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기원을 둘러싼 최고의 과학사기사건, 필트다운
에르베르 토마 지음, 이옥주 옮김 / 에코리브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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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런던 남부 서식스주의 필트다운 마을 근처에서 고대의 유물이 발견됩니다. 인간의 두개골 모양과 원숭이의 아래턱 모양을 지닌 화석인류가 발견된 것입니다. 필트다운 이전의 화석인류는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그리고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발견된 원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세개의 화석인류에 모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네안데르탈인은 너무나 상스러워 보였고, 크로마뇽인은 너무 현대인과 가까웠으며, 자바의 원인은 유럽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대중들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 필트다운 화석은 영국인에게 특히나 의미가 있었는데,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은 모두 프랑스, 독일, 벨기에, 크로아티아 등 유럽 본토에서만 출토된 화석인류였기 때문입니다. 옆나라 프랑스가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 모두를 발굴한 상황이다 보니 영국인들의 자존심은 손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등장한 이 필트다운의 화석은 영국에서 출토된 데다가 아주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마스크를 가진, 그야말로 사람들이 기다리던 이상적인 화석이였습니다.

1912년 필트다운인의 발견은 유럽의 선사시대 고고학과 인간 고생물학이 활성화되고 있던 매우 특별한 상황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지질학적으로 매우 오래된 인간 존재에 대한 생각은, 필트다운보다 1년 전에 발견된 독수리 부리 형태의 가공 부싯돌의 발견과 더불어 부상합니다. 이 부싯돌은 고대에 영국의 동쪽을 완전히 잠식했었던 바다의 연안 침전물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제3기 인간의 실존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필트다운이라는, 인간의 두개골과 원숭이의 아래턱을 지닌 이 화석은 매우 오래된 적당한 장소에, 고생물학적이고 선사학적인 맥락에서 아주 논리적인 순서로, 적절한 순간에 나타난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인간, 제3기인의 실존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필트다운인은 그야말로 완벽했기 때문에, 영국의 많은 유명한 학자들이 이 발견에 열렬한 환호를 보내게 됩니다. 인류의 기원을 새롭게 밝히는 혁명적 사건이었던 데다가, 심지어 최초의 인간이 영국인이라는 국수주의적 만족감까지 제공해줬기 때문입니다.

필트다운인의 발견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고생물학자들과 동물학자들에게 논쟁을 일으켰는데, 미국자연사박물관의 게릿 밀러,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마르슬랭 불 등 많은 학자들은 두개골과 턱이 같은 지역에서 발굴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둘의 조합에 강한 의구심을 표명합니다. 그들은 순수한 해부학적 논리를 따라간다면 두개골과 턱이 각기 다른 존재에 속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평가는 필트다운인이 발굴됬을때 해부학적으로 중요한 부위인 턱의 앞부분과 턱관절 부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논쟁은 뇌 용량에 대한 부분인데, 이 또한 두개골 부분이 전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필트다운인의 공식적인 발표회가 이루어졌고, 영국 학자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지지를 표명합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1915년에 두번째 유적을 발견해 이를 필트다운2 라고 명명했고, 심지어 필트다운인이 사용했을것이라고 추정되는 엄청나게 큰 납작한 뼈 조각, 훗날 크리켓 배트라고 불리우는 화석도 발견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필트다운인을 보기위해 대영박물관으로 갔고,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기도 합니다. 미국의 학계도 의견이 크게 양분되었는데, 게릿 밀러와 알레스 흐르들리카, 앨번 마스턴 등과 같은 소수의 학자들만이 견해를 고수했습니다.

필트다운 발견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이 사건을 정교하게 검사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X선 분광사진기 분석, 전자현미경 사진, 방사선 측정과 탄소14를 통한 연대측정 등 현대적인 기술이 도입되면서 점차 필트다운에 대한 공격이 시작됩니다. 케네스 오클리는 뼈의 서로 다른 연대를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불소 함유량을 통한 상대적 연대측정법을 적용하려고 시도했고, 결국 필트다운의 발견 중 크리켓 배트가 위조라는 것을 밝혀냅니다. 위너는 과망간산염 포타슘으로 필트다운의 턱뼈의 이빨을 만들어내 턱뼈가 가짜일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합니다. 결국 대영박물관 가빈 디비어의 지시로 검사를 시행했는데, 필트다운인이 만들어진 위조라는것이 밝혀집니다. 이는 공식 보고서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필트다운인이 발견되었을때 만큼의 소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40년간 최초의 인간이라는 자리를 지킨 필트다운인이 사기라는 충격은 그동안 지지해왔던 학자들은 물론이고 정치적으로도 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결국, 의회에서 누가 책임을 지느냐는 문제가 불거졌고 위조의 장본인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필트다운인 위조에 쓰인 기법은 매우 정교했고, 그 위치선정 또한 높은 고고학적 지식을 요구했기 때문에 우연히 만들어질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때문에 최초의 발견자 찰스 도슨을 비롯해 필트다운인을 발표했던 아서 스미스 우드워드, 당대 내로라 하는 최고의 지질학자, 고생물학자, 해부학자, 동물학자, 박물관 관리자들이 범인으로 의심받았으며, 심지어 셜록 홈즈의 각가 아서 코난 도일, 프랑스의 사상가 테야르 샤르댕 신부 등도 용의선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대영박물관의 광범위한 공식조사에도 불구하고 위조범을 찾지 못했습니다. 주요 용의자들의 관련 서류는 모두 폐기된 상태였고,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었습니다. 결국 현재까지도 필트다운의 위조범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필트다운 사건은 어쩌면 누군가 장난으로 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당시 영국의 정세와 고고학적 발견의 필요성 등의 환경을 감안하면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입니다. 필트다운이 발견되었을 때, 마르슬랭 불은 "오직 신념만이 구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필트다운의 경우에, 신념은 순식간에 이성을 압도하고 말았습니다. 대영박물관이 필트다운 화석을 조사하는데 있어서 방해를 한 이유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당시 수많은 전문가들이 있었지만 필트다운의 진실은 40년동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인류학 역사상 최고의 과학사기사건이라 부를 만한 필트다운 위조사건은, 과학자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에 대한 불신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과학이 만들어낸 사기사건을 해결한 것 또한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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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이긴 사람들 - 하워드 진 새로운 역사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문강형준 옮김 / 난장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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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그의 심리학 실험을 담은 저서《권위에 대한 복종》을 통해 흥미로운 여러 관점들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어떤 사회, 어느 곳에서나 권위에 대한 복종이 너무도 쉽게 발생한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 대부분은 맹목적이거나, 관습에 순응하는 뿌리 깊은 습관에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밀그램은 다수의 사람들이 권위에 복종한다는 것을 밝힘과 동시에 소수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며 그것이 어떤 조건하에서 일어나는지 또한 밝혀냈습니다. 이 책은 역사적으로 그러한 소수의 사람들이 불합리한 권위에 대항해 이루어낸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책의 제목대로 '권력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H.카는 역사는 개별적인 역사가들이 과거에 대해 저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한 사회가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다른 사회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카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경향이 역사가가 속한 사회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때 역사가들은 연대기 작가들과 달리 그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의 저자 하워드 진은 현재 우리사회에서 필요한 시점을 역사에서 찾고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 혹은 위에서부터의 것이라는 관점과 다르게 하워드 진은 '아래로부터의 역사'에 주목합니다. 하워드 진은 역사를 통해 역사는 아무리 정부와 지배층이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통치하려고 해도 인민들은 언제나 이에 대항해서 일어났음을 보여주며, 그 저항은 결국 끝내 승리하고야 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권위자의 명령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지한다 하더라도 그에 저항하기는 매우 힘이 듭니다.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에서 비도덕적인 명령은 사람들의 양심과 싸우며 많은 긴장상태를 유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단순히 실험을 도와주겠다고 한 약속을 깨는것마저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였습니다. 복종적인 사람들은 전기충격의 책임을 실험자에게 전가할 수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금방 편안해질 수 있는 반면, 불복종한 사람들은 실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권위에 대항한 사람들은 그 대가로 신의를 저버렸다는 괴로움에 휩싸이고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렸다고 괴로워하며 자신의 원칙을 버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도덕적인 행동이였고, 도덕적인 사람이였습니다. 단순한 불합리한 실험을 실시하는 교수의 권위에도 이렇게 저항하기 힘든 마당에, 더 거대한 불합리한 사회적 권위에 사람들은 쉽사리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문명은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런 정의에 따르면, 권위자의 명령을 무조건 수용하는 우리는 아직 문명화환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의미 있고 중요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의 기본적인 경험에 반하는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전통이나 관습 또는 권위자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충분히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수용을 요구하는 확실성이 우리가 경험한 확신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기표현은 그 뿌리에서부터 방해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국가에서 자유의 조건은 늘 권력이 강요하는 규범을 광범위하고 일관되게 회의하는 것이다. - 복종의 위험, 라스키 

그렇기 때문에 역사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시민불복종의 역사는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데이비드 소로는 정부가 노예제도를 지원하고 도망친 노예들을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그런 정부에는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1846년에 미국이 멕시코를 침략하는 것을 보고 그에 반대하면서 세금 납부를 거부했으며, 이로 인해 감옥에 가게 됬습니다. 그의 행동은 도덕적이였고 양심적인 결정이였지만,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런 행동이 비애국적이며, 비민주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정부가 하는 일을 대중이 샅샅이 지켜볼 것을, 그리고 법이 국민들의 생명, 자유, 행복추구를 박탈할 경우 그 법에 불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주 조금만 역사를 반추해봐도, 문제는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정부냐'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우리 정부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표현한 이상인 '인민을 위한 정부'일까, 아니면 인민당 웅변가 메리 엘리자베스 리스가 1890년에 묘사한 현실, '월스트리트의, 월스트리트에, 월스트리트를 위한 정부'일까? - p.43 

민주주의적 가치는 정부나 정치인, 혹은 사법체계가 내려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민이 개척해야 할 몫이며, 역사적으로도 그러한 부분을 보여줍니다. 흑인들은 인종적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정부에 기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흑인들은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제에 반대하는 전국적 움직임을 만들어냄으로써 링컨 대통령과 의회가 노예제를 폐지하도록 이끌어냈던 것과 같이, 이 문제를 자신들의 손으로 해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남부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인종차별에 저항해 들고 일어섰습니다. 그들은 연좌농성, 자유의 행진, 모든 종류의 시위를 비롯한 시민불복종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들 중 수천 명이 감옥에 갔으나 그들은 나라 전체를 일깨웠고, 결국 의회와 대통령은 인종차별을 종식시키고 흑인들이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노동운동 역시 같은 교훈을 배웠습니다. 노동시간을 줄이거나 임금을 올리거나 혹은 안전한 노동조건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정부에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 집단적인 힘을 사용해 조직화하고 파업을 했습니다. 많은 불복종 노동자들이 거대한 사회적 압력과 싸워가며 때론 자신의 생명 자체를 희생시키기도 했지만 그 피와 땀의 결실은 덕분에 현재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또한 불합리한 전쟁에 반대했던 시민들의 반전 외침 또한 전쟁의 종식에 기여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운동들에게서 얻게 된 교훈은, 정부의 권력과 부유한 대기업의 권력은 국민의 복종에 의존한다는 점입니다. 시민들이 복종하지 않을 때, 노동자들이 일하기를 거부할 때, 군인들이 총을 들지 않을 때, 기존 권력은 힘을 잃고 항복합니다.

모든 선전포고는 일종의 국민축제가 되어야 해. 투우경기에서처럼 입장권과 음악이 있는 축제 말이야. 경기장에는 수영복을 입고 몽둥이를 든 양국의 장관과 장군들이 선수로 등장하지. 거기서 서로 싸워서 남은 사람의 국가가 승리하는 거야. 여기서 엉뚱한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나은 방법이잖아. - 「서부전선 이상 없다」 中 

앞에서 말한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은 이러한 시민불복종의 역사가 결코 쉽게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밀그램이 사회와 개인의 조건 변화가 복종 비율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용기있는 시민불복종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독재에 저항해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이 일어났던 것은 우리의 소중한 역사입니다. 하워드 진은 이러한 역사가 가르쳐주는 '국민의 힘은 정부가 억누를 수 없다'는 교훈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는 언제나 굳건히 의회와 법원과 정부라는 권력에 맞서 싸우는 행동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서로 조직할 때, 참여할 때, 일어서서 함께 외칠 때, 어떤 정부도 시민들을 향해 불합리한 권위를 행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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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뎐 - 시대를 풍미한 검은 중독의 문화사
양세욱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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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먹는 음식 중 하나가 바로 짜장면입니다. 배달음식의 대명사가 바로 짜장면이며, 중국음식이란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국에서 짜장면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한국인의 대중적인 음식인 짜장면은 단순히 면과 춘장으로 이루어진 음식이 아닙니다. 짜장면에는 한국 근현대사 과정과 한중교류의 지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저자는 단순한 음식으로서의 짜장면을 넘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짜장면의 문화사를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서 짜장면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합니다.

쌀과 달리 밀은 밀가루로 채취하는데 있어서 정교한 기술과 많은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오랜 옛날부터 밀가루 음식은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근대 기술이 도입되기 전까지 면은 번거로운 음식이였기 때문에, 국수는 잔치의 음식이였고 축제의 음식이였습니다. 이는 한국에서 국수를 결혼식과 동일시해서 부르는 관습이나 일본의 한 해의 마지막날에 국수를 먹는 풍습 등을 통해 잘 알수 있습니다. 짜장면의 성공 뒤에는 국수가 가지고 있는 잔치와 축제의 음식이라는 상징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면은 또한 그 특유의 생김새로 인해 독특한 재미를 더해주기도 합니다.

관건은 입술이다. 밥이나 빵을 먹을 때는 입술을 쓸 일이 없다. 입술을 사용하는 음식은 오직 가늘고 긴 면 하나뿐이다. 노출된 성기인 입술은 인체에서 가장 많은 감각세포들이 집중되어있는 부위이다. 빨고 스치고 문지르는 동안 입술에 멀티 오르가슴을 전해주는 음식이 면인 것이다. - p.109 

짜장면의 원류는 중국의 가정식 음식에서 비롯되었는데, 삶은 면에 볶은 면장과 야채를 얹어 비벼 먹는 음식으로 '장을 볶은 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름은 작장면입니다. 중국음식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작장면도 지역별로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작장면이 한국으로 건너오게 된 것은 임오군란때 중국인들이 장기 체류하면서 화교가 생성됨으로서 비롯됩니다. 여러 작장면 중 우리나라의 짜장면과 가장 유사한 형태가 북경과 산동식 작장면인데, 한국에 진출한 화교의 90%정도가 산동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짜장면이 현재의 한국화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작장면의 면장에 캐러멜 소스를 섞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1948년 화교 왕송산은 영화장유라는 식품 회사를 창업하고 사자표 춘장이라는 제품을 출시합니다. 이 춘장이 보편화되면서 단맛이 없고 짠맛이 강했던 작장면에서 윤기가 나고 단맛을 내는 짜장면이 됩니다.

 

짜장면의 성공요인은 여러 개가 있습니다. 짜장면이 보급될 당시,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외식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식은 아직 가정의 음식이였고, 일식은 국민정서상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양식은 너무 비쌌습니다. 반면 중국식당은 값이 저렴하면서 집에서 먹기 힘든 별식이였기 때문에 외식장소로 급부상했습니다. 모택동의 공산당이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귀향할 수 없었던 화교들 중 많은 수가 중국 음식점으로 전업해 중국 음식점 수가 많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밀가루 원조와 정부의 혼,분식 장려 운동 또한 짜장면의 성공에 기여했습니다. 혼,분식 장려 운동으로 쌀 중심의 식습관이 크게 변했습니다. 1970년부터 등장한 철가방과 배달문화는 짜장면을 확고한 한국식 문화로 정착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1980년대를 기점으로 외식 문화의 꽃이라는 짜장면의 위상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중국음식점 경영자의 국적이 화교에서 한국인으로 점차 변화했습니다. 정부 또한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을 시행하면서 태화점, 공화춘 등과 같은 유명한 고급 중식당들이 문을 닫게 됩니다. 중국인들과 교류가 단절되면서 중국음식은 고유의 특징을 잃게 됩니다. 영업전략은 단가를 낮추는 쪽으로 진행되었고, 배달만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88년 올림픽을 전후로 외식장소로 한식, 일식, 양식이 점차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외식문화의 정상에 있었던 짜장면을 필두로 한 중국음식은 평범한 음식이 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맛의 하락입니다.

 

짜장면 맛있는 집이 없는 건 당연한 거야. 좋은 춘장이 없으니까. 지금도 집에서 춘장을 만들어 먹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춘장을 상업적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캐러멜 넣은 강력한 공장 춘장의 맛을 못 이겨. 불행한 거지. 된장찌개 맛있는 집들 생각해봐. 그런 집들은 다 이유가 있어. 어느 절에서 스님이 만들어놓은 메주를 쓴다거나 고향집 할머니가 직접 만든 된장이라거나. 아직까지 좋은 된장을 찾는 사람이 있고, 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좋은 된장을 먹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명맥이 유지되는 거잖아. - p.184 

정부의 정책, 한국인의 인종차별 등으로 화교들이 떠나가면서 중국식당은 과거의 모습에서 변화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식당엔 중국인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요리들이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인들이 먹지 못하는 중국음식이 된 것입니다. 이는 한국인이 외국에 나가서 한식당에 들어갔는데 전혀 듣도보도 못한 요리가 한국음식이라고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중국식당의 요리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중국음식에 대한 편견인 느끼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해 줍니다. 하지만 중국요리는 느끼한 음식만 있지 않습니다. 수없이 많은 종류를 가진 중국요리엔 끓이고, 삶고, 찌고, 데치고, 굽고, 졸이고, 버무리는 음식들이 가득합니다. 한국의 중국식당들은 중국과 교류가 끊김으로서 중국음식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고, 한국화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중국음식의 한국화는 정체를, 퇴보를 야기했습니다. 이는 세계 어디서나 싸고 다양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중국음식이 한국에서는 비싸고 천편일률적이고 맛없는 음식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음식의 본질은 섞임과 나눔이다. 모든 음식은 퓨전 음식이며,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이다. 우리의 혀는 익숙함과 새로움의 경계에서 방황하며 음식의 유혹을 좇는다. 음식은 복잡한 통관 절차나 입국 심사 없이 국경을 넘나든다. 짜장면과 중국음식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 p.256 

하지만 중국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반세기 이상 정체되었던 중국음식에 변화의 바람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정말로 중국인들이 평소 먹는 중국음식이 한국에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한국인들이 먹었던 중국요리, 짜장면 또한 중국으로 진출했습니다. 한국식 중화요리를 팔고 있는 중국식당이 늘어나고 있고,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짜장면을 찾는 중국인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변화의 바람은 긍정적입니다. 짜장면은 근현대 한중교류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음식입니다.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될 음식이 된 짜장면은 먼 미래까지 한중교류의 산 증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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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파시즘 - 선(禪)은 어떻게 살육의 무기가 되었나?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지음, 박광순 옮김 / 교양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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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에 태어난 석가모니 붓다의 말이 쓰여진《법구경》130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평화로운 삶을 사랑한다. 이 이치를 자기 몸에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라." 그 외에 다른 경전을 봐도 불교에서 살생을 금지하는 계율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불교의 무아관과 생사불이론은 왜곡되어 전쟁 이데올로기로 변했습니다. 저자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불교 간의 유착관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불교가 다른 세계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대량 학살을 부추기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정당화해 왔다는 불편한 현실입니다.

일본의 불교는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태동하던 순간부터 함께였습니다. 일본 불교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사실상 국가 종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일본 선불교는 오랫동안 국가를 위해 이데올로기적인 경찰 역할을 해 왔습니다. 국가의 모습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불교의 모습도 국가가 요구하는 형태로 변화했습니다. 일본의 선불교는, 깨달은 사람들은 선악뿐만 아니라 생사도 포함해 모든 이원성을 초월한다는, 8세기 중국의 선불교에서 유행했던 도덕률 폐기론자들의 주장을 물려받았습니다. 선불교는 상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죽음도 불사하는 의무감이라는 미덕을 강조했고, 폭력을 성스러운 의미로 가득 채우면서 문화적 당위 명제로 만들었습니다. 선불교의 권위자 스즈키는 선 특유의 직관적인 이해 방식으로 인해 거의 모든 철학과 도덕론에 극히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선은 영혼의 불멸이나 정의, 신성한 길, 혹은 윤리적인 행동과 관련해 그들과 언쟁을 벌일 필요가 없으며, 단지 한 사람이 도달한 결론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그 결론을 가슴에 품고 전진하라고 촉구할 뿐이다. 선은 행동을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일단 결심을 하면 가장 효과적인 행동은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은 진실로 사무라이 무사의 종교다. - 스즈키 

스즈키 선사의 말처럼, 일본은 뒤돌아보지 않고 군국주의로 전진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메이지 시대 말기 이래 아나키즘이나 공산주의 등을 상대로 한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제도권 불교의 지도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군국주의로의 전환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국내에서든 국외에서든 근본적으로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어내려는 반동적인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주류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은 반공의 깃발 아래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국가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나라의 군국주의처럼 일본의 군국주의의 성장도 군 내부의 반대를 포함한 국내의 반발을 억압하며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암살 사건들에 대해서 불교계는 지지를 보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불교의 교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목적과 동일시되어야 했고, 제도권 불교 지도자들은 대승불교의 계율을 왜곡해서 퍼뜨렸습니다.

조동선종의 총무원장이자 소지사의 주지였던 세키젠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평화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이상이다. 평화는 인간 최고의 이상이다. 일본은 평화를 사랑한다. 우리는 평화와 근본적인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우리가 속해 있는 국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국가를 잊는다면 진정한 평화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조국에 대한 의무를 잊어버린다면 우리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주장하는 방식에 관계없이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기는 해도 언제나 일본의 전쟁은 평화의 전쟁이다." -《전쟁과 선》p.125 

선불교 교리의 몇몇 주요 측면은 일본 군인 정신의 중심부에 있었습니다. 그중 주요한 것은 바로 생사일여의 깨달음이였습니다. 생과 사는 동일하며, 생명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서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고귀한 정신을 획득할 수 있다는 선의 생사관은 곧 군인들 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 전체의 생사관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군인들의 목적이 살아남아서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장에서 죽는 것이라는 이 사고방식은 군 지휘관들에겐 매력적인 사상이였습니다. 군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적의 목숨도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는 난징대학살 등 민간인 대규모 학살극으로 이어졌고, 일본군의 경우 다른 나라보다 압도적인 비율로 적군 포로를 많이 죽였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군은 포로가 되는 비율이 2차대전 국가들 중에서 매우 낮았는데, 포로가 되기 전에 단체로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차 대전의 막바지에 패색이 짙어질 무렵의 일본은 국가 전체가 대량 자살을 통한 나라의 구원이라는 이미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불교가 제공하는 무아의 이데올로기는, 자살 특공대라는 현상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했습니다. 이런 성향은 군인뿐 아니라 일본의 민간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일본의 군사 지도자들은 수백만 명의 민간인들을 전투에 소집함으로써 고의적으로 일본인들을 죽음으로 인도했습니다. 이런 행위는 정치적 엘리트의 자기 중심주의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꺼이 일본 국민의 압도적 다수를 희생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도자들은 불교의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생사관을 국민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연합군에 죽음으로서 맞서 싸우라고 지시했지만, 막상 천황과 그의 최측근, 대본영의 군 참모들은 약 6~7천명의 조선인 강제 노역자들을 동원해 만든 거대한 방공 터널 속에서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대담하게 적을 죽이고 적의 것을 훔치고 약탈하는 것과 전법에 따라 정복할 때까지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하는 것은 기독교도의 행위고 사랑의 행위다. 이런 일들은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 마르틴 루터 

불교 지도자들은 일본의 군국주의에 사상적 바탕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군국주의에 뛰어들어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 식민지에 대한 불교 전도 사업인데, 일본의 주요 불교도들은 중국과 아시아 나머지 지역의 불교는 후진적이고 수동적이며 사회적 요구에 무관심한 반면에, 일본 불교는 능동적이고 사회 참여적이며 과학적이기 때문에 일본 불교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참된 불교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일본의 참된 불교를 아시아의 민족들, 심지어 서양인에게까지 전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식민지 곳곳에 전파된 일본의 불교 사원은 그 지역의 일본군들에게 든든한 사상적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불교 지도자들은 전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노력함으로써 전후 일본에서 좌익 정당이 성장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들은 우익 단체의 기반이 됨으로써 애국심을 고취하고, 일본이 전쟁당시 잔혹 행위를 저지른 것이나 침략 전쟁에 참여했다고 암시하는 것을 모두 교과서에서 제거하려 했습니다.

일본의 불교계가 보여준 이 역사적인 사례들은 종교가 어떻게 군국주의 파시즘의 광기와 유착해 대량 학살과 집단 자살의 혼돈으로 빠져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불행한 사례가 특별한 사례는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본 불교의 형태는 무엇보다 우리나라에 먼저 있었습니다. 근대 일본불교의 구조적 특징은 사실 불교의 전래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는데, 신성 왕권에 강력히 집중된 국가를 건설하는 원인으로 기능했던 정치,종교적 이데올로기로서 유용한 호국불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일본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국가에 대한 복속은 한국 불교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군국주의에 휩쓸린 일본 불교의 지도자들은 동양과 서양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들도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시대의 가치관과 편견에 손쉽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너무 평범한 행동을 보여줬습니다.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것은 바로 승려들의 그 평범한 악 이었습니다.

종교학자 마틴 마티는 종교 옹호자들은 대개 종교에 뒤따를 수 있거나, 종교가 만들어낼 수 있는 골칫거리를 축소하며, 진리 추구를 기본적인 주제로서 소중히 여기려 한다면, 신문이나 텔레비전 방송에 계속 등장하는 종교의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의 많은 형태와 표현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 된다는, 목숨을 빼앗는다는 특징입니다. 안타깝게도 적어도 현대사에서 다수의 종교 지도자들이 마티의 지적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저자는 현재까지도 이루어지고 있는 성전이라는 형태의 살육을 이해하고, 줄이기 위해선 종교학자들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역사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 심리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지원과 관심이 있어야 종교가 수 천년동안 외쳐왔지만 한번도 지켜지지 않았던 것,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윤리를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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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 잉글리시 - 영어를 삼킨 아시아, 표준 영어를 흔들다
리처드 파월 지음, 김희경 옮김 /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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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어로서 영어는 그 위상이 독보적입니다. 아시아에서도 영어는 서로의 의견을 전하는 주요 통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아시아의 영어는 미국이나 영국의 영어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싱가포르에는 싱글리시(Singlish)가 있고, 태국에는 타이글리시(Thaiglish)가 있으며, 필리핀에는 타글리시(Taglish)가 있습니다. 오늘날 쓰이는 영어는 모두 새로운 영어이며 영어를 계속 사용한 곳에서도 영어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수백만 아시아인들이 지역 특색이 강한 영어로 막힘없이 의사소통하는 것을 보면 아시아에서 통용될 영어의 적합한 모델은 아시아 너머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자인 리처드 파월은 아시아 영어가 영어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사회의 영어교육은 이른바 원어민 영어라는 것이 중심에 있습니다. 원어민이라는 개념은 언어학의 범위를 넘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층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영어몰입교육을 추진한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의 오륀지 사건 또한 원어민 발음에 대한 사회적 욕망을 단적으로 표현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영어 원어민이라고 해서 영어를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규칙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습득한 제1언어의 문법을 설명하는 일은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오히려 문법을 나중에 배워서 익혀야 했던 교사들이 더 잘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외국어를 배웠던 기억을 살려 언어 습득과 관련된 다양한 기술을 원어민 같은 사람들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더 어리고 경험도 모자란 외국인 교사들보다 뒷전으로 밀리는 게 당연시되곤 합니다.

원어민 발음에 대한 집착이 말해주는 문제는, 우리가 구어체 영어보단 문어체 영어에만 신경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어를 외국어로 쓰는 한국, 일본, 태국 등과 같은 사회에서는 영어의 지역적인 변형을 영어의 잘못된 사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영어를 외국어로 쓰는 사회의 영어 사용자들이 가지고 있는 표준문법과 발음을 중시하는 태도는 그들이 대화하고 싶은 외국인 상대가 미국인일 것이라는 통념을 말해주지만, 세계적으로 영어 회화의 대부분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영어의 본고장이 훨씬 다양하고 특이한 사투리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원어민이라 생각하는 백인들, 미국인이나 영국인과 대화하기 위해 표준문법과 발음을 익히지만, 막상 원어민들은 영국 표준 발음이나 미국 표준 발음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표준 발음과 문법에 대한 압박은 학문적으로 영어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현상을 만들어냅니다.

1986년 외래어 표기법에 중국어가 포함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국립국어원 심의 결과 '자장면'으로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이 책에서는 지금까지 밑줄을 무시하고 자장면 대신 짜장면으로 표기하고 있다.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심의 전에도, 심의 결과가 나온 지 벌써 한참이 흐른 지금에도 '자장면'을 파는 중국식당은 없기 때문이다. 언어정책의 일관성 유지를 위해 한번 정해진 원칙을 고수하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시장에서 버림받고 언중들의 관행과도 동떨어진 어떠한 언어순화론자들의 노력도 성공할 수 없음을 언어정책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짜장면은 짜장면일 뿐이다. -《짜장면뎐》p.143 

미국의 언어학자 세실 넬슨과 래리 스미스는 성공적인 의사소통의 요소로 단어를 명료하게 인식하는 식별력, 단어의 뜻을 아는 이해력, 말하는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는 해석력을 지목합니다. 만약 일본사람과 영어로 대화할 때 일본의 대화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능숙한 문법과 발음으로 영어를 말한다고 해도 그 회화는 제대로 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언어에는 상황마다 특수한 환경이 주어지며,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래리 스미스가 주장하는 핵심은 한 가지 언어를 나이 들어 배운 사람은 그 언어를 국어로 자연스럽게 습득한 사람보다 듣는 사람들의 특별한 요구를 더 잘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와이대학의 래리 스미스는 영어를 제1언어, 제2언어로 쓰는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뒤 아시아인들은 서로의 영어 발음을 비 아시아인의 영어 발음보다 더 잘 알아듣는 경향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 연구는 말을 알아듣도록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해할 수 있는 영어는 원어민 영어라는 가정에 의심을 품게 했다. - p.57 

언어학자들은 국제어로서 영어가 지닌 단순화된 문법과 발음이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겐 불규칙동사, 문화와 얽힌 숙어투성이 원어민 영어보다 더 적합하다고 지적합니다. 영어를 제2언어로 쓰는 사회는 영어의 지역적인 변용이 이루어집니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말끝마다 라, 아 를 붙이며, 필리핀 사람들은 타갈로그어와 스페인어를 섞어 쓰고, 파키스탄 사람들은 단순 시제 대신 진행형을 쓰는 관행 등을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현상은 혼성어인 피진이 되기도 하고, 좀 더 정교한 혼성어인 크레올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변용 영어들 또한 영어이며, 세계의 영어 사용자들이 아시아에서 온 말들을 사용하면서 영어는 훨씬 풍요로워졌다는 점입니다. 인도 작가들이 인도 영어로 된 작품으로 영연방 국가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을 수상하는 건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교육자들은과 언어학자들은 영어가 세계 여러 곳에서 사용되면서 영어의 역사적 고향에서 만들어진 변형보다 훨씬 다양한 변형들이 만들어졌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의사소통에 있어서 충분히 효율적이고, 문학작품을 한층 더 풍성하게 했다고 인정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영어의 변용을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영어는 표준 영어에서 세계 영어들로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영어를 사용하고 싶자면, 공부하는 영어, 완벽한 영어의 제약에서 벗어나 통하는 영어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영어를 쓰고 싶은 사람에게도, 영어를 쓰고 있는 사람에게도, 영어에게도 좋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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