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리틀 포레스트 1~2 세트 - 전2권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 김희정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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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을 남기기 전에 영화 중반에 몇 분 씩 간격을 두고서 이어지는 긴 대사를 옮겨 둔다.


"도시 사람들은 우리 고향 코모리랑 말하는 게 달라. 사투리 같은 거 말고. 자신이 몸으로 직접 체험해서 그 과정에서 느끼고 생각하며 배운 것, 자신이 진짜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거잖아. 그런 걸 많이 가진 사람을 존경하고 믿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주제에 뭐든 아는 척하고 남이 만든 걸 옮기기만 하는 놈일수록 잘난 척해. 천박한 인간들이 하는 멍청한 말들을 듣는 데 질렸어. 난 말야. 남이 자길 서서히 죽이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두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진 않았어. 코모리를 나가서 처음으로 고향 사람들을 존경하게 됐어. 우리 부모님도 그렇고. 참말을 할 수 있는 삶을 사셨구나 하고."


주인공 이치코(하시모토 아이)와 마찬가지로 도시 생활 거쳐 귀향한 청년 유우타(미우라 타카히로)가 같이 동네 어른 양식장 일을 거드는 도중에 무슨 방언 쏟아내듯 읊던 대사인데, 이에 대해 이치코는 속엣말로 독백한다. '유우타는 자기 인생과 마주하려고 고향에 돌아온 것 같다. 반면, 나는 도망쳐 왔다.' 일견 마음을 움직이는 측면도 있지만 공감해서 기록해 둔다기보다는 그 반대에 가깝다. 자연 주기에 맞춰진 삶 속에 진리가 있고 시골 사람들은 그 이치를 꿰고 있다는 일종의 농어촌 클리셰, 판타지.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하게 만든 도시 판타지가 부숴진 데에 대한 반대급부, 트라우마로 여겨질 정도로 독단이 심하다. 상보적인 관계는 차치하고도 반복성에의 함몰 위험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론 뿐인 탁상공론 만큼 오직 체득만으로 깨쳐 알 수 있다는 경험 맹신주의 역시 내겐 경계 대상이다.

 

 

 

"분지 밑바닥에 있는 코모리는 한여름이면 수중기에 잠겨 있다. 산 위의 수증기들까지 흘러 들어온다. 젖은 셔츠처럼 달라붙는 대기... 지느러미만 붙이면 헤엄칠 수 있을 것만 같다..."

 

 

각설하고,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リトル・フォレスト 夏・秋)]은 제목 그대로 계절별로 제작된 두 중편을 하나로 묶은 영화다. 일본 도호쿠 지방의 고향 마을 코모리에서 거의 모든 생활 수단을 자급자족하는 주인공 이치코의 일상이 뚜렷한 서사 구조 없이 다채로운 자연 식단 위주로 펼쳐지는데, 전문적인 요리 프로 이상으로 식재료의 재배와 수확 혹은 채집 과정부터 상세한 레시피와 이른바 '먹방' 장면들까지 일일이 제시된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광과 소박한 계절 음식들 틈새로 이치코의 감정과 사연들이 자연스레 묻어난다.

 

 

 

 

작금의 일본 영화계 주류를 이룬다고 판단되는 친환경 슬로우 라이프 지향 힐링 무비들을 접하다 보면 조건 반사적으로 행여 시골에 대한 환상이 개입돼있지나 않은지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의 경우 글 머리에서 언급한 가치관 측면의 판타지 요소가 걸릴 뿐 아니라 경제적 제반 조건들은 생략된 채 마냥 평온하고 예쁘게 진행되는 이치코의 농촌 생활엔 치열하게 겨우겨우 이어지는 삶의 어떤 진면목, 악취가 휘발돼 있다. 허나 어떤 인식이나 판단 이전에 망연자실, 러닝타임 내내 넋놓고 화면을 들여다 보게 된달까. 안팎으로 귀농 판타지 혐의가 짙긴 한데,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기엔 그 판타지가 너무도 소소하니 정갈하다. 비록 가공의 세계일지 몰라도, 오로지 농삿일과 먹거리 준비만으로 하루 온종일을 보내는 생활이 골치 아픈 도시 일과 이상으로 꺼려지는 내 호오에 부합하진 않아도, 근본적인 치유까진 못돼도, 무균질의 대상 앞에 머리가 비워지면서 나 스스로를 담담히 돌아보게 하는 휴양 효과가 분명 있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라는 작가의 만화가 원작이라고 한다. 하우스 제작 후 본격적으로 효율적인 농법을 적용하면 코미리 정착이 기정 사실화되면서 영영 다시는 못 떠날 것 같아 그냥 척박한 노변에서 고구마를 키운다는 이치코의 과거 짧은 도시 생활 중 숨겨진 사연이 뭔지, 5년 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집을 떠났다는 친모의 편지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지 궁금해진다. 후속작이라는 [리틀 포레스트: 겨울과 봄] 편이 케이블 목록에 올라오면 역시나 챙겨 보게 될 듯싶다. 대놓고 귀농 판타지라 부르는 게 과연 합당한지 아닌지 여부도 그 후에야 더 또렷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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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부부의 날이라 그러고, 곧 결혼기념일이기도 하고 해서 선물도 하고 간만에 썰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의식주' 중에 '식'에 가장 둔감하다. 레스토랑의 종류별 스테이크나 마트에서 만원 주고 사오는 냉동 닭가슴살이나 내겐 그냥 다 같은 고기나 마찬가지.

 

 

 


그렇다면 '의'는? 역시나 둔하다. 거의 패션 테러리스트에 가깝달까. 춘추복과 여름옷, 겨울옷 두께와 옷감에 구분이 있을 뿐 그냥저냥 다 비슷비슷한 용도의 몸가리개.

 

 

 


그나마 '주'에 조금 민감했으나 그마저 애들 낳고 살면서 잠자리든 짐 정리 인테리어든 뒤죽박죽, 선이 뭉개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잿빛의 삶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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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21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어떻든 좋은 시간 오붓하게 가지셨네요.^^

풀무 2015-05-22 06:2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프레이야님. 산뜻한 주말 보내세요. :)
 

 

 

- '시경', '초사'를 다룬 부분에서는 이성·추상력의 문사철(文史哲)보다 감성·상상력이 중요한 시서화악(詩書畵樂)을 강조하셨는데, 이도 사유의 유연성을 의미합니까.


​"시서화라고 하면 교양 예술이라고 인식되고 끝나는데, 사실 시서화는 문사철이 담지 못하는 풍부한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 문사철과 시서화를 같은 세계인식의 틀로 보는 게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은 교향곡 5번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음악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소통하는데 대단히 서툽니다. 그래서 '운명'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죠.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음악의 무한한 세계가 왜소한 개념으로 축소됩니다. 잭슨 플록의 5번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문사철, 즉 문학의 서사 방식에 과도하게 갇혀 있는 것입니다. 시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지시한 의미를 뛰어넘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 시대의 문맥에 갇혀 있는 것을 뛰어넘는 탈문맥이 필요합니다. 후기 근대사회의 비인간적인 존재론적 논리가 지속가능한 것인가까지 사유하자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나의 삶을 조감하자는 게 책의 기본 취지입니다."  - 경향신문 인터뷰 중에서 -

 

인터뷰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241806311&code=9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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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가와 히로시 감독, 니시지마 히데토시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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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찬찬히 보는 사람 감정을 침전시키다 끝내 마음 밑바닥까지 가닿고 마는 순도 높은 멜로를 얼마만에 보는 지 모르겠다. 아마도 고교 시절 만났던 폴란드 영화 [조용한 태양의 해] 이후 개인적으로 처음이 아닌가 싶다. [좋아해]는 열일곱 고교 시절 서로 좋아한단 말 한마디 못 건네고 가슴 속으로만 풋사랑을 앓다 헤어진 후 17년이 지나 우연히 재회한 두 남녀를 묵묵히 지켜보는 영화다. 과거 그리고 지금의 자신과 상대방을 진솔하게 돌이켜 바라보며 세월의 간극을 메워가다 마침내 '좋아해' 한마디 조심스레 전할 수 있게 되기까지를 담백하게 그리고 있다.


늦봄이나 초여름 쯤 됐을까. 야구를 그만 두고 기타에 빠진 소년 요스케가 강둑 풀밭에서 서툴게 연주하는 같은 소절의 반복적인 멜로디를 멀찌감치 떨어져 듣다가 그대로 흥얼거리던 소녀 유는 그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서지만 그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늘 말끝을 흐린다. 몇 날 며칠 그렇게 서로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씩 다가서나 싶던 순간 반 년 전 사랑하던 연인을 잃은 유의 언니를 덮친 예기치 못한 사고로 두 사람은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17년이 지난 어느 가을. 음반회사 영업사원이 된 서른넷 요스케 앞에 우연히 서게 된 서른넷 유가 그 지난 날 멜로디를 소환한다. 두 사람은 과거 미완의 곡 뿐 아니라 못 다한 채 가슴에 묻어둔 말 역시 마저 맺어져야 함을 깨닫게 된다.


미묘한 떨림 외에 큰 진폭 없이 진행되는 서사, 별 대사 없이 오직 감정에 충실한 느린 극의 흐름에 호불호가 크게 갈릴 작품이다. 두 여린 주인공의 미세한 동작과 표정은 물론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까지 그 어느 것 하나에서도 섣불리 눈길을 떼지 않는 카메라는 잠시잠깐 번지는 미소부터 흔들리는 눈빛, 부지불식간 새어나는 숨소리와 눈가에 살짝 맺히는 물기, 그들 심경이 반영됐을 하늘 빛과 대기의 질감까지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영화의 시선과 그에서 전해지는 감정선이 대단한 깊이나 무게를 지닌 것도 아니다. 그저 소박하고 단출하나 진중하게 두 남녀를 응시하고 그들 호흡에 귀기울이면서 가슴에 맺힌 말이 터져나오는 순간을 주시할 뿐이다. 끝까지 보고 나면 원제목 [好きだ,] 뒤에 찍혀 있던 쉼표가 의미심장하게 와닿으며 엔딩 자막 뒤에 제시되던 두 사람의 겨울 언덕행을 축복하고 싶어 진다. 조용히 스며들어 마음을 훔치는 수작이다.

P.S. 참, 국내에 많은 팬들을 지닌 카세 료도 중요한 단역으로 출연한다. 34세 요스케(니시지마 히데토시)에게 우연히 범행 현장을 들키고 나중에 요스케를 칼로 찌르는 부랑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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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4-12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쪽섬 님은 일본 영화의 절대 강자이십니다... ㅎㅎㅎㅎ

풀무 2015-04-13 08:29   좋아요 0 | URL
저야 가끔 맘닿는 영화 보고 기록해두는 정도이고.. 진짜 요즘 일본영화 트렌드 강자들은 네이버에 즐비합니다. ^;
 
컨테이젼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기네스 팰트로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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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젼]에서 재난의 실체는 박쥐의 병균이 돼지로 옮겨가 변이되면서 사람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다. 'D-2'라는 자막과 함께 재난의 둘째날부터 시작된 영화는 바이러스의 확산 양상을 속도감 있게 보여주다가 제일 마지막에 'D-1' 즉, 바이러스의 창궐 원인이 되는 화면들을 배치하는 영리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컨테이젼]의 주인공은 'MEV-1'라는 가상의 바이러스는 물론, 그 창발과 전이 앞에 무기력한 '인류'라는 시스템 자체다. 유명 배우들이 잔뜩 나오지만 소더버그의 차갑고 건조한 시선은 그들에게 스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낼 기회를 좀체로 주질 않는다. 그냥 일반인들 자리에 맷 데이먼, 기네스 펠트로, 케이트 윈슬릿, 로렌스 피시번, 마리옹 꼬띠아르, 주드 로 같은 유명인들이 들어가 있는 가상 다큐 내지 재연 드라마인 셈.
 

영화에 오버가 없다. 발빠르되 입은 무겁달까. 바이러스의 무차별 습격으로 혼돈에 빠진 세상 속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사람들. 한쪽에선 아노미를 틈타 폭동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불안과 광기, 군중심리를 악용해서 돈벌이를 하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질병의 원인을 추적하고 백신을 개발하는 등 자신의 일을 수행하며 때로 희생하기도 하는 모습을 카메라는 과묵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렇게 극적 장치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기존의 감염 재난물 장르의 공식을 철저히 피해가는데도 흥미진진. 진정 섬뜩한 작품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로 '나'를 감염시킬지 모르는 위험에 노출되면서 육체 이전에 이미 정신이 황폐해진 사람들이 얼마나 나약하고 사악해질 수 있는지, 그런 우리가 이루고 있는 '첨단' 문명, 그 고도의 사회계약과 과학기술 조차 기실 자연 앞에 얼마나 무력하고 취약한지 실감나게 보여주면서 보다 근원적이고 실질적인 공포감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마약 중독 문제에 대해 역시 사실적으로 파고 들었던 [트래픽] 이후로 간만에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진면목을 엿보면서 몰입할 수 있는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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