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이 무엇일까?

리뷰 첫머리에 왜 뜬금없는 질문인가 싶지만, 숨가쁘게(!) 책을 읽어내려간 후의 허탈함 뒤에 저 질문이 느닷없이 나를 찔러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온갖 매체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에 대해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내가 세상의 모든 (이성간의) 사랑에 대해 가지는 가장 큰 감정은 '부러움'이다. 거기에 더하자면 의구심 정도일까. 이 무슨 세살바기 어린아이 같은 유치함인가 싶지만 이런 내 성격 탓에 난 로맨스 소설들을 볼 때면 온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고, TV에서 열렬하고도 헌신적인 사랑이 펼쳐질 때면 조용히 채널을 돌렸다. 굳이 (불쌍해 보이는) 날 변호하자면, 내 눈에는 그 모든 애정표현들이 현실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말 그렇게 닭살돋는 말들을 속삭인단 말야?

그런 의문을 뒤로하고 오늘도 (피곤함과 상관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찾아 집어든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는 확실히 재미는 있었다. 문제는... 너무 감정이입이 된다는 점. 단 한글자 차이로 인해 잘못 전해진 이메일 한 통에서 시작된 이메일 펜팔은 어설픈 유머와 신랄한 비판, 상냥한 유쾌함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든든한 남편과 두 아이를 둔 에마는 이메일 대화 속에서 다시 한 번 결혼 전의 '에미'가 되어 가족이라는 '내부 세계'에서 벗어나고, 언어심리학 조교수인 레오는 자신의 세계의 이별에서 벗어난다. 이들의 첫 만남이 그야말로 우연이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였기에 오히려 그 이상으로 주고받는 이메일에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하지만 오로지 이메일의 형식으로만 이루어진 대화라 실제로 두 사람의 감정이 여과없이 보여졌기 때문에 내가 책에 끌려들어간 건 순식간이었다.

침착하게 보이려고 애쓰지만 언제나 감정을 드러내고마는 에미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술에만 취하면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는 레오. 편지보다 빠르고 전화보다는 먼 이메일 안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더 자유로울 수 있었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린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사랑에 대해선 한없이 무지한 내게는 이렇게 순수하게 감정만 부딪히는 경우가 오히려 알기 쉬웠다. 그래서 그런지 등장인물이 30대임에도 불구하고 귀여워 보이고 (불륜이지만) 서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평소 결혼의 책임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에게는 그렇게 두 사람의 '감정'에 끌려갔다는 게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런게 사랑이려나. 엔딩까지 날 강하게 끌었던 팽팽한 대화가 더이상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너무 슬프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겠지. 부디 두 사람이 행복해 지기를.

-우리 주위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요. 우린 그 어디에도 살고 있지 않아요. 나이도 없고, 얼굴도 없어요. 우리에겐 밤낮의 구별도 없어요. 우린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아요. (33)

-당신에게 너무 매여 있게 돼요. 나를 만날 때 등을 돌리고 있는 남자, 나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 남자, 나한테서 메일만 원하는 남자, 실제로 만나는 여자들과는 (짐작건대) 쓰라림을 맛보다가 끝내 고통의 문안으로 들어서고 말기 때문에 내가 쓴 말들을 상상 속의 여자를 창조해내는 데 이용하는 남자, 그런 남자의 메일을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요. (111)

-여느 누구가 아닌 그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입니다. 물론 저에게도 당신은 여느 누구가 아닙니다. 당신은 제 안에 있으면서 저와 늘 동행하는 제 2의 목소리 같은 존재입니다. 당신은 저의 독백을 대화로 바꿔놓았습니다. 당신은 제 내면을 풍부하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132)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순간 당신의 환상 속 에미는 영원히 죽는다는 사실. (164)

-'가정의 평화'는 형용모순이에요.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 짝을 이룬 것이라고요. (252)

-우린 골라인에서 출발하는 셈이에요. 따라서 나아갈 방향은 하나밖에 없죠. 되돌아가는 것. 우린 미몽에서 깨어나는 지난한 과정을 밟아야 해요. 우리가 쓰는 글이 우리의 실제 모습, 실제 삶일 수는 없어요.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며 그렸던 많은 이미지들을 우리의 실제 모습이 대신할 수는 없어요. (278)

-유령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라이케씨, 당신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만질 수 없고, 따라서 실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은 제 아내의 환상이 만들어낸 존재일 뿐이지요. 한없는 행복감, 세상과의 절연 상태에서 기인하는 몽롱함, 글로 지은 사랑의 유토피아......이런 것들이 만들어낸 환상 말입니다. (311)

-우리의 만남이 두려워요. 만나고 나서 당신을 잃게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363)

-'잃는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말아요.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미 잃는 거예요. (3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