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블로그를 잘 둘러보신 분이라면 아실테지만 평소 독서량의 90%를 학교 도서관에서 해결하는 입장에서는... 여느 도서관과 조금 다르게 전공 서적들로 가득 찬 도서관이 조금 불만스러울 때가 있다. 특히 요즘같이 날이 더웠다가 비가 왔다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는 (어째서인지)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내 기분이 오락가락 정신없어지곤해서 나란히 꽂힌 책등을 열심히 들여다 보아도 어느 책 하나 뽑아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은 상당히 간단한 듯 복잡하다. 호불호가 은근히 뚜렷해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무조건 신뢰하며, 추리소설류는 무의식중에 손이 나간다. 그 어느 쪽에도 해당이 되지 않을 때면 다른 사람이 추천했던 책을 우선 골라 한 번 훑어보고 맘에 드는 구절이 나오면 일단 리스트에 추가한다. 그렇지도 않을 때에면, 표지가 예쁘거나 제목이 독특한 책들을 무작위로 뽑아 책을 훑어보고, 역자후기를 읽어본다. 뭐, 이렇게 써놓으니 굉장히 복잡해 보이지만 빌리는 책의 80%는 추리소설, 나머지는 그냥 표지가 예쁘고 제목이 독특한 책이니 상당히 치우쳤다면 치우친 기준이랄까.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는 조건 중 당연, 독특한 제목에 속했다. 우리 학교 도서관에 일본 소설이 유난히 많아서 (영문모를) 오기로 이번엔 외국소설에 집중해 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일본소설 책장을 지나 옆으로 눈을 돌려 제목을 훑어보고 있을 때였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물론 아니고 말고! 나야 언제나 금요일 저녁이길 원하지만, 세상일이 다 내 맘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가방에도 쏙 들어오는 책의 크기에 더더욱 만족하며 대출하고 돌아오는 길은 그야말로 금요일 저녁 같았다. 좋은 책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이란 금요일 저녁에 비할바가 아니다.

이 유쾌하고 슬프도록 웃긴 책은 소극장 무대에서 매달 발표되었던 글을 모은 책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약간 낯선 방식의 '발표 형식'이라 처음에는 짧은 연극을 했던 대본인가? 했지만 아무래도 내 이해가 맞다면 소극장에서 자신이 쓴 글을 읽는 모임이 있는 모양이다. 확실히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어야만 하는 방식 답게 글은 시종일관 톡톡 튀는 매력을 보여준다.

요일이 등장하는 제목을 가진 책 답게,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로 나뉜 목차지만 사실상 이야기들은 (일련의 순서가 있긴 해도) 옴니버스라서 요일과는 별 상관이 없다. 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을 한없이 게으르고 어딘가 엉뚱하면서도 나름의 진지함을 가진 사람으로 설정해 놓았다. ...실제로 그런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불행히도 독일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 전에 독일에 갈 여비도 없지만.

호어스트(주인공)는 청소와 빨래, 설거지를 미루고 미뤄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심지어 도둑이 들어도 화를 내고 가는 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게으른 남자다. 쓸데없이 자신에게 관대하고 하루종일 혼자 놀아도 절대 지치지 않을 그런 남자이기도 하다. 그런 호어스트의 일상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하며 어이없어 웃음이 나온다. 책의 처음 단편은 '티롤행 표 두 장'인데 이 짧은 글에서 나는, 호어스트라는 사람에게 무한한 동질감과 호감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걸 느꼈다. 어쩜 저렇게 나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내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기에 나는 좀 더 크고 시원하게 웃을 수 있다. 아무래도 우리는 같은 '게으르지만 자신에게 관대한 과'니까! 아니 뭐...부지런한 분들이 보시기에는 '시간낭비'겟지만 당장 코앞에 (나에게는) 산더미같은 일들이 쌓여있다면 이정도 현실 도피는 귀여운 수준 아닐까 싶다. 어리숙해서 귀엽고 웃긴 호어스트, 게으름을 떠나 이렇게 웃음을 주는 남자를 미워할 사람이 있을까.

처음부터 이게 순서와 그리 상관없다는 작가의 말을 읽어서 인지 작품과 작품 사이에 전에 등장한 사람이 다시 등장할 때마다, 그리고 그 전편의 이야기가 슬쩍 비칠 때마다 반가워서 또 웃고 말았다. 이 작가는 독자(혹은 청자)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각 편마다 2~3장의 짧은 작품들이라 뭐라 설명하고 싶어도 그저 어이없는 개그의 일인자를 차지할만한 남자가 나온다, 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아... 이렇게 글재간이 없어서 어디 다른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싶어 하실까...이 리뷰를 읽으시는 분들도 이래서 어디 이게 무슨 책인지 알 길이 없잖아...하고 불안하시더라도 속는 셈 치고 한 번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음에 들어하신다면 더더욱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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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놀 청소년문학 28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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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청개구리 기질이 98%인 나는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같이 사람들이 너무 본 책은 어쩐지 손이 가질 않는 편이다. 이 책도 내가 애용하는 한 인터넷 서점에서 열심히 광고가 뜨기에 읽기도 전에 눈에 익기는 했지만 읽어볼 마음은 거의 없었다. (광고가 많이 뜰수록 마음이 멀어지는 이 비뚤어진 기질이란!) 하지만 학교 도서관에 신간이라며 정면에 꽂혀있는 이 책을 보자 어쩐지 표지의 개가 나를 유혹했다. 거기다 사실 제목도 독특하고 제목 폰트도 귀여우니 내가 좋아하는 표지 스타일이기도 했고.

이게 무슨 중대한 고민이라고 난 한참을 신간 책장 앞에서 고민했고 마침내 누군가가 그 책을 빌려가고 난 후에 결심했다. 저 사람 뒤에 빌려봐야겠다, 라고. 그렇게 빌려온 책은 귀여웠다. 무엇보다 내가 귀여워 하고 한편으론 싫어하기도 하는 '어린아이'가 이 책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어리고 미숙하지만 스스로는 자신이 충분히 성숙하다고 믿는 어린아이만큼 귀엽고 또 사랑스런 존재가 있을까. 물론 내가 그랬다고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책은 그런 어린아이가 현실과 맞닥트렸을 때의 (약간은) 극단적인 반응을 차근차근 집어가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어린아이는 잔혹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냐면 나는 어렸으니까. 너무해, 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잔인해,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책에서 루앤이라는 친구는 딱 그런 어린아이다. 엄마가 말하는 '친하게 지내지 말아야 할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급작스런 친구의 변화에 거리를 두고 냄새나는 친구를 더이상 친구라고 여기지 않는. 읽으며 화를 내긴 했지만 그 나이대로 돌아가 내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게 어린 아이라는 거겠지.

덕분에 주인공 조지나가 급격한 환경 변화에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은 슬픔이 아닌 수치심이며 분노다. 집에서 쫓겨나 차에서 자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조그마한 소녀.

-그러고는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엉엉 울었다. 그 애가 나를 감싸 안으며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내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13)

어린아이 였던 내가 조지나와 루앤에게 감정이입을 했다면 어른티를 내는 나는 조지나의 엄마에게 감정이입했다. 사이가 좋지 않던 남편이 '푼돈'을 남기고 증발해 버렸고, 아직 어린 두 아이들은 고스란히 엄마의 책임이었다. 세탁소에서 일하는데다 집에서는 쫓겨났다. 이보다 더 짜증나는 상황이 있을까. 어린 아이들은 엄마에게 불평하고 하루에 두번 알바를 뛰어도 돈은 쉽사리 모이지 않는다.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돈'이 얽히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그건 조지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리한 꼬마 아가씨는 '돈'이 있어야 이 짜증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 정확히는 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알게되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개 납치'. 맹랑한 생각이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너무 무서운 생각이기도 하고! 하지만 납치를 했어도 마냥 귀여운 강아지에게 조지나는 어쩔수없는 정을 느끼고 그로 인한 죄책감과 돈을 벌고 싶다는 현실적인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서서히 어린아이의 유치함에서 벗어난다.

처음의 조지나가 물질적인 부재에 부끄러워 했다면 후반의 조지나는 착한 사람을 속이고 있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강아지의 맑은 눈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만하면 훌륭히 어른스럽지 않을까.

무티 아저씨는 등장인물 중 가장 호감 가면서도 또한 가장 무서운 사람이다. 언제 조지나에게 야단을 칠까...하고 조마조마하게 읽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는 인생의 조언자 노릇을 톡톡히 해내지만 실상 말은 별로 없는 독특한 존재다. 어린 조지나에게 그는 거지 아저씨였지만 스스로는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풍족하진 않지만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강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 강한 사람이기에 죄책감에 흔들리던 조지나를 자연스레 옳은 길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어른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진정한 교육법이 아닐까.

조지나의 발상이 귀엽고 웃음이 나게 하는 이 책, 어린 친구들도 어른분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때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독이 되기도 한다. (19)

-나는 두 눈을 세차게 끔뻑인 다음 발끝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비참해도 남들에게 그 마음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52)

-'난 나쁜 사람이 아니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건 멋진 계획이야. 결국은 모두 다 행복해질 거야.'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다 진실이 될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134)

-나는 윌리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녀석의 두 눈을 바라보며 "슬퍼하지 마, 작은 친구야" 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윌리가 눈썹을 살풋 들어 올렸다. 녀석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그토록 참으려고 애썼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153)

-때로는 뒤에 남긴 삶의 자취가 앞에 놓인 길보다 더 중요한 법이다 (200)

-때로는 말이야,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법이라고- (203)

-노트에 적어놓은 대로 조목조목 따르지는 않았지만, 나는 옳은 결정을 했다. 결국 내 마음이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한 짓에 대한 죄책감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시간을 한참 전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애초에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던 때로. 그러나 나는, 적어도 '제 8단계'에서는 옳은 결정을 내렸다. (254)

-창밖을 가득 채운 까만 밤을 구경하면서 밤공기를 깊이깊이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가 났다. 인동초와 갓 손질한 잔디처럼 싱그러운 향내였다. 그 냄새는, 조금도 고약하지 않았다.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만큼이나 상쾌하고도 풋풋했다. 살면서 다시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그런 향기였다.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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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우즈 지음, 김안나 옮김 / 매직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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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책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좋은 책은 마치 기쁨처럼 나누면 나눌수록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내가 좋아하는 작가 혹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 구절이 저렇게 해석되는구나 하고 감탄할수록 그 책에 대한 애정도 커진다. 그리고 내 경험상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항상 무언가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책으로 인해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책을 만나는, 책의 순환 고리가 내가 독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지 싶다.

조금 독특한 제목의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은 내가 좋아하는, 책의 '인간성'이 가장 잘 표현된 책이다. 30대 여성작가 줄리엣을 중심으로 주고받은 편지글을 통해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각각의 캐릭터의 개성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재미가 있다. 낙천적인 성격이지만 섬세한 줄리엣, 줄리엣을 무척 아끼는 시드니와 소피 남매, 조금은 산만하지만 순수한 이솔라, 사려 깊은 아멜리아... 줄리엣이 건지 섬의 사람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읽는 동안 나 역시 그 순수한 사람들이 너무 좋아졌으니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약간은 지루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줄리엣은 어느 날, 건지 섬에서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옛날 줄리엣이 가지고 있던 '찰스 램'의 수필선집을 우연히 소유하게 된 한 남자가 보낸 정중하고 책에 대한 애정이 보이는 편지를 받고난 후, 건지 섬의 주민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점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감자껍질파이 클럽'이라는 북클럽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전쟁 중 우연히 만들어진 '감자껍질파이 클럽'의 이야기를 다음 소재로 삼고 싶었던 줄리엣은 결국 건지 섬으로 찾아가게 되고, 그 정 많은 작은 섬에서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찾게 된다.

이 책의 중심축은 '책과 사람들' 그리고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고통을 주었다면, 책은 새로운 자아와 희망을 주었다. 평생을 독서와 담을 쌓고 살았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책을 접하지만 서서히 빠져 들어가 평생 책만 읽어온 사람보다 순수한 열정을 가지게 되는 과정은, 책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을 흐뭇하게 만들 것이다. 실상, 사람은 책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책이 있어 사람은 꿈을 꾸고 희망을 받고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 이 건지 섬의 사람들처럼, 책이 있어 풍요로워진 세계를 한 번 접한 사람은 저도 모르게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 책 속에서 '전쟁'의 모습은, 모순적인만큼 인간적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건지 섬의 사람들이 하는 전쟁 이야기는 독일군을 무작정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건지 섬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는 엘리자베스는 선량한 독일 군인과 사랑에 빠졌고, 이야기 속의 몇몇 독일 군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인간적인 도리를 다했다. 피해자지만 가해자를 무작정 비난하지 않는 포용력과 공정함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승패와 상관없이 전쟁은 모두를 상처 입히지만, 그 속에서 나는 인간다움이라는 희망을 보았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인 전쟁을 겪고도 순박하고 정이 많은, 배고픔과 불안함을 독서와 온정으로 이겨나갔던 건지 섬의 사람들처럼, 다정한 사람들과 즐길 수 있는 책이 있다면, 무엇이 부러우랴.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의 대부분을 모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앞으로 내가 읽을 수 있는 좋은 작품이 있다는 건 오히려 그만큼 기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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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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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무엇일까?

리뷰 첫머리에 왜 뜬금없는 질문인가 싶지만, 숨가쁘게(!) 책을 읽어내려간 후의 허탈함 뒤에 저 질문이 느닷없이 나를 찔러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온갖 매체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에 대해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내가 세상의 모든 (이성간의) 사랑에 대해 가지는 가장 큰 감정은 '부러움'이다. 거기에 더하자면 의구심 정도일까. 이 무슨 세살바기 어린아이 같은 유치함인가 싶지만 이런 내 성격 탓에 난 로맨스 소설들을 볼 때면 온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고, TV에서 열렬하고도 헌신적인 사랑이 펼쳐질 때면 조용히 채널을 돌렸다. 굳이 (불쌍해 보이는) 날 변호하자면, 내 눈에는 그 모든 애정표현들이 현실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말 그렇게 닭살돋는 말들을 속삭인단 말야?

그런 의문을 뒤로하고 오늘도 (피곤함과 상관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찾아 집어든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는 확실히 재미는 있었다. 문제는... 너무 감정이입이 된다는 점. 단 한글자 차이로 인해 잘못 전해진 이메일 한 통에서 시작된 이메일 펜팔은 어설픈 유머와 신랄한 비판, 상냥한 유쾌함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든든한 남편과 두 아이를 둔 에마는 이메일 대화 속에서 다시 한 번 결혼 전의 '에미'가 되어 가족이라는 '내부 세계'에서 벗어나고, 언어심리학 조교수인 레오는 자신의 세계의 이별에서 벗어난다. 이들의 첫 만남이 그야말로 우연이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였기에 오히려 그 이상으로 주고받는 이메일에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하지만 오로지 이메일의 형식으로만 이루어진 대화라 실제로 두 사람의 감정이 여과없이 보여졌기 때문에 내가 책에 끌려들어간 건 순식간이었다.

침착하게 보이려고 애쓰지만 언제나 감정을 드러내고마는 에미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술에만 취하면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는 레오. 편지보다 빠르고 전화보다는 먼 이메일 안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더 자유로울 수 있었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린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사랑에 대해선 한없이 무지한 내게는 이렇게 순수하게 감정만 부딪히는 경우가 오히려 알기 쉬웠다. 그래서 그런지 등장인물이 30대임에도 불구하고 귀여워 보이고 (불륜이지만) 서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평소 결혼의 책임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에게는 그렇게 두 사람의 '감정'에 끌려갔다는 게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런게 사랑이려나. 엔딩까지 날 강하게 끌었던 팽팽한 대화가 더이상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너무 슬프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겠지. 부디 두 사람이 행복해 지기를.

-우리 주위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요. 우린 그 어디에도 살고 있지 않아요. 나이도 없고, 얼굴도 없어요. 우리에겐 밤낮의 구별도 없어요. 우린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아요. (33)

-당신에게 너무 매여 있게 돼요. 나를 만날 때 등을 돌리고 있는 남자, 나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 남자, 나한테서 메일만 원하는 남자, 실제로 만나는 여자들과는 (짐작건대) 쓰라림을 맛보다가 끝내 고통의 문안으로 들어서고 말기 때문에 내가 쓴 말들을 상상 속의 여자를 창조해내는 데 이용하는 남자, 그런 남자의 메일을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요. (111)

-여느 누구가 아닌 그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입니다. 물론 저에게도 당신은 여느 누구가 아닙니다. 당신은 제 안에 있으면서 저와 늘 동행하는 제 2의 목소리 같은 존재입니다. 당신은 저의 독백을 대화로 바꿔놓았습니다. 당신은 제 내면을 풍부하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132)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순간 당신의 환상 속 에미는 영원히 죽는다는 사실. (164)

-'가정의 평화'는 형용모순이에요.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 짝을 이룬 것이라고요. (252)

-우린 골라인에서 출발하는 셈이에요. 따라서 나아갈 방향은 하나밖에 없죠. 되돌아가는 것. 우린 미몽에서 깨어나는 지난한 과정을 밟아야 해요. 우리가 쓰는 글이 우리의 실제 모습, 실제 삶일 수는 없어요.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며 그렸던 많은 이미지들을 우리의 실제 모습이 대신할 수는 없어요. (278)

-유령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라이케씨, 당신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만질 수 없고, 따라서 실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은 제 아내의 환상이 만들어낸 존재일 뿐이지요. 한없는 행복감, 세상과의 절연 상태에서 기인하는 몽롱함, 글로 지은 사랑의 유토피아......이런 것들이 만들어낸 환상 말입니다. (311)

-우리의 만남이 두려워요. 만나고 나서 당신을 잃게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363)

-'잃는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말아요.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미 잃는 거예요.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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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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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초콜릿 코스모스>가 무척 맘에 들어서 냉큼 온다 리쿠의 다른 책을 집어들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을 때 다른 작품들이 어쩐지 무서운 이야기들 같아서, <밤의 피크닉>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 당연히 좀 오싹한 이야기겠거니 생각했다. 무서운 건 싫어하지만, 영상물만 아니라면 그나마 참을 수 있는데다...무서워하면서도 보고 싶어하는 어린애 기질이 발동해 마음을 다잡고 읽기 시작했다. -중간을 생략하고 말하자면... 이야기의 내용과 상관없이, 난 혼자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잖아... 혼자 기대하고 실망하는 거야 익숙한 일이지만,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래도, 책은 재미있었다. 발랄하고 화려한 재미는 아니지만, 성장소설답게 조금 답답하고 미묘한 공기를 잘 잡아낸 작가의 역량에 감탄했다.

<밤의 피크닉>은 수학여행 대신 일년에 한 번, 전교생이 밤을 새워 함께 걷는 이벤트의 이야기이다. 아침에 출발해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는, 말 그대로 하룻동안의 이야기인데도 이야기는 지루하지 않다. 학교의 이벤트는 간단해 보이는 것조차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게다가 '학교'라는 장소는 다들 한번씩은 거치는 장소니만큼 공감하기도 쉬운 것 같다. 그 시절에는 나 혼자만의 고민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지금보면 다른 친구들에게도 있는 고민이었다든가- 하는 아련함까지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기도 하고. 성장소설 치고는 상당히 시간적으로 짧지만(하룻밤이니까) 그 하룻밤 안에도 아이들은 어른에 한 발짝 다가선다.

주인공인 도오루는 남모르는 비밀이 있다. 아버지가 바람펴서 생긴 배다른 남매, 다카코가 같은 학교, 심지어는 같은 반에 다니고 있다. 도오루와 다카코는 서로를 무시하며 의식하고 있다. 그 둘은 서로를 완벽히 밀쳐내지도, 완벽히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친구들의 도움과, 일상과 조금은 이질적인 밤의 마력으로 그 둘은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갈 수 있었다.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겠지만, 다카코의 태도는 상당히 호감이 갔다. 다카코의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성격일까. 재빠르지는 않지만 관대한 성격이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타입이라고나 할까. 솔직히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딘가 다 조금은 불안하다. 다카코의 엄마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고등학생이기 때문일까 그 어른이 되기 직전의 아슬아슬함이 귀여워 보였다.

시노부의 말대로, 고등학교까지는 청춘의 잡음을 즐겨야 할 때다. 그걸 나도 그 시절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조금 씁쓸하기도 하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지금이라도 열심히 해야겠지. 성장소설은 읽으면서 나도 한 뼘씩 자라는 것 같다. 혹시 내가 정말로 다 자란 어른이라면 성장소설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흡족해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나는 아직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한참은 멀었나보다. 한 뼘 한 뼘 자라나는 수밖에.

-당연한 일이지만, 길은 어디까지고 이어져 있어 언제나 끊어지는 법 없이 어딘가의 장소로 나온다. 지도에는 공백도 끝도 있지만 현실 세계는 빈틈없이 이어져 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매년 이 보행제를 경험할 때마다 실감한다. 철이 들었을 때부터 언제나 간략화된 지도와 노선도, 도로지도로밖에 세상을 파악하지 않아서, 이런 식으로 어디에나 빠짐없이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20)

-수면이라는 것은 고양이 같은 것이다. 시험 전날처럼 부르지 않을 때는 잘도 찾아와서, 잠에서 깨어나면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으면 죽어도 오지 않아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하게 한다. (29)

-내 신발이 없을 때의 불안함, 슬픔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마치 자기의 시간과 행동을 통째로 빼앗긴 듯한 느낌이었다. (31)

-몸을 움직이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걷는 것은 좋아했다. 이런 식으로 차가 없고 경치가 멋진 곳을 한가로이 걷는 것은 기분 좋다. 머릿속이 텅 비어지고, 여러 가지 기억과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붙들어두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더니 마음이 해방되어 끝없이 확산되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59)

-장시간 연속하여 사고를 계속할 기회를 의식적으로 배제하도록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생활에 의문을 느끼게 되며, 일단 의문을 느끼면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촘촘히 구분하여 다양한 의식을 채워 넣는 것이다. 그러면 의식은 언제나 자주 바뀌어가며 쓸데없는 사고가 들어갈 여지가 없어진다. (60)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커다란 누군가가 손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 사람은 손만 있어서 하늘 위에서 이쪽으로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서 그것을 누군가가 꼬옥 껴안고 있다. 수평선을 보면 언제나 그런 느낌이 든다. 한편으로 수평선은, 높은 곳에서부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무서웠다. 그것은 꼭 소리굽쇠를 두드릴 때처럼 웅웅거리는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이제 틀렸다, 너희들은 이제 끝이다, 하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그 소리를 들었을 때가 이 세계의 마지막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83)

-하지만 잡음 역시 너를 만드는 거야. 잡음은 시끄럽지만 역시 들어두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네게는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이 잡음이 들리는 건 지금뿐이니까 나중에 테이프를 되감아 들으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들리지 않아. 너, 언젠가 분명히 그때 들어두었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할 날이 올 거라 생각해. (156)

-좋아한다는 감정에는 답이 없다. 무엇이 해결책인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으며, 스스로도 좀처럼 찾을 수 없다. 훗날의 행복을 위해 가슴속에 간직하고 허둥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아한다는 마음은 어떻게 매듭을 지으면 좋을까. 어떤 상태가 되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만족할 수 있을까. 고백한들, 데이트한들, 임신을 한들, 어느 것도 정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괜히 행동을 일으켜 후회하기보다 마음속에만 소중히 간직하는 편이 훨씬 낫다. (223)

-여름방학 때의 그 불쾌한 느낌. 바로 저기까지 끝이 다가와 있다. 하루하루 확실하게 다가온다. 지금 시작하면 아직 해낼 수 있다. 조금이라도 빨리 시작하면, 시작한 만큼 어떻게든 된다. 그렇게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도저히 손을 대지 못하는 악순환. 일단 책상에는 앉아보지만 다른 일을 하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시작하여 핵심 과제의 주위만 어물쩍거리다, 중요한 것을 조금도 시작하지 못한다. 하루하루 미루는 동안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 후회막급의 심정으로 해야 할 일의 양에 기겁하게 되는 여름의 끝...(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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