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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서사 구조와 전략 ㅣ 논형학술총서 6
박기수 지음 / 논형 / 2004년 6월
평점 :
디즈니 애니메이션『라이온 킹』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우리도 애니메이션으로 돈벌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적이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한 편이 벌어들인 돈이 자동차 150만 대 수출액과 맞먹는다고 말하며, 미래의 동력은 문화산업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일본의 닌텐도 게임기 같은 것을 개발해볼 수 없느냐"고 말한들 한국의 닌텐도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원해도 한국 교육 환경에서 스티븐 잡스나 빌 게이츠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 봤지만, 여지없이 실패했습니다. 저자 박기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한국 애니메이션의 실패엔 서사의 부재가 있습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가장 취약한 분야가 서사라는 점은 저자와 같은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도 많이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설문조사 결과 소비자들은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으로 '유치한 이야기'를 뽑았고, 애니메이션을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이야기라고 언급했습니다. 애니메이션『아마겟돈』의 실패를 말함에 있어서도 전문가들은 서사 능력의 한계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문제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것은, 애니메이션을 아동용 오락물 정도로 취급하는 시대착오적인 인식과 더불어, 서사적 역량을 지니고 있는 전문가 집단의 외면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애니메이션 감독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 서사라는 낯선 경계에 도전할 사람은 적고, 벤치마킹하려는 노력도 부족합니다.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작품의 서사와 소비자의 향유입니다. 소비자의 향유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서사입니다. 대중은 서사를 통해 콘텐츠를 향유하면서 향유의 정도, 기간, 가치를 결정합니다. 애니메이션은 실재의 부재, 시뮬라크르의 세계이기 때문에, 향유자들의 생산적이고 실천적인 향유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애니메이션의 언어적 특성과 구성 원리 모두, 향유자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해서 향유의 내용과 질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애니메이션엔 매력적인 서사구조와 그것을 즐기는 향유자들이 있습니다. 동호회 결성, 작품에 대한 정보 수집, 성지 순례, 2차 창작, 동인지, 대본 번역, 코스프레 등 능동적인 참여자로 텍스트에 개입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문화실천이 없다면, 아무리 매력적인 서사구조를 만들어도 애니메이션은 실패하게 됩니다.
애니메이션은 하이 코스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산업이며, 애니메이션 자체만으로 수익을 내기 힘듭니다. 때문에 애니메이션은 필수적으로 원 소스 멀티 유즈 전략과 창구효과를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합니다. 거대 자본의 디즈니도 애니메이션을 통해 얻는 수익은 10%밖에 되지 않으며, 나머지 90%는 토털마케팅을 통해 매출을 올립니다. 이는 애니메이션 기획 단계부터 대중과 문화를 효과적으로 상관시킴으로써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서사 텍스트와의 적극적인 대화, 직접 참여하는 것은 향유자만이 아닙니다. 상업성은 서사 자체에 내장되어야 하며, 서사 구조 자체를 상업적인 면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개편해야 합니다. 저자는 한국 애니메이션들이 대중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문화적 가치나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에만 집착함으로써 콘텐츠적 가치를 도외시한 탓이라고 말합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성공에는 견고한 서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서사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개방적 서사지향인데, 미스테리물적인 요소, 기존 애니메이션의 패러디, 정신분석학적 단서, 종교적 상징, 성장소설적 요소, 학원 로맨스물적 요소와 같은 다양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서사는 향유자의 참여적 수행 과정을 통해 실체를 드러내고 변화하는데, 현학적인 주변 정보들이 그 자체로 독립적인 향유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서사 요소가 완결된 텍스트로 수렴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둠으로써 쓰여지는 텍스트를 생산해낼 수 있었고, 애니메이션의 생명력은 방영 당시는 물론이고 종영 이후에도 이어지게 됩니다. 향유자들은 에반게리온에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분석하고, 예상하고, 즐기며 애니메이션의 생명력을 이어갑니다.
한국의 애니메이션들은 서사의 빈곤, 그로 인한 향유의 부재, 필연적인 상업적 실패를 겪었습니다.『영혼기병 라젠카』의 서사는 상동구조가 뚜렷한 방향 없이 산만하게 제시됨으로써 중심이 되는 두 갈등이 모두 긴장과 문제성을 상실해버렸고,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슬랩스틱 코미디나 대사는 애니메이션에서 타겟으로 잡았던 향유층보다 하위의 것이었습니다.『하얀마음 백구』의 경우 준수한 서사적 미덕을 보여주지만, 판매 타겟이 모호하고 케릭터 자체의 상품화가 힘들었습니다.『원더풀데이즈』의 경우 계열체적 서사가 통합체적 서사로 충분히 연결되지 못해 케릭터들의 행동에 당위성이 사라졌습니다.『원더풀데이즈』는 DVD를 반복적으로 향유하거나 메이킹북이나 메이킹필름을 통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면, 서사적 구조를 극복 가능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이것이 대부분 일 회 관람으로 끝나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굿즈판매 역시 포스터나 영상집이 빠져있는데, 작품의 주요 세일즈 포인트인 빼어난 영상미를 간과하는 결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인생의 핵심만을 추구한다. 그 핵심이란, 자기 자신과 자기 삶을 모두 걸 수 있는 우정, 사랑, 열정, 꿈, 신념 같은 것이다. 이러한 열망을 가리켜 실존주의적 열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진정 자유로운 존재로서 인간은 단 하나의 추구에 자신의 모든 걸 내걸 때에야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러나 실제 우리네 현대인의 삶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p.77
성공적인 애니메이션은 대중의 참여도가 높고, 꾸준히 생명력을 이어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선정성, 폭력성, 과장성을 우려하지만, 오히려 위험한 것은 순수함으로 은폐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입니다. 헨리 지루는《디즈니 순수함과 거짓말》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생산하는 청교도적 윤리관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대중에게 부르주아, 백인, 기독교, 남성이라는 지배적 가치를 확고부동하게 만듭니다. 애니메이션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것이며,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 발전을 위해선 지금은 성공적인 애니메이션의 구조와 전략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본과 기술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심도 있고 견고한 서사를 활용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그 대상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즐길만한 매력적인 서사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다양한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성공적인 한국 애니메이션이 탄생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