다면 이 영화는 마치 거울처럼 우리를 보여준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의 우리가 어떤지를 말이다.
진짜 살아서 움직이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하루는 사실 지루하다.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제가 오늘같고 내일이 어제같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야말로 영화니까 가능한 일이다. 시트콤도 드라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일들은 현실에서 그렇게 동시 다발적으로 절대 심심하지 않도록 일어나 주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일본이라는 색다른 공간속에 있지만 그 속에서도 일상은 다르지 않다. 어딘가로 여행을 간다고 해서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순전히 관광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일본에 있어서 외롭고 공허한것이 아니다. 그냥 그들의 삶 자체가 그렇다.
만약 지금 슬럼프에 빠져 있다면 이 영화를 보지 않기를 바란다. 지나치게 슬프게 느껴질 수도 있어서 콱 뛰어내릴지도 모른다. (여태 설명했으니 눈물 흘리는 종류의 슬픔이 아니라는 것은 알리라 믿는다.) 나 역시 조금 우울한 요즘인지라 이 영화를 보고 땅속으로 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영화를 본 그저께 보다 비가오는 오늘 나는 이 영화가 더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