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개
캐롤린 파크허스트 지음, 공경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난 차에 굉장히 약해서 몸이 약해지면 어김없이 멀미를 한다. 차 안에서 글자를 봐도 그렇다. 책도 아니고 단순히 핸드폰으로 문자를 봐도 머리가 핑-도는 짜증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내가 일요일 오후 차 안에서 책 한권을 잡고 있었다. 내가 징징거릴 걸 민감하게 알아챈 엄마는 차 안에서 웬 책이야, 라고 말했고 난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엄마, 이 사람 아내가 막 자살하려는 참이란 말이야."

 

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렉시는 이미 책의 첫장부터 죽은 채 등장했으니까. 하지만 어둠 속 작은 구원에 매달리듯 난 렉시의 마지막이 무언가 특별하고 우리에게 알려주고픈 뭔가를 던져줄거라 믿었다. 자살을 선택이라고 믿는 여자. 그리고 그녀의 헌신적인 남편. 두 사람이 날 잡고 놔주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교수인 폴은 집에 전화를 했다가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랑스런 아내 렉시가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채 발견되었다는 형사의 목소리였다. 그 후, 아내를 너무 사랑하던 폴은 렉시가 죽던 당시 함께 있던 개,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쳐 렉시가 죽던 그 날의 미스터리를 풀어보려 하는데...

 

개가 말을 한다면...이라는 상상은 개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해봤을 테마다. 우리집은 그렇게 개를 미친듯이 아끼고 사랑하는 집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줄곧 일이년의 공백을 사이에 두고 강아지를 데려오곤 했다. 요크셔테리어에 마르티스... 지금의 강아지는 시츄로 굉장한 먹보지만 애교가 많다. 강아지들을 키우다보면 절실하게, 이 녀석이 말을 할 줄 알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정확히는 말을 알아들을 줄 알면 좋을텐데, 지만. 화장실을 못 가릴 때나, 밖에 나가야 하는데 바지 가랑이를 물고 놓지 않을 때, 아파서 낑낑 대는데 나는 영 어디가 아픈지 잘 모르겠을 때. 애처롭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난감하기도 하고. 그럴 때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머리를 쓰다듬고 말하는 거다. '네가 말만 할 줄 알아도...'

 

물론 그건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다. 사실 실제로 개가 말을 하게 되면 오히려 오싹하지 않을까 싶다. 싫다, 싫어. 유창하게 말을 강아지라니. 하루 이틀이야 재밌겠지만 나중에는 감시당하는 느낌이나 안 들면 다행이겠지...

 

폴은 아내를 잃은 슬픔에, 실은 그녀가 자살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에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일에 매달린다. 폴과 렉시는, 이성적인 남편과 감성적인 아내였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아내의 죽음은 남편의 이성을 여지없이 흐트러트린다. 순수한 애정. 그 애정이 독이 된다.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폴이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일상을 그리지만 실제로는 폴이 바라본 렉시를 '보여주고' 있다. 예쁜 렉시, 엉뚱한 렉시, 예술가답게 복잡한 렉시... '폴이 바라본' 렉시는 그랬다.

 

과연, 남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린 자주 '우리가 남이니?'라고 말하지만 '남'이란 개념은 결국 '자기가 아닌 존재'를 말하는 거고, 그렇게 치면 부모님조차 남인 셈이다. 결국 어느 정도까지 이해는 해도 100% 이해하기란 어려운 그런 존재. 친밀도에 따라 이해도도 다르겠지만 다른 어떤 존재를 100% 이해한다는 것 또한 무서운 일이 아닐까.

 

폴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렉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그 마지막에서 깨닫는다. 진실, 그것만이 위안이라고. 내가 편하자고 상상한 모습이 아니라, 환하게 웃든 찌푸리며 화를 내든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걸.

 

바벨의 개, 바벨탑에서 막 도망쳐 나온 폴과 로렐라이의 슬픈 '렉시' 그리기. 어리석고 사랑스럽고. 축축한 코를 부비며 주인을 올려다보는 강아지를 닮은 소설이었다.

 

-당신이 듣지 않으면 나는 말할 수 없어요 (14)

 

-내가 도달한 결론은, 모든 개들은 목격자라는 것이다. 개들은 우리의 가장 사적인 순간에 언제나 함께 한다. 우리가 혼자라고 생각할 때도 개들은 같이 있다. 개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개들은 심지어 대통령의 무릎에도 앉는다. 사랑과 폭력 행위, 입씨름과 싸움을 지켜본다. 아이들의 은밀한 장난도 본다. 그들이 본 것을 죄다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그들과 함께 했던 삶의 빈틈이 메워질 텐데. 뭔가 시도해 보는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19)

 

-느긋하고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입술에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기운이 났다. 내 앞에 새로운 하루가 펼쳐져 있었다. 가능성이 넘치는 하루가. 얼른 렉시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안달이 났다.(59)

 

-다른 사람의 심장이나 간, 신장을 이식받은 사람은, 음식이나 좋아하는 색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치 장기에 옛 기억이 담겨 있어서, 새 주인의 몸속에서 과거가 들어갈 자리를 찾는 것 같다나. 바로 내가 내 몸 안에 렉시를 그런 식으로 담고 있었다. 그녀가 내 안에 자리 잡은 후, 나는 그녀의 스타일로 보고 듣고 맛보게 되었다. (63)

 

내 최고의 기사를 빼앗아가는구나. 내가 오늘 알게 된 것을 어제도 알았다면, 네 잿빛 눈을 빼고 흙으로 된 눈을 박았을 것을. 네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제도 알았다면, 살로 된 네 심장을 빼고 돌로 된 심장을 박았을 것을. (82)

 

-"가서 렉시를 데려와."
나는 개가 아는 모든 명령어를 외쳤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나는 로렐라이를 막지 못한다. 그 마법 주문을 내뱉은 후로는 막을 재간이 없다. 로렐라이는 집을 빙빙 돌면서,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맨다. (89)

 

-자살은 한순간일 뿐이라고 렉시는 내게 말했다. 그녀는 내게 자살을 꼭 그렇게 표현했다. 한순간의 일이라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거나, 태양이 빛나고 있으며, 보고 싶어 안달하던 영화가 이번 주에 개봉한다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 없게 되는. 잘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리란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영영 그럴 것 같다. 그래서 자신에게 묻는다. 이게 다란 말이야? 이런 일이 닥칠 줄 알았지만 오늘이 그날일 줄은 몰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순간은 끝난다. 그 영화를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키우는 개를 보면서 내가 없어지면 누가 개를 보살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에 계속 남는다. 그 생각을 일부러 하지 않더라도, 그날의 선택권이 내게 있다는 걸 알고 위로를 받는다. 사탕을 뺨 안쪽에 밀어넣듯이, 그 생각을 마음 구석에 밀어놓는다. 그 뒤에 묻어둔 기억은 혀를 굴릴 때의 달콤한 쾌감과 똑같다. (105)

 

-내가 어렸을 때, 과장법을 많이 쓰던 어머니는 이런 말을 즐겨 했다. 세상이 끝날 때, 마지막으로 내가 떠오를 거라고. 땅이 갈라지고 발밑으로 흙이 내려앉을 때 어머니는 하늘로 날려보내듯 내 이름을 외칠 거라고 했다. 매일 나이 드는 걸 알고 놀라는 지금에야 어머니의 말이 과장만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우리 모두는 이런 이름을 하나씩 품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름의 가치는 그런 마지막 순간에 입에서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모른다. 그게 언제나 예상하는 이름일 것 같지는 않다. 내 어머니조차도 그랬을 것이다. (141)

 

-작은 역할을 하더라도 내가 나오는 대목을 읽는 게 좋았다. 다른 사람의 꿈에 내가 등장하는게 만족스러웠다. 그건 어떤 면으로든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니까 내 마음의 벽 밖에서도 내가 존재감 있고 가치 있다는 증거니까. (303)

 

-누구나 심장이 두 개란 말이 맞지 않을까? 주먹처럼 뒤에 웅크리고 있는 비밀 심장.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단순한 심장 밑에서 비비꼬여 쪼그라든 채 살아가는 심장. ...두 번째 심장을 어두운 색으로 만드는 것은 꿈의 내용이 아니라, 잠이 오지 않아서 깨어 있을 때 머리를 스치는 생각들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그런 생각들이고. (306)

 

-그대는 나의 가장 멋진 기사님. (314)

 

-거기 삶의 큰 거짓과 죽음의 큰 거짓이 있었다는 걸 이제는 똑똑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보통 사람들에게 자살은 결코 선택하지 않을 순간이다. 하지만 결국 그걸 선택하리란 걸 아는 사람들, 자기에게 선택권이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다르다. (336)

 

-그런데 당신은 인생의 하루가 그런 식으로 사라져가는 게 두려워져. (338)

 

-그래서 나는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아무리 여러 번 보더라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341)

-우리 사이에 있던 어두운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도, 너무 환해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던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한다. 그 여인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려 노력한다. 슬픔에 위안이 되게 내 마음대로 짜 맞춘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시간이 흘러, 용서라는 약이 갈라지고 찢긴 내 가슴을 씻어줄수록 나는 알게 된다. 그녀를 본모습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내가 우리 둘에게 줄 수 있는 선물임을.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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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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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이야기를 먼저 고백하도록 하자. 나는 한국소설을 그리 즐겨읽는 편이 아니다. 작가가 이 책에서 문학이 그녀에게 현실에서 불가능한 꿈이었다고 말했듯이, 독서라고 말하기도 민구한 내 '읽기'는 꿈보다 더 먼 환상이었다. 나는 내 현실과 거리가 먼 글을 읽으며 대리만족을 하고 만족해 잠든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소설은 내 취향에서 현저히 먼 셈이다. 읽다보면 싫어도 내가 대한민국에 살고있다는 게 느껴지니까. 같은 이야기라도 한국 이름이 나오고 한국인들이 나온다는 이유 하나로 내가 현실에 몰입하게 되니까.

 

하지만, 그간 내가 읽어온 한국 소설에 비하면 이 <외딴방>은 현실도 현실이지만 읽다보면 작가에게 몰두하게 되는 소설이다. 나는 내 이 취향 때문에 신경숙의 소설은 지난 학기에 읽은 <엄마를 부탁해>가 처음이었다. 내 평생 한 권의 책을 읽으며 그렇게 많이 울어보긴 처음이었다. 읽을 때마다 날 울렸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도 뒷부분이 되기 전까지 멀쩡했었는데. 난 그게 유난히 '엄마, 가족, 우리 개'에 약한 내 성격 탓이라고 생각했다. 심하게 감정이입한 결과라고.

그게 아니었다. 난 그 감정을 왈칵 쏟아내게 한 글이 단순한 소설이 아니었다는 걸 이 <외딴방>을 통해서야 깨달았다.

 

자기고백. 소설이라고 하는 만큼 어딘가 작가의 기억속에 허구가 섞엿겠지만 소설 속 그 선배처럼 알아낼 재간이 나에겐 없다. 나에게 <외딴방>은 소설이라기 보다 작가가 힘겹게 써내려간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읽는 것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이, 기억이, 삶이 주는 그 몰입도. 써내려가는 과거와 써내려가고 있는 현재가 뒤섞인 <외딴방>은 사실 정형화된 책들만 읽어온 나에게 조금 헷갈리는 책이었다. 과거엣 현재로의 급격한 전환에 나는 옛날 외딴방에 사는 소녀를 훔쳐보다 누가 뒷덜미를 잡은 것마냥 덜컥, '지금'을 바라봐야했다.

 

열일곱의 소녀는 시골에서 외사촌과 함께 상경해 큰오빠와 함께 살며 회사에 취직한다. 간단한 노동직이지만 돈을 받고, 야간이지만 학교도 다닐 수 있다. 사진사가 되고 싶다는 외사촌, 작가가 되고 싶었던 어린 소녀. 다들 어려운 시기에도, 사람들은 살았다. 회사에서, 학교에서, 그녀가 살았던 외딴방에서 소녀는 누군가를 만난다. 어른이 되어서도, 작가가 되어서도 묻어두고 싶었던 그 기억의 한 부분들을. 

나는 모른다. 그녀가 말하는 그 고단함과 두려움은, 넘치진 않더라도 모든 것이 풍족하게 보장되어 온 온실 속의 나에겐 사실 외국의 소설만큼이나 먼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절박했던 시대를, 나는 겨우 책 속의 삽화에서, 흘러가듯 얘기하시는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나 보고듣곤 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 열일곱, 열여덞, 열아홉의 소녀에게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지금의 작가가 꽁꽁 숨겨두었던 그 아픔은 시대의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 자신에게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고나서도 숨어있던 그 시절은 너무 힘들고 가난했기 대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부재를, 그 아픔을 풀어내는 과정이 아팠기 때문에  소설보다 진실하고 사실보다 깊다.


소설 속 김영옥처럼 난 신경숙이 부럽다.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작가라서. 그런 경험 자체보다 그 경험을 힘겹게나마 남들에게 소설의 형태로 풀어낼 수 있는 그 글솜씨가 부럽고 어려움 속에서도 꿈꿀 수 있었던 소녀가 부럽다. 소설이고 에세이고, 심지어는 리뷰까지. 나에게 글쓰기란 너무 어렵다. 작가는 그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를 고민하지만 난 아직 글쓰기가 그저 막연히 어렵다. 한 줄을 쓸 때 스며드는 내 자신이 부끄럽고 두 줄을 쓸 때 그 무의미함에 서글프다. 소심한 나에게 글쓰기라 대로변에서 큰 소리로 노래하는 것 같다. 좀 더 은근하긴 하겠지만. 그런 나에게 이 <외딴방>이 주는 의미는 다른 소설과 다르다.

 

환상의 문학이 아닌 현실의 문학.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이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것인지." 작가는 처음과 끝을 이 문장으로 정리하고 있다. 작가인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게 갖는 감정이 남다르겠지만 독자인 나에게 이 <외딴방>은 훌륭한 문학이다. 사람 마음을 이렇게 흔드는 글을 문학이 아니라면 뭐라고 설명하겠는가.

 

<외딴방>, 오랜만에 밤을 새고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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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가게
장 퇼레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림원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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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표지부터 독특한 분위기가 풍기는 책을 읽는 내내 스토리와는 무관하게 프랑스 이름들이 도통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굉장히 슬펐다. 이름치는 책도 제대로 못 읽는구나- 싶어서. 지금 다시 보니 그렇게 어려울 거 없는데 왜 읽다보면 헷갈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도 책은 이름치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이야기다. 나는 영화로는 조금이라도 으스스하거나 놀라는 장면을 보지 못하지만 책을 볼 때는 어딘가 기괴한 구석도 즐기며 볼 수 있다. 시각에 청각이 더해지면 충격이 2배가 되기 때문일까... (단순한 겁쟁이라서일까...)

이 책은 우울하기 짝이 없는 튀바슈 가문이 주인공이다. 우중충한 세계에 사람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자 하는 숭고한 사명감으로 자살가게를 몇 대째 운영해 오고 있는 튀바슈 가족. 자살가게가 그들의 터전이고 생활이라 구석구석 죽음의 음침한 분위기가 배어있다. 가족 구성원들의 성격도 범상치 않다. 누나인 마릴린은 둥실한 몸매에 항상 자신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여자아이고, 첫째인 뱅상은 자살에 관한한 매우 창조적인 예술가지만 항상 두통에 시달리는 뼛속까지 우울한 남자아이다.

이런 우울한 가족들 사이에서 막내인 알랑만이 유일하게 살아가는 걸 진심으로 즐거워 하는 낙천적인 사람이다. 튀바슈 부부는 그런 막내가 (그것도 구멍난 콘돔을 실험해 보다 태어난 막내가!) 못마땅해 형, 누나와 같이 음침한 성격으로 키우려 애쓰지만 이 조그만 아이는 도무지 어둠에 물드는 구석이 없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항상 방실거리며 웃음을 보낸다.

<자살가게>에는 곳곳에 자살에 대한 기묘하고 재치있는 아이디어들과, 생소하고 (나름) 흥미로운 자살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다. 가게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각각 다른 사연들이 있다. 가까운 사람이 죽어 그를 잊지 못해 죽고 싶다는 사람, 더이상 사람들을 참아내지 못하겠다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아이템이 채워져 있던 자살가게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가게의 신선고에서 동물이 빠졌다. 자살을 위해 독이 있는 동물을 사간 사람들이 그 동물에 정이 들어 다시금 살아갈 희망에 불탔기 때문이다. 간단하지만 이해가 가는 구절이다. 자신에게 온전히 마음을 쏟아부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사람을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튀바슈 가족에게 알랑이 그런 존재였다. 사람을 우울할 때 즐거운 것, 웃기는 것을 보고 마음에 위안을 삼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가 특히 그래서 우울할 때는 꼭 소장하고 있는 DVD 중 웃긴 것만 모아 연달아 보곤 한다. 뭐랄까, 항상 변하지 않고 즐거운 것은 우울한 사람에게는 한 줄기 빛과도 같지 않을까.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알랑은 전염이 강하다. 웃음이 그런 것처럼. 몇 대째 이어져 오는 집안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꼬마는 형, 누나, 엄마까지 행복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죽음에 잠겨있을 때는 식욕이 없던 뱅상이 알랑에 의해 변해가고 식욕이 돌아온다. 자신이 쓸모없다 느꼈던 마릴린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있게 되어 기쁘다. 어린 시절 번번히 엄마를 기다리느라 버림받은 느낌을 느껴왔던 엄마도 그 마음의 상처를 잊어간다.

이런 가족들의 모습에 알랑을 모니코의 자살특공대 연수를 받게 해야겠다고 결심한 아빠 미시마는 그것이 모든 것의 해결책이라고 믿었지만, 오히려 막내 알랑이 없어지자 알랑이 보내온 엽서를 보며 각자 힘의 원천으로 삼으며 살아간다. 튀바슈 가족에게 변화가 오고 있다.

-우리 역시 절망할 때가 있답니다. 세상 하직하고픈 이유가 없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가 준비한 상품을 우리 스스로 맛볼 순 없지요. 만약 그랬다간 제일 마지막 사람이 가게문을 아예 닫아야만 할 테니까요. 그렇게 된다면 손님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35)

-벌받고 있는 겁니다. 학교에서 자살자에 대한 질문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근데 쟤가 뭐란 줄 아십니까? 아 글쎄, '자, 살자!'고 하는 사람이라나 뭐라나, 그랬다는 거 아닙니까! (39)

- 순간, 미시마는 왠지 가슴 한복판을 빛이 가르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가게에서나 이층 아파트에서는 종종 기운이 차고 넘쳐 괄괄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 이곳 지하실 구석에 앉아 막내로부터 온 사연 몇 줄을 읽는 동안에는 전혀 그런 태도가 아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모든 게 다 잘 될 거예요......'
아, 이 못 말리는 낙천주의자, 요 철 모르는 요정 같은 녀석! (130)

-뤼크레스, 마릴린, 미시마, 뱅상.....그 모두에게 알랑의 존재가 아쉽다. 마치 삶의 의미가 아쉬운 것처럼......(138)

-인간의 고뇌를 달래는 가족치료사,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반짝인다. 그것은 잊혀진 보배가 숱하게 빛을 발하고 있을 경탄할 만한 속내를 감춘 눈빛이다. (166)

- 날이면 날마다 인간의 머리를 꿈으로 가득 채우는 이 어린 소년은 세상 만물을 기분 좋게 적시며 졸졸 흐르는 한 줄기 시냇물과도 같다. 그는 우리를 미증유의 신천지로 이끄는 저 아름다운 수평선과도 닮았다. 두 발은 이불 속에서조차 모험 충만한 경주를 하듯 뒤척이는데, 방에 가득한 이 향기는......아이들의 몸에서 나는 상큼한 향기다. 그의 잠은 기발한 발상이 톡톡 튀는 기적 같은 현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음이 틀림없다. 오, 아이의 머릿속이야말로 온갖 신기한 동화가 움트는 요람이거늘! (182)

-결말네타 포함/ 책 다 읽으신 후 보는걸 추천해요~

뭐랄까. 굉장히 재밌고 비틀린 느낌을 주는 책인데... 정말 작가를 만나고 싶어지게 만든다. 결말이 뭐 그래?! 하고 따지고 싶다. 어떡할거야, 당신... 급 우울해져 버렸잖아! 하고 따져보고 싶다.

어 떻게 보면 알랑이 가장 죽음에 근접했던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을 이루고 나면, 그 나머지 인생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극단성이랄까. 여러가지 이유로 자살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그 이유 안에 '자기'가 있었다. 하지만 알랑에게 '자신'이 있었을까. 단순히 임무의 완수. 자살특공대 수업을 착실히 들었구나, 알랑.

열린 결말인 듯도 싶지만, 해피 엔딩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생각할 수록 짜증이 난다. 자살이 우울한 것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슬픔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다시 튀바슈 가족은 자살가게를 운영할까...
아아...제일 잔인한 건 너야, 알랑...

- 알랑은 붕대를 단단히 틀어쥔 채, 지난 일들에 대한 그 어떠한 아쉬움이나 미움도 없는 덤덤한 마음으로 저 위 가족들 얼굴을 바라보면서 흔들흔들 오르고 있다. 지금 보이는 저들 모두의 행복과 미래에 대한 갑작스런 신념, 저 얼굴들에 빛나는 환한 웃음이야말로 알랑의 일생일대 걸작이나 마찬가지다. 2미터가 남자 누나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튀바슈 부인은 난데없이 어린 시절 유치원 마당에 들어서는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듯 가까워지는 아들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 알랑의 임무는 완수된 것. 순간......그는 손을 놓는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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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 소설
장 미셸 코엔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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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이 내 눈에 띄인 건 작년이었다. 오색찬란한 하드커버도 눈에 확 들어왔지만 사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바로 제목. 다이어트 소설! 다이어트라니 이 세상 여자 반이상이 반응할 그 단어가 당당히 소설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여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그 책을 뽑아 읽고 싶다는 마음이 솟아났다. 하지만 소심하고 컴플렉스 투성이인 난 쓸데없는 자격지심에 몇번이고 책을 들었다 놨다 하며 소심의 극치를 (도서관 CCTV에게) 보여줬고 결국 사람이 한적했던 어느 날 조심스럽게 뽑아 후다닥 대출해 집으로 뛰어왔다.

책은 두껍고 하드커버지만 생각보다 가벼웠고 무엇보다, 진부한 말이지만, 손에서 놓을 수 없을만큼 재밌었다. 아주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 역시 '날신해진다'는 일에 나름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비록 게으름과 넘치는 식욕으로 제대로 시도해 본적은 없지만서도. 의식할 필요도 없는 제목에 굳이 과민반응했던 것도 실은 내가 스스로 날씬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그래서 이 책을 들고 집까지 종종걸음을 치며 책장을 넘기고 싶은걸 꾹 참고 있었다.

나는 다이어트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의 재기넘치는 이야기를 읽고 자기위안을 삼고 싶었다. '다이어트 소설'은 '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소설의 주 무대는 살을 빼는 클리닉이며 주인공들 모두 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살'이라는 외면보다 '사랑'이라는 내면에 집중한다. 왜 사람들은 살이 찔까? 왜 사람들은 자신의 몸매/몸무게에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을까?

작가는 '파리 클리닉'의 의사, 닥터 마튜 소랭을 통해 그 이유가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말한다. 닥터 마튜는 모든 의사의 귀감이 될만큼 환자를 위해 애쓰고 환자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의사다. 그의 클리닉은 단순히 살을 빼거나 섭식장애를 고치기 위한 곳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마음의 결핍 또한 치료해 나간다. 닥터 마튜가 있기에 사람들이 변할 수 있었겠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각자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안고 클리닉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부모님에게서 사랑을 느낄 수 없어 먹기를 거부한 거식증 환자 사라, 쓸모가 없어졌다고 고용주에게 버림받은 유명 디자이너 랄프, 엄마의 바람을 알고 한없이 실망한 치대생 에밀리, 품위와 자존심으로 가족간의 사소한 비밀을 몇년이고 오해한 델핀, 남편의 바람에 상처받은 유쾌한 릴리안. 사람들은 낙원과도 같은 클리닉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지탱해가며 상처를 치료하고 마주볼 용기를 얻는다. 그 사람들은 '먹는 것'을 자신의 탈출구로 삼았고 그 결과로 더욱 스트레스를 받고있는 섬세한 사람들이었고 악순환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믿음뿐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 또한 필요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시각은 새벽 1시였다. 사실 자기 전 가볍게 프롤로그만 읽으려고 집어든 거였는데 끝내 끝까지 다 읽고 늦게 자고 말았다. 나는 비록 클리닉에서 도움을 받았지만 스스로 다시 일어날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긴 그 사람들이 부러웠고 존경스러웠고 사랑스러웠다. 스스로 어쩔 수 없다면 도움을 구하는 것 또한 한 방법일 것이다. 그 결과로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다면 순간의 자존심이 문제일까. 그렇게 열심히 애쓰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기특한(내가 말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니지만) 사람들 중에서 랄프는 독보적인 존재다. 사실상 닥터 마튜가 영양학적인 면에서 균형을 잡아주었다면 랄프는 정신적인 면에서 사람들 사이의 균형을 잡아준다. 랄프의 경험과 굳은 의지는 사람들을 한 팀으로 묶어주었고 랄프에 비해서 어린 사람들에게는 든든한 보호자를 만들어 주었다.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길에 자신을 가지고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나이를 떠나서 대단한 사람이다. 사랑이 분명 만병통치약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 형태는 다를지라도 '사랑'은 사람에게 살아갈 힘과 희망,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클리닉의 환자들이 사랑을 회복하고 나서야 살이 빠지고 삶의 목표를 잡게 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까.

비록 원하고 예상했던 내용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유쾌하고 내 컴플렉스를 간접적으로나마 해소시켜준 유익한 책이었다. (책 속의 식단은 챙겨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지만)이 책을 읽기만 해도 행복해져서 살이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자신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환자들은 자기가 겪는 고통만큼 그대로 표현을 하곤 하지요. 사라는 사랑이 넘치는 아이예요. 자기가 아직 주지 못한 사랑, 아직 받아보지 못한 사랑...(28)

-랄프는, 인생이란 수많은 관문을 헤쳐나가야 할 문제들의 연속임을 알고 있었다. (67)

-사라는 자신에게서 욕구라는 감정이 샘솟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차갑기만 하던 몸이 서서히 따뜻하게 풀리는 현상을 느꼈다.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이 이토록 감미롭다는 것조차 그녀는 잊고 있었다. (73)

-더이상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마튜의 말이 옳았다. 지금이야말로 에밀리가 스스로를 지켜야 할 때인 것이다. (148)

-마음과 영혼의 깊은 곳에서 전해지는 견딜 수 없는 고통까지 감내해야 하는 에밀리의 온몸이 부를 떨렸다. 이런 내부의 학대는 망가진 위장에서 전해지는 그 고통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158)
-대신 그 질문들을 내부에 감춰두고 침묵이라는 자물쇠로 잠가버렸다. 그리고 수많은 양의 칼로리로 그 질문을 덮어버렸다. 그것은 고통의 주머니와도 같았다. 몇 년 동안이나 꾸역꾸역 먹어치운 음식물로 가득한 고통의 주머니. (179)

-뚜렷하고 새로운 목표 없이 보낸 요 몇 년이 자신을 살찌게 한 원인은 아닐까? 매일매일 같은 일만 반복하는 지겨운 일상이 그의 육체에 반영되어 예전과는 다른 육중한 몸으로 바뀐 것은 아닐까? (195)

-접히고 또 접힌 살, 둥뚱하게 나온 배, 팽창할 대로 팽창한 피부는 곧 자신의 엄청나고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아들이 건넨 몇마디의 말로 곧 사라져버렸다. 이런 말의 힘, 특히 침묵하고 있었던 말의 힘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299)

-그렇게 꽁꽁 묶어놓고 참기만 할 게 아니라, 제 안에 있는 눈물을 다 쏟아놨어야 했지 않나 하고 말입니다. 그 눈물이 쌓여 몸이 이렇게 부은 것 아니겠어요! (401)

-살을 빼고 싶다는 욕구 속에는 몸을 바꾸고 싶은 욕망이 들어 있다네요. 번데기가 나비로 변태하듯이요. 결국 살을 빼서 우리가 닮고 싶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새롭게 출발을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겠죠. (403)

-환자를 만나면 만날수록 느끼는 건데, 그들은 흔히 고통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경우가 많아. 물론 나도 그래. 얼마든지 다른 곳을 향해 문을 열고, 좀더 즐겁고 나은 것을 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이렇게 마음을 외부로 향하게 하는 것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발판이야.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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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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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난히 고유명사에 약한 편이다. 사람 이름부터 시작해서 지명, 나라 이름 등등 그저 고유명사기만 하면 내 머리속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지 어느 순간 까맣게 잊혀지곤 한다. 익숙(해야)할 우리나라 지명도 그런데, 다른 나라 지명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을 펴들고 읽기 시작했을 때 후쿠오카, 사가, 세후리 등등 지명 이름이 나오자 순식간에 집중력이 떨어져 버렸다. 불행히도 지명에만 약한 게 아니리 지리에도 약한 나는 지명으로 점철된 설명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그 곳이 어떤 장소인지 파악하길 포기했다. 사실 장소가 아무렴 어떠냐,는 얄팍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만.

후아, 다 읽었더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속이 갑갑했다. 도대체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깜깜했다. 이게 동정인지 누군가를 향한 경멸인지. 그것도 아니면 동질감인지. 내가 어렸을 적의 악당은 별다른 이유없이 그냥 나쁜 놈이었다. 사람을 업신여기고 미워하고 죽이는 '순수'한 나쁜 놈. 그런 악당들을 미워하는 데에는 아무런 고민도 이견도 없었다. 하지만 뭐랄까, 악당들이 점차 '인간적'으로 변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애초에 난 내가 착하다고 생각할만큼 뻔뻔하지 않아서 어느 정도는 악당 쪽에 호감을 주고 있었는데 '악당'들이 이유와 생활을 갖기 시작하자 선과 악의 이분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렴풋이 이 세상에 사실은 선과 악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론으로 알기 시작했지만,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경험이 모자란 듯 싶다. 난 아직도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곤 하니까.

그런 면에서 나에게 이 소설은 도통 '구분'할 수 없는 책이다. 착한 사람인 듯 하면 아닌 것 같고, 나쁜 놈인가 하면 그저 어리석을 뿐이고. 난 딱히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 걸 믿는 편은 아니지만, 사람은 알고보면 다 착한 면이 있는 건 확실하다. 다만 그게 겉으로 드러나 있는지, 아니면 다른 성격에 묻혀있는지가 다를 뿐. 이 책은 그걸 노골적으로 펼쳐보여준다.

난 사실 처음 책을 읽을 때 '요시노'라는 여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 퉁명스럽게 구는 거야 남말할 처지가 아니지만 친구들에게 부리는 허세나 만남 싸이트 같은 일들을 보면 아무래도 난 요시노를 좋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으면, 요시노가 좋아지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감정이 누그러지는 걸 느낀다. 그건 아무래도 내가 요시노에게서 발견한 작은 동질감 한 조각과,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에 공감했기 때문일 거다.

요시노의 허세는 자신의 말을 액면 그대로, 즉 순수하게 믿어주는 마코 앞에서 빛이 난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허세를 부리는 사리 앞에서의 요시노는 어딘가 초조해 보인다. 그건 아마도 사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자신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순진한 마코 앞에서보다 더 확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겠지. 정도야 다르지만 좀 더 잘나보이고 싶어서 작은 허세를 부린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불쌍한 요시노. 요시노는 좀 더 나이가 들어 자신의 어린 날을 부끄러워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내가 요시노에게 이런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는 건, 요시노의 아버지, 요시오의 행동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 책의 인물 중에서 마스오가 제일 '악당'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가 저지른 '범죄'는 없지만 그는 여자를 한 밤의 산 중턱에 버리고 와도 죄책감을 갖지 않고 단지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남들에게 우쭐해서 자랑하고 가볍게 떠벌리는 멍청이 이기도 하다. 그런 마스오의 앞에서 요시오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지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기껏해야 내가 느끼는 감정에서 퍼올린 단면이라 난 실제 그런 상황에서 겪을 가슴의 고통을 잘 모른다. 하지만 난, 그런 어리석은 사람의 앞에서 충동적으로라도 아무 일을 저지르지 않은 요시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런 놈 때문에 아저씨 인생까지 망칠 것 없어요, 라는 심정이었달까.

이 책의 인물 중 철저히 '피해자'인 요시노의 부모들과 달리 유이치라는 존재는 독특하다. 그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물론 실제 삶 속에서 어느 누구 하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유이치는 다른 사람을 극단적으로 배려하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버림받았던 그에게 자신의 욕구는 극히 미미하며 한정된 분야에 국한되어 있다. 그런 그에게도 감정이 있었다. 타오르는 분노와 사랑이. 어찌보면 유이치는 늘 사랑을 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해. 처음부터 끝까지, 아직도 버림받았던 어린아이처럼 우물쭈물 누군가를 기다리는 유이치를 보며 동정심이 일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요시노는 어떡해. 이미 죽어버린 요시노와 자식을 먼저 보낸 요시오는 어떡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진실을 굴곡없이 알린다는 게 이렇게 힘들까. 사람을 100% 있는 그대로 대하면 진심이 전해질까. 자문해봐도 아니라는 답을 내놓는 내 자신이 슬프다.

끝내 유이치의 진심을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난 다른 무엇보다도 그게 서글프고 가여워서 끝내 마음이 무겁다.

-이제는 시간이 흘렀다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것은 배신한 쪽의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걸 미호는 새삼 깨달았다. (157)

-그러나 진실을 진실로 전달하는 게 이렇게도 힘든 일인지는 몰랐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거짓말을 지어내는 게 훨씬 편할 것 같다고 하야시는 생각했다. (165)

-세상에서 하는 말이 맞는 거죠? 그 사람은 악인이었던 거죠? 그런 악인을, 저 혼자 들떠서 좋아했던 것뿐이죠. 네? 그런 거죠? (475)

-그랬더니 그 사람,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렇지만 양쪽 다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니까"라고 하더라고요. (466)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비웃는 마스오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스오의 이야기를 듣고 웃는 두 젊은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요시노를 비방 중상하는 편지를 보내는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요시노를 행실이 나쁜 여자로 치부해버리는 와이드쇼의 해설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450)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지. 자기에겐 잃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강해진 걸로 착각하거든. 잃을게 없으면 갖고 싶은 것도 없어. 그래서 자기 자신이 여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잃거나 욕심내거나 일희일우하는 인간을 바보 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안 그런가? 실은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야. (448)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 하는. (439)

-그렇지만, 그래도 아버님이 어떻게든 마스오에게 항변해주길 바랐습니다. 침묵한 채 지지 않길 바랐습니다. (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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