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 프로젝트
다비드 사피어 지음, 이미옥 옮김 / 김영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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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목에서도 알다시피 (환생 프로젝트라니!) 이 책은 환생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내가 별 5개를 주기는 쉽지 않은데, 이 책은 어찌나 재미있던지 망설임도 없이 별 5개, 라고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환생 프로젝트라, 제목이 붙여져 있기는 하지만 종교적인 색채로 보는 환생이 아니라 굉장히 유쾌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점점 존재가 희미해지는 듯 보이는 불교지만 외국에서는 어째 사람들이 점점 관심을 보이고 있다하더니 이렇게 재미난 소재가 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우리 나라에서는 교과서나 책에서나 봤던 <환생>. 내가 환생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은 사실 스님들이 작은 미물도 죽이기 싫어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걸어갔다던 이야기였다. 미물이라도 죽이면 나쁜 업보가 쌓여 다음 생에는 인간이 아닌 동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명한 달라이 라마의 환생도. 기본적으로 모든 종교에 똑같은 관심(즉 그닥)을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환생이니 업보니 하는 게 와닿지 않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해박한 지식이나 진지한 생각보다는 웃음 속의 깨달음을 중시한다.

 

주인공인 킴 랑에는 매우 성공한 여자 아나운서로, 남편 알렉스와 딸 릴리를 가족으로 둔 여자였다. 너무 성공한 나머지 딸과 놀아주지도 못하고 남편과는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 (남편은 매우 좋은 남자임에도!) 킴이 <킴>으로서 있던 마지막 날은 딸애의 생일이면서 독일 텔레비전 수상식이 있던 날이었다. 딸애의 생일파티를 뒤로 하고 시상식으로 달려가지만 여러 가지 일은 꼬이고 꼬여 엉망진창이다. 거기다 잘생긴 남자와 바람까지 피우게 되고... 여러모로 엉망진창이었던 하루를 정리하기 위해 올라간 옥상에서 우주 정거장의 파편을 맞고 사망한다. (애도) 하지만 눈을 떠보니 웬걸, 자신이 개미가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스스로를 부처, 즉 붓다라고 소개하는 "뚱보" 개미까지! 킴이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여서 개미로 태어났다는 말에 킴은 격분하지만 도리가 없다. 다시 가족을 되찾기 위해 어떻게든 접근하려 애를 쓰지만 그 와중에 다시 죽어버리고... 다시 개미로 태어난 킴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환생한 개미인 "카사노바"를 만나 좋 더 좋은 업보를 쌓아 가족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그래서 얄미운 남편의 새 애인을 떼어놓고자 노력한다.

 

물론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그 과정의 스케일이 어마어마하게 큰 만큼 (온갖 동물을 다 거치니ㅋㅋ)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게다가 게스토도 빠방하니 어! 하고 상큼하게 놀라주며 훌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중요한 등장인물 중 하나인 카사노바는 이름이 좀 웃긴 인물, 이 아니라 정말 카사노바 본인으로 영 좋은 업보와는 어울리지 않는 성격 탓에 무려 113년 동안 개미로 환생했다. 전적으로 킴의 관점에서 쓰여진 이 소설 중간중간에 * 표시와 함께 쓰여진 말풍선안의 카사노바 관점의 글은 정말 매력덩어리라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환생이니 업보니 하는 용어가 많이 쓰이고 그게 글을 이끌어 가지만, 이 소설의 제일 중요한 건, 삶의 소중한 순간은 극락보다 좋다, 라는 교훈아닌 진리를 말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훈계조로 말했다면 재미가 없었겠지만 각종 동물들의 삶을 겪으며 벌어지는 해프닝에 주인공이 가진, 가족을 향한 사랑에 유머까지 곁들이니 금상첨화!

독일 책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데 이렇게 재밌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물론 작가의 개성과 실력 덕분이겠지만. 이게 첫 번째 책이라 하니 앞으로의 작품도 너무너무 기대가 된다.

 

+유쾌한 소설을 읽고 싶으신 분

+미드 <내 이름은 얼>을 보고 소재가 참신하다 생각하셨던 분

+삶의 소중한 것이 궁금하신 분

+환생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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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 라이프 (보급판 문고본)
앨리스 카이퍼즈 지음, 신현림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어제 저녁 오랜만에 펑펑 울었다. 참을 이유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책장을 넘겼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눈가가 시큰하다. 아주 오랜만에, 책을 읽고 가슴이 울려서 펑펑 울어봤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상큼하게 가라앉는 하늘빛 바탕에 아기자기 귀여운 노란빛 그림들이 늘어선 표지는 자세히 보면 하늘빛 포스트잇이 붙어 있기에, 책을 다 읽은 지금 어쩐지 또 새롭다.

 

사실 이 책에 대해서 들은 건 좀 됐지만 별 생각은 없었다. 내용이 뭐다, 라고 들은 건 아니었고 새로나온 책을 체크할 때 독특하다는 사람들의 평을 본 것 뿐이었으니까. 거기다 사람들이 좋다, 좋다 하면 어쩐지 하기 싫어지는 이놈의 청개구리 기질 덕에 아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내가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던 중 이 책을 보게된 건, 아마 우연이었을 테지만, 필연이라 생각하고 싶다. 처음에는 흥미였다. 어, 나 이 책 어디서 들어봤어, 라는 아주 가벼운 흥미. 책도 가볍고 작아 책장에서 쏙 빼들어 대뜸 중간을 펼쳤다. 독특하다는 사람들의 평대로 속 안은 보통의 문단 형식이 아니라 노란 포스트잇 위에 적어놓은 짤막한 문장들로 되어 있었다. 한 장 두장,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넘겼다. 너무 일상적이고, 공간에 비해 글이 너무 적었으니까. 그런데.

 

쿠궁. 그냥 갑자기 눈가가 시큰해졌다. 눈물이 나오기 전 급격하게 몰리는 열기에 정신이 없었다. 도서관 같은 공공장소에서 울 수는 없어, 라는 쓰잘데기 없는 오기로 책을 가까스로 덮고 제 자리로 밀어넣었다. (*다 읽은 책은 북카트에 놓아주세요, 라는 말은 무시한 채)원래 목적이었던 책을 빌리고 돌아오는 길에 싱숭생숭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뜬금없이 엄마가 보고 싶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엉엉 울고 싶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내 머리 속을 제일 크게 차지하고 있던 생각은, 다음엔 꼭 빌려서 엄마랑 같이 읽어야 겠다, 였다.

 

그래서 빌려온 그 책을, 단숨에 다 읽고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고 말았다. 귀엽지만 인간마음을 (당연히) 모르는 우리집 강아지는 주인이 울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내 발가락을 물고 있었다. 이 책 덕분에 코가 다 헐었다. 나쁜 것, 날 울리다니.

 

내용은 아주아주 간단하다. 주의할 것은 절대 픽션이라는 것. 실화라고 생각하면 더 슬프다. 물론 실화일 수도 있다. 상황이 그만큼 일상적이니까.

부모가 이혼해 산부인과 의사인 엄마와 함께 사는 클레어는 겨우 15살 소녀다. 엄마가 너무 바빠서 제대로 얼굴 맞대고 이야기 할 시간도 없기에 그 둘은 냉장고 위에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서로에게 말을 전한다. 심부름, 친구 이야기, 아빠 이야기, 토끼 이야기 등등. 바쁜 엄마에게 클레어가 조금 불만이 있던 것 빼고는 아무 이상이 없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덜컥 유방암에 걸렸다. 혼자 사는 엄마로서 딸에게 힘든 짐을 지우고 싶지 않던 엄마는 일상처럼 딸을 대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클레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엄마가 정말 아픈건지 실감을 하지 못해 자신의 남자친구니 휴가니 하는 불만을 얼굴 보기 힘든 엄마에게 쏟아붓고 만다. 그런 와중에 엄마의 유방암이 특이해 계속 진행되고 클레어는 더이상 현실을 피할 수가 없다. 엄마 또한. 클레어는 엄마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고, 엄마의 일생을 좀 더 이해하고 싶었다. 엄마는 더이상 딸이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죽음 앞에서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딸이라 아들과 엄마, 아들과 아빠 사이는 잘 모른다. 그래도 딸과 엄마 사이는 좀 안다. 내가 겪고 있으니까. 나는 아빠에게 애교를 부리는 딸은 단연코 아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아빠와는 공통화제가 별로 없어 가끔( 아주 가끔은) 사랑하는 데도 불구하고 시간을 지내기가 불편할 때가 있다. (특히나 아빠와 내가 거의 혼자 놀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지만 엄마와는 할 얘기가 무궁무진하다. 큰 딸이라 예전에는 해주지 않던 엄마의 힘들었던 시절, 친가, 외가 쪽 이야기, 우리 어렸을 적 이야기, 등등 민감한 이야기부터 가볍게는 연예인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등. 불행히도 내 성격의 80%는 아빠쪽이라 엄마와 자주 싸우기도 하지만, 그만큼 엄마가 더 가까운 건 사실이다.

이 책에서 아무리 엄마가 바빴어도, 클레어가 엄마에게 느끼는 유대감은 아빠 사이의 유대감과는 또 다를거다. 엄마와 딸 사이니까. 같이 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만큼 더 슬펐겠지.

 

어쩜 이렇게 이 책은 날 울리는지 모르겠다. 그냥 생각만 해도 찡해져서 뒤죽박죽이 된 채 울상이 되어 버린다. 우리 엄마가 낮잠 자고 있는 이 시간에도.

 

중학교 시절,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길렀던 강아지 하늘이가 죽었을 때 나는 일주일을 울었다. 처음 죽어있는 고 작은 털복숭이 강아지를 봤을 때는 충격으로 울었고, 그 차가워진 몸을 수건에 싸서 묻을 때도 울었고, 돌아오는 길에도 내내 울었다. 저녁 밥상에서도, 방 안에서도, 그 녀석의 물건들이 어느 순간에 튀어나올 때도 울었다. 저녁 밥상 앞에서 울고 있는 내가 엄마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만큼, 어쩌면 우리보다 더 하늘이를 좋아했던 엄마가 내게 말했다. "누군가가 죽은 뒤 우는 사람은, 그 사람 살아 생전에 잘 해주지 못해 미안해서 우는 거다."라고. 근데 사실이 그랬다. 처음엔 더이상 그 조그만 녀석이 왕왕 대며 짖는 소리도, 부드러운 털뭉치도, 따뜻했던 몸도 더이상 없다고 생각해 눈물이 나왔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내가 녀석을 예뻐 할 줄만 알고 씻겨주지도 배설물을 치워주지도 않은 그 미안함에, 냄새난다고 놀아주지도 않았던 그 미안함에 울게 되었다. 너무 미안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고작 1년 지낸 개가 죽어도 그런데, 우리 엄마가 죽는다면... 클레어는 강한거다. 나 같으면 만날 울면서 지낼거야.

 

이 세상의 모든 딸들과 엄마들의 일상에 꼭꼭 필요한 책. 아들들도 보면 좋구요. 단지 남들이 우는 거 보기 싫으면 집에서 혼자 읽을 것!

 

*기억하고 싶은 글귀 (옮겨 쓰며 또 울고....)

-피터와 함께 창밖을 보고 있었어, 클레어. 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면서. 따사로운 햇볕에 눈이 녹기 시작하고 피터의 부드러운 털이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있네. 모든 게 잘될 것 같아. (55)

-엄마, 지난밤에 피곤해 보이더라. 잠잘 가다 느꼈어. 지금보다 더 걱정해야 되나? 이런 건 글로 묻는 게 더 쉽고 편해. 엄마 기분이 어떤지, 치료를 어찌 되는지 물어볼 땐 말야. (84)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거지. 엄마가 아픈데도 이러다니. 엄마 방사선 치료도 같이 못 가고, 이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이기적으로 굴어서 미안해요. (103)

-엄마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말 안 하면서 왜 나는 엄마한테 다 얘기해야 해? (107)

-엄마, 집에 없네. 엄마는 늘 밖에 있는 사람이잖아. 전혀 이상할 건 없지. 안 그래? 냉장고에 붙은 엄마 메모 봤어. 만약 엄마가 있음 직접 말할 텐데. 없으니까 여기다 쓸 수밖에 없잖아!

마이클은 최고야. 재미있고, 똑똑하고, 귀엽고 내가 원할 때 내 곁에 있어 줘. 이건 엄마보다 더 나은 점이야. 아빠보다도. 그리고 엄마도 아빠랑 헤어졌으면서 마이클과의 일에 대해 충고할 입장은 아니라고 봐! (115)

-아빠는 우리가 너무 오래 싸우는 것 같대. 대화가 부족해서 그렇대. 난 엄마를 걱정해야 할지 그냥 내 인생이나 신경 써야 할지 모르겠어. (123)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런 일들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책은 없구나. 그런 책이 있음 좋겠어.

넌 학교도 다녀야 하고 좋은 친구도 사귀어야 하고 그 외에 보통의 열다섯 살짜리 아이가 할 일들을 해야잖니. 이런 것들이 각각 잘되야,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어. (124)

-그동안 엄마한테 화내서 미안해. 그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미안해. (125)

-말할 수가 없어, 클레어. 미안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127)

-병은 나을 수 있어. 엄마를 위해 내가 강해지도록 노력할게. 엄마도 나을 거라는 거 잊지 마. 꼭 그래야 해. 엄만 좋아질 거야. (129)

-네가 몹시 필요할 만큼 엄만 너무 약해졌어. 하지만 나 때문에 네 생활이 흐트러지고 네가 고생하는 건 싫어. 그냥 엄마의 어린 딸로 남길 바란단다. 그래서 알리지 않았어. (132)

-엄마가 내 나이였을 땐 어땠을지 궁금해. 학교에서 우린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라. 우린 틀림없이 친구가 됐을 거야. (135)

-공원을 함께 걷자. 엄마가 좋아하는 분홍색 꽃들도 보고. 그 꽃 이름이 무였더라? 강가에 서서 해가 지는 풍경도 보고. 내가 산책하는 내내 엄마 손을 잡고 있을 거야. 4시에 만날까? (143)

-나는 여자인 엄마를 상상하는 게 어려웠어. 엄마를 여자가 아니라 엄마로만 알았던 거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여자로서의 엄마 얘기를 해 줄래요? (153)

-엄마를 바라볼 때/ 내가 꿈꾸는 여인을 본다/ 강인하고 용기있고/ 아름답고 자유로운/ 엄마, 사랑해 (160)

-의사가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다 있네?"라고 한 말이 기억나. 농담이었는데 엄만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어. 내겐 기적이었어. (166)

-선물 몽땅 맘에 들어. 그중에 최고의 선물은 엄마야. 바깥에서 보다니. (167)

-때때로 인생이 어렵고, 세상이 힘든 곳이며, 우리 운명은 어쩔 수 없다는 걸 네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클레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가끔 누구 책임도 아닌 일이 일어나기도 해. (171)

-클레어, 오늘 아침 부엌에서 춤추던 네 모습이 떠올라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어. 풀잎 끝이 갈색으로 물들어 가고 불쌍한 피터는 아직도 더위에 헐떡거리는데, 춤추는 너만이 맑고 신선했단다. 사랑해. (183)

-나도 엄마의 아픔을 함께하고 싶어. (187)

-길이 구부러지고 휘어져도

  우리는 함께 있을 거야

  구부러진 인생을 껴안고

  우리는 기댈 거야

  서로에게

  엄마는 나에게

  나는 엄마에게 (196)

-넌 나에게 큰 힘이 되고 있어. 나도 너한테 이렇게 잘해 준 적이 있었던가 싶다.

  나는 좋은 엄마였니? 이건 모든 엄마들이 묻고 싶어도 감히 묻기 힘든 질문이지. 물론 엄마들에겐 물을 기회도 잘 없겠지. (200)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는 내 엄마잖아. (201)

-엄마는 네가 정말 필요해, 아가.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던 싱글맘인 내가 너한테 기대는 건 익숙치 않아서 그랬어. 자신을 돌봐 줄 딸이 절실히 필요한 반쪽 여자가 되는 게 쉽지가 않네. (206)

-나는 널 어리고, 맑고, 빛으로 가득 찬 존재로만 끌어안고 있었지. 내가 너에게 몹쓸 짓을 했더구나. 내가 널 어른이 되도록 해 주면 넌 그렇게 될 거야. 그리고 난 그렇게 해야 하고. (2007)

-내가 가질 시간이 이제 없는 것 같아. 아무래도 그 시간들을 낭비하고 중요한 걸 놓친 것만 같구나. 그래도 나에겐 네가 있지.

사랑하는 딸이. 너는 내 삶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의미와 기쁨을 주었어. (207)

-문득 내가 엄마 인생을 거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내 나이에는 어땠어? 아빠와 주로 무엇을 얘기했지?

(중략) 이런 모든 질문들이 날 울려요, 엄마. 왠지 모르겠어. 아마도 이런 질문들이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어른들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 같기 때문인가 봐. 나 무섭고 싫어. (209)

-부엌에 앉아 사진 자르는 네 모습 영원토록 봤음 좋겠다. (212)

-엄마는 내게 미래와 당당히 맞설 힘을 줬어요.

최악을 준비하며 최선을 희망한다. 엄마, 좋은 생각이죠? (213)

-그리고 난 '더 좋은 엄마'를 바라지 않아요. 나에겐 엄마는 최고의 엄마야. (215)

-미래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넌 괜찮을 거야. 그렇지?

더 이상 멋진 딸은 없단다. (222)

-나에게도 더 멋진 엄마는 없어. (223)

-우리에게 더 많은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엄마, 이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야. 엄마랑 함께한 시간이 더 많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있어서 기뻐. (229)

 

+세상의 모든 딸과 어머니께

+펑펑 울고 싶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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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6
카를로 콜로디 지음, 김양미 옮김, 천은실 그림 / 인디고(글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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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 내가 인터파크에서 이 책의 서평단에 신청했을 때 가장 끌린 건 피노키오에 대한 기억보다는 책 표지서부터 보이는 "예쁜" 그림체였다. 부드러운 색감에 아기자기한 그림체...예쁜 걸 사랑하는 내가 스크린 너머로 보이는 삽화에 빠진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깜박 잊고 배송지를 자취방이 아니라 집으로 해놔서 엄마에게 전화로 웬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얼른 책을 보고 싶어서 주말이 기다려졌다. 총 2시간 반이 걸려 도착한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를 찾았다. 버스 안에서 늘어져 자서 머리는 부스스했고 눈은 살짝 부어있었다. 이것저것 쑤셔넣은 짐가방이 발밑에 떨어져 있었다. 엄마는 TV를 보다가 일어나 나와서 내 모습이 웃긴지 으하하 웃으며 저기 있다고 손짓으로 내 책상을 가리켰다.

 

아...쓰레기장같은 내 책상 위에 저렇게 예쁜 책이 놓여 있었다니.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앞으로도 2주간은 청소할 계획이 없다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다...) 어쨌거나 엄마는 내 물건은 무조건 내 책상에, 라는 공식 하에 가져다 놓은 듯 하다.

 

처음 본 '피노키오'는 생각보다 작아서 큰 책장보다는 책상 앞 작은 책장에 꽂아두고 생각날 때마다 펴보면 좋을 사이즈였다. 대충 비교하자면 다이어리의 평균적인 크기...라고나 할까. 양장본이라 표지도 반들반들하고 그림은 너무 예쁘고... 이렇게 생긴 다이어리가 나와도 좋을 것 같다. (그럼 난 또 사느라 돈을 허비하겠지)

 

피노키오라... 난 동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어지간한 동화는 알고있다고 (몰래) 자부하고 있다. 피노키오, 인어공주, 신데렐라, 엄지공주... 삽화도 좋고 해피엔딩도 좋고 무엇보다 그 아기자기함이 좋다. 그래서 피노키오도 나름 잘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럴수가.

 

피노키오...... 때려주고 싶다.....어쩜 이렇게 꼬맹이인지. 어린시절 봤던 피노키오는 어리숙하지만 유쾌했는데 그럭저럭 어른 대열에 끼게 된 후 보니 이건 그야말로 매를 부르는 꼬꼬마가 아닌가...! 몇 번씩 타일러도 지 멋대로 하기 일쑤고, 고집은 센데 아는 게 없다. 덕분에 옆에서 살짝 꼬시기만 해도 팔랑팔랑 팔랑귀가 되어 나쁜 길로 룰루랄라 노래까지 부르며 달려나간다.

 

한참을 으으...때려주고 싶다...를 연발하며 책장을 넘기느라 그 예쁜 삽화에 위안도 못 받고 있을 무렵...옆에서 끙끙 거리는 내가 이상하고 성가셨는지 컴퓨터를 하던 엄마가 뭔데 강아지마냥 끙끙대? 하고 물었다. 나는 열변을 토하며 꼬꼬마 피노키오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하자 엄마는 또 으하하하 웃더니 "너랑 뭐가 다르냐"하고는 또 막 웃었다.

 

과연. 같은 종(?)을 은연중 싫어하는 내가 유난히 과민반응을 보인 이유가 있었다. 지금이야 쿨하게 인정하겠지만 어렸을 적의 나는 내가 고집이 세다는 것도, 여러 가지 충고를 해주시는 주위 어른분들이 (당연히) 나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꼬꼬마였다. 특별히 나쁜 짓은 안 했다쳐도 고집만큼은 피노키오 못지 않았다.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도 웃고있는 엄마를 보니 그냥 조용히 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노키오에게 더 화내봐야 내 얼굴에 침뱉기니까.

 

묵묵히 엄마를 의식하며 책을 다시 읽으려니 이제껏 무시했던 삽화가 보였다. 화려하기 보다는 부드럽고 고운 색채에 팔다리가 짧아서 더 아기자기해 보이는 그림체가 잘 어울리는 페이지가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주는 듯 했다. 삽화 속 피노키오는 하는 짓(?)과 다르게 눈도 똥그랗고 작은 팔다리를 활기차게 놀리는 아이라 제페토 할아버지의 마음이 조금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저렇게 작은 애가 앞에서 꼬물꼬물 움직이면 어느 부모가 예뻐하지 않을까.

 

피노키오를 개과천선 시킨 건 자신의 깨달음도 있겠지만, 끈기있게 옆에서 돌봐주고 바른 길로 이끌어준 존재들 덕분이다. 더없이 너그러운 아빠, 제페토 할아버지와 항상 자애롭게 돌봐주는 엄마, 요정님, 간간히 등장하는 말하는 귀뚜라미 같은 동물들 덕분에 피노키오는 (번번히 놓치지만) 다시 한 번 바른 길로 들어설 기회를 갖는다. 그런 피노키오가 부러웠던 건, 내게 이제는 그런 기회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겠지. 내가 어렸을 적 본 피노키오는 이렇게 자세한 버전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만화로 보면 내용보다는 재미에 치중해 코가 늘어나는 피노키오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나나 동생에게는 좀 늦었지만, 내 사촌동생에게는 아직 늦지 않았겠지. 다음 번, 사촌동생을 만나면 큰 맘먹고 내 예쁜 피노키오 책을 빌려줘야겠다. 그림 예쁘지 하고 어깨도 으쓱거려보고, 그러니까 너도 엄마랑 아빠 말 잘 들어 하고 오랜만에 어른인 체도 해봐야지. 아마 내 고집쟁이 사촌동생은 콧방귀를 흥 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언젠가 더 시간이 지나면 그 누나가 왜 그렇게 잘난 척했나, 하고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생각할 날이 올지 모른다.

뭐, 그런 게 그림책의 미덕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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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 모으는 소녀 기담문학 고딕총서 4
믹 잭슨 지음, 문은실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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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서관에서 책을 찾는 일은 보석을 발굴하는 것과 같다. 가끔은 맞지 않는 책을 찾아낼 때도 있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책이 한순간에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기도 한다.

뼈 모으는 소녀는 오랜만에 잡아본 '흥미로운' 책이었다. 책이 얼마 없는 학교 도서관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발견한 이 책은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지는 작가의 이름과, 범상치 않은 책표지 그림 덕택인지 독서욕구를 자극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단언컨데.... 난 이제부터 이 작가의 팬이다..!!

내가 영어만 좔좔좔 했어도 당장 홈페이지(www.mickjackson.com)에 접속할텐데, 불행히도 영어를 보면 내 섬약한 신경이 더이상의 스트레스를 견뎌낼 것 같지 않아 당분간 미뤄두기로 했다. 작가의 다른 책들이나 찾아봐야지.

 

이 책의 원제는 Ten Sorry Tales로, 난 사실 우리나라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임팩트도 강하고. 물론 열개의 미안한 이야기들, 이라는 원제가 동화를 뜻하는 Fairy tales와 겹쳐서 말장난스러운 것도 마음에 들지만서도.

10개의 이야기가 한 책안에 들어가 있다보니 다들 단편이 되었는데, 하나 하나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정말로 하나같이 '미안한' 이야기들인데도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강렬해서 읽고나면 어쩐지 후련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두려운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하다.

 

지하실의 보트라는 단편으로 시작하는 열개의 이야기들은 각자 음울한 듯 잔잔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보이는 현실과 어두운 면이 교묘하게 얽힌 판타지다. 판타지라 말하기엔 조금 거창할지도 모르지만, 현실 세상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을 일을 판타지라 부른다고 정의하자면, 확실히 판타지이긴 하다. 어느 누가 돈을 주고 은둔자를 고용하고(물론, 나는 돈이 넘쳐나는 부자들의 사고방식을 잘 모르겠지만) 핀으로 고정된 나비들을 살릴 수 있겠냔 말이다.

 

정말 고르기 힘들지만, 가장 기억나는 단편을 고르자면 역시 제일 처음 읽은 지하실의 보트가 되겠다. 믹 잭슨의 세상을 처음으로 접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평소 내가 궁금했던 '지하실의 보트 꺼내기'가 소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혹시 아실까 모르지만, NCIS에서 깁스는 항상 집 지하실에서 보트를 만드는데 아무리 봐도 쪼꼬만 문으로는 나갈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보트가 시즌 3 혹은 4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걸 볼 수 있다. 그 어떤 살인 미스테리보다 날 괴롭히던 문제였기에, 믹 잭슨이 이 단편에서 제시한 해결책은 내 마음에 꼭 들었다.

 

모리스 씨는 전쟁에서 왼쪽 다리를 잃은 꼼꼼한 성격의 할아버지이다. 오랫동안 일했던 철물점을 퇴직한 후, 무언가 할 일을 찾아 고민하던 모리스 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탔던 것 같은 보트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차근차근 보트를 만들어 나간다. 모리스 씨가 문제점을 깨달은 건 보트를 다 만들고 난 뒤였다. 모리스 씨의 작은 지하실 문으론, 보트가 지나갈 도리가 없었다! 상심한 모리스 씨가 몇 날 몇일이고 보트를 바라보며 소일하던 어느 날, 마을에 홍수가 나 모든 사람이 피해를 입었다 할 때, 모리스 씨는 지하실에서 불어난 물에 보트를 띄우고 즐거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물이 빠져나가 처참해진 지하실을 보수하고 넓혀가며 다음 홍수를 기대하고 있던 모리스 씨에게 군인들이 홍수를 대비해 막아놓은 모래 주머니는 큰 골치덩이였다. 비가 오기 시작해 모리스 씨가 분한 맘에 모래 주머니를 한쪽 발로 쿡쿡 찌를 무렵, 어디선가 사람들이 나타나 모래 주머니를 일사분란하게 나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홍수가 마을을 덮쳤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터널에서 신나게 보스를 타던 모리스 씨는...

 

까지만 하도록 하자. 마지막 부분이 제일 즐거웠으니까, 다른 사람도 즐겨야 할 여지는 남겨둬야지...

 

보트 이야기도 재밌었지만,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같은 경우에는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기억에 남는다. 뭐랄까, 요즘 스트레스 받는 일도 많고 장래에 대한 걱정을 하느라 늘어난 생각 덕에 공감을 한 이야도 있지만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해피 엔딩을 생각하고 있다 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야기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는 과장이고 생각이 더 많아졌달까. 핀은 엄마와 말다툼을 한 뒤 가출을 해 숲에서 지내고 그 동안 핀의 사려깊음과 자기 주장은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마치 숲 속에 사는 동물처럼. 인간으로서의 기억도 사라진 핀이 어쩌다 우연히 기억을 하나씩 되찾고 집에 다가갔을 때. 나는 핀이 엄마에게 달려가 안길 줄 알았다. 그렇게 해피 엔딩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제일 슬픈 건, 핀의 생각에 내가 공감한다는 거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 였으면 좋을텐데, 라고 문득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삽화도 그렇지만 분위기에서 팀 버튼이 생각난 게 혹시 나만의 생각일지는 모르겠다. 삽화의 덕이 크지만, 비슷한 '판타지'고 우울하고 어두운 면을 다루지만 재미있고 나름 경쾌하다는 면이 닮은 것 같다. 아니면 말구..

 

혹시 도서관 가실 일이 있는 분께 꼭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생애 처음으로 그는 늙은이가 된 심정을 느꼈다. 쓸모없고 닮아빠진 부품이 된 것 같았다. (20)

-우연이란 세상이 때때로 당신의 관심을 끌려 하는 한 방법일 뿐이다.

-또 다른 나비는 어찌나 검고 촉촉하게 윤이 나는지, 마치 방금 전까지도 잉크병에 빠져 있었던 것 처럼 보였다. (32)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일이란 누구에게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움직일 수 없는 견고한 진실이 당신 앞에 버티고 서는 일은 거의 없다. (39)

-이것은 이른바 '죽은 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표현하려는 것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경의이다. (108)

-그러나 어떤 생각은 견디기 어려운 가려움증 같아서, 그냥 내뱉어 버리는 수밖에 없다.

 

 

+팀 버튼의 분위기를 좋아하시는 분

+심심하신 분

+단편을 좋아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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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일 1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

 

표지만으로도 매혹적인 책 위의 띠지에 쓰여진 이 찬사에, 그리고 가고일이라는 제목에 그저 무심히 중세의 러브 스토리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가고일이라는 우리 나라에서는 생소한 단어에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어느 영화에서 본 음울한 하늘을 배경으로 한 돌석상뿐이었다. 이상하게도 떠오르는 이미지는 모두 다 어둡고 쓸쓸한 것들이라, 중세라는 가만 두어도 우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그런 이야기겠거니. 유난히 졸렵던 토요일 오후, 책 두권의 무게를 손으로 가늠하며 그저 표지에 시선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책을 받아든 그 날, 시험기간을 공부보다는 스트레스로 지쳐 돌파한 나는 책을 읽으려고 했다기 보다는 자기 전의 무료한 시간을 죽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졸음을 이겨내며 책을 읽기엔 내가 아직 진정한 독서가가 아닌가보다,  스스로를 비죽여 가며. 하지만 좋은 책은 사람을 독서가로 만드는 법이었다! 심봉사가 번쩍 눈 뜨는 것마냥 핏발 선 눈을 뜨고, 침대를 구르듯 내려와 책장을 넘겼다.

 

말도 안 돼. 데뷔작이라니. 정말이지 좌절했다. 뭐든지 많이 하면 늘게 되어 있다. 책을 한 권 두 권 읽다보면 취향에 상관없이 잘쓴 책이 존재한다는 걸 차츰 깨닫게 되고, 어느 책이 그런 책인가 알 수 있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글도 쓰면 쓸수록 느는 법이고. 그런데 이게 데뷔작이란다. 이 톡톡 튀는 언어들 때문에 눈을 뗄 수가 없는 작품이 무려 첫번째 작품이란다. 물론 이 작품을 쓰기 전에 수많은 습작이 있었겠지만 그저 놀랍고 감탄하고 (비교되는 나로 인해) 우울했다.

 

[가고일]은 내 예상을 시원하게 깨부수는 일부터 시작했다. 중세시대를 상상하고 있던 내게 난데없이 눈에 들어오는 마약에, 버번(술)에 차까지. 어? 하는 것도 잠깐 아직 이름도 모르는 주인공의 차가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다. 설마 죽지는 않겠지. 초장부터 마약이 등장하고 이어지는 화상 이야기에, 뒤따르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우울한 어린시절이 줄줄이 흘러나오는데도 독특한 표현력은 마약처럼 읽는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다사다난한 어린시절 덕분인지 천성이 그런 것인지, 주인공은 사람을 끄는 말솜씨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실제로 들으면 친구보다는 적을 더 많이 만들 말투지만 지면상에서는 블랙유머로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하긴, 화상을 입고 누워있는 사람이 사랑스럽게 말하기도 어려운 일이겠지.

 

"개인적으로 하느님의 거대한 계획이 아이의 폐를 태워 없애는 거라는 사실을 일곱 살짜리 여자 애에게 말하는 건 몹쓸 생각이라고 믿는다." (52 page)

 

아, 나름 재치있다고 생각한 구절을 옮겨 써보았는데 이야기 밖의 구절은 책 안에서보다는 싱싱함을 잃는구나. 그 재치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라도 꼭 다른 분들께 권해 드려야겠는데?

 

이 작가의 역량이 어느 정도냐 묻는다면, 이 작품 곳곳에 단테의 신곡이 배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고등학교 때 포기하고 또 포기한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고 대답하겠다. 거기다 공감되는 구절은 어찌나 많은지. 일본에 있었던 사람인 만큼, 일본에 대해서도 해박해서 그 친숙함에 순간 놀라고 웃어버렸다. 외국에 갔다와본 나로서는 일본인도 아닌 서양인(캐나다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아시아인의 사정이 어찌나 웃기던지.

 

"서양 나라에서 살면서 겪는 가장 큰 문제는 일본 여자로서도 작은 편인 사유리가 자신에게 맞는 옷을 종종 아동복 가게에서 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137page)

 

 

사실 이 책은 1,2 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다 각 권의 두께 또한 척 보기에는 만만치 않다. 긴 이야기를 꺼리는 사람이라면 잠시 얼굴을 찌푸릴만도 하다. 하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한다면, 아무리 그런 사람들이라도 책의 두께와 이야기의 길이가 책을 읽는데 전혀 문제가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거라 믿는다. 정말이지 손을 뗄 수가 없으니까.

 

주인공은 인간적으로 결코 완벽해 보이지 않는다. 어렸을 적이야 주인공의 잘못이 아니라 해도 커서는 에로영화계에서 이름을 떨쳤고 술에 마약에 방탕함까지. 거기다 어찌나 말을 얄밉게 하는지. 마음 씀씀이가 나쁜 사람은 아닌데 처음 등장하는 주인공은 화상을 입은 몸뚱이 속에 한없이 가벼운 영혼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수백년간 기다리고 사랑해주고 기억해준 인연이 있다는 것 만으로 한없이 부러운 사람이기도 하다.

이야기 중간에 나오는 단편적인 사랑 이야기들 역시 잊을 수 없을만큼, 전체적인 이야기에 견줄만큼 사랑스럽다. 그렇다, 700년의 사랑이야기가 매혹적이고 흥미진진하다면 그 이야기들은 애틋한만큼 사랑스럽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바이킹 시귀르드르의 이야기였다. 아마도, 그만이 짝사랑과 가장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름답다고 말해야 할까. 나는 이 이야기에서 감동을 느꼈다. 사랑스럽고 그만큼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름다웠는가? 사실 모르겠다. 바이킹 시귀르드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울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울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으니까 참아야만 했다. 날 울릴 뻔한 이야기가 포함된 이 스토리가 아름다웠는가?

나는 모른다. 모른다고 말하기는 정말이지 쑥스럽지만, 모르겠다. 나중에 사랑을 하면 알게 되려는가. 나는 그저 부러웠다. 700년을 우직하게 그야말로 심장을 내줄만큼 사랑한 누구가가 있는 마리안네가 부러웠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불운에도 기다려주는 이가 있어서, 자신이 가슴에 품고 살아갈 이가 생긴 주인공이 부러웠다. 내가 아직 진정한 사랑을 알기엔 어려서 이러는가.

이 가슴 저리도록 부러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분명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일터다.

 

그래, [가고일]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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