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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걸을수록 나는 더 작아진다 ㅣ NFF (New Face of Fiction)
셰르스티 안네스다테르 스콤스볼 지음, 손화수 옮김 / 시공사 / 2014년 10월
평점 :
빨리 걸을수록 나는 더 작아진다 // 셰르스리 안네스다테르 스콤스볼 지음.
예순. 그리고 일흔. 그리고 여든.
그 이후의 삶은 어떨까. 60세가 더 이상 '노인'이 아니라 제2의 시작이구나를 부모님을 보며 깨닫는 요즘 문단에서는 여든을 넘어 이제 100세 할아버지 마저도 못마땅한 현실에 안주하고 죽음을 그저 앉아서만 기다리진 않는다. 오히려 길지 않은 남은 생, 좀 더 알차게 보내기 위해 그들만의 도전, 또 한번의 리그를 유쾌하게 시작한다. 10년 이상 나이어린 여자친구와 멋진 연애를 하는 할아버지의 베이징 여행기, 인류의 굵직굵직한 사건현장에 어쩌다보니 함께 했던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 이어 이번엔 대인관계가 서툴지만 늘 언젠가는 인기인이 될거란 기대를 놓지 않는 할머니가 내게 다가왔다. 심지어 이 할머니의 삶은 아주 드라마틱하지도 아주 불가능해 보이지만도 않는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 그녀. 마테아.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던 '시시한 아줌마'가 이젠 동네의 새로운 '시계 아줌마'로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멋지진 않지만 그래도 운율은 맞출 수 있었다.
마테아.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세상에서 가장 웃기지만 그 사실을 본인만 아는 조금은 웃픈 할머니. 남편의 은퇴만 기다리며 그럭저럭 대인관계가 서툴어도 잘 버텨왔다.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건 어찌보면 그야말로 자기만의 세상에 너무 빠져있어서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이고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섣불리 사람을 믿었다가 그 사람에 의해서 완전하게 세상과 단전하게 되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니까. 마테아는 적어도 마트에 장을 보러가는 정도의 외출은 이전에도 하였고 심지어 남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타인의 집 가정부로 잠깐이긴 하지만 사회활동을 시도해보기 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유머러스함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고 키우던 개 스테인을 자살인것 처럼 떠나보내긴 했어도 분명 자신의 실수가 있었음을 고백하는 등 성격이나 성향자체가 이상하다고 보기에는 너무 억울할 수도 있다.
마테아. 그녀는 어쩜 보통의 우리와 너무 닮아 있다. 사회생활을 잘하고 못하고는 직장생활을 무난하게 견뎌내는냐로 판가름 나는 요즘 생계를 위해 버티기만 되는 요즘은 진짜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무엇인지 헷갈리기까지 하다. 마테아가 밤늦게 외출을 삼가게 된 까닭도 이웃 소녀의 납치사건이 계기가 되었던 만큼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녀를 변명해주고 싶은 안타까움이 들었다. 더군다나 유네와 같은 이웃이라면 나도 정말이지 알고 지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중간 중간 예상치 못한 발랄함에 피식피식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가끔은 낯선 사람에게 편지를 쓰기도 한다. 전화번호부에서 골라낸 불운한 이름들.
나는 주간지나 일간지에 실린 광고 사진을 오려내서 편지지에 붙이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오늘 단 하루만 한 상자에 5크로네! 헤우게루 슈퍼마켓으로 오세요."
정말 편지의 글을 믿고 슈퍼마켓을 찾은 누군가가 계산대 앞에서 황당한 표정을 지을 것을 상상하면 기분이 좀 나아지기도 한다.
마테아가 그토록 원하던 남편 엡실론과의 사랑은 미혼인 내게 여러모로 부러운 모습이었다. 아내를 위해 서투르지만 상자를 만들어주고, 그 상자바닥에 사랑하는 마테아에게 라는 닭살스러운 멘트를 남기며 얼굴을 붉히는 엡실론의 모습은 그가 어떤 외모인지 여부를 떠나 오래도록 함께 하는 동반자로서는 충분하게 느껴졌다. 물론 몇가지 세심하지 못한 부분도 보이지만 완벽하지 않아 더 좋은게 아닐까. 그런 엡실론이 그녀곁을 떠나는 순간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마테아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각인 시켜두기 위해 세상밖으로 걸음을 내딛으려고 노력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녀뿐 아니라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이자 유일하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엡실론의 부제는 그녀에게 큰 상처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책에서는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지구에 남아 있던 사람들보다 나이가 덜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니까.
예를 들면, 엡실론과 함께 있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오게B와 마테와의 대화속에서 그녀는 삶이란 원래 힘든 것이고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자신의 삶도 나름 제대로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본다. 나의 삶은 얼만큼 제대로 였다. 제대로라면 그래서 기쁘고 행복한지 심지어 신께 감사한 맘이 드는지도. 저자가 병에 걸려 움직이는 것 자체가 힘겨울 때 삶과 죽음에 관해 깊게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역자의 말에서 보았는데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또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삶과 죽음에 관한 생각보다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배우자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엡실론과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 좋은 이웃을 만날 확률과 통계적인 수치는 어느정도일까 와 같은 그런 고민들. 빨리 걸을수록 나는 더 작아진다. 라는 타이틀을 새삼 다시 읽어본다. 읽기 전 책소개만 접했을 때는 작아진다는 것이 죽음만을 뜻하는 줄 알았는데 다 읽고나니 비단 죽음뿐만이 아닌 것 같다. 얇고 술술 읽히지만 이 책은 아주 가벼운 듯, 다소 싱거운 결말이지만 그 짧은 시간 지금 내가 깊게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혹은 너무나 경솔하게 생각해왔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았는지, 혹은 살고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