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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
이시가와 히로시 감독, 니시지마 히데토시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06년 12월
평점 :
이렇게 찬찬히 보는 사람 감정을 침전시키다 끝내 마음 밑바닥까지 가닿고 마는 순도 높은 멜로를 얼마만에 보는 지 모르겠다. 아마도 고교 시절 만났던 폴란드 영화 [조용한 태양의 해] 이후 개인적으로 처음이 아닌가 싶다. [좋아해]는 열일곱 고교 시절 서로 좋아한단 말 한마디 못 건네고 가슴 속으로만 풋사랑을 앓다 헤어진 후 17년이 지나 우연히 재회한 두 남녀를 묵묵히 지켜보는 영화다. 과거 그리고 지금의 자신과 상대방을 진솔하게 돌이켜 바라보며 세월의 간극을 메워가다 마침내 '좋아해' 한마디 조심스레 전할 수 있게 되기까지를 담백하게 그리고 있다.
늦봄이나 초여름 쯤 됐을까. 야구를 그만 두고 기타에 빠진 소년 요스케가 강둑 풀밭에서 서툴게 연주하는 같은 소절의 반복적인 멜로디를 멀찌감치 떨어져 듣다가 그대로 흥얼거리던 소녀 유는 그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서지만 그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늘 말끝을 흐린다. 몇 날 며칠 그렇게 서로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씩 다가서나 싶던 순간 반 년 전 사랑하던 연인을 잃은 유의 언니를 덮친 예기치 못한 사고로 두 사람은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17년이 지난 어느 가을. 음반회사 영업사원이 된 서른넷 요스케 앞에 우연히 서게 된 서른넷 유가 그 지난 날 멜로디를 소환한다. 두 사람은 과거 미완의 곡 뿐 아니라 못 다한 채 가슴에 묻어둔 말 역시 마저 맺어져야 함을 깨닫게 된다.
미묘한 떨림 외에 큰 진폭 없이 진행되는 서사, 별 대사 없이 오직 감정에 충실한 느린 극의 흐름에 호불호가 크게 갈릴 작품이다. 두 여린 주인공의 미세한 동작과 표정은 물론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까지 그 어느 것 하나에서도 섣불리 눈길을 떼지 않는 카메라는 잠시잠깐 번지는 미소부터 흔들리는 눈빛, 부지불식간 새어나는 숨소리와 눈가에 살짝 맺히는 물기, 그들 심경이 반영됐을 하늘 빛과 대기의 질감까지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영화의 시선과 그에서 전해지는 감정선이 대단한 깊이나 무게를 지닌 것도 아니다. 그저 소박하고 단출하나 진중하게 두 남녀를 응시하고 그들 호흡에 귀기울이면서 가슴에 맺힌 말이 터져나오는 순간을 주시할 뿐이다. 끝까지 보고 나면 원제목 [好きだ,] 뒤에 찍혀 있던 쉼표가 의미심장하게 와닿으며 엔딩 자막 뒤에 제시되던 두 사람의 겨울 언덕행을 축복하고 싶어 진다. 조용히 스며들어 마음을 훔치는 수작이다.
P.S. 참, 국내에 많은 팬들을 지닌 카세 료도 중요한 단역으로 출연한다. 34세 요스케(니시지마 히데토시)에게 우연히 범행 현장을 들키고 나중에 요스케를 칼로 찌르는 부랑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