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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미
드니 빌뇌브 감독, 제이크 질렌할 외 출연 / 비디오여행 / 2014년 10월
평점 :
'혼돈은 아직 해석되지 않은 질서일 뿐이다. (Chaos is order yet undeciphered.)' 영화 오프닝에 제시되는 화두를 영화에 맞추자면 이렇게 쓸 수 있겠다. '도플갱어는 아직 의식되지 않은 자신의 무의식 내지 또다른 욕망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도플갱어 (The Double)]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 소설을 각색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에너미]는 한마디로 괴작이다. 허나 망작은 아닌, 되려 모호함이 겹겹의 다의성으로 확장되는 가작 이상의 영화다.
권태로운 일상을 이어가던 역사학 교수 아담(제이크 질렌홀)은 동료가 추천한 2005년 영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를 보던 중 자신과 똑같이 생긴 배우 앤서니(역시 제이크 질렌홀)의 존재에 이끌려 그를 찾아 나서지만 그로 인해 스스로의 실존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처음엔 만남에 뚱했던 저돌적인 성격의 앤서니가 되려 자신과 얼굴은 물론 목소리에 흉터 자리까지 똑같은 아담에게 집착하기 시작하고 아담의 연인 메리(멜라니 로랑)에게까지 흥미를 느끼면서 서로의 삶을 바꿔보자 제안한다. 앤서니의 임신한 아내 헬렌(사라 가돈)에게 기묘한 끌림을 느끼던 아담 역시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두 사람 간의 기이한 불안과 혼돈의 정체성 게임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파국을 맞는다.
연출 의도 자체가 영화를 어떤 결로 읽어도 통하는 텍스트로 열어둔다. 내 경우 어찌 봤느냐,면 앞서 언급한대로. '도플갱어는 아직 의식되지 않은 자신의 무의식, 또다른 욕망이었을 뿐', 자신의 삶에 위기감과 환멸을 느끼던 주인공 아담이 도피처(도피자아)로서, 욕망의 해방구로서 도플갱어 앤서니를 만들어낸, 한 사람이 겪는 두 겹의 삶에 관한 영화로 봤다. 내가 짚은 층위에선 아담과 앤서니가 동일인물이고 헬렌은 아내이며 메리는 혼외연인이다.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쾌락을 추구하고픈 욕망에 추동됨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결국 다시 현실로 소환될 수밖에 없고, 자꾸만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욕망 덩어리, 도플갱어 앤서니는 그에게 위협적인 존재 즉, 가공할 적(enemy)이 된 셈이다. 따라서 메리와 함께 앤서니를 파괴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아담에게 마지막 순간 지금껏 앤서니를 통해서만 접촉하던 금기시된 욕망을 대변하는 거미가 엄청난 위압감으로 현현하는 건 수순이다. 결국 아담은 자아 통제에 실패한 것이다.
도입부와 중반부에 등장하는 거미(를 짓이기는) 여인이나 잿빛 안개로 자욱한 도시에 서있는 대형 거미 등 거미의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한편으로 중간중간 카메라가 스쳐 지나며 잡아내는 황색 도시 하늘을 덮은 전신줄, 아담이 도플갱어 앤서니를 찾게 되는 인터넷 웹 자체, 마지막 앤서니와 메리가 타고 있던 차가 전복되면서 방사형으로 금이 간 차창 등을 통해서 거미줄 이미지가 간접적으로 반복된다. 아마도 드니 빌뇌브 감독은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 아담 스스로가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도시의 이쪽과 저쪽을 묶어놓고 거미줄에 스스로 걸려들었다'는 얘길 하고 싶었던 듯하다. 전반적으로 마치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을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영화로 만든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다소 식상한 감이 아쉽지만 주인공 아담을 통해서 잿빛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웃픈 초상을 볼 수도 있겠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우화이고 희비극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