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의 비밀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백설자 옮김 / 현암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펄펄 살아있는 인형들이야." 18p

사실 읽은 지 꽤 되는 책이라 메모와 내 기억력만 가지고 리뷰를 쓰려니 굉장히 두렵다. 가뜩이나 온갖 비밀스런 의미들이 넘쳐나는 이 책이 올바르게 소개되지 않을까봐.

소피의 세계에서 나를 반쯤 기절시켰던(중학생? 고등학생? 아무튼 그 시절의 나에겐 너무나도 졸려운 책이었다) 요슈타인 가아더가 쓴 이 책은, 소피의 세계를 읽기 전부터 날 매료시켰던 책들 중 하나였다. 불행히도 내 안타까운 기억력 덕에 한동안 제목도 작가도 모른 채 끙끙 앓았지만, 책을 찾을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그 때에도 책의 내용들은 내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아빠와 함께 아테네, 혹은 그리스 어딘가에 있을 엄마를 찾아 떠나는 소년, 한스 토마스가 여행을 하며 겪은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독특한 아버지의 밑에서 자라서인지 나름 침착하고 생각이 많은 한스 토마스를 찬찬히 따라간다. 책에서 한스 토마스의 아빠는 종종 "한스 토마스야,"라고 풀네임을 불르는데 어쩐지 그 느낌이 좋아서 입에 착 달라붙는 것 같다. 실제로 우리 아빠가 내 이름을 성까지 붙여 부르면 좀 무섭겠지만...(뭔가 찔리고 있음)

소피의 세계, 마법의 도서관에서도 날 미소짓게 했던 요슈타인 가아더 작품의 세심함은 여전하다. "카드의 비밀" 제목 답게 책에서는 카드가 실컷 나온다. 특히 조커가 제일 중요한 카드로 비춰지는데, 처음에는 머리가 좀 아프지만 읽다보면 조커에 어쩐지 정이 가는게 또 묘하다.

이 책의 소제목은 글귀가 아니라 각 카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이아몬드 에이스, 다이아몬드 2 등등... 그 순서 또한 나름 의미가 있으니 책을 읽으며 찾아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엄마를 찾으러 아빠와 둘이 떠나는 여행이라 책의 반이상은 아빠와 한스 토마스의 대화나 마찬가지다. 한스 토마스 생각에 의하면 국가에서 연구비를 받아도 될만큼 철학자같은 아버지와, 여행 중 겪는 신비한 일을 통해 점점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한스 토마스의 대화는 이게 과연 정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인가 싶을 정도로 철학적이다. 읽으며 잠깐, 이래서 엄마가 떠난 건가, 하고 실없는 생각도 해봤다.

한스 토마스의 아빠는, 소위 사생아라고 하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다. 적군과 사랑에 빠진 할머니는 그 군인이 떠난 후에 한스 토마스의 아빠를 낳아 길렀다. 아빠에게는 카드의 조커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데 한스 토마스는 이런 과거 덕에 아빠는 스스로를 '조커'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스스로를 찾기 위해 집을 나간 엄마를, 되찾아 오기 위해 아버지와 길을 떠나는 한스 토마스는 주유소에서 만난 난쟁이가 준 돋보기로, 어느 한적한 산골마을의 빵집 할아버지가 빵에 넣어 건네준 꼬마책을 읽으며 점점 이상한 일을 겪는다. 책속의 책, 액자식 구성으로 펼쳐진 꼬마책은, 동화스럽다못해 환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바다를 표류하던 남자가 내리게 된 섬에서 그는 '카드'들을 만나게 된다. 알아듣지 못할 헛소리를 해대는 카드들의 틈바구니 속에 홀로 살아가던 한 할아버지와 만나게된 그는 그 할아버지가 실은 자신의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카드'들이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자신의 상상력이 낳은 산물이라는 것을 털어놓는다. 상상물의 산물인 카드들은 그 사실을 아는 것을 무의식중에 거부하고 있었지만, 오직 조커만이 그것을 눈치채고 카드들에게 폭로할 마음을 먹는다. 카드들의 축제에서 각자 준비한 글귀로 이야기를 만드는 '의식'에서 모든 진실이 꿰맞치고, 카드들은 자신들이 피조물이라는 걸 알고 동요한다. 그 와중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는 조커와 함께 섬을 급히 빠져나왔다. 꼬마책을 읽고 있던 한스 토마스는 꼬마책의 내용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과 맞물리는 '실제'이야기라는 걸 알고 꼬마책을 넘겨줬던 할아버지가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테네에서 엄마와 만난 아빠와 한스 토마스는 사이좋게 가족으로 돌아와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역시나 요약에는 자신이 없는 나; 무슨 이야기인지 영 모를 정도로 써놓았지만, 실제로 읽으면 그 구성이 치밀하고 흥미진진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난 무엇보다 작가의 상상력에 새삼 감탄했다. 꼬마책에 나오는 카드 달력은 정말로 기발했다! 정신없이 읽던 내게는 좀 복잡해 세세한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너무 기발해서 나도 한 번 써먹어 봐야겠다, 싶을 정도였다. 거기다 꼬마책과 한스 토마스의 세계를 능숙하게 넘나들며 여러 가지 힌트들을 뿌려놓아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에서 조커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무슨 저주라도 받은 것 처럼;; 한스 토마스의 집안은 대대로 '조커'였다. 어느 곳 한 곳에 가족과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야만 했던, 그리고 버려져야만, 아니 남겨져야만 했던. 따지고 보면 어느 누구 하나 잘못한 게 없는데도. 조커는 어디까지나 자유롭다. 카드에는 4가지 소속이 있지만 조커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덕분에 자유를 얻었지만 소속감이 없다. 조커가 자유를 느끼기 위해선 고독이 필요한 것이다. 한스 토마스는 집안의 가장 어린 조커였지만, 모든 조커의 대를 마무리 지었다. 직접 엄마를 찾으러 나가 되찾아왔고, 아빠마저 믿지 않았던 꼬마책을 온전히 믿음으로써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아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조커가 있을 것이다. 자유와 고독, 양면의 동전같은 존재가.

+철학적인 분위기를 좋아하시는 분
+소피의 세계를 재미있게 읽으신 분
+요슈타인 가아더가 좋으신 분
+세상을 독특하게 바라보고 싶으신 분

http://niarain.tistory.com2009-05-28T15:20:24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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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도서관 - 소설로 읽는 책의 역사
요슈타인 가아더.클라우스 하게루프 지음, 이용숙 옮김 / 현암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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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피의 세계」의 저자로도 유명한 요슈타인 가아더의 다른 작품. 이 책은 매우 특이한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이런 프로젝트(?)가 한 번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맘에 들었다. 저자는 요슈타인 가아더 말고도 클라우스 하게루프라는 작가가 한 명 더 있다. 가아더와 하게루프는 각각 전화, 팩스 상으로 주고받으며 집필했다고 한다. 주인공이 두 명 나오는데 각자 한 명 씩 역할을 맡아 써내려 갔다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릴레이 정도가 될까. 소설 커뮤니티나 비툴 커뮤니티 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지만 이렇게까지 흥미있는 건, 역시 작가들의 역량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표지는 크빈트 부흐홀츠라는 몽환적이면서 상상력이 넘치는, 그러면서도 잔잔한 그림풍을 지닌 화가의 작품으로 「마법의 도서관」에 꼭 맡는 표지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 화가의 작품집이 한국에서도 출간되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검색해 보시길~ (그냥 네이버 검색만 해도 쏟아져 나옵니다...)

'소설로 읽는 책의 역사 마법의 도서관'이 이 책의 긴 제목인 만큼, 책을 읽다보면 '책'에 관한 역사, 정보를 얻게 된다. 그것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작가 두 분이 다 오슬로에 살고 있던 관계로 노르웨이의 지명이 자주 등장하는데, 지리에 약한 나로선 그게 무슨 판타지에 나오는 이름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지명 이름이 (어찌보면)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으니 유심히 살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참고로 오슬로는 노르웨이의 수도로, 노벨 평화상이 수상되는 곳이기도 하다. 밑의 사진이 오슬로의 풍경. (출처 : http://www.fjord-tours.com/oslo/)



다른 한 곳은 책에 따르면 피엘란, 현재의 표기법으로는 피어랜드라고 하는 곳으로 그렇게 도시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평화로워 보인다. (출처 : http://www.fjaerland.org/)

아까도 말했다싶이 이 책은 작가들이 각자의 캐릭터를 설정해 주고받은 원고를 모아 만든 책이다. 가아더는 둘 중 1살 많은 야무진 사촌누나인 '베이체'를, 하게루프는 상상력이 풍부하지만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무모한 '닐스' 를 맡았다. 책 안에서도 서로 떨어진 지방에 사는 두 사촌은 방학을 함께 보내고 난 뒤 '편지책'을 쓰기로 결정한다. 편지를 편지지에 쓰는게 아니라 노트에 써서 보내고 다시 돌려받는 형식으로, 말하자면 교환일기쯤 되겠다. 물론 보통의 교환일기보다 스케일이 (일단 우표 값이!) 크지만서도. 각자의 글 앞에는 닐스와 베리체의 아이콘이 있어 누가 썼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정말로 우체국을 통해 주고받은 '편지책'이고 2부는 닐스가 베리체가 사는 피엘란에 간 관계로 직접 주고 받은 듯 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정말 웃음이 나는 게, 사촌지간이 주고받은 편지라 그런지 격의없으면서도 귀여운 표현이 자주 나온다. 서로를 정답게 비꼬는 표현이 나오는 건 당연한거고 "짱"이라든가 하는 표현이 나와서 풋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내용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사이좋은 두 사촌은 각자의 일상을 전하기 위해 편지책을 쓰기로 결정했지만 자꾸 주변에서, '이상한 여자', 비비 보켄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오슬로에서 봤던 그 여자는 베이체가 사는 피엘란에도 나타나고, 순식간에 어린이 탐정단으로 변모한 둘은 각자의 방법으로 그 여자의 비밀, "비밀의 도서관"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비비 보켄과 떨어진 곳에 사는 닐스에게는 그 여자와 관련된 듯한 사람이 자꾸 나타나 일상의 평화로움을 비틀지만 치기어린 닐스는 소심하게 겁을 먹으면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비록 덜덜 떨지라도.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선생님 부부와 자꾸 닐스의 곁을 맴도는 '스마일리' 때문에 닐스는 책에서나 나올 법한 상상력이 넘치는 추리(...)를 거듭하고 베이체는 그런 닐스를 '사실'에 근거한 추리를 하자며 타이르면서도 역시 상상력이 펼쳐지는 걸 막을 수 없다. 결국 밝혀진 비밀은 비비 보켄은 '책의 해'를 맡아 노르웨이 중학생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기로 한 책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베이체와 닐스가 방학 때 쓴 시를 읽고 이 아이들에게 맡기자, 라는 생각으로 그들에게 '영감', 즉 여러가지 의심가는 상황을 만들어 줘 상상력과 박진감이 넘치는 '편지책'을 쓸 수 있게 한 거였다. 의심가는 선생님 부부는 비비와 대학 동창이었고, '스마일리'야 말로 비비와 아이들을 방해하는, 출판업계에 도전하는 '비디오' 업계의 관계자였다.

이 책을 읽다보면 몰랐던 책에 관한 지식들이 흥미진진하게 튀어나온다. 서지학자(bibliographer)의 기원이 그리스어로 책을 뜻하는 biblion에서 왔다는 것도, 고판본(incunabula)가 라틴어로 아기의 요람 또는 첫 출발기를 뜻하는 incunabula에서 왔다는 것도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현재도 도서관에서 쓰이고 있는 분류방식이 듀이의 십진분류표(DDC)라는 사실에 도서관을 떠올려보며 눈을 빛냈고, 37P의 곰돌이 푸 이야기는 선연하게 기억에 남는다.

아기 돼지는 크리스토퍼 로빈의 바지 멜빵을 태어나서 단 한 번 밖에 보지 못했지. 그런데 그 멜빵이 어찌나 새파란 색이었던지 한 번 보고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던 거야. 아기 돼지는 그 바지 멜빵을 다시 본다는 상상만 해도 엄청나게 흥분하곤 했지. 그러면서 끔찍하게 신경이 날카로워졌지. 만일 그 바지 멜빵이 진짜로 그렇게 눈에 시리도록 새파란 색이 아니라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가 걱정이었어. 만일 그 멜빵이 아기 돼지가 이제까지 수없이 보아온 보통의 별볼일없느 파란 색이라면? 하지만 크리스토퍼 로빈이 재킷을 벗었을 때, 아기 돼지는 기뻐서 기절할 지경이 돼. 그 바지 멜빵이 정말 자기 기억 속에 있는 그대로 시리도록 새파란 색이었거든. 그래서 아기 돼지는 그날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 이야기는 그저 별것 아닌 멜빵 이야기 같지만, 사실 거기엔 그 이상의 뜻이 담겨 있어. 이 이야기를 읽으면 난 어떤 돛단배 그림이 떠올라. 언젠가 우리가 여행을 갔을 때 묵었던 어느 시골집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이야. 그건 분명 아주 평범한 배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나한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로 보였지. 매일 저녁 엄마는 나한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그 이야기 속에서 난 그 돛단배를 타고 지구를 돌며 낯선 나라들로 배를 저어갔던 거야. ~(중략) ~ 그리고 그때와 똑같은 기분이 크리스토퍼 로빈의 바지 멜빵 이야기를 읽었을 때 느껴졌지. 그래서 난 책 읽는 걸 그처럼 좋아해. 책을 읽을 때면 어느 정도는 나 자신도 작가가 될 수 있거든. (38p)

표지부터 내용, 읽고 난 후의 여운까지 완벽한 한 권의 책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오랜만의 강력한 책이다(실제로 이모에게 권했지만 사촌 남동생이 어려 거절당했음)! 
+흥미진진한 어린이책을 좋아하시는 분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책을 좋아하시는 분
+소피의 세계를 알고 계시는 분
http://niarain.tistory.com2009-05-28T15:22:01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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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김호영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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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렸을 적 내가 할머니집에서 가장 좋아하던 책들은 엄마가 어렸을 적 보시던 꼬마 니꼴라였다. 재기넘치는 스토리도 좋았지만 아직 어렸던 내게 가장 끌렸던 건 친근해 보이는 땅딸한 꼬마들의 그림이었다. 코는 멀찌만히 크고 어른에 비해 현저히 작아- 작다기 보다는 난쟁이 수준이었지만 – 발치에 굴러다니는 듯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의 그림이. 러프한 선에 꼭 필요한 것만 – 다른 말로 하면 여백이 아름다운 – 그림이었지만 통통 튀는 꼬마 니꼴라의 일상에 꼭 맞아 한 때 정신없이 따라 그리기도 했던 그림체였드랬다.

그런 그림체의 주인을 다시 찾았다. 귀여운 스토리와 함께. 얼굴 빨개지는 아이는 그림체와 꼭 맞는 깜찍한 이야기이다.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져 외로운 아이와 시도 때도 없이 재채기를 하는 통에 외로운 아이가 만드는 귀여운 우정 이야기랄까. 어찌나 귀여운지 그들이 커서 어른이 되었더래도 나는 여전히 그들이 귀여웠다. 장 자끄 상뻬가 그리는 그림, 글은 어딘지 천진한 구석이 있어 보고 있노라면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하고 내가 어른이 되어 어린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의 표지는 티끌하나 없는 흰 색에 반질반질하게 빛나 불빛 아래 비추면 절로 미소가 나온다. 장 자끄 상뻬가 프랑스인이라 크고 붉은 글씨체로 Marcellin Caillou 라고 우리의 주인공 얼굴 빨개지는 아이의 이름이 쓰여있다. 처음에 그게 프랑스어로 얼굴 빨개지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물론 프랑스어를 모르는 나는 아직도 그게 맞은지 모르겠지만 흰색 바탕에 붉은색 글씨는 굉장히 강렬해 그 밑의 작고 작은 얼굴 붉은 꼬마가 더욱 귀엽게 보인다.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내 동생조차 뭐야, 하고 관심을 보일 정도로.


사실 이야기 자체는 간단하다. 작은 문제 때문에 조금 외롭게 지내는 아이가 친구를 만나 함께 지내는 즐거움을 알아간다는 것. 이야기가 간단한데도 마음을 울리는 구석이 있는 건 이 이야기가 진짜 친구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적에 만난 친구가 평생을 함께 할 ‘진짜’ 친구일 가능성을 얼마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짜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외롭게 사는가. 나는 어렸을 적부터 책을 좋아해서 아이들과 놀기 보다는 책을 집어들고 구석에 뒹굴며 책을 읽었다. 사교성이 풍부한 동생과는 달리 친구라곤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학년이 올라갈 수록 그나마도 적어져 조금, 아주 조금 외로웠다. 굳이 어린이에게 한정할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친구란 존재는 필요하다. 외로움을, 시간을,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말하듯이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므로. 내 약점이, 다른 이들이 내 약점이라 여기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어 받아들여줄 친구를 사귀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까미유와는 달리.


그런데도 이 책을 읽다보면 희망이 샘솟는다. 저 어딘가 진짜 친구가 있고 나는 곧 찾을 수 있을거라고. 얼굴이 붉은 작은 까미유를 통해 내가 먼저 진짜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 이 간단한 이야기가 얼마나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다른 사람들이 정말 알았으면 좋겠다. 일단은 내 동생부터.

 

+진짜 친구를 찾고 계시는 분

+혹은 친구 사이에 의문이 생기신 분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가 좋으신 분

+꼬마 니꼴라의 귀여운 그림체가 눈 앞에 아른거리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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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강 밤배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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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허니문이었던걸로 기억된다. 친구의 어깨 너머로 훔쳐보던 책에 2년 후에나 흥미를 느껴 본격적으로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작가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사실 그 전 까지는 일본 문학이라고 해봤자 일본적이지도 한국적이지도 않은 애매모호한 무라카미 하루키밖에 몰랐으니 내가 일본문학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것도 웃긴 일이겠지만, 내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읽고 느낀 건 우스으리만치 처연한 정적인 감동이었다. 허니문과 키친을 거쳐 하드보일드 하드 럭와 도마뱀를 지나 하얀 강 밤배. 다른 책들도 더 있지만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자주 꺼내드는 책은 하얀 강 밤배다.

민음사의 하얀 강 밤배는 차분한 분홍색의 바탕에 흰 제목이 깔끔한 책 표지를 가지고 있어 표지만 바라보고 있어도 진정이 되는 느낌이 든다. 내용은 더더욱 조용하다. 제목조차 하얀 강 밤배. 조용하고 아스라히 퍼지는 달빛, 반짝이는 강물과 새하얗고 작은 배가 떠오르는 제목이, 나는 마음에 꼭 들었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마음의 적어도 십분의 일은 책 자체의 제본에 있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다. 물론 내용도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지만.


하얀 강 밤배는 총 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일상 속에서 미래를 잃어버려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키고 잠이 든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묘사가 절묘해 아련하다. 첫번째 이야기는 조금 특이한 불륜을 하고 있는 젊은 여자의 늘어나는 수면시간을 통해 세상과 단절된 일상이 잃어버리고 있는 현실감을, 두번째 이야기는 에너지 넘치던 오빠가 죽어버린 뒤 남아있는 사람, 특히 그의 연인이었던 사촌언니의 휴식을 통해 죽어버린 사람 뒤로 남는 그림자의 영향력과 미래를, 세번째 이야기는 남자를 사이에 두고 싸우다 헤어진 연적의 유령을 만나러간 술을 좋아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보다 강렬했던 순간의 감정의 아련함을 그리고 있다. 물론 이건 내 주관적인 해석이라 다른 사람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지만, 요시모토 바나나의 묘사가 훌륭해 공감하게 될거라는 점은 장담할 수 있다.


하얀 강 밤배에 나오는 사람들은 각자 휴식상태, 혹은 가사상태에 빠져있다. 현실이 괴로워서 눈을 돌려 몸을 웅크리고 생각을 끊고 조금씩 힘을 비축해 나가듯이. 그건 나쁜 일이 아니다. 사실 오히려 조금 부럽기까지 하다. 본인에게는 견디기 힘들어 눈을 돌린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서 도망치는 순간 도태된다는 걸 알고 있고, 두려워 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언제 맘편히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나갈 수 있을까. 그러니까 하얀 강 밤배의 사람들은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잃고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거겠지. 그들은 틀어박혀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출구는 어디일까, 라고 느릿느릿하더라도. 옆에서 내밀어주는 손을 의심쩍어하면서도 잡아 결국은 다시 세상에 돌아왔다. 반짝이는 빛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잡을 수 있는 희망이고 미래다.


일상을 조근조근 늘어놓는 묘사에 나도 모르게 나를 떠올리게 하는 문체. 나른하고 몽환적이면서도 평범한 이야기. 조용하고 수수하지만 잡을 수 있는 희망. 하얀 강 밤배, 그야말로 우울할 때의 치료제와도 같은 책 아닐까.

+우울해서 혼자 있고 싶을 때

+혹은 우울해서 누가 도와줬으면 좋겠을 때

+정적인 분위기의 책을 좋아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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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노네 고만물상 (보급판 문고본)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오유리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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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책은 내가 산 책이 아니었다.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를 살 때 1+1 이벤트로 딸려온, 말하자면 덤이었다. 공중그네를 만족스레 읽고 다음 읽을 것을 찾아 헤매던 눈에 들어온 게 이 노란빛의 작고 가벼운 책이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서도 알다시피, 나는 일본소설의 '아기자기한 생활 묘사'가 너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이 나카노네 고만물상은 돼 '덤'으로 딸려왔는지 모를만한 책이었다. 뭐, 이런 류 싫어하는 사람은 또 싫어하겠지만서도.

 

위의 표지에서 보다시피 표지는 샛노란 색에 마치 판화라도 찍은 듯한 검은 그림이 새겨져 있다. 내가 일본식 화풍에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지극히 일본 스러운 분위기다. 위의 표지에선 안 나와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덤이라 그런걸까!) 왼편에 색이 빠진듯한 분홍띠에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 가와카미 히로미 신작 장편'이라 쓰여 있다. (나중에 알고보니 보급판이라서 표지가 다른 거였다...)원래 있는 것만 봐와서 일까, 위의 표지는 어째 김이 새 보이는걸.

 

표지에서도 느껴지지만 전체적인 책 분위기는 잔잔하며 조금 멍-하다. 제목인 나카노네 고만물상은 화자인 히토미가 일하고 있는 무늬만 골동품점으로 주인은 나카노 씨. 나카노 씨는 조금 별난 구석이 있는데다 여자를 조금 밝히는, 어찌보면 지극히 평범한 중년 아저씨다. 그 곳엔 다케오라는 매우 과묵한 직원이 또 한 명. 각각 따로 보면 (나름) 평범한 이들이 모여 있으니 묘하게 멍뎅한 느낌의 콤비가 되고 만다. 거기에 나카노 씨의 누나인 마사요 씨까지.

 

읽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카노네 고만물상에는 결코 격정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들이 두리뭉실~하게 사람에게 상처입히는 일이 적은 책상 모서리처럼, 그냥 그렇게 일어난다. 그래서 읽으면서도 그렇게 마음 졸일 일도, 골치 아프게 생각할 일도 없다. 어찌보면 그게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다 읽고 나서 주인공들처럼 싱글싱글 웃고 있을 때였다. 이 이야기 안에서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사랑을 했고, 누군가는 이별을 했는데도 세상을 돌아갔다. 그런 사소한 일들을 부품삼아 어떻게든 돌아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카노 씨의 고만물상은 조금은 마음 편한, 동떨어진 곳엣 위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느긋한(그 자신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저 표지처럼 빛이 바랜 듯한 분위기의 관계들을 보다보면 나도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이야기 안에서 고만물상이 다시 부활했을 때, 나 역시 기뻤다. 그 사이좋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얼굴을 맡댄 게 너무 좋아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뭐  독자를 편하게 만드는 게 이 책의 소임이었다면 그 몫은 확실히 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나른한 토요일 오후에 추천!

 

인상깊은 구절들.

-지독하게 자기만 아는 사람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

-인간이 무서워. 나자신은 더 무서워.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

 

+일본식 정적인 분위기를 좋아하시는 분.

+이렇다할 사건이 없어도 싫증내지 않으실 분.

+나른한 토요일 오후에 읽을 책을 찾으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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