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핸드 -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그리고 인류 최후의 날 무기
데이비드 E. 호프먼 지음, 유강은 옮김 / 미지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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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이 군대의 규모를 절반으로 줄이고, 미사일 등 전략무기를 포기한다면, 북한은 핵무기, 생물학 무기를 완전 폐기하고, 핵실험을 중단할 것이다. 또한 재래식 무기들을 절반까지 감축하고 군대의 규모를 절반까지 줄이겠다." 만약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은이 이런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면, 대한민국 정부는,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반응을 할까요? 또한 한국 사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북한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저럴 것이다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서로 무기를 맞대고 대립한 두 세력이 하나의 위대한 성취, 서로의 무기를 버리고 악수를 청한다는 결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매드 맥스』,『폴아웃』또는『터미네이터』의 파괴된 세계, "임모탄님이 날 보셨어!" 라고 외치며 광란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이미지는 냉전의 공포, 핵무기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얻은 모든 가치가 사라지고, 리셋되며, 그 잔해에서 비참하게 살거나, 궁극적으로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단순히 영화나 게임, 만화의 공상적 상상력이 아니었습니다. 냉전 하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었습니다. 냉전의 주역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물론이고, 권헌익이《또 하나의 냉전》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냉전은 세계인 모두의 것이었습니다. 냉전이 만들어낸 무기들의 파괴력은, 상대방의 인구나 산업 기반을 절반 이상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되었고, 종래에는 지도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자 데이비드 E 호프먼은 과거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기밀들을 활용해 냉전 당시의 무기군축의 역사를 실감나게 재현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지도부의 회고록들과, 소련 중앙위원회 간부엿던 비탈리 카타예프의 정보 등은 당시 소련과 미국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의 규모는 막대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6년동안 연합국이 떨어뜨린 폭탄은 300만 톤이었지만, 군비경쟁 이후 미국과 소련이 보유한 파괴력은 150억 톤에 달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핵전쟁이 시작된다면 가장 먼저 죽게 될 것은 군인들이나 시민들이 아닌, 정치인 자신들이라는 점입니다. 미국의 핵미사일은 크렘린 궁에, 소련의 핵미사일은 백악관을 향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반응은 민감했고, 때론 신경질적이기도 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지도부는 더 많은 핵무기만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라 생각했고, 핵무기에 대비해 곳곳에 지하벙커를 만들었습니다. 소련 지도부는 자신들이 선제공격을 받아 몰살당한 이후에도 확실하게 미국에 보복할 수 있도록, 컴퓨터가 자동으로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는 시스템 '데드 핸드'를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버튼 한번만 누르면, 두 초강대국은 확실히 멸망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살고 상대는 죽는다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핵무기 버튼은 자폭버튼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상대는 물론이고 자신들까지 완벽하게 파괴할 무기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군비경쟁의 관성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멈추고자 하는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대한항공 격추 사건을 계기로 세계가 얼마나 벼랑 끝에 다가섰는지, 그리고 핵군축이 얼마나 필요한지가 드러났다. 어떤 이들이 추측한 것처럼 단순히 소련 조종사들이 여객기를 군용기로 오인한 것이라면, 핵무기 발사 버튼에 가까이 있는 소련의 군 인사가 훨씬 더 비극적인 착각을 범하는 일도 충분히 상상할 법하지 않은가 - p.131

미국의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도덕적인 이유였는지, 종교적인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핵 없는 세상을 만들고싶다는 개인적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핵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군비 증강이었습니다. 그는 군비를 증강하면서도 무기 감축에 대한 욕망을 엿보였고,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 미국을 보호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핵 없는 세상을 위해 핵무기를 공격하는 무기를 만드는 방향을 선택한 것입니다. 반면 소련 지도부는 겉으로는 혁명을 외치며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계속했지만, 속으로는 군비 축소를 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의 군대와 군산복합체는 너무나 많은 돈을 빨아먹고 있었고, 경제가 파탄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상 미사일 전력에 있어선 소련이 우위에 있었지만, 점점 기술력이 뒤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이 본격적으로 군비감축을 외친 것은, 새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부터였습니다. 개혁가였던 고르바초프는 집권직후부터 미국에게 서로 군비를 감축하자고 말했습니다. 소련이 먼저 핵실험을 중지하면서 미국도 같이 중지할 것을 원했고, 미사일을 줄이고 군대를 철수시키는 등 기존과는 다른 파격적인 행보를 계속했습니다. 2000년까지 단계적으로 미국과 소련 뿐만이 아닌 모든 나라의 핵무기를 없애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레이건 정부의 두뇌들은 고르바초프를 믿지 않았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군비감축이 절실했지만, 미국과의 상호감축이 아닌 일방적인 감축은 하기 힘들었습니다. 소련은 계속 핵실험을 중지했지만, 미국은 계속 진행했습니다. 미국인들은 고르바초프의 급진적인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고, 소련인들은 레이건의 꿈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은 둘다 같은 꿈, 핵무기 없는 세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는 서로에게 여전히 수수께끼였습니다.

체르노빌 이후에는 핵의 위협이 우리 국민들에게 더 이상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확실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핵무기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한결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연설에서 고르바초프는 체르노빌을 계기로 "인류에게 핵전쟁이 벌어지면 어떤 심연이 드러날지"가 밝혀졌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저장된 핵무기에는 체르노빌 사태보다 수십만, 수백만 배는 끔찍한 재앙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었다. - pp.356~357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은 레이캬비크에서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지적처럼, 이것은 '역사에 위대한 대통령으로 영원히 기록될 일'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은 회담을 통해 장거리 핵무기의 절반을 감축한다는 협정을 이끌어냈지만, 우주로 무기경쟁이 확대되는걸 바라지 않았던 고르바초프와 달리 레이건이 미국의 미사일 방위개념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협정의 한 단어, 미사일 방위는 '연구'한다는 미국측과 '연구실'에서만 한다는 소련측의 의견차이였습니다. 고르바초프가 제시한 지구상의 모든 핵무기를 없앤다는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중거리핵전력조약을 통해 소련의 파이오니어 미사일과 미국의 퍼싱2 미사일을 전부 폐기하는 등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은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한 행보를 걸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 이후 등장한 부시 대통령은 레이건과는 달리 핵무기의 폐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핵무기의 억제력이라는 미국의 전략적 사고는 굳건했고, 부시는 충실히 청지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고르바초프 시대에 대대적인 핵무기 감축이 이루어졌더라면 많은 핵무기가 체계적으로 폐기되었겠지만, 옐친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폐기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소련은 붕괴했고, 소련이 남긴 유산들, 수많은 무기들은 방치되었고 사라졌습니다. 핵무기는 여전히 존재하며, 강대국 대접을 받기 위해 갖춰야 하는 어른의 장난감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영화『지.아이.조 2』에서처럼 단번에 핵무기 없는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북한을 믿지 않는 것처럼, 소련과 미국이 서로를 믿지 않아 결정적 찬스를 놓친 것도 아쉽지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소련이 남긴 유산들, 여전히 미군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은 인류를 멸망시킬 '데드 핸드'라고 말합니다. 냉전의 공포는 끝난 게 아닙니다. "임모탄님이 날 보셨어!" 라고 외치며 광란하는 세상을 살고 싶지 않다면,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꿈꿨던 세상,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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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산다는 것 - 세상의 작동 원리와 나의 위치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
아브람 더 스반 지음, 한신갑.이상직 옮김 / 현암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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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그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대답이 있습니다. '이성적 존재'라는 답변도 가능하고, 영화『매트릭스』에 나오는 대사처럼 '바이러스'라고 답할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인간은 엄청나게 다양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함축적으로 말하기 위해선 다의적이고 때론 추상적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가장 무난한 답변은 아마도 '사회적 동물'이 아닐까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일본에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다른 사람과의 사회적 관계를 거절하는 히키코모리 현상마저도 나와는 다른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네덜란드의 사회학자 아브람 더 스반은 유럽에서 저명한 사회과학자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사회학 뿐만 아니라 정치학, 역사학, 심리학 등 인간과 관련된 학문을 연구했으며, 라디오 통신원, 다큐멘터리 제작 등 방송인으로서의 경력을 가지고 있고, 수필 등으로 문학성까지 인정받았습니다. 유럽 9개 의회에서 내각이 구성되는 과정을 분석한 논문을 통해 모델과 역사를 조화시킨 공로로 왕립학술원에 선출되었고,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사회 조직과 구조에서 인간의 합리성을 찾고 있습니다. 합리적 선택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역할, 협력과 집단에서 등장하며, 그런 네트워크 속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아브람 더 스반은 사회학의 핵심 문제들이란 방대한 분석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살고있는 인류의 유일한 생존자인 로버트 네빌은, 유일한 생존자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에게 적당한 산소와 온도, 식량, 거처, 지식이 있어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로버트 네빌에게 간섭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립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아브람 더 스반은 독립적인 사람이란 타인이 필요없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받은 걸 갚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는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없기 때문에 권력도 없고, 존경도 없으며, 재산도 없습니다. 규제도, 터부도 존재하지 않은 완전히 자유로운 삶이지만, 의미도 없습니다. 사람이 탐하는 모든 욕구는 다른 사람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때문에 로버트 네빌은, 다른 사람을 원합니다.

타인의 영향력은, 그것이 고의적이든 아니든 간에, 매우 큰 것이다. -《인간, 사회적 동물》p.71

다행히도 우리 주변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가족관계, 친구관계, 동료관계 등 다양한 네트워크를 만들고 해체합니다. 네트워크에 들어간 이상 누구라도 타인이 필요로 하는 걸 줄 수 있기 때문에 권력을 가질 수 있으며, 재화를 타인이 쓰지 못하도록 배제함으로써 재산이 생겨나고, 각자 얻은 만큼에 따라 계층에 소속됩니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경멸하며, 서로에게 합리적인 기대를 하며 살아갑니다. 사회화와 문명화 과정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되며, 사회적 관계를 통해 언어, 종교, 법, 예술을 탄생시키고, 시장, 기업, 국가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가 됩니다.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권력관계의 우위성을 추구하는 자도 있고, 타인에게 존경만 받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더 많은 타인이 재화를 사용하지 못하게 배제함으로서 자신의 재산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사회적 관계의 가치들은 다른 사람이 있기에 가치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불평등을 심화시킴으로서 네트워크가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과거엔 그런 사회적 관계에 대한 도전은 다른 사람들이 관계를 해제하거나, 죽창을 통해 해결했지만, 세계화 과정을 통해 사회적 관계가 글로벌화된 지금은 지역적 도피라는 해결책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회성원은 상호 의존적이라는, 또 누구도 다른 사람의 빈곤에 개인적으로 책임질 필요는 없지만 모두가 기여하는 복지제도를 통해 국가가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는 사회의식을 낳았다. 풍요로운 나라들이 주변부에 사는 극빈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정책을 개발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에게도 이롭다는 의식이 번영한 나라 사람들에게 먼저 생겨야 한다. - p.226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선 사회적 관계를 구성해야 하며, 사회적 관계는 상호의존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상호의존은 인간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사회가 만들어낸 다양한 문제들, 국가권력과 자본권력 등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은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해결해야 합니다. 왕은 백성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가 통수권은 택도 아닌 수중의식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노동 대중으로부터 위임받는 것입니다. 사회 전반의 현상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학문인 사회학은 이런 구조를 분석하고 해결하는데 도움을 줌으로써,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기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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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서사 구조와 전략 논형학술총서 6
박기수 지음 / 논형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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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애니메이션『라이온 킹』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우리도 애니메이션으로 돈벌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적이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한 편이 벌어들인 돈이 자동차 150만 대 수출액과 맞먹는다고 말하며, 미래의 동력은 문화산업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일본의 닌텐도 게임기 같은 것을 개발해볼 수 없느냐"고 말한들 한국의 닌텐도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원해도 한국 교육 환경에서 스티븐 잡스나 빌 게이츠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 봤지만, 여지없이 실패했습니다. 저자 박기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한국 애니메이션의 실패엔 서사의 부재가 있습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가장 취약한 분야가 서사라는 점은 저자와 같은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도 많이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설문조사 결과 소비자들은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으로 '유치한 이야기'를 뽑았고, 애니메이션을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이야기라고 언급했습니다. 애니메이션『아마겟돈』의 실패를 말함에 있어서도 전문가들은 서사 능력의 한계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문제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것은, 애니메이션을 아동용 오락물 정도로 취급하는 시대착오적인 인식과 더불어, 서사적 역량을 지니고 있는 전문가 집단의 외면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애니메이션 감독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 서사라는 낯선 경계에 도전할 사람은 적고, 벤치마킹하려는 노력도 부족합니다.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작품의 서사와 소비자의 향유입니다. 소비자의 향유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서사입니다. 대중은 서사를 통해 콘텐츠를 향유하면서 향유의 정도, 기간, 가치를 결정합니다. 애니메이션은 실재의 부재, 시뮬라크르의 세계이기 때문에, 향유자들의 생산적이고 실천적인 향유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애니메이션의 언어적 특성과 구성 원리 모두, 향유자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해서 향유의 내용과 질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애니메이션엔 매력적인 서사구조와 그것을 즐기는 향유자들이 있습니다. 동호회 결성, 작품에 대한 정보 수집, 성지 순례, 2차 창작, 동인지, 대본 번역, 코스프레 등 능동적인 참여자로 텍스트에 개입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문화실천이 없다면, 아무리 매력적인 서사구조를 만들어도 애니메이션은 실패하게 됩니다.

애니메이션은 하이 코스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산업이며, 애니메이션 자체만으로 수익을 내기 힘듭니다. 때문에 애니메이션은 필수적으로 원 소스 멀티 유즈 전략과 창구효과를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합니다. 거대 자본의 디즈니도 애니메이션을 통해 얻는 수익은 10%밖에 되지 않으며, 나머지 90%는 토털마케팅을 통해 매출을 올립니다. 이는 애니메이션 기획 단계부터 대중과 문화를 효과적으로 상관시킴으로써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서사 텍스트와의 적극적인 대화, 직접 참여하는 것은 향유자만이 아닙니다. 상업성은 서사 자체에 내장되어야 하며, 서사 구조 자체를 상업적인 면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개편해야 합니다. 저자는 한국 애니메이션들이 대중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문화적 가치나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에만 집착함으로써 콘텐츠적 가치를 도외시한 탓이라고 말합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성공에는 견고한 서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서사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개방적 서사지향인데, 미스테리물적인 요소, 기존 애니메이션의 패러디, 정신분석학적 단서, 종교적 상징, 성장소설적 요소, 학원 로맨스물적 요소와 같은 다양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서사는 향유자의 참여적 수행 과정을 통해 실체를 드러내고 변화하는데, 현학적인 주변 정보들이 그 자체로 독립적인 향유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서사 요소가 완결된 텍스트로 수렴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둠으로써 쓰여지는 텍스트를 생산해낼 수 있었고, 애니메이션의 생명력은 방영 당시는 물론이고 종영 이후에도 이어지게 됩니다. 향유자들은 에반게리온에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분석하고, 예상하고, 즐기며 애니메이션의 생명력을 이어갑니다.

한국의 애니메이션들은 서사의 빈곤, 그로 인한 향유의 부재, 필연적인 상업적 실패를 겪었습니다.『영혼기병 라젠카』의 서사는 상동구조가 뚜렷한 방향 없이 산만하게 제시됨으로써 중심이 되는 두 갈등이 모두 긴장과 문제성을 상실해버렸고,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슬랩스틱 코미디나 대사는 애니메이션에서 타겟으로 잡았던 향유층보다 하위의 것이었습니다.『하얀마음 백구』의 경우 준수한 서사적 미덕을 보여주지만, 판매 타겟이 모호하고 케릭터 자체의 상품화가 힘들었습니다.『원더풀데이즈』의 경우 계열체적 서사가 통합체적 서사로 충분히 연결되지 못해 케릭터들의 행동에 당위성이 사라졌습니다.『원더풀데이즈』는 DVD를 반복적으로 향유하거나 메이킹북이나 메이킹필름을 통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면, 서사적 구조를 극복 가능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이것이 대부분 일 회 관람으로 끝나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굿즈판매 역시 포스터나 영상집이 빠져있는데, 작품의 주요 세일즈 포인트인 빼어난 영상미를 간과하는 결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인생의 핵심만을 추구한다. 그 핵심이란, 자기 자신과 자기 삶을 모두 걸 수 있는 우정, 사랑, 열정, 꿈, 신념 같은 것이다. 이러한 열망을 가리켜 실존주의적 열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진정 자유로운 존재로서 인간은 단 하나의 추구에 자신의 모든 걸 내걸 때에야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러나 실제 우리네 현대인의 삶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p.77

성공적인 애니메이션은 대중의 참여도가 높고, 꾸준히 생명력을 이어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선정성, 폭력성, 과장성을 우려하지만, 오히려 위험한 것은 순수함으로 은폐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입니다. 헨리 지루는《디즈니 순수함과 거짓말》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생산하는 청교도적 윤리관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대중에게 부르주아, 백인, 기독교, 남성이라는 지배적 가치를 확고부동하게 만듭니다. 애니메이션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것이며,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 발전을 위해선 지금은 성공적인 애니메이션의 구조와 전략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본과 기술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심도 있고 견고한 서사를 활용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그 대상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즐길만한 매력적인 서사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다양한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성공적인 한국 애니메이션이 탄생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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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5-06-17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월 24일과 25일 박기수 교수가 주관하는 세미나가 개최된다 하는데 지방인지라 허허

착선 2015-06-18 10:04   좋아요 0 | URL
지방은 그런게 좀 힘들죠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거짓말 - 일본인이 파헤친 일본의 진짜 얼굴
스기타 사토시 지음, 양영철 옮김 / 말글빛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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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선진국이냐고 묻는다면 확실하게 대답하기 힘들지만, 일본이 선진국이냐고 묻는다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한때 세계 제 2의 경제대국, G7 가입국, 전세계 곳곳에 자국의 문화가 알려져 있는 일본은 어떤 기준을 대입하더라도 선진국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선진적일 수는 없습니다. 선진국 일본이라 자부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스기타 사토시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세계적인 부자 나라이지만, 국가의 부가 아무리 풍부하다고 해도 그것이 국민생활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외교, 교육, 경제 등의 분야에서 일본이 개선해 나가야 하는 점들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는 일본의 교육 제도를 본뜬 것이 많기에, 일본의 교육 제도가 가지는 문제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학력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사회적 서열화, 초등학생때부터 경쟁적인 환경에 내던져지는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수험제도는 학생들의 삶을 파괴합니다. 저자가 특히 지적하는 것은, 교육을 통한 사상의 통제입니다. 검정교과서라는 이름의 통제는, 학생들의 역사관, 시민의 모습을 획일화합니다. 이런 교육의 기능은 근대국가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동력이었지만, 전체주의, 민족주의 등 다양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애국가와 태극기를 강제하는 것처럼, 일본 역시 국가(國歌)와 국기(國旗)를 강제하고 있으며, 반발하는 교사들은 엄벌에 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선진적인 교육을 위해선 교육을 교사와 학생들의 자주성에 위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부과학성과 도쿄도 교육위원회는 교육의 자유를 제한하는 그 자체가 교사들이 잘못된 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크고 심각한 잘못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통제에 의해 고정된 사상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면 자주적 판단 능력을 가진 시민은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주적인 시민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일본의 미래는 없다고 봐야 한다. - p.86

우리나라에서도 문제되고 있는 저출산 현상은 일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노동자들은 긴 근로시간 때문에 고통받고 있으며, 수많은 잔업, 야근을 합니다. 잔업과 야근은 당연하다는 인식으로 인해 추가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도요타 자동차에서 근무하던 겐이치 씨의 경우 평균적인 수면시간은 2시간 20분이였습니다. 결국 그는 30세가 되던 해에 직장에서 쓰러져 사망했고, 사망 원인은 과로에 의한 치사성 부정맥이였습니다. 평균 귀가시간이 밤 9시, 통근시간을 포함하면 11시나 12시에 집에 도착하는 현실에서 저출산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저자는 쓸데없는 잔업, 야근 문화를 버리고 남성들의 귀가시간이 빨라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아이를 키울만한 여유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왕복 2~3시간에 달하는 출퇴근 시간도 문제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영주택을 지으려 해도 토지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 토지는 효율적 활용의 공간이 아닌, 투기의 대상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회의 육아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빈약합니다. 보육원 수는 적고, 육아휴가는 존재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여성은 1달에서 길어야 3달을 넘지 못하며, 남성이 육아휴가를 쓴다는 것은 회사에서 짤리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습니다. 자신이 사용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의 휴가에도 관대해지지 못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노동조합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1970년부터 일본의 좌파세력은 힘을 잃었고, 노동운동은 노동자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경제부흥기 시절에 기업들이 알아서 모든걸 해결해주던 문화의 잔재이지만, 지금은 더 이상 기업에서 노동자들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일본은 여성 노동자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여성노동자 임금비율은 남자에 비해 68% 수준으로, OECD 순위에서 중국, 한국에 이어 세번째로 낮기 때문에 여성의 사회진출이 힘듭니다. 일본 노동자들은 교육비 등 경제적 부담감이 너무 커서 아이를 못 낳는다고 말합니다.

치한은 일본의 출퇴근 시스템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가혹한 인구밀도가 낳은 산물인 셈이다. 볼프렌은 원조교제와 포르노에서 볼 수 있는 일본 남성의 병리에 대해 서술했다.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 볼프렌은, 장시간에 걸친 노동과 사회에 순종할 것을 요구받는 데서 생기는 자유 상실의 결과라고 진단했다. 일본인 노동자를 울적하게 만드는 스트레스는 꼭 치한 행위나 선정적으로 자극적인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상적인 인간은 일본처럼 비인간적인 사회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 p.156

일본의 세금은 모든 사람들이 부담하는 소비세 위주의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법인세, 사업세, 주민세 등 3대 법인세는 계속 감소하고 있고, 법인에 대한 감세분에 연구개발, 설비투자 감세 등을 이유로 감면된 세금을 감안하면 기업들이 내는 세금은 오히려 마이너스입니다. 기업은 세금을 내기는 커녕 162조 엔에 달하는 금액을 지원받는 상황에서 기업이 부담해야 할 조세와 사회보험 부담을 기피하고 있고, 국가가 사회보장 지원도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가운데 시민들이 사용하는 물건에 대한 소비세의 비중은 계속 늘어갑니다. 덕분에 대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내부유보금은 어마어마해져갔지만, 그것은 대다수 국민들이 부담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자는 GDP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국가로서의 일본은 풍요롭지만 국민으로서의 일본인은 빈곤하다면,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인지 질문합니다.

저자는 국가의 부가 불균형을 이루는 것은, 정치가 국민을 위해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3권분립에 해당하는 재판관들마저 정치 비판에 직결되는 판결을 내지 못하며, 이라크 파병 반대, 기미가요 반대 등 정책을 호소하는 전단을 일반인이 배포하는 것은 범죄가 됩니다. 일본의 정치가들은 친기업적, 친미국적 행동을 보이는데, 미일지위협정에 따라 원래는 지불하지 않아도 될 주일미군의 주둔경비를 매년 지불하는 것을 예로 듭니다. 경제가 힘들기 때문에 국민을 위한 사회복지 예산을 줄이면서도, 미군을 위한 금액은 증가합니다. 미국정부는 매년 연차개혁 요망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하는데, 1988년의 쇠고기, 오렌지 자유화, 1993년의 구조개혁, 1994년의 규제완화 등의 요구를 자민당 정부는 자동적으로 채용합니다. 일본의 공탁금 제도는 의원의 자격은 재산 혹은 수입에 따라서 차별되지 말아야 한다는 헌법 조문을 유명무실하게 만들며, 사실상 평범한 시민은 국회의원을 할 수 없는 나라를 만듭니다.

국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선진국의 조건이 아니다. 일본은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다른 나라들, 특히 과거의 식민지배, 침략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끼쳤던 국가들과 우호관계를 구축하는 일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 한일기본조약, 중일평화우호조약으로 과거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보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처사이다.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일본 정부가 구차한 변명거리를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 pp.251~252

공업화의 진전, 기술과 경제의 발전, 에너지의 대량 소비, 풍부한 국가의 부라는 선진국의 모습에서 남녀평등, 아동, 환경을 배려하는 나라, 지방주권을 통해 시민이 행정을 감시하는 나라, 창의적인 교육, 교육을 위한 교육을 하는 나라, 노동조건을 개선해 비정규직이 없는 나라, 황실의 땅과 수입을 국민을 위해 사용하는 나라, 과거사를 반성하고 평화를 외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일본이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리만 가설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이 변화한다면, 일본이 선진국이냐고 물었을 때, 더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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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을 위한 여름 - 종교의 신과 과학의 신이 펼친 20세기 최대의 법정 대결 걸작 논픽션 8
에드워드 J. 라슨 지음, 한유정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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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결과는 사회 구성원들의 태도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데버러 L. 로드는 우리 마음속에 굳어버렸다고 가정하는 편견조차도 사실은 법에 의해 얼마든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폐단이었던 성희롱이 성희롱 금지법 시행 후 많은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고, 인종차별 금지법으로 인해 많은 인종차별 사례가 개선되었습니다. 사회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사람들은 법적 정통성을 요구하고, 재판의 결과는 사회의 변화를 가속화시킵니다. 국가보안법 같은 사례가 쟁점이 되는 것은, 변화의 여파가 크기 때문입니다. 이문옥 감사관 사건, 망원동 수재 사건 등 수많은 판례들은 우리 사회를 서서히 변화시켜 왔습니다. 수많은 재판들 중에서도, 그 영향력이 엄청난 '세기의 재판'들이 있습니다. 에드워드 J 라슨이 말하는 존 스콥스 재판도 그 중 하나입니다.

HBO의 드라마『뉴스룸』에서 천사가 진짜로 존재한다고 믿는 미국인이 많다고 말할 정도로 미국은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나라입니다. 많은 미국인들은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며, 과거에는 그런 경향이 더 강했습니다. 다윈주의의 등장과 20세기 초에 과학자들이 인류 기원에 대한 다윈주의적 시각에 힘을 실어주는 증거들, 이른바 잃어버린 고리를 쏟아내면서 기독교계는 반발했고, 충돌이 예상되었습니다. 무신론자들이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고, 그들의 핵심엔 진화론이 있었습니다. 20세기 들어 고등교육을 받기 시작한 미국인들이 급격하게 증가했는데, 문제는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친다는데 있었습니다. 젊은층이 기독교 세계관을 버리고 진화론 세계관으로 교육받는 것은 기독교계에 있어서 생존의 문제였고,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은 대대적으로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근대주의를 이교로 규정하고 종파를 뛰어넘어 전통적인 신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단결했습니다.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은 정치적인 행보를 시작했는데, 범죄율을 낮추기 위해 금주령 캠페인을 실시했고, 공산주의를 공격했으며,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교육하는것을 반대했습니다. 원리주의와 반진화론운동은 여러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중 하나가 테네시 주에서의 진화론 교육금지 법안이었습니다. 이 법안은 기독교계의 승리였지만, 많은 논란거리를 안고 있었습니다. 미국시민자유연맹은 이 법안에 반대하기로 했고, 존 스콥스를 통해 재판을 열었습니다. 존 스콥스는 스스로 법을 어겼다고 신고했고, 다수결주의와 전통 복음주의, 과학 세속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표방하는 근대주의 세력이 충돌했습니다.

법을 어긴 존 스콥스의 죄를 묻는 스콥스 재판이었지만, 존 스콥스는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과 미국시민자유연맹의 클래런스 대로가 재판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성경 이야기, 불신론과 계시 종교에 대한 믿음을 두고 벌어진 클래런스 대로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대결은 미국 전역에 알려졌습니다. 수만 단어의 법정 전문이 전국에 배포되었고, 수많은 증인들과 변호사들은 뜨거운 여름을 보냈습니다. 유머와 혼란, 재치와 증오가 법정에 있었습니다. 주민 대부분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배심원단은 원리주의에 유리했지만, 클래런스 대로는 주도권을 잃지 않았습니다. 에드워드 J 라슨은 영화『패치 아담스』나『타임 투 킬』에서 볼 법한 치열한 법정 공방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머리기사로 다음 글을 실었다. "클래런스 대로가 오늘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로 꽉 찬 법정에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과 정면충돌해 원리주의 사자의 털을 뽑고, 엄지손가락을 멜빵바지에 넣은 구부정한 자세로 이들이 신성시하는 모든 믿음을 거역했다." - p.241

주민 대부분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기독교 교육을 시행하는것이 당연하다는 다수결주의, 헌법상 어떤 기관도 종교의 자유에 위배되는 수업을 할 수 없다는 개인의 자유는 일진일퇴를 반복했고, 서로에게 의미있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은 그 끝을 보지 못했고, 스콥스 재판은 진화론 교육을 한 것은 맞으니 유죄라는 결말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스콥스 재판은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에 있어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이 대결구도는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카이스트와 창조과학회가 공존하고, 과학 교육개정안에 창조론을 가르치지 말라는 내용이 포함되자 기독교계가 반발하고 있습니다. 성경직역주의, 창조 과학, 지적 설계, 진화론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고 에드워드 아귈라드 재판에서 의미있는 판결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 재판 역시 끝은 아니었습니다. 스콥스 재판에서 시작된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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