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떠나며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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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은 한국인에게 의미깊은 날이지만, 일본인에게도 의미가 깊은 날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했다는 것은, 당시를 살아가던 조선인과 일본인의 삶에 거대한 변화가 오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식민지 관계가 종식되면서 모든 질서는 뒤바뀌었고, 역사적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야 했습니다.《CMB 박물관 사건목록》에서 아르헨티나 독재정권이 무너졌을때의 기득권층의 심리를 '세상의 끝'이라 말한 것처럼,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8월 15일 이후는 '세상의 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의 조선인들, 그리고 국사교육을 받는 현재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일제강점기 시절에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단순한 침략자이자 타지에서 온 지배자로 인지하지만, 한반도에서 살던 많은 일본인들은 한반도를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했습니다. 1910년 이전부터 한반도에 넘어와 반세기가 넘도록 한반도에서 살고있는 일본인도 있었고, 일제강점기 중기와 후기에 한반도로 넘어온 사람들이나 한반도에서 태어난 식민자 2세들은 조선인들의 저항도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일본 본토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고향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살아가던 대략 100만 명의 일본인들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카무라가 "패전했기로서니 꼭 내지로 돌아가야만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어른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돌아가야 한다고만 대답했다. 그녀도 결국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집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왜 '자신의 고향'인 강경 땅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p.32


이승만 대통령이 6.25가 발발하자 재빠르게 도망간 것처럼, 한반도의 일본인 중에서도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일본으로 도망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지도층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리스 사태에서 보듯이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은행의 돈을 인출하고자 했고, 일본정부는 금융이 정지되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사람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는 한편, 화폐를 마구 찍었습니다. 이런 자기방어적 화폐는 향후 남한 사회에 심각한 경제 교란을 초래했으며, 그중 상당한 금액이 점령군을 상대로 한 접대비 명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한반도에 살던 모든 일본인들이 순식간에 일본으로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 한반도의 일본인들을 본토로 수송하기 위해선 반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고, 재산 반출에 대한 점령군의 제한 조치가 민간인은 1,000엔, 직업군인은 200~500엔으로 제한되면서 패전 이후에도 한반도에서 살고 싶다는 일본인도 많았습니다. 잔류파들은 일본 본토로 넘어가도 아는 사람은 없고, 직장도 없고, 재산도 없었기 때문에 힘겨운 삶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패전 이후 경성일본인세화회와 경성YMCA가 재류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자 수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어를 배우며 한반도에서 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모두 본토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의 세력이 닿은 남한지역에 살던 일본인들은 그나마 행운아였습니다. 일본인 상류층 인사와 미군 사이의 교류는 활발했으며, 조선인과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일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정도 재산을 숨겨 밀반출할수도 있었고, 많은 조선인들이 광복 이후 해외에서 돌아오면서 주택난 등의 문제가 불거지자 조선인과 일본인들은 비상국면에 서로 양보하고 협력하면서 격변의 시대를 버텼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세력이 닿은 만주, 북한 지역에서 살던 일본인들은 달랐습니다. 패전 후 북한, 만주, 다롄 등 소련 점령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귀환 과정을 '지옥으로부터 탈출'로 묘사할 정도였습니다. 소련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받은 피해를 복구할 목적으로 한반도에 있는 설비, 기계등을 소련으로 가져갔고, 일본인 노동력을 탐내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갔습니다. 성폭력, 약탈 등 소련군의 악행은, 조선인 보안대원이 보다못해 일본인 여성을 산속이나 민가로 몰래 피난시켜줄 정도였습니다.

해외 거주자들은 종전 후 중앙정부로부터 어떠한 외교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거주지 선택권도 인정받지 못했고 재산마저 상실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돌아가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들의 재외 재산을 대외 배상 차원에서 국가가 처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71


8월 15일의 역사적 혼란은 한반도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산업 시설의 파괴와 물자의 폐기, 횡령과 밀반출 같은 일본인들의 불법행위로 한국의 재산은 더 줄어들었고, 일본인들의 재산이 갑자기 시장에 몰리면서 일본인 주택을 중심으로 시작된 투기 붐과 같은 갑작스런 물가의 폭등, 식량의 부족이 일어났습니다. 각종 공, 사유재산은 극소수의 한국인에게 집중되면서 왜곡된 부의 이동, 분배를 가져왔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겐 오히려 식민지 시절만도 못한 삶을 가져왔습니다. 한반도에서 살던 일본인들 역시 고통스러운 삶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힘겹게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일본 동포들로부터 받는 멸시와 차별이었습니다. 본토인 입장에서는 외지에서 돌아오는 일본인들 모두가 자신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귀환자, 제대군인들은 전후 일본의 열등 국민으로 전락했고, 빈곤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2차 세계대전이 남긴, 태평양전쟁이 남긴 결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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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적이 아니다 -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 그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신기철 지음 / 헤르츠나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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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태극기 휘날리며』에선 안타까운 장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하나는 진태의 약혼녀 영신이 반공청년단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입니다. 영신은 북한군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지만, 빨갱이로 몰려 죽게 됩니다. 반공청년단의 이런 행동은 영화를 위한 극적 장치도, 전쟁통에 과열된 과격함도, 순간의 감정에 의한 즉흥적인 살인도 아니었습니다. 영신이 겪은 일들은 수많은 한국 국민들이 겪은 실화이며, 체계적인 대량학살이었습니다. 피와 살이 난무하는 한국전쟁에서, 한국 국민들, 민간인들을 살해한 것은 북한의 인민군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한국 군대는, 그 총부리를 인민군뿐만이 아닌,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한국 국민들을 향해 들이댔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국부(國父)라 부르는 이승만은, 한국전쟁 당시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전쟁기술이 발달하면서 전쟁이 벌어지면 군인보다 민간인들이 더 많이 희생되고, 점령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적국의 군인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적국의 민간인이 아닌, 자신의 국민, 자신의 민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자기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칼로 찔러 살해하는 부모가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부모라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승만이 가장 먼저 공포한 법령은 전쟁을 위한 계엄령이 아니라,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었습니다. 이 법령을 통해 이승만은 수많은 시민들을 부역 혐의로 몰아 살해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얻었습니다.

권력욕에 눈멀었던 늙은 독재자는 항일투쟁에서조차 전선에서 멀수록 안전하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에게 두려움의 대상은 점점 다가오는 외부의 적뿐만이 아니었다. 내부 지배 질서의 흔들림 역시 공포였다고 한다. 해방 후 5년 동안 저질러 온 전횡을 염두에 두었다면 이는 전쟁 상황에서 당장 눈앞의 적은 인민군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정치적 반대자들로 여겼음을 의미한다. - p.34

전쟁 초기 미국 대사는 인민군에게 잡히기 전까지 최대한 오래 대통령이 서울에 머물러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이승만은 즉시 피난 갈 것을 고집했습니다. 국회 토론에서 서울을 사수할 것이 결정되었고, 이를 알리기 위해 국회 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했을 때, 이미 이승만은 남쪽으로 피신한 뒤였습니다. 이승만은 전쟁이 시작된 순간부터 수도를 지킬 생각이, 국민을 지킬 의지가 없었습니다. 이승만의 다양한 행적은, 침략하는 적보다 적에 협력할 것으로 보이는 국민들을 더 두려워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건국 후 테러, 암살, 학살로 일관했던 독재자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당연하지만, 이승만은 자신의 잘못보다 국민을 원망했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계엄령의 범위에 전라도를 제외했습니다. 이로 인해 피난민을 자신이 도망쳐온 곳과 멀리 떨어진 호남으로 유도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정부 수립 전후부터 이승만 정부에 사사건건 대들었던 지역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의 국민들을 이승만은 처리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북한군이 진군하면서 국군은 후퇴했고, 국군이 후퇴하는 길을 따라 한국군에 의한 한국인의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8사단은 후퇴하면서 제천, 예천, 영천에서 민간인을 집단 학살했고, 6사단은 횡성, 원주, 여주, 충주, 음성, 괴산, 문경, 청원, 상주에서, 수도사단, 2사단, 7사단은 진천, 청원, 안동, 보은, 의성, 청송에서, 3사단은 울진, 영덕, 대구에서 시민들을 살해했습니다. 미군에 의한 학살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정보에 의해, 때로는 의도적으로, 육군과 해군, 공군의 종합적인 공격을 받아 민간인들은 살해당했습니다. 민간인 학살은 전투성과로 보고되기도 했습니다. 후퇴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극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한지역을 수복하는 과정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압록강까지 진군하는 과정에서, 1.4후퇴를 하는 과정에서도 민간인들은 살해당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이미 국가보안법은 불법 학살 행위를 조장하는 합법적 근거였다. 단독정부 수립 직후 1948년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국가보안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입증 가능한 행위가 아닌 범죄 의도를 추정해 처벌하는 데 있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주관적, 정치적 판단만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하는데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 - p.240

이승만 정부의 한국전쟁은 방어 전쟁이라고 하면서 점령군이나 저질렀을 법한 집단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한강철교, 수원공항 등 다양한 실수들 역시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한강철교 폭파로 인해 1만명이 넘는 국군이 강을 건너지 못했으며,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국민들은 부역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고, 다리를 끊었지만 인민군의 진격 저지와도 큰 관련이 없었습니다. 대통령은 충청도로 피신해서 국민들에게 안심해도 괜찮다고 기만적인 라디오 방송을 했습니다. 이 거짓 방송을 듣고 재빨리 피난을 간 사람들은 애국자가 되었고, 대통령의 말을 믿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용공분자나 부역자가 되서 대통령의 손에 처형당했습니다.

이승만의 광기는, 반공주의와 정치권력과 결합해 합리적인 대량학살을 벌였습니다. 민간인 학살 책임에 있어서 이승만의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은 명확합니다. 이승만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시절엔 조명되지 못했고,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사의 어려움 등으로 국가가 스스로 죄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참여정부 시절에 와서야 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희생자들에게 사죄가 이루어졌습니다. 어쩌면 이승만은 한국전쟁 발발을 자신에게 반대하는 한국인이 없는 클린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전쟁 내내 벌어진 한국군에 의한 한국 민간인 학살은, 국가적 폭력, 자발적 복종, 합리성이란 형태를 가집니다. 이 특징을 가지는 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현대성의 '밝은 핵심', '현대 문명의 꽃', 바로 홀로코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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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핸드 -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그리고 인류 최후의 날 무기
데이비드 E. 호프먼 지음, 유강은 옮김 / 미지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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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이 군대의 규모를 절반으로 줄이고, 미사일 등 전략무기를 포기한다면, 북한은 핵무기, 생물학 무기를 완전 폐기하고, 핵실험을 중단할 것이다. 또한 재래식 무기들을 절반까지 감축하고 군대의 규모를 절반까지 줄이겠다." 만약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은이 이런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면, 대한민국 정부는,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반응을 할까요? 또한 한국 사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북한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저럴 것이다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서로 무기를 맞대고 대립한 두 세력이 하나의 위대한 성취, 서로의 무기를 버리고 악수를 청한다는 결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매드 맥스』,『폴아웃』또는『터미네이터』의 파괴된 세계, "임모탄님이 날 보셨어!" 라고 외치며 광란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이미지는 냉전의 공포, 핵무기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얻은 모든 가치가 사라지고, 리셋되며, 그 잔해에서 비참하게 살거나, 궁극적으로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단순히 영화나 게임, 만화의 공상적 상상력이 아니었습니다. 냉전 하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었습니다. 냉전의 주역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물론이고, 권헌익이《또 하나의 냉전》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냉전은 세계인 모두의 것이었습니다. 냉전이 만들어낸 무기들의 파괴력은, 상대방의 인구나 산업 기반을 절반 이상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되었고, 종래에는 지도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자 데이비드 E 호프먼은 과거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기밀들을 활용해 냉전 당시의 무기군축의 역사를 실감나게 재현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지도부의 회고록들과, 소련 중앙위원회 간부엿던 비탈리 카타예프의 정보 등은 당시 소련과 미국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의 규모는 막대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6년동안 연합국이 떨어뜨린 폭탄은 300만 톤이었지만, 군비경쟁 이후 미국과 소련이 보유한 파괴력은 150억 톤에 달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핵전쟁이 시작된다면 가장 먼저 죽게 될 것은 군인들이나 시민들이 아닌, 정치인 자신들이라는 점입니다. 미국의 핵미사일은 크렘린 궁에, 소련의 핵미사일은 백악관을 향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반응은 민감했고, 때론 신경질적이기도 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지도부는 더 많은 핵무기만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라 생각했고, 핵무기에 대비해 곳곳에 지하벙커를 만들었습니다. 소련 지도부는 자신들이 선제공격을 받아 몰살당한 이후에도 확실하게 미국에 보복할 수 있도록, 컴퓨터가 자동으로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는 시스템 '데드 핸드'를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버튼 한번만 누르면, 두 초강대국은 확실히 멸망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살고 상대는 죽는다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핵무기 버튼은 자폭버튼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상대는 물론이고 자신들까지 완벽하게 파괴할 무기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군비경쟁의 관성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멈추고자 하는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대한항공 격추 사건을 계기로 세계가 얼마나 벼랑 끝에 다가섰는지, 그리고 핵군축이 얼마나 필요한지가 드러났다. 어떤 이들이 추측한 것처럼 단순히 소련 조종사들이 여객기를 군용기로 오인한 것이라면, 핵무기 발사 버튼에 가까이 있는 소련의 군 인사가 훨씬 더 비극적인 착각을 범하는 일도 충분히 상상할 법하지 않은가 - p.131

미국의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도덕적인 이유였는지, 종교적인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핵 없는 세상을 만들고싶다는 개인적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핵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군비 증강이었습니다. 그는 군비를 증강하면서도 무기 감축에 대한 욕망을 엿보였고,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 미국을 보호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핵 없는 세상을 위해 핵무기를 공격하는 무기를 만드는 방향을 선택한 것입니다. 반면 소련 지도부는 겉으로는 혁명을 외치며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계속했지만, 속으로는 군비 축소를 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의 군대와 군산복합체는 너무나 많은 돈을 빨아먹고 있었고, 경제가 파탄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상 미사일 전력에 있어선 소련이 우위에 있었지만, 점점 기술력이 뒤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이 본격적으로 군비감축을 외친 것은, 새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부터였습니다. 개혁가였던 고르바초프는 집권직후부터 미국에게 서로 군비를 감축하자고 말했습니다. 소련이 먼저 핵실험을 중지하면서 미국도 같이 중지할 것을 원했고, 미사일을 줄이고 군대를 철수시키는 등 기존과는 다른 파격적인 행보를 계속했습니다. 2000년까지 단계적으로 미국과 소련 뿐만이 아닌 모든 나라의 핵무기를 없애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레이건 정부의 두뇌들은 고르바초프를 믿지 않았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군비감축이 절실했지만, 미국과의 상호감축이 아닌 일방적인 감축은 하기 힘들었습니다. 소련은 계속 핵실험을 중지했지만, 미국은 계속 진행했습니다. 미국인들은 고르바초프의 급진적인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고, 소련인들은 레이건의 꿈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은 둘다 같은 꿈, 핵무기 없는 세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는 서로에게 여전히 수수께끼였습니다.

체르노빌 이후에는 핵의 위협이 우리 국민들에게 더 이상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확실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핵무기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한결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연설에서 고르바초프는 체르노빌을 계기로 "인류에게 핵전쟁이 벌어지면 어떤 심연이 드러날지"가 밝혀졌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저장된 핵무기에는 체르노빌 사태보다 수십만, 수백만 배는 끔찍한 재앙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었다. - pp.356~357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은 레이캬비크에서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지적처럼, 이것은 '역사에 위대한 대통령으로 영원히 기록될 일'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은 회담을 통해 장거리 핵무기의 절반을 감축한다는 협정을 이끌어냈지만, 우주로 무기경쟁이 확대되는걸 바라지 않았던 고르바초프와 달리 레이건이 미국의 미사일 방위개념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협정의 한 단어, 미사일 방위는 '연구'한다는 미국측과 '연구실'에서만 한다는 소련측의 의견차이였습니다. 고르바초프가 제시한 지구상의 모든 핵무기를 없앤다는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중거리핵전력조약을 통해 소련의 파이오니어 미사일과 미국의 퍼싱2 미사일을 전부 폐기하는 등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은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한 행보를 걸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 이후 등장한 부시 대통령은 레이건과는 달리 핵무기의 폐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핵무기의 억제력이라는 미국의 전략적 사고는 굳건했고, 부시는 충실히 청지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고르바초프 시대에 대대적인 핵무기 감축이 이루어졌더라면 많은 핵무기가 체계적으로 폐기되었겠지만, 옐친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폐기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소련은 붕괴했고, 소련이 남긴 유산들, 수많은 무기들은 방치되었고 사라졌습니다. 핵무기는 여전히 존재하며, 강대국 대접을 받기 위해 갖춰야 하는 어른의 장난감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영화『지.아이.조 2』에서처럼 단번에 핵무기 없는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북한을 믿지 않는 것처럼, 소련과 미국이 서로를 믿지 않아 결정적 찬스를 놓친 것도 아쉽지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소련이 남긴 유산들, 여전히 미군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은 인류를 멸망시킬 '데드 핸드'라고 말합니다. 냉전의 공포는 끝난 게 아닙니다. "임모탄님이 날 보셨어!" 라고 외치며 광란하는 세상을 살고 싶지 않다면,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꿈꿨던 세상,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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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었다 - 임진왜란의 상식을 되짚다
양재숙 지음 / 가람기획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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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으며, 말을 할 수 없었던 한 소녀가 열정적인 선생을 만나며 장애를 극복했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헬렌 켈러 이야기'는 교육의 중요성과, 극한의 조건 속에서도 한 인간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사회화 과정의 감동적인 교훈을 전해줍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 이야기는 그녀가 장애를 극복한 이후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습니다. 동화가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헬렌 켈러의 소녀 시절 이야기이지, 그 이후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장애를 이겨낸 기적의 여성으로서 여성 참정권을 위해 투쟁했고, 인종차별을 반대했으며, 노동자들과 장애인들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는 사실은 헬렌 켈러 이야기의 교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헬렌 켈러의 삶을 그녀의 어린아이 시절로만 이해합니다.

1924년에 발표된 현진건의 단편 소설《운수 좋은 날》을 이해함에 있어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된 건 당시 설렁탕의 가격에 대한 정보였습니다. 학창시절에《운수 좋은 날》을 처음 배웠을 때는 설렁탕을 현재의 설렁탕, 즉 대중적이지만 어느정도 가격은 있는 음식으로 생각하고 이해했지만, 설렁탕의 가격이 생각 이상으로 싼 음식이었다는 새로운 정보를 인지하게 되면서《운수 좋은 날》이 조금 다르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지식은 무언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른 관점을 제공하며, 임진왜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저자는 교과서를 통해 배울수밖에 없었던 임진왜란의 상식을 바꾸고자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전쟁입니다. 삼국지가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을 가진 덕분에 여전히 사랑받는 것처럼, 임진왜란도 한국, 일본, 중국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관계와 전투, 극적인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침략야욕을 가지고 있었느냐에 대한 논쟁부터 시작해서 십만양병설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고조되고, 일본의 부산진, 동래성 전투를 시작으로 이름난 맹장 신립의 패배, 수도의 함락과 선조의 피난, 원균의 이야기로 바닥까지 추락한 자존심은 의병과 승병의 등장, 권율의 행주대첩에 이어 이순신의 이야기는 카타르시스로 연결되며 임진왜란은 마무리됩니다. 마치 삼국지 중에 제갈공명이 오장원에서 지는 것으로 끝나는 작품이 있는 것처럼, 임진왜란도 극적인 사건관계만이 연결되는 소설적 형태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임진왜란을 큰 사건 위주로 언급되는 교과서 지식으로 인지하게 되면서 몇가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게 있는데, 조선은 무능했지만 특출난 몇몇 위인들의 활약 덕에 적을 물리칠 수 있었고, 백성들이 스스로 싸워야 했으며, 국토가 피폐해졌다는 인식 등입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은 조선만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패배했다는 인식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었으며, 그 이유는 조선이 일본보다 강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승리 요인도 이순신의 해군보다는 육군이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무력하게 당하는 이미지와는 달리 조선 관군이 전쟁의 핵심이었다고 말합니다.

초기 전투에서는 대부분의 육상 전투에서 일본군이 공격하여 승리하였으나, 제2기 총 17회의 주요 육상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공격이 4회인 반면, 조선군 및 의병의 공격이 13회로 공세의 주도권이 바뀌었다. 또한 전투 결과에서도 일본군 승리가 6회인 반면, 무승부 3회, 조선군 및 의병의 승리는 8회였다. 즉,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개월이 지난 후부터는 전투에서 조선군이 주도권을 쥐고 치렀고, 전투 결과도 조선군이 유리했다.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p.236

임진왜란 전 과정을 살펴볼 때 임진왜란은 전투 면에서도 조선군이 일본군에 승리한 전쟁이며, 일본군으로서는 전쟁 목표를 이루지 못했던 실패한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은 조선반도를 넘어 중국을 함락하고, 인도까지 진출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도는 커녕 중국땅도 밟지 못했습니다. 조선이 초기에 일본에게 당했던 이유도 조선이 성리학 때문에 국방력이 약화되었다기보다는 현실적 이유에 의해 국방력을 조절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가장 큰 위협이였던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통해 평화를 구축할 수 있었고, 여진족과 대마도를 평정한 이후 많은 군사를 유지할 필요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백성의 여론을 중시했기 때문에 강력한 군대의 유지를 반대한 백성들의 뜻에 따라 일반 사병을 최소화하고 만약을 대비해 병농일치의 군사체계를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군체제는 국민개병제로 평시에 민간인이 전시엔 군인이 되는 체제였기 때문에, 조선 의병이 관군과 유기적 연결을 통해 임진왜란때 활약할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패배했다는 인식에는 조선땅만 전쟁의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 기반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국토의 파괴와 전쟁의 패배가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스탈린그라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등은 국토가 파괴되어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스크바가 도시의 5분의 4가 잿더미로 변했고, 전쟁에서 모든 파괴는 러시아에서 발생했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프랑스였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군인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은 붕괴되지 않았고, 초기 기습에는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총력전 체제로 전환한 이후에는 일본군을 상대로 우위에 있었습니다.

파괴는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지 않는다. 어느 한쪽이 막대한 파괴의 피해를 입고도 승리할 수 있다. 적대세력의 경제적 자원과 특히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파괴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전쟁에서 파괴의 피해가 결정적이려면 얼마나 파괴해야만 할까? 일본은 68개 도시가 파괴되었지만 항복하지 않았다. 전쟁의 승패는 적의 군대가 패배했는가에 달려 있지, 주민과 거주지역, 국가와 경제시설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에 달려 있지 않다. -《핵무기에 관한 다섯 가지 신화》p.120

저자는 임진왜란을 왜란, 즉 불법적인 무장 왜구들의 난동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정규 전쟁으로 인지한다면 승리와 패배가 있지만, 난동엔 평정만이 있기 때문에 승리를 승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전란 중에 입은 국토의 상처만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역사교과서의 언급도 임진왜란 전의 평화보다는 붕당과 군역제도의 문란에 치중하고 있으며, 조선군에 대한 언급도 대다수는 이순신과 의병만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승리를 다룬 교과서는 거의 없으며, 피해현황을 다루는 언급이 다수입니다. 이런 구성은 당연히 학생들이 임진왜란을 받아들이는 기준이 되며, 이런 임진왜란의 인식은 조선에 대한 전체적인 인식으로도 이어집니다. 만약 임진왜란 이야기를 통해 정부에 대한 불신이, 중국에 대한 사대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 역사인식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저자는 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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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3-17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책이네요. 패배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지만, 임진왜란을 ˝승리˝한 전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요. 이한우의 선조와 비슷한 인식을 가지는 책이군요.
 
불평등의 창조 - 인류는 왜 평등 사회에서 왕국, 노예제, 제국으로 나아갔는가
켄트 플래너리 & 조이스 마커스 지음, 하윤숙 옮김 / 미지북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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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의 기반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에도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냐고 묻는다면, 속 시원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사회는 평등하지 않다는 것은 역사의 기록이 시작되던 당시부터 지금까지 지속되는 사실입니다. 역사의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오히려 지금처럼 헌법상에서나마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고고학자 켄트 플래너리와 조이스 마커스는 인류학적 관점과 고고학적 관점을 동시에 사용해 인간 불평등 기원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혹독한 환경속에서 채집생활을 하던 시절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평등한 사회를 구축했습니다. 개개인은 완력과 지력, 민첩성 등에서 차이를 보였지만, 서로 나누며 살던 삶에서는 그러한 불평등이 불평등한 사회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저자들은 평등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 중 하나로 남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으면 넉넉하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개인적 성취는 모두의 행복으로 이어졌습니다. 만약 좋은 성취를 거둔 사람이 자신을 뽐내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막기 위해 유머를 사용합니다.

이런 평등의 기반에는 샌델식 논의도 엿보이는데, 비록 인간이 힘과 지능, 민첩성 등에서 타고난 차이는 보이지만, 어떠한 사회적 성취가 개인의 우월성을 입증하는데 있어서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요구 하는 것, 환경의 차이, 상황의 차이는 사회적 성취를 매번 변화시킬 수 있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개인의 우월성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세 사회에 각광받는 능력이 있고, 근대사회에 각광받는 능력이 있으며, 현대에 각광받는 능력은 또 다릅니다. 마이클 조던이 말했던 것처럼, 조던의 개인적 능력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농구라는 시스템을 현대사회에서 인정해주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채집사회가 평등사회를 이루었던데 반해, 농경이 시작되면서 성과 기반 사회가 일반화되었고, 사회적 불평등의 기반이 만들어집니다. 몇몇 인류학자는 풍부한 식량 자원 때문에 집단폭력이 일어난다고 보는데, 식량 자원이 풍부하면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나는 공동체의 일원이자 경쟁하는 적으로서, 누가 더 높은 성과를 내느냐에 따라서 일반인과 명망있는 사람으로 나뉘게 됩니다. 성과 기반 지도력 사회를 알려주는 지표는 대부분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남자 숙소의 존재인데, 마치 오늘날 군대처럼 선택받은 남자들끼리 모여 살면서 경쟁하게 됩니다. 성과 기반 사회는 씨족이나 반족이 형성되면서 시작되는데, 씨족 사회의 대표적인 의식제도 젊은이보다 연장자가 더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 전제에서 시작됩니다. 나이와 경제적 부는 개인적 우월성을 입증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준이 됩니다. 성과 기반 사회에선 다른사람을 압도할만한 규모의 파티를 주최함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아바팁 촌락에 관한 해리슨의 연구는 루소의 가장 중요한 결론이라 할 만한 내용에 힘을 실어 주었다. 즉 다른 사람에게 우월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그런 사람으로 대우받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에서 불평등이 시작되었다는 내용이다. 인구 증가, 집약 농업, 환경의 혜택 등과 같은 요인이 아무리 뒷받침되더라도 인간의 힘으로 사회 논리를 적극적으로 조정하지 않는 한 세습적인 불평등은 생기지 않는다. - p.317

성과 기반 사회는 세습적 불평등의 씨앗을 안고 있었고, 사회에 몇 가지 논리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세습 사회로 바뀌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주론의 수정인데, 신성한 존재라는 개념이 처음엔 이타심을 북돋우고 지위 대결을 완화함으로써 인간 사회를 강화했다면, 그 후엔 세습 상류층을 창출하는 방향으로 조작됩니다. 이 시기의 유적을 보면 남자 숙소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신전이 들어서게 됩니다. 때문에 신전의 등장은 세습 지도력 사회의 지표로 보는데, 종교적 해석을 기반으로 특정인의 지배를 합리화한 것입니다. 성과 기반 사회는 명망가가 죽었을 때 그의 재산을 모두 파괴한 반면, 세습 사회는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도록 허용했고 세대를 거치면서 재산이 불어났습니다. 세습 사회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노예인데, 성과 기반 사회는 포로들을 죽였거나 범죄자들을 추방한 반면, 세습 사회에서는 인간을 물건으로 취급해 노예로 삼았습니다.

계속되는 세습으로 인해 부가 집중되기 시작했고, 이후 인간의 사회는 왕국으로, 제국으로 나아갑니다. 지위 사회는 계층 사회로 이행되는데, 계급 내혼이라는 행동으로 인해 계층은 고착화됩니다. 평등 사회에서는 빈부 격차를 용인하지 않았고 넉넉한 인심을 베풀라는 사회적 압력이 강했던 반면, 세습 지위는 빈부 격차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귀족 개념이 없는 사회라면 부에 의한 귀족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과 사회에서 개인의 성공은 그 개인의 삶에서 끝나는 것이지만, 세습 사회에서 아버지의 성공은 곧 아들의 성공이 됩니다. 성과 기반 사회의 논리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규칙대로 경기를 벌이면 누구나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면, 세습 사회는 개인의 노력보단 아버지가 명망가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노력을 이기는 것은 혈통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상태로 태어났지만 곳곳에서 속박당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다고 루소는 선언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 조상들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불평등에 저항할 수 있는 수십 가지 가능성이 있었지만 항상 단호한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덕, 사업적 역량, 용맹을 높이 평가한 점에 대해서는 그들을 용납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특성이 세습된다는 견해만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 p.905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 켄트 플래너리와 조이스 마커스의 연구는, 채집사회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평등한 것도, 성과 기반 사회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불평등의 모습이 바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많은 경우 그러한 구도들은 연결되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회가 무엇을 중요시하느냐에 따라 장기적인 사회 변화, 심화된 불평등을 낳는 원천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평등을 더 중요시한다면, 그만큼 불평등적인 요소는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우월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자와 이에 반대하는 자 사이에 지속적인 투쟁이 계속되었으며, 적극적인 소수의 특권은 수동적인 다수가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오늘날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세습이 가져다주는 특권의 폐해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즉 우리 사회가 부에 의한 귀족을 허용하고 있다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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