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
아이리스 장 지음, 윤지환 옮김 / 미다스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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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후작이 쓴《소돔의 120일》에는 보통 사람은 읽기 힘든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물어보는 듯한 이 작품은 세계문학 중에서도 기념비적인 작품이지만 그 잔혹성 때문에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금서로 지정되었습니다. 만약 잔혹한 장면이 등장하는 책이 금서로 지정되어야 한다면,《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원제 : The Rape of Nanking)는《소돔의 120일》보다도 먼저 금서로 지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난징대학살을 다룬 이 책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면서 아직 관련인들이 살아있을 정도로 최근의 일이기에 더 잔혹합니다. 난징대학살의 기록은 야만스러워 보이지만, 실제론 이성과 합리성이 낳은 현대의 비극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벌인 중국과 일본의 전쟁에서 난징의 함락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중국 국민당의 수도가 난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 사령관 마쓰이는 난징에 입성하기 전에 난징에서 불법적인 행위를 하지 말 것을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마쓰이가 지병으로 인해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고 왕족 출신이었던 아사카가 대리로 들어온 상황에서 난징은 함락되었고, 난징에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받은 첫 명령은 항복한 모든 전쟁포로를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조나라 병사 30만명이 생매장됬다고 하는 장평대전을 연상케 하는 이 명령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첫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은 자신들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 살육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2천 명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이런 처형 방식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을 난사했다. - p.98 

중국군을 처리한 일본군은 그 다음엔 민간인, 특히 여성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8만 명의 난징 여성이 강간당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장소도, 나이도, 임신부도 상관없었습니다. 열 살짜리 소녀가 대낮에 길거리에서 강간당한 후 살해당했고, 태아를 꺼내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시민들을 산 채로 파묻거나, 가슴까지 파묻고 그 위를 탱크로 지나갔고, 사지를 절단하거나, 태우고, 동사시키고, 염산이나 황산에 담그고, 산채로 개의 먹이로 주는 등 잔혹한 행위를 계속했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사진으로 기록되었는데, 무카이 토시아키와 노다 타케시 중위의 100인 목 베기 시합의 경우 일본의 신문에도 보도되어 그 행동을 자랑스럽다는듯이 과시했습니다.

30에서 40만명의 희생자가 나왔을 것으로 추산되는 난징대학살은 일본인이 잔인한 사람들이라서 생긴 일은 아닙니다. 아이리스 장은 난징대학살을 낳은 근본적 원인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장은 그 원인 중 하나로 일본의 교육제도를 주목하는데, 아이들에게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똑같은 과목을 배우게 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언급합니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군대였고, 어떠한 사람도 악마로 만들 수 있게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폭력에 노출되고, 권위에 복종하게 됨으로써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었고, 군대는 그런 토양 위에 사람을 살인병기로 바꿔놓습니다. 권위에의 복종, 타자의 탈인간화와 같은 방식을 도입해 군대는 평범한 사람을 100명의 목을 벨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착한 아들, 훌륭한 아버지, 다정한 오빠였던 사람들이 전장에 나와서는 양심의 가책없이 다른 사람들을 죽인다. 살인마로 변해 가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세 달만에 악마로 변해버렸다. - p.111 

전쟁이 평범한 사람을 악마로 변신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동시에 영웅의 탄생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장은 대학살 와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존 라베를 주목합니다. 독일인 사업가이자 난징의 나치당 리더였던 존 라베는 난징에 국제안전지대를 설치해 지도자가 되었고 수십만 명의 중국인을 구합니다. 라베는 중국인을 돕기 위해 히틀러에게 전보를 쳤고, 목숨을 걸고 식량을 구합니다. 라베는 어린 소녀를 강간하려는 일본군과 몸싸움을 벌여서라도 희생자를 구해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의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고 있었을 때, 중국의 나치는 중국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를 분석하면서 폭력, 복종, 합리성으로 구성된 현대 문명의 꽃이라고 지적합니다. 바우만은 홀로코스트는 한때의 광기가 아니라 문명화된 현대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또다시 홀로코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난징대학살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가공할만한 대량 학살, 효율적 살해, 체계적인 잔혹성은 우리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이 교육, 군대문화 등으로 언제든지 발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존 라베의 이야기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대량학살을 주도하던 나치의 사상에 동의하던 나치당원이 대량학살에 저항하는 웃지못할 이야기는, 우리에게 작은 희망을 전해줍니다. 서구인 기준으로 난징대학살은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할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야기였습니다. 아이리스 장이 1997년에 쓴 이 책은 난징대학살을 영어로 알린 최초의 보고서로 평가받고 있으며,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르는 제2의 난징대학살을 경고한다는 점에서 값진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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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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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는 역사적으로 내란이나 전쟁, 경제 불안 등의 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나타납니다. 위기 상황을 극복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독재를 탄생시키지만 대부분의 경우 독재는 위기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독재는 본질적으로 위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위기를 지속시키거나 악화시킵니다. 그래야 독재가 공고화되고 장기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향은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김일성, 박정희, 카스트로, 후세인 등 모든 독재자들에게 발견됩니다. 독재는 권력이 집중되기 때문에 독재자를 멈출 방법이 존재하지 않으며, 점점 더 심한 독재와 폭정을 일삼게 됩니다.

박정희는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부터 때때로 영구집권에 대한 흑심을 드러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옮긴 것은 1968년 삼선개헌의 정지작업으로 김종필 직계를 제거하면서부터입니다. 1인 파쇼권력을 획책한 것은 71년 대선 전후로 알려져 있는데, 72년에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는 유신 반대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나지는 않았을 거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박정희는 유신권력에 반대할 소지를 깨끗이 청소해 놓았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있었는데, 여당의 경우 김종필계를 숙청해놨고, 언론 또한 장악한 지 오래였습니다.

1974년 10월에 젊은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 뒤, 동아일보는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저지른 민주화운동 탄압과 인권 유린을 보도했습니다. 최근 있었던 철옹성같은 30년 독재를 자랑하던 이집트 독재자, 무바라크가 실각한 사건은 언론이 민주화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권력자들에게 언론은 가장 효과적인 무기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적이기도 합니다. 1972년에 유신을 선포한 이래 효과적으로 종신지배체제를 굳히고 있었던 박정희도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언론인들의 저항은 최대의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동아일보의 반 독재적 움직임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동아일보에게 광고금지라는 압력을 행사합니다. 현재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많은 미디어가 광고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이것은 미디어 콘텐츠를 변형시키는 가장 강력하고도 영향력 있는 압력 중의 하나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보여준 광고를 통한 효과적인 탄압은, 광고와 자유시장은 미디어 소비자가 최종구매자로서 자신의 선택을 결정하는 중립적인 체제를 양산하지 못하며, 결국 미디어의 번영과 생존에 영향을 행사하는 것은 광고주의 선택임을 보여줍니다.

동아일보사는 광고 탄압으로 인한 기구 축소와 사원들의 징계 명목으로 박정희에게 저항한 160명을 대량 해직했습니다. 해직당한 언론인들은 동아일보사 건물 안에서 항의 투쟁을 벌였는데, 동아일보 언론인들이 사옥에서 농성투쟁을 벌이자 박정희는 실전적인 해결책을 지시합니다. 200명이 넘는 괴한들을 동원해 투쟁중이던 피디, 아나운서, 엔지니어들을 폭력을 사용해 몰아냈습니다. 이들은 당시 실시되던 야간통행금지에도 불구하고 지프에 언론인들을 싣고 갔습니다. 박정희에게 저항하다 강제해직되어 실업자가 된 113명에겐 정보기관의 감시와 미행, 취업 방해, 구속과 연행과 고문, 공민권 제한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언론탄압 덕분에 주요 언론들은 박 정권의 비위를 거스를 내용은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 중 하나는 학생운동인데, 71년에 학원병영화를 반대하는 학생들에 대해 위수령을 발동해 1,889명의 학생을 연행했고 학생운동세력에 심각한 타격을 줍니다. 유신 이후에도 민우지 사건, 검은 10월단 사건, 함성지 사건 등을 통해 학생들을 또 다시 위축시킵니다. 하지만 73년의 김대중 납치사건, 서울대 문리대에서 벌어진 반유신 투쟁 등은 박정희 정권에 큰 타격을 줍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악랄함을 국제사회에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고, 서울대의 투쟁은 전 대학으로 퍼져나가 동맹휴학, 시험 거부 등의 투쟁을 일으킵니다. 박정희정권은 학생투쟁에 대해 문리대에서만 180명을 연행하고 20명을 구속하는 등 초강경 처벌로 나섰지만, 12월에 구속학생 전원을 석방하고 모든 처벌을 백지화하는 항복선언을 합니다.

이 조치로 인해 반유신투쟁은 학원가를 넘어서게 되었고, 장준하 등 각계인사 30명이 헌법개정청원운동을 시작합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순분자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지만 반유신투쟁이 멈추지 않자 결국 74년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합니다. 유신헌법을 반대하면 15년 징역형을 내리겠다는 협박이였습니다. 긴급조치 1호 위반을 통해 첫번째로 구속된 장준하씨를 시작으로 23명이 1호를 통해 처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긴급조치1호 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박정희 정권은 같은 해 4월 3일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는데, 이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반대하면 죽일 수 있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명이였습니다.

박정희는 흔히들 유신독재 등의 어두운 면과 경제개발이라는 빛이라는 두가지 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두가지는 따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가 남긴 가장 어두운 유산은 경제적인 면이며, 박정희를 몰락시킨 큰 이유 중 하나도 경제적인 면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재벌체제와 비대한 토건 부문을 특징으로 하는 산업구조와 정부의 통제 아래 이들 부문에 자금을 지원하는 관치금융이라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만들어냅니다.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전략은 일본의 메이지 근대화를 의식적으로 모방합니다. 당시 박정희는 국유기업 중심의 경제개발을 원했지만,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작은 국가에서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정권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채택한다면 미국과의 관계를 더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박정희는 국유기업 중심의 성장을 제한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재벌기업들은 국유기업이 아니면서도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국유기업과 비슷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박정희에게 이것은 반공산주의적 입장을 유지하는 동시에 재벌기업을 확실히 통제하여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발전 당시 한국의 소득분배가 비교적 괜찮은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전의 역사적 특수상황에 기인합니다. 토지개혁이 단행되었고, 한국전쟁과 이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실물자산과 금융자산이 파괴됨으로써 자산의 하향평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게다가 극도로 낮은 소득수준에도 불구하고 건국 초기부터 의무교육을 실시해 인적자본의 분배 또한 비교적 고른 편이었으며, 교육시스템이 계층 상승의 주요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리한 초기 조건 하에서 1960년대의 고도성장은 실제로 동반성장의 양상을 띠었습니다. 분배와 관련한 박정희 정부의 정책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오히려 급속한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을 쥐어짜는 저임금, 저곡가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동반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경제의 구조적 특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적 장점도 1970년대 이후 중화학공업화 정책에 의해 변하게 되며, 박정희정권 중후반에 가서는 극심한 양극화 현상을 보여줍니다.

비민주주의적인 통제경제정책은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특정 경제집단에 편중된 지원, 성장만능주의, 전투적인 성장 속도라는 네 가지 핵심적인 특성을 지닙니다. 독재와 억압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하면 결국 공정한 룰이 정착되지 못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량을 키우지 못하기 때문에, 갈수록 적대적 노사관계나 각종 개발을 둘러싼 갈등 및 님비현상 등 갈등비용이 증폭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민주적이고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차지한 박정희는 빠른 시간 안에 경제성장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정치적으로 계속 불안한 입장에 서 있거나 권력에서 쫓겨날 수 있다고 판단했고,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몇 개의 선택된 기업에 집중하는 강압적인 방식을 선택합니다. 결과적으로 일반 시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소수가 이익을 독점하는 시스템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박정희 체제를 붕괴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체제의 최대 수혜자인 재벌의 성장이 큰 역할을 차지합니다. 독점자본으로 성장한 재벌은 정부의 개입을 거부했으며, 이것은 박정희 체제의 성공 조건을 해체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는 재벌 육성정책이 중소기업의 동반성장과 고용의 확대를 수반하는 효과가 강하게 나타났으나, 재벌이 스스로의 힘으로 독점적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경제의 재생산 과정을 통제하면서부터는 이러한 순선환 효과 또는 적하효과가 크게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재벌의 독점적 지배력은 국민경제의 균형발전을 저해하는 힘으로 작용해 재벌의 이익과 국민경제의 이익이 괴리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재벌의 선도적 성장을 통해 국민경제 전체의 순선환적 동반성장을 이끌어낸다는 이른바 적하효과 논리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현실적 유효성을 상실한 이데올로기적 구호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의 고용회피 경향으로 가속화된 제조업 고용의 감소와 서비스경제로의 이행 및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의 강화와 중소기업의 피폐화라는 두 가지 구조적 변화는 양극화 추세를 가속화했고 이는 급속한 사회불만을 일으켜 체제의 종말을 가져오게 됩니다. 결국 독재정권은 무너졌지만 독재정권이 낳은 가장 큰 위험, 재벌은 아직 우리 곁에 있습니다.

공제욱이 지적하듯, 당시 박정희 정권이 필요로 했던 조국 근대화의 논리는 일사불란한 동원, 효율적 생활, 근검절약, 강도높은 노동, 발전된 미래를 위한 희생 감수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어떠한 비효율성도 적극적으로 배제시켜야 했고, 전 국민은 군대와 같은 조직으로 거듭나야 했습니다. 군대는 필연적으로 피라미드 구조를 지니며, 가장 위에 오롯이 존재하는 통치자가 있습니다. 그것이 독재자이고, 독재자의 시대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인 것입니다. 알라스테어 스미스는《독재자의 핸드북》에서 독재자들의 통치규칙을 지적하며 독재자의 권력기법이 비단 독재정권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민주주의사회, 다원주의사회에서도 은밀히 숨어있는 독재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에 대한 견제는 독재사회에만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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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역사란 무엇인가 + 전환시대의 논리 (영화 변호인) 세트 - 전2권
리영희.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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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는 공무원 국사 수험서의 첫 장에서 다루는것은 선사시대가 아닌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이런 역사를 보는 관점은 과거의 사실을 강조하는 랑케, 액턴의 관점과 역사가의 입장을 강조하는 크로체, 콜링우드의 입장, 그 두가지를 절충하는 카의 입장 이렇게 3가지가 제시되지만, 그중 중간적인 입장에 있는 이 책의 저자 에드워드 H. 카가 가장 비중있게 다뤄집니다. 20세기 중반에 나온 이 책이 아직도 주목받고 있는것은, 그의 역사인식론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 책을 낼 당시 저자가 반론하고자 했던 논리 또한 아직도 존재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역사를 바라보는데 있어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사실만을 확인한다는 실증주의, 역사는 특수한 것만 다룬다는 개념, 사람은 역사에서 뭔가를 배울 수 없다는 주장,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의 사생활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어떻게 내려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공적인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 문제, 역사에서 우연적 사건이 의미하는 것, 역사의 객관성, 역사가는 어디까지가 단일한 개인이고 어디까지가 사회와 시대의 산물인지에 대한 문제, 역사는 문학인가 혹은 과학인가에 대한 문제와 같은 당시에도 지목되었고, 지금도 지목되어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카는 자신의 역사인식론을 펼칩니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관계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카의 가장 유명한 문구중 하나인 이 말은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계에 대한 그의 주장입니다. 19세기의 역사가들이 주장했던 틀림없는 사실 이라는 마법의 문구는 실증주의자들로 하여금 사실 숭배를 조장합니다. 로크나 러셀의 경험론적 철학이 이런 역사관과 조화를 이루는데, 이런 경험주의의 인식론은 주관과 객관의 완벽한 분리를 전제로 합니다. 역사란 확인된 사실의 집성으로 이루어진다는 이 주장은 20세기 초에 들어 반대에 직면하는데,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나 미국의 역사가 칼 베커 등은 역사는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런 두 주장은 역사가 과거에 있느냐, 현재에 있느냐에 대한 논의인데, 카는 한쪽을 다른쪽 위에 올려놓는 것은 불가능하며, 두 논의는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의 없이 산업혁명을 위대하고 진보적인 업적으로서 다룰 것이다. 혁명 도중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들은 초기 단계에서 공업화에 따르는 대가로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한 대가를 보고 진보를 중단하고 공업화를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고 주장하는 역사가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영국의 산업혁명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농민집단화 문제에 있어서 잔혹성과 무자비를 공업화의 정책에 따른 희생의 불가피한 부분으로서 논한다면, 나쁜 일에 관대하고 냉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 pp.122~123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판단할때는 어느 정도의 해석을 전제로 하며, 역사적 해석은 언제나 도덕적 판단, 가치판단을 포함합니다. 역사서에도 그런 가치판단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역사를 쓰는 역사가 또한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역사가의 지식은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닌,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축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의 저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가의 사회적 배경을 고려해야 합니다. 과거의 사건, 제도, 정책에 대해 판단을 내림에 있어서 이런 해석이 중요한 것은 역사가의 판단 자체가 현재의 가치규범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치규범 속에서 역사가들은 자신들이 품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인지하고, 그것을 초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 포이어바흐 

과거의 수많은 사실 가운데서 어떠한 것이 역사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역사로 받아들여야 하느냐에 대해 카는 현재의 상황에 교훈을 주고, 미래를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역사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역사가들은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현재 사회에서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역사적 발견과 주장이 사회의 관심사를 대변할 뿐 아니라 사회의 지적 영향력과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역사는 문학적 탐구가 아닌 과학적 탐구 영역이 되어야 하며 역사 흐름은 다양한 사회 이론과 계량화, 과학 법칙을 통해 현재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지식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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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총론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1
정기문 지음 / 민음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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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는 공무원 국사 수험서의 첫 장에서 다루는것은 선사시대가 아닌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이런 역사를 보는 관점은 과거의 사실을 강조하는 랑케, 액턴의 관점과 역사가의 입장을 강조하는 크로체, 콜링우드의 입장, 그 두가지를 절충하는 카의 입장 이렇게 3가지가 제시되지만, 그중 중간적인 입장에 있는 이 책의 저자 에드워드 H. 카가 가장 비중있게 다뤄집니다. 20세기 중반에 나온 이 책이 아직도 주목받고 있는것은, 그의 역사인식론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 책을 낼 당시 저자가 반론하고자 했던 논리 또한 아직도 존재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역사를 바라보는데 있어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사실만을 확인한다는 실증주의, 역사는 특수한 것만 다룬다는 개념, 사람은 역사에서 뭔가를 배울 수 없다는 주장,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의 사생활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어떻게 내려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공적인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 문제, 역사에서 우연적 사건이 의미하는 것, 역사의 객관성, 역사가는 어디까지가 단일한 개인이고 어디까지가 사회와 시대의 산물인지에 대한 문제, 역사는 문학인가 혹은 과학인가에 대한 문제와 같은 당시에도 지목되었고, 지금도 지목되어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카는 자신의 역사인식론을 펼칩니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관계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카의 가장 유명한 문구중 하나인 이 말은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계에 대한 그의 주장입니다. 19세기의 역사가들이 주장했던 틀림없는 사실 이라는 마법의 문구는 실증주의자들로 하여금 사실 숭배를 조장합니다. 로크나 러셀의 경험론적 철학이 이런 역사관과 조화를 이루는데, 이런 경험주의의 인식론은 주관과 객관의 완벽한 분리를 전제로 합니다. 역사란 확인된 사실의 집성으로 이루어진다는 이 주장은 20세기 초에 들어 반대에 직면하는데,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나 미국의 역사가 칼 베커 등은 역사는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런 두 주장은 역사가 과거에 있느냐, 현재에 있느냐에 대한 논의인데, 카는 한쪽을 다른쪽 위에 올려놓는 것은 불가능하며, 두 논의는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의 없이 산업혁명을 위대하고 진보적인 업적으로서 다룰 것이다. 혁명 도중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들은 초기 단계에서 공업화에 따르는 대가로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한 대가를 보고 진보를 중단하고 공업화를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고 주장하는 역사가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영국의 산업혁명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농민집단화 문제에 있어서 잔혹성과 무자비를 공업화의 정책에 따른 희생의 불가피한 부분으로서 논한다면, 나쁜 일에 관대하고 냉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 pp.122~123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판단할때는 어느 정도의 해석을 전제로 하며, 역사적 해석은 언제나 도덕적 판단, 가치판단을 포함합니다. 역사서에도 그런 가치판단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역사를 쓰는 역사가 또한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역사가의 지식은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닌,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축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의 저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가의 사회적 배경을 고려해야 합니다. 과거의 사건, 제도, 정책에 대해 판단을 내림에 있어서 이런 해석이 중요한 것은 역사가의 판단 자체가 현재의 가치규범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치규범 속에서 역사가들은 자신들이 품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인지하고, 그것을 초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 포이어바흐 

과거의 수많은 사실 가운데서 어떠한 것이 역사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역사로 받아들여야 하느냐에 대해 카는 현재의 상황에 교훈을 주고, 미래를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역사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역사가들은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현재 사회에서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역사적 발견과 주장이 사회의 관심사를 대변할 뿐 아니라 사회의 지적 영향력과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역사는 문학적 탐구가 아닌 과학적 탐구 영역이 되어야 하며 역사 흐름은 다양한 사회 이론과 계량화, 과학 법칙을 통해 현재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지식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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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3판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3
E. H. 카 지음, 권오석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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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는 공무원 국사 수험서의 첫 장에서 다루는것은 선사시대가 아닌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이런 역사를 보는 관점은 과거의 사실을 강조하는 랑케, 액턴의 관점과 역사가의 입장을 강조하는 크로체, 콜링우드의 입장, 그 두가지를 절충하는 카의 입장 이렇게 3가지가 제시되지만, 그중 중간적인 입장에 있는 이 책의 저자 에드워드 H. 카가 가장 비중있게 다뤄집니다. 20세기 중반에 나온 이 책이 아직도 주목받고 있는것은, 그의 역사인식론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 책을 낼 당시 저자가 반론하고자 했던 논리 또한 아직도 존재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역사를 바라보는데 있어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사실만을 확인한다는 실증주의, 역사는 특수한 것만 다룬다는 개념, 사람은 역사에서 뭔가를 배울 수 없다는 주장,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의 사생활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어떻게 내려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공적인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 문제, 역사에서 우연적 사건이 의미하는 것, 역사의 객관성, 역사가는 어디까지가 단일한 개인이고 어디까지가 사회와 시대의 산물인지에 대한 문제, 역사는 문학인가 혹은 과학인가에 대한 문제와 같은 당시에도 지목되었고, 지금도 지목되어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카는 자신의 역사인식론을 펼칩니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관계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카의 가장 유명한 문구중 하나인 이 말은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계에 대한 그의 주장입니다. 19세기의 역사가들이 주장했던 틀림없는 사실 이라는 마법의 문구는 실증주의자들로 하여금 사실 숭배를 조장합니다. 로크나 러셀의 경험론적 철학이 이런 역사관과 조화를 이루는데, 이런 경험주의의 인식론은 주관과 객관의 완벽한 분리를 전제로 합니다. 역사란 확인된 사실의 집성으로 이루어진다는 이 주장은 20세기 초에 들어 반대에 직면하는데,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나 미국의 역사가 칼 베커 등은 역사는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런 두 주장은 역사가 과거에 있느냐, 현재에 있느냐에 대한 논의인데, 카는 한쪽을 다른쪽 위에 올려놓는 것은 불가능하며, 두 논의는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의 없이 산업혁명을 위대하고 진보적인 업적으로서 다룰 것이다. 혁명 도중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들은 초기 단계에서 공업화에 따르는 대가로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한 대가를 보고 진보를 중단하고 공업화를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고 주장하는 역사가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영국의 산업혁명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농민집단화 문제에 있어서 잔혹성과 무자비를 공업화의 정책에 따른 희생의 불가피한 부분으로서 논한다면, 나쁜 일에 관대하고 냉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 pp.122~123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판단할때는 어느 정도의 해석을 전제로 하며, 역사적 해석은 언제나 도덕적 판단, 가치판단을 포함합니다. 역사서에도 그런 가치판단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역사를 쓰는 역사가 또한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역사가의 지식은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닌,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축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의 저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가의 사회적 배경을 고려해야 합니다. 과거의 사건, 제도, 정책에 대해 판단을 내림에 있어서 이런 해석이 중요한 것은 역사가의 판단 자체가 현재의 가치규범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치규범 속에서 역사가들은 자신들이 품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인지하고, 그것을 초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 포이어바흐 

과거의 수많은 사실 가운데서 어떠한 것이 역사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역사로 받아들여야 하느냐에 대해 카는 현재의 상황에 교훈을 주고, 미래를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역사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역사가들은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현재 사회에서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역사적 발견과 주장이 사회의 관심사를 대변할 뿐 아니라 사회의 지적 영향력과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역사는 문학적 탐구가 아닌 과학적 탐구 영역이 되어야 하며 역사 흐름은 다양한 사회 이론과 계량화, 과학 법칙을 통해 현재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지식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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