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연극(그리피스)이 있었다. 시(무르나우)가 있었고 회화(로셀리니)가 있었으며 무용(에이젠슈테인)이 있었고 음악(르누아르)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영화가 존재한다. 그리고 영화라는 것은 니콜라스 레이를 말한다. (장 뤽 고다르, [카이에 뒤 시네마] 기고 평론 '별의 저편에: 니콜라스 레이의 씁쓸한 승리')
니콜라스 레이만 영화를 만든 게 아니다. 데이빗 와크 그리피스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도, 로베르토 로셀리니도,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도, 장 르느와르도 모두 영화를 만들었다. 그들의 작품은 연극도 시도 회화도 무용도 음악도 아닌 영화 그 자체였으며 아직도 세계 주류 영화사에서 니콜라스 레이 이상으로 평가받으면 받았지 그 밑은 아닌 대작가들이다. 하지만 이십대 중반의 장 뤽 고다르는 '영화라는 것은 니콜라스 레이를 말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 자리에 안소니 만이나 로버트 올드리치 내지 조셉 로지나 사무엘 풀러 혹은 누벨바그나 시네마누보 아니면 아예 고다르 본인 이름을 박아 넣는들.
일본의 저명한 비평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고다르로부터 '픽션적인 대담한 단순화'야말로 확고한 자기주장이 없으면 무시당하기 십상인 환경에서 비평가에게 '필수불가결한 자세'임을 배웠다고 썼다. (영화의 맨살 -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비평선) 하지만 보다 중요한 건 다음 얘기, 그 전제 사항이다. 이 '픽션적인 대담한 단순화'에 대하여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지면서 완강히 버티는 것'. '영화는 복수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혹은 무수한 측면을 가지고 있어서 어디에서부터 들어가도 좋을 것이지만 그러나 나 자신은 이 측면에서부터 작품에 접근했다, 그리고 그 책임은 그것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진다'는 자세. 영화는 무수한 세부로 이루어져 있어 그 복수의 세부가 서로 다른 기능의 뒤얽힘으로 무한히 펼쳐지기 마련, 그 모든 방향과 차원까지 통틀어 완전히 알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누구나 어느 한두 지점에 대해 언급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비록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은 기껏 여기까지지만 '마치 그것이 결정적이기라도 한 것처럼' 끝까지 글을 몰아 붙이는 결기, 동시에 그렇게 결의한 책임을 반드시 자신이 '자신의 언어로 짊어지겠다는 긴장감'이야말로 평론가의 자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