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마음에 없는 소리
김지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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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고 있는 순간보다 읽은 후 오래도록 잔상이 어른거리는 소설이 있다. 별것 아닌 소재인 듯 보이는데 곱씹을수록 그 안의 감정들이 피어오르는 소설이 있다. 그렇지,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현듯 그 감정이 내것임을, 내가 가졌고 느꼈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소설이 있다. 김지연의 단편집 <마음에 없는 소리>가 그랬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사랑과 쓸모없음. 사랑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쓸모없는 감정들. 욕망과 현실. 직시와 회피. 사랑과 배려. 이런 것들이 계속 떠오르는 단편이다. 

* 따로 쓴 감상 → https://blog.aladin.co.kr/nantee/13749711




「굴 드라이브」 

암컷 굴이 알을 수천만 개 낳는다고, 몰랐다.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필리핀 여성 미셸이다. 


""서울에는 언제 갑니까?"

"내일 저녁요."

"나도 데려가세요."

"네?"

나는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말이 완전히 진심인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농담이에요. 앞에 보세요."

미셸은 농담이라며 웃어넘겼다. 농담이라는 말은 참 간편하다. 모든 말들을 금방 가볍게 만들어버린다."


미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한다. 제목이 굴 드라이브,이니 나는 내맘대로, 굴 드라이브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미셸에게 더 마음 써서 읽었다. 어릴 때 나를 싫어했던 친구가 용서해줄 수 있냐고 묻는 말에 아니,라고 대답하는 화자도 마음에 들었다. "씨발...... 하여튼 맘에 안 들어. 이러니까 싫어했겠지......" 라고 말하는 친구도 좋았다. 소설을 끝맺는 문장들도 좋았다. 화자가 고향에 내려가면 꼭 미셸과도 친구했으면 좋겠다. 




「결로」

중고 직거래는 신경쓸 일이 많다. 중고 거래를 떠올리니 당근마켓이 해외로 진출했다는 기사가 생각난다. 이 단편은 중고거래 자체에 방점을 두지 않는다. 거래를 기다리며 길에서 만난 여자들 이야기다. 치매, 노화, 여성, 그들의 세월, 그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돌봄노동이 딸에게 부여되고 있다는 점이, 현실이 그러하지만 그래도 찜찜하다. 이젠 소설에서도 늙은 어머니를 돌보는 남성을 보고 싶다. 세심하게 신경쓰고 잘 돌보는 남성의 모습이 일상인 세상. 소설에서 "그건 재활용해야 돼!"하고 외치는 여인의 마음을 내가 너무 잘 알아서 살짝 신경질이 났다. 이런 모습을 남성에게서도 보고 싶다. '나'는 사이가 좋지 않은 동생을 죽었다고 설명하는데 와, 놀람과 동시에 감동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 물건을 판 사람은 기다리기로 한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을 테지만 나는 또 내맘대로 그가 화자의 동생이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러면서 역시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을 화자가 그 물건을 사서 정말 다행이라고 혼자 들떠했다. 




「작정기」

이 단편에는 실제 죽음이 나온다. 예상하지 못한 죽음이고 그래서 이전의 상황에 그 죽음을 대입해보는 일이 화자에게는 어쩌면 애도의 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원진'이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된 이유가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또다른 복선일지도 모르겠고. 우연과 시간이 겹쳐지고 현실과 환상이 겹쳐지고 '나'와 원진이 겹쳐지고. 의도치 않았지만 같이 오지 못한 친구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일도. 


"나는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바로잡았어야 했을까? 그것은 어떤 빌미가 되었을까. 누군가 원진을 이미 죽은 사람으로 간주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 원진의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미신적이고 원진에게도 옳지 못하다. 그런데도 그런 자책감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물리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이 세계가 물질로 가득차 있고 설명 가능한 공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으로 내 죄를 만회하려고 한다. 그런 건 물리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가능하지 않다. 사실 그건 죄도 아니지 않나. 내가 원진을 죽인 것도 아니고 죽음을 사주한 것도 아니고 단지 말을 옮기는 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것뿐이다. 내 죄라고 할 만할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자책하는 것은 원진이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날 야키토리 가게에서 유코와 남자가 원진을 죽은 사람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가벼운 해방감을 느꼈다는 것을 나 자신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나약한 말들」

내가 생각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은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봐주는 사람은 없다. 이 단편에도 역시 죽음이 있고 관계의 일상이 있다. 추억이 있고 애도가 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이 단편을 읽을 때 집중력이 흐려졌었나 보다. 가장 불분명하게 기억이 남아 있다. 다시 읽어봐야 겠다.


"난 너를 알아, 내가 왜 몰라? 나는 너를 아주 잘 알아,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혜수는 자신을 잘 모른다고 말했고 정은은 마치 이 세상에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날 밤 정은은 아주 괴로웠기 때문에 자고 일어나면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완전히 미쳐버린 채로 잠에서 깰 것이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를 거라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 거였다. 그래서 잠들 수가 없었다. 졸음이 밀려왔는데 잠들면 안 될 것 같았다. 잠들기 싫어서 엉엉 울었다. 우는 건 체력 소모가 많은 일이었고 결국 울다 지쳐 잠들었다. 창밖의 파르스름한 빛이 조금씩 방안까지 스미고 야단스러운 새소리에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을 때에야 정은은 여전히 자기 자신인 채로 잠에서 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도감 속에서 정은은 또 울었다. 그렇게 한동안은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우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느 날에는 완전히 미쳐버리겠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엔 미쳐버릴 거야.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정은은 미칭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학습한 규칙을 따르며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마음에 없는 소리」


"우리가 불행을 극복하는 방식은 태연해지는 것이었다. 낫는다는 것을 믿고 그 미래가 이미 도래한 것처럼 굴기. 그렇게 하면 반복되는 불행들을 점점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다." 


청년 아닌 청년. 중년 아닌 중년. 이맘때쯤이면 이 정도는 하고 이 정도는 갖고 살고 있어야지, 너는 입때꼇 뭐했니, 남들 다 그렇게 살 때 너만 왜 그러고 있니, 제대로 살아,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이런 말들이 뒤통수에서 들리는 듯하다. 내내 들어왔던 말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귀로 듣는 것만 같은 소리들, 눈빛들, 태도들. 이십대 아니고 삼십대 아니라도, 아마 죽기 전까지 그런 말을 들을 것이다. 오지랖은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소설 속 경상도 사투리가 친근해서 음성 지원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울기 시작할 때」

죽음이다. 이번 죽음은 조금 다르다. 죽음이 글자 속에,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 있다. 사람 그 자체다. 마침 이 단편을 읽기 전에 죽으면 마음은 어떻게 될까,에 대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터라 아래와 같은 구절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죽는다는 건 어쩌면 그냥 마음이 산산이 흩어지는 건지도 모르지. 

다른 누군가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처음에 기능을 다하는 건 몸뿐이지만 그렇게 되면 마음이 머물 곳이 없어지니까 마음은 산산이 흩어질 수밖에 없지. 그러면 너라고 할만한 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거야. 너는 여러 마음들의 집합체 같은 거라서." 



소설 초입부에 등장한 인물 '삼'을 맞닥뜨렸을 때엔, s*o님 글에 자주 등장하는 동명인물이 떠올라 웃었다. "...어쩔 수 없이 몇 번 삼이라고 불러주었고 나중에는 그게 너무 익숙해져서 진짜 이름을 까먹어버렸다"는 문장에서도 웃었다. 그렇지만 그 다음부터는 웃을 수가 없다. 


"삼은 큰돈을 꾸고 갚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가족 중 누구 하나가 불치병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살아남으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행을 극복하려면 돈이 많을수록 유리하다고 말했다. 가난은 일종의 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소할 수 있는 이 질병을 불치병으로 키우는 것이 국가라고 말했다. 나는 그걸 누가 몰라, 하고 대꾸했다. 하지만 삼은 국가가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뉴스를 보지 않았고 선거철이 되어도 투표하지 않았으며 자기가 힘을 보태 사회의 어떤 부분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열심히 회사에 다니며 채무자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집으로 찾아가 추심명령을 전달했다. 삼은 그때마다 자신이 채무자들을 비난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왜 아직도 가난한 거야, 하고. 그러는 삼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스스로 답을 내릴 수가 있었다. 이십사 시간 동안 일만 한다고 해도 그저 살아있느라 드는 비용을 충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삼의 결론은 그래서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삼은 병의 발생이 의지와 관련된 것처럼 말했다." 


소설 속 화자의 이야기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몰입하다가 화들짝, 다시 소설 도입부를 떠올리는 순간이 온다. '스포일러 포함'에 체크했지만 그래도 말하면 안 될 것같다. 나만 놀랐을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일」 

"우리가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데 굳이...... 섹스까지 해야 할까?"

이 문장을 만났을 때 이 단편이 좋아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지배하는 관념인 이성애 이데올로기, 삽입 섹스가 유일하고 정상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슬쩍 비틀어 꼰 방식이 유쾌했다. 때로 직설적이기도 하다. "몰라. 좆 달린 거 빼면 좆도 없는 것들이 여자 잘 만나고 다니는 거 보면 짜증나. 좆 너무 과대평가되어 있어." "그건 인정." 

어이없이 웃기기도 한다. "그니깐요. 언닌 진짜 좋겠어요. 한남이랑 결혼할 일은 없잖아요. 최고로 부러워. 저도 여자나 만날 수 있었으면 했다니까요." 

응원과 지지에 대한 입장 차이 같은 것도. "그러니까 나는 네가,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인 네가, 자라는 내내 나와의 가정 내 이권 다툼에서 늘 교묘히 우위를 점하던 네가, 나와는 접점이 거의 없어 십 분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무리인 네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생각이란 걸 하든 말든, 이해를 하든가 말든가, 응원이고 나발이고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정말 어쩌라고 싶었지만," / "물론 그게 다 얘가 동성연애 시작하기 전의 일이지만요...... (그때 나는 옆 테니스코트의 언니를 짝사랑해서 혼자서도 맨날 벽 치기를 하러 갔었다.) 근데! 나는 그거 다 이해해줍니다! (예예, 감사합니다.) 이놈의 대한민국에서 나 같은 애비가 몇이나 되겠어요?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시기상조다 이 말이지요. (그놈의 나중에!)" 

그러니까 이 단편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랑, 뭘까. 


""근데 있지." 

"어."

"나도 사랑 같은 게 뭔지 잘 모르겠어."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원에서」 

마지막 단편은... 역시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이 얽혀 있다. 앞의 단편들도 그랬다. 주된 흐름은 있지만 거기에 여러 문제들이 일정한 방향도 속도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물려있다. 단어들을 늘어놓으니 상황이 단어 안에 규정되는 듯해 지웠다. 그렇게 늘어놓기엔 너무... 기분나쁘게 잘 짜여진 현실이다. 


"여자가 새로 결혼한다는 단어가 왜 없어? 재가도 있고. 찾아봐, 더 있을걸? 너 지금 너무 한 생각에만 빠져 있어. 그냥 결과를 정해놓고 그 결과로 갈 수 있는 길만 생각하는 꼴이라고. 다른 건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를 않잖아." 

"악! 아악! 악!'

나는 기영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아무 뜻 없는 비명을 질렀다. 계속 질렀다. 기영의 말을 멈추고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비명이 내가 느끼는 감정과 가장 흡사했다.

... 

나는 기영이 판정관이나 심문관처럼 굴지 말고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줬으면 했다. 팔짱을 끼고 어디 책잡을 데가 없나 따져보기 전에 일단 경청부터 해줬으면 했다. 실수 하나에 나를 의심하지 말고 우선은 믿어줬으면 했다." 


이 상황, 너무 익숙하고 잘 아는 상황.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이해하고 또 이해받으려는 것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최고의 방법은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랠프 니콜스 

"잘 듣는 것은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으로 반응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다." - 앨리스 두어 밀러 


다른 책('아티스트웨이'인용구)에서 가져온 문장이지만, 이게 안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소설 속 남자처럼. 이것뿐 아니라 다른 부분들도 모두 익숙하다. 익숙해서 부르르 하게 된다. 



***

단편들 모두가, 관계에서 미묘하게 흐르는 감정선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단편들을 하나로 꿰뚫는 굵직한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내 비밀의 감정 같은 것들이다. 말로 뱉지 않았지만 느껴버리고 말아서 금이 가고 멀어지고 다시 사랑하게 되는 그런 것들이다. 그것은 죽음이고 농담이고 그리움, 사랑, 두려움, 환멸 이기도 하다. 관계에 있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 우리가 어떤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 작가의 소설들은 그런 작업의 일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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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7-16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편 제목들도, 다 좋네요.

굴 드라이브, 뭔굴? 하다가 수천만개 알? 믿을까 말까?하면서 호기심 같이 생기네요^^

난티나무 2022-07-17 05:12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어요. ㅎㅎㅎ 수천만 개… 검색해보다가 말았어요.ㅋㅋㅋ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66%)



... '고통이 앎의 특별한 형태'라 하더라도,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통해서 무언가를 알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 경험해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알기 위해 그것을 경험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 그러나 이런 자기방어적인 생각과는 상관없이,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들이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 상황들 중에서 가장 잔혹한 것이 전쟁일 것이다. 아무리 상상해보려고 해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상상하기 싫은 마음이 훨씬 더 크겠다. 그럴 리가 없어, 가 얼마나 현실감각을 마비시키는지. 

전쟁(제2차세계대전)에 참가했던 여성들의 증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읽기는 그래서 아주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인물의 감정에 이입하는 순간이 두려웠다. 자칫 그 거리를 잊으면 눈물이 나왔다. 장소가 러시아라는 사실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지금 러시아는... 생각의 기준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헷갈린다. 그래서 더 읽기가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리뷰는 쓰지 못할 것같고, 얕디얕은 감상으로 숙제처럼 페이퍼를 쓴다. 





"이후에도 나는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이 두 진실과 적잖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의식 저 밑으로 쫓아버린 사실 그대로의 진실과 시간의 흔적이 스며든 공통의 진실. 신문 냄새가 폴폴 나는 공통의 진실. 첫번째 진실은 두번째 진실의 맹렬한 공격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예를 들어, 만약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가족이나 지인, 이웃들(특히 남자들) 중 누군가, 제3의 인물이 동석하면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와 단둘이 있을 떄보다 덜 진실해지고 덜 솔직해진다. 이미 대중을 의식한 대화가 돼버린다. 관객을 위한 대화, 당사자의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얻어낼 길은 요원해진다. 강력한 자기방어에 부딪친다. 자기통제. 끊임없이 이야기가 다듬어진다. 일종의 패턴까지 생겨난다. 듣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차분하고 깔끔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 신중하게 해야 할 말만 골라 한다는 것. 참혹한 일이 위대한 일로, 인간 내면의 불가해하고 어두운 면이 순식간에 이해가 되고 설명 가능한 것으로 둔갑한다. 나는 기념비들만 가득한 과거의 사막에 뚝 떨어지곤 했다. 공훈들만 가득한 황야에. 도도하고, 결코 속을 내보이지 않는 것들만 잔뜩 모여 있는 곳에. 니나 야코블레브나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나를 위한 하나의 전쟁을 들려주었다. "딸이라 생각하고 이야기할게. 어린애나 다름없는 우리가 겪어야 했던 그 모진 세월을 당신이 이해하기 쉽도록 말이야." 그리고 청중을 위한 또하나의 전쟁을 그녀는 준비해두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전쟁을. 신문에서 떠드는, 영웅들과 공훈이 주인공인 전쟁. 젊은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훈육용의 전쟁. 평범하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 불신에, 보통의 삶을 소위 이상이라는 것과 슬쩍 바꿔치기하려는 이 욕망에 나는 매번 충격을 받았다. 평범한 온기를 차디찬 광채와 맞바꾸려는 욕망에." 

33%


일상의 대화에서도 그러할진대, 온갖 인간의 면모를 바닥까지 보게 되는 전쟁에 대해서라면 오죽할까 싶다. 내가 아는 전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막연한 상상과 미디어가 보여주는 장면들에 국한되어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모습들이 깔려있는지, 알지 못했다. 군대와 병사들, 대포와 총과 칼, 참호와 병원, 총알들을 뚫고 '영웅적'인 행위를 하는 영화의 (남자)주인공들, 조연은 죽어나가고 주연만이 살아돌아오는 클리셰,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는 듯이. 





"...... 나는 집사람의 전쟁 이야기를 꽤 많이 기억해요. 요즘 말로, 집사람 이야기를 '슬쩍했거든'. 손자들한테 들려주려고. 그래서 내 전쟁보다 집사람의 전쟁을 녀석들에게 더 많이 들려줬을 거요. 사실 녀석들에겐 그게 더 재미있을 거야. 

사울 겐리호비치가 계속 말을 잇는다. 

-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

35%


전쟁 속에서도 성차는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럴 수밖에. 전쟁도 시간 속에 있고 사람들은 살아야 하니까. 삶의 연속이 아닐 수 없으니까. 구절들을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자주 숨이 막혔다. 생명을 위협받는 곳에서도 사회적 여성성을 강요받는 모습에. 너는 여자니까 남자들을 위로해야 해, 보살펴야 해, 부드러운 말과 친절한 웃음을 제공해야 해... 남자들 무리 속에 여자가 한 명 있으면 분위기가 얼마나 좋아지는지 모르지? 너희는 그런 존재인 거야. 남자들을 위한. '착한' 여자들은 대부분 마음에서 우러나 그렇게 한다. 부상병을 안아주고 키스해주고 토닥여주고 늘 살피고 가족이 없는 병사들에게 위로 편지를 쓰고... 그 모습이 감동적이긴 하지만 여자의 역할에 대한 슬프고 복잡한 감정까지 지울 수는 없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어. 좋은 사람이었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안 생기더라고. 하지만 몇 달 후에 그 사람 막사로 거처를 옮겼지. 달리 어떡해? 사방이 남자들인데, 그 남자들이 무서워 떨며 지내느니 한 남자랑 같이 사는 게 낫잖아. 오히려 전투에 나가는 건 무섭지 않았어. 전투가 끝나고, 특히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쉴 때가 무서웠지. 총탄이 빗발치고 포탄이 불을 뿜을 땐 나를 '누이! 누이!'라고 부르다가도 전투만 끝나면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다들 기회만 엿봤으니까....... 밤이면 막사에 틀어박혀 아예 나가질 않았어...... 다른 여자들도 이 이야기를 하던가?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아마 말하기 창피했을 거야...... 그래서 입을 다물었을걸. 다들 자존심은 세가지고! 하지만 그런 일은 정말 있었어. 왜냐하면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니까.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니, 억울하잖아...... 그리고 남자들이 4년이나 여자 없이 지낸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우리 군엔 매음굴이 없었어. 그래서 알약 같은 것도 나눠주지 않았지. 다른 부대에는 여자들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는 없었어. 4년 내내...... 지휘관들은 그래도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지만 사병들은 아니었어. 군율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선 다들 침묵하지...... 보통 그런 건 말하지 않는 법이니까...... 안 해......" 

72%


"만약 그 장교가 성폭행을 한 거였다면...... 글쎄...... 그런 일이야 당연히 있었지...... 사실 우리가 입 밖에 내질 않아서 그렇지, 그건 전쟁터의 법칙이나 마찬가지였어. 남자들은 몇 년씩 여자 없이 지내는데다 증오심까지 더해졌으니까. 소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면 처음 3일 동안은 약탈을 하는데...... 뭐, 당연히...... 그 짓도 헀지...... 당신도 모르진 않을 거야...... 하지만 3일이 지나서도 그 짓을 하다가 발각되면 재판에 부쳐질 수 있었어. 엄벌에 처해지기도 하고. 하지만 3일 동안은 마음대로 술도 마시고, 그리고......" 

91%


책 전체에 성희롱, 성푹행 같은 이야기는 드문 편이다. 내내 불안하게 '강간'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며 읽었지만 위의 증언이 보여주듯 침묵을 택한 여자들이 많았다. 이젠 이야기할 수 있다고, 여성이 어떻게 지워졌는지 고발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저 증언들 사이사이에, 그들의 주름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이 숨어있을 수밖에 없을까, 가슴 아픈 또다른 이유 중 하나다. 우리는 이미 '전시강간'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깊이 박힌 여성혐오는 여성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아래의 증언이 보여준다. 참전 여성들이 왜 입을 다물고 살아야 했는지를 보여준다. 



"조국이 우리를 어떻게 맞아줬을 것 같아? 통곡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4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뺨이 화끈거려. 남자들은 나 몰라라 입을 다물었고, 여자들은...... 여자들은 우리에게 소리소리 질렀어. '너희들이 거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 젊은 몸뚱이로 살살 꼬리나 치고...... 우리 남편들한테 말이지. 이 더러운 전선의...... 군대의 암캐들아......' 우리는 정말 온갖 말로 모욕을 당했어...... 알다시피 러시아어 어휘가 좀 많아야지......" 




"남편에 대한 원망은 없어. 오래전에 용서했거든. 딸아이를 낳고 누워 있는데...... 남편이 우리 모녀를 보더니...... 잠깐 있다 가버렸어. '정상인 여자라면 과연 전쟁터에 나갈 수 있을까? 총 쏘기를 배우고? 그래서 당신이 정상아를 낳을 수 없는 거다'라고 나를 비난하며 가버렸지. 나는 남편을 위해서도 기도해...... 

어쩌면 남편 말이 맞는지도 모르잖아? 그런 생각이 들어...... 다 내 죄라고......" 

76% 



'착한' 여자들은 자신들을 받아들기를 거부하는 사회에서 결국 '내 탓'을 한다. 너무 익숙하다. 떠난 남편도 같이 전쟁터에서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마지막 심문 후에 나는 벌써 세번째, 총살대상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어. 그런데 세번째 심문자로 나선 파시스트가...... 자기 전공이 역사라고 밝히더니 우리가 왜 그런 사람들인지, 왜 우리에겐 이념이 그토록 중요한지 알고 싶다는 거야. 생명이 이념보다 소중하지 않느냐면서. 당연히 나는 동의하지 않았지. 그러자 소리를 지르며 나를 때리더라고. 그러고는 또 물었어. '뭐야? 뭐가 너희들을 이렇게 만든 거야? 대체 그게 뭐라고 죽음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건데? 왜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가 전 세계에서 반드시 승리할 거라고 확신하지? 그는 러시아어를 아주 잘했어. 그래서 그에게 모든 걸 설명하기로 마음먹었지. 어차피 죽을 목숨, 헛일하는 셈 치고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 알려주고나 죽자 싶었거든. 그는 거의 네 시간 동안 질문해댔고, 나는 최대한 아는 대로 대답해줬어.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배운 마르크스-레닌주의까지 다 이야기했지. 그랬더니, 오, 그가 하는 행동이라니! 자기 머리를 움켜쥐고는 방안을 뛰다시피 서성이고, 한자리에 못박힌 듯 꼼짝도 않고 서 있고, 나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하지만 처음으로 매질은 안 하더군." 

77%


"나는 지금 건강이 좋지 않아. 신경이 많이 쇠약해졌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무슨 상을 받아왔느냐'고 물을 때마다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나한테까지 신경을 쓸 새가 없었다'고 털어놓기가 창피해. 하지만 아마 신경을 못 써서가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줬을 거야. 그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다들 죽을힘을 다했지...... 한두 명도 아니고 그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일일이 다 상을 주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최고의 상을 받았잖아? 5월 9일. 승리의 날!" 

94%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 나약한 정신소유자인 나도 저 심문자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어째서 저렇게 어린 나이에 전장으로 뛰어나갈 수가 있지? 무엇이 그렇게 만들지? 꼭 전쟁이 아니라도,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아니, 나에게 저런 이데올로기가 있기나 하나? 이런 뻔한 질문들. 얕다 얕아.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어...... 가족들도 모두 무사했지...... 엄마가 온 가족을 살리셨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살리고 여동생과 남동생을 살렸지. 그리고 나도 살아 돌아왔고...... 1년 후에 아빠도 돌아오셨어. 훈장을 여러 개 받아오셨더라고. 나도 훈장 하나와 메달 두 개를 받아왔지. 하지만 우리 가족의 결론은 그랬어. 우리집에서 진짜 영웅은 엄마라고. 엄마가 온 가족을 살렸으니까. 엄마가 우리 가족도 우리집도 구했어. 결국 엄마가 가장 가혹하고 끔찍한 전쟁을 치른 셈이지. 아빠는 단 한 번도 훈장을 달지 않으셨어. 훈장 약장도 달고 다니신 적이 없지. 아빠는 엄마 앞에서 훈장을 내놓고 자랑하지 않으셨어. 부끄럽다고 하셨지. 불편해하셨어. 엄마는 훈장도 메달도 없었으니까...... 

내 삶에서 우리 엄마만큼 내가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은 없어......" 

95% 


전쟁이 끝난 이후의 삶. '승리'했어도 모조리 파괴된 삶의 터전들, 사라진 사람들. 가족도 집도 직업도 학력도, 여자들에게 더 가혹한 현실. 생각만 하는데도 아득하다... 이 책을 읽는 것으로 전쟁의 이면을, 거기 어김없이 도사리고 있었던 성차별, 여성혐오, 사랑, 연대, 여성의 힘, 같은 것들을 새로이 엿보게 되었음에 일단 버거움을 잠재워본다. 분노를 충전한다. 





"이 일을 멈출 수가 없다. 매번 진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하므로." 

95%


"... 어떻게 이야기해야 해? 어떤 표정으로? 자, 이제 당신이 대답해봐. 대체 어떤 얼굴로 그 일을 회상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눈물부터 쏟아져. 하지만 반드시, 꼭 이야기해야 해. 우리가 겪은 일이 헛되이 사라지면 안 되니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니까. 이 세상 어딘가에 우리의 비명소리가 남아 있어야 하니까. 우리의 그 피맺힌 통곡이......"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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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09 2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익히 알고 있는 일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읽고 듣는 것은 또 다시 그것을 체험한다는 거 같아요. 제 3자로 읽는 것조차도 이런데 자신의 경험을 다시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일을 다시 겪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읽어나가기 쉽지 않겠지만 열심히 읽겠습니다. 먼저 읽으신 난티나무님 따라서요.

난티나무 2022-07-10 06:09   좋아요 1 | URL
맞아요,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기억을 되살려 말하는 건 엄청난 고통이겠죠. 전쟁 속에서도 이중삼중의 삶을 살아야 했던 여성들은 더 그랬겠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전쟁 이야기가 더 필요하고, 전쟁 후의 이야기도 역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레이스 2022-07-10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체르노빌...>과 함께 읽고 생각이 많았던 책!이예요. 리뷰 보니 다시 정리하고 싶단 생각이 드네요.
그때는 줄긋기와 태그, 발췌문 참조 정도만 했었어요

난티나무 2022-07-19 01:39   좋아요 0 | URL
엄훠나 제가 댓글을 못 보고 지나갔나 봐요.^^;;;
아아 체르노빌... 그것도 읽어봐야 겠어요. 모두 현재진행형인 일들이네요.....ㅠㅠ
 












김지연, <마음에 없는 소리> 



소설집 전체에 간략하게 감상을 남기려고 창을 열었는데, 처음엔 감흥이 적었던 첫 단편을 다시 훑는 사이 슬금슬금 또다른 감정들이 피어올라 글이 길어졌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

"근처 조선소가 망한 뒤론 다 빠져나갔어요. 여긴 그전부터 어차피 나 같은 늙은이들뿐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며 가며 들르는 사람들이 있었거든. 근데 이제는 볼 것도 없고 살 것도 없어서 아무도 안 오지."

...

"겨우 오는 사람들이래봤자 쓰레기 투기를 하려는 놈들뿐이야. 저기 좀 봐. 여기다 다 버리고 간다니까. 소파, 냉장고, 자전거 같은 것도 다. 그것뿐이게? 개나 고양이도 버려. 하여튼 별의별 걸 다 버리고 가. 요 앞바다도 나 어릴 땐 저 바닥까지 투명했는데 더럽고 냄새나고 똥물 다 됐지."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 


뜬금없지만, 쓰레기 버리고 다니지 말자. 자기가 머물렀던 공간에 쓰레기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집안이나 골목이나 대로이거나 시장이거나 회사이거나 여행지이거나, 세상 어느 곳에서든. 쓰레기를 남기면서 다니기 싫으면 물건 구매를 자제하자. 인간은 정말, 환경을 너무 오염시키고 있다. 이것은 나에게도 하는 말이다. 쓰레기 투척뿐만 아니라 함부로 '침범'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눈에 들어온다. 예의란, 배려란 무엇인가 계속 묻게 된다.



=======

상주는 내 지인 중 나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와 진영의 관계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왜 친한 사람들에게도 커밍아웃하지 않냐며, 요즘 세상에 숨기고 사는 게 더 촌스러운 거 아니냐고 말했을 때는 다시 보지 않으려고 했었다. 나는 상주에게 너는 편협한 인간이라고, 너의 세상은 좁고 너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사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네 주변에는 '진보' 성향의 사람들만 있어서 다 동성애에 '찬성'하는지 모르겠지만 교원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인 덴지 모르냐고. 조금만 이상한 소문이 돌아도 학부모들이 나를 자르라고 탄원을 해올 것이라고. 그러면 가르치는 일로밖에 벌어먹고 살 줄 모르는 나는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가 없게 될 거라고. 상주는 그 말들에 다 동의했지만 내게 사과를 하지는 않았다. 너 역시도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좁게 살지 않냐고 되물었을 뿐이다. 그 말은 오랫동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좁게 살아간다. 비밀 첩보원처럼. 들키지 않으려고. 그래서 계속 촌스럽게만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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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너무 좁은 의미의 혹은 소설과는 다르게 지나치게 넓은 의미의 문장이 될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누구나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일 한두 개쯤 가슴에 품고 사는 것같다. 슬프다. '커밍아웃'할 수 있지만 그 이후 휘몰아칠 사회적 폭풍을 감당해내기는 어렵다. 그것이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라면 더더욱. 그것이 '여성'과 관련된 문제라면 더더욱.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좁게 살아간다. 비밀 첩보원처럼. 들키지 않으려고. 그래서 계속 촌스럽게만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

다만 치료받은 일을 말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걱정할까 봐 그랬다고만 했다. 진영은 화를 냈다.

"그래도 말했어야지."

"뭐하러 그래. 별일도 아닌데 괜히 걱정하고. 마음 졸이고."

진영은 다시 또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불을 붙이는 데 좀 애를 먹었다.

"마음 졸이게 했어야지."

"뭐하러."

"같이 졸이게 해줬어야지."

나는 더 할말도 없고 더 하고 싶지도 않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그만 가자."

진영은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


진영의 마음을 이해한다. 얼굴을 빤히 올려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짐작이 간다. 생각하기에 따라, 별일 아닌 것은 없다. 모든 크고작은 일들이, 한 마디 말이, 몸짓이, 별일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조차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 일이 된다. 어떤 일 앞에서는 솔직하고 어떤 다른 일 앞에서는 솔직하지 못한 태도가, 정말 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수영은 못하고 해변을 걷기만 하다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아무리 여름이래도 밤의 바다는 추울 테고 일 년 사이 더 늙어 있을 우리에게 호기나 오기 같은 건, 충동적인 농담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신 우리는 함께 해변을 걷다가 쓸모없는 것들을 잔뜩 주울지도 모른다. 예쁜 소라 껍데기를 하나 주워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워온 소라 껍데기를 서랍 속 상자에 잘 넣어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한번씩 꺼내 귀에 갖다대고 파도 소리를 듣고 또 서로에게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


"그런데 왜 다 벗고 수영을 하고 싶었어?"

묻지 않아도, 대답하지 않아도, 그 마음이 느껴진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잘 몰라도, 어슴푸레하게 짚이는 지점들. 소설 속 인물들은 끝내 나체수영을 하지 못했다. 읽는 내내 그 일에 성공(?)하기를 바랬지만 성공했더라도 진영와 화자의 관계는 변함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랬다면 혹여 '나'는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까? 함께 한다는 건 그토록 어려운 일이다. 해변에서 주운 소라껍데기는 상자에 들어가는 순간 잊혀질 테고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꺼냈을 때는 어디서 누구와 가져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수 있다. 기억난다 하더라도 그때의 애틋한 마음은 증발했을 수 있다. 해변에서 무엇이든 '쓸모없는 것들'을 줍고 싶은 마음은 무엇인지,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쓸모없는 것들'을 줍는지, 잠시 생각했다. 욕실 거울선반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조개껍데기 몇 개가 떠오른다. 어디서 주워왔더라. 이젠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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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09 06: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게는 말하고싶지 않은 것을 말하지않을 권리도 있다는걸 왜 사람들은 망각할까요? 커밍아웃만이 권리가 아니라 커밍아웃하지 않을 권리도 있닪아요. 아주 사소한거라 하더라도..... 단편들 중에서는 이렇게 자꾸 곱씹게 되는 글들이 있는거같아요. 뭔가 내 마음을 건들이는거겠죠. ㅎㅎ
여기는 툐요일 주말 아침입니다. 거긴 금요일 밤이네요. 푹 주무시고 즐거운 주말 맞으세요

난티나무 2022-07-09 06:35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 말씀 맞는 말씀!!!! 말하지 않을 권리, 말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늘 좋은 말씀 늠 감사해요~
어느새 주말이군요. 덥지만 마음은 시원한 주말 보내시길~!^^

- 2022-07-10 02:48   좋아요 1 | URL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투… 이후를 조금 더 생각하게 되요. 누군가의 말함이 나의 말하지 않음을 들쑤시는 순간…. 들을…
저는 책을 많이 읽는 여자들, 많이 이해하는 여자들, 그러나 말하기 싫은 말할 수 없는 여자들이 글을 쓰길 바랍니다.
하고 싶은 말을 감추고 싶어하면서도 감춘 부분으로 하는 말을 쓸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고 그것은 불가해하더라도 여성이라면 감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쓰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리고 잘 쓴다는 기준도 남성의 기준일지도 몰라요.
소설이든 산문이든 시이든… 말하지 않고 싶은 것들을 꼭 같은 방식으로 말할/말하지않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허용하는 만큼의 용기를 쓰는 난티님을 응원하겠습니다. 정확히 그 지점에서 감응하는 분들이 있다는 걸 더 믿어보시길 💕

난티나무 2022-07-10 06:32   좋아요 0 | URL
공쟝쟝님 말씀에도 동감!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거. 잘 하고 싶다!ㅋ
말하기 ‘치사‘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말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고 알아듣는 것도 아닌, 자칫 잘못하면 찌질하다고 여겨지는 것들. 일상 속 문제들. 그러나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닌 것들이요. 말하지 않으면 계속 같은 상황 속에 살게 되니까. 적절한 방식으로 꼭 표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표현해 보고 싶어요.
이 소설집도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생각해요. 관계 속의 미묘함과 어긋나는 모습들을 잘 포착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다른 방식으로 말하기! 저도 원합니다!ㅎㅎㅎ 계속 쓰자!!!!!

그레이스 2022-07-09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쓰다가 버린 것들과 조개껍데기, 둘다 원래의 쓸모를 다했지만 왜 다를까? 라는 생각이...!

난티나무 2022-07-09 15:35   좋아요 2 | URL
조개껍데기 같은 것은 ‘쓸모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인간 중심적 시각 같아요. 일단 자연의 일부이고…. 생명은 다했지만 해변에서 오랜 시간 물에 쓸리면서 바람에 쓸리면서 조금씩 먼지가 되어가는 것일 텐데, 그걸 그 자리에서 이동시키는 순간부터 그럴 수가 없어지니까요. 소설에서는 조개껍데기 말고도 마모된 유리조각, 라이터 같은, 사람들이 버린 물건 흔적들도 나와요. 소설적 장치이겠지만. 그레이스님 댓글에 생각이 많아지네요.^^ 저는 욕실의 조개껍데기를 보면서 다음부터는 주워오지 말아야지 늘 생각합니다.^^;;;;;
 

* 삶의 목적

- 엄마, 이 책에 이 천재도 그렇게 묻네. 인간이 사는 목적은 무엇일까, 하고. (읽는 책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Extrêmement fort et incroyablement près>'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 오, 그래? 너도 천재?(^^) 너 맨날 인간은 왜 사는 걸까, 묻잖아. 그런데 사는 목적을 꼭 생각해야 할까? 

- 사람이 태어나는 건 목적이 없잖아. 조건들이 만들어져서 태어나는 거잖아.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고. 사람들 누구나 그렇지 않아? 뭐, 돈을 번다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한다거나 여행가고 싶다거나 하는 목표가 있잖아. 

- 그건 목표지 목적은 아니잖아. 

- 그런가? 음, 사람은 결국은 죽으니까? 

- 죽기 위해서 산다고? 

- 아니, 죽는 게 목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죽으니까... 음 그건 목적이 될 수는 없겠네. 

- 그럼 사람들은 자기가 왜 사는지 왜 자꾸 생각하려고 할까? 

- 음...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런 거 같애. 자기가 살아야 하니까. 그렇지 않아? 누구나 자기가 생존하는 게 가장 우선이잖아. 

- 그러네?



* 별똥별

- 엄마, 나 어제 별똥별 봤다?

- 와, 진짜?

- 짚 있잖아, 집 말고 짚. P. 거기 올라갔는데...

- 응... P? (그게 뭐지?) 아, 피읖! ㅋㅋㅋ

- ㅎㅎㅎ 어, 짚 비닐로 싸놓은 거 있잖아. 거기 올라갔는데...

(눈을 크게 떴나 보다.)

- 아니, 안 위험했어. 그거 하나에 몇 톤이나 돼서. (내 마음을 읽는 요물.) 한 서너 개 됐나.

- 와, 엄청 높았겠다.

- 응, 좀 높았지. 토미랑 둘이 그 위에 누워서 하늘 보고 있었거든. @$%^&*$# 별똥별이 지나가는 거야. 토미랑 나 둘만 봤어.

- 음, 별똥별 되게 순식간에 지나가지 않아?

- 맞아.

- 소원은 빌었고?ㅎㅎ 그런데 별똥별 질 때 소원 비는 거 안 되지 않아? 너무 빨리 지나가니깐.

- 응, 그래서 보고 나서 빌었지.

- 뭐 빌었는데?

- 얘기하면 안 이루어진대~요~ (두 집게손가락을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

- 그렇지, 알았어.ㅎㅎㅎ

- 어제 하늘이 되게 맑았거든. 그래서 별도 엄청 많았어. 별 보고 누워있었지.

- 좋았겠다.

- 엄마한테 보여줄 거 있는데. 이따 보여줄게. 

- 그래. 




아이의 말을 주의깊게 들으면서 녹음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주의깊게 들어도 나중에 글로 옮기면서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쉽다. 내가 뭐라고 했는지도 잘 기억 안 나니 원. 이런 순간들이 20년동안 빼곡했는데 그것도 아쉽다. 기록도 없고 영상도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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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09 0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이들 어릴 때 알라딘서재랑 싸이월드에 육아일기를 썼어요. 요즘 어쩌다 읽어보면 전혀 기억 안 나는 상황도 있어서 깜놀합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런 상황들은 여전히 많을테고 이젠 그런걸 기록하지도 않으니 그저 지금 함께 있는 이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죠. ㅎㅎ

난티나무 2022-07-09 06:33   좋아요 1 | URL
저도 서재에 아이들 이야기 많이 쓴 것 같아요. 싸이월드도 마찬가지!ㅎㅎㅎㅎ
‘아마 앞으로도 그런 상황들은 여전히 많을테고 이젠 그런걸 기록하지도 않으니 그저 지금 함께 있는 이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죠.‘ 우와~!!! 맞아요, 앞으로도 많기를 바라고, 전부 기록할 수는 없어도 그 순간의 느낌과 감정을 온전히, 소중하게~ 저도 그런 마음으로 적어보았어요. 대화를 옮기는 일은 아주 어렵구나 하면서요.ㅎㅎㅎㅎㅎ

단발머리 2022-07-09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름 아이들 이야기 쓴다고 했는데도 지금도 좀 아쉬운 마음이 들어요. 그치만 바람돌이님 말씀대로 ‘지금 함께 하는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려고 합니다.
전 별똥별 한 번도 못 봐서 완전 부럽습니다. 빠르게, 진짜 빠르게 소원빌 수 있는데 말이지요 ㅎㅎ

난티나무 2022-07-09 15:39   좋아요 0 | URL
아이가 저더러 본 적 있냐고 묻는데 기억이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저도 본 적 없나 봐요. ㅎㅎㅎ 소원을 미리 생각해놔야 겠어요. 혹시 모르니까. 🤣
(아 그런데 밤에 나가야 별을 볼 수 있………잠이 너무 좋은 😂 )

이 순간을 소중히!!!!
 

















"소피스트들이 사기꾼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생각에 충실한 사람들은 대개 떠돌아다닌다. 생각이라는 비물질적인 것에 충실한 유형과 특정한 사람이나 특정한 터전에 충실한 유형은 다르지 않을까 싶다. 사람이나 터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한곳에 머물러야 하는 반면, 생각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가가기 위해 떠난다고 할까. 사색가가 떠돌아다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생계다. 생각이란 모든 사람들이 신뢰하고 좋아할 수 있는 그 무엇, 이를테면 농작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을 재배하는 사색가는 진리를 찾아다녀야 할 뿐 아니라 먹고살 길을 찾아다녀야 한다."

(35/648)



어제 일기장에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정착,이라는 것에 대해 끄적거렸다. 나는 한번도 어딘가에 정착한 적이 없었고 고향이라 할 만한 곳도 없다고. 정착하는 것을 인생 최대의 과제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볼 때마다 정착이 꼭 필요한 것인가 의문을 가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 하고. 매우 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넋두리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 그러니 여기까지. 좀더 생각이 정리되면 글로 풀어보겠다. 리베카 솔닛의 위 구절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내가 원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살게 된 것은 아니라 할 지라도, 역시 내가 원해서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도 않을 것같다는 생각에 나는 정말 '정상'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가, 쭈글쭈글 되어버리기가 일쑤였거든. 생각에 충실한 건 음 지금까지는 그렇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가능성 있을 것도 같고. 생계. 하 이게 문제네. '사람이나 터전에 충실'한 사람들도 있겠구나, 그런 사람들이 정착해서 사는 거구나, 갈피 하나 머릿속에 더 끼워넣고.



​"루소의 글이 철학적 보행을 다루는 문헌의 효시라면, 그것은 루소가 자기의 사색이 어떤 정황 속에 행해지는지를 상세히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최초의 저술가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과격파였다면, 루소의 가장 과격한 행동은 (보행, 고독, 자연 등을 기반으로 조성되는) 개인적, 사적 경험의 가치를 재평가한 일이었다. 루소가 다양한 혁명, 이를테면 정치조직의 혁명뿐 아니라 상상의 혁명과 문화의 혁명을 고취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루소에게 혁명이 필요했던 이유는 그런 사색 경험의 방해물을 제거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루소가 자신의 지성을 십분 발휘해 가장 강력한 주장을 펼칠 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드높이고 있는 정신 상태와 생활 방식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때였다." (48/648)


"루소와 키르케고르에게 보행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지금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보행을 이야기한 곳이 비개인적, 보편적 철학에 속하는 저서가 아니라 개인적, 묘사적, 구체적 작품(루소의 『고백록』과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키르케고르의 일기들)이기 때문이다. 보행이 그런 종류의 글에 어울리는 소재인 이유는 보행 그 자체가 보행자의 사유를 개인적, 구체적 경험의 세계에 정박시키는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보행의 의미를 논하는 글이 대개 철학이 아니라 시나 소설, 편지, 일기나 여행기, 수필인 것은 그 때문이다." (61/704 - 글자 크기를 키웠더니 페이지 수가 늘어남)



루소와 키르케고르 이야기, 재미있었다. '업적'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그 외에는 다 까는 듯한 어조.ㅎㅎㅎ 철학자들 책은 안 읽고 이렇게 뒷이야기만 듣다 보면 그만 그들의 작품들을 외면하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루소는 어이없고 키르케고르는 좀 불쌍하다. 흠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 감상일 뿐.





"길을 걷는 몸은 상처 입고 아파하고 부서질 수 있는 본래적 한계로 되돌아가지만, 길을 걷는 일 그 자체는 마치 몸을 연장하는 도구처럼 세계로 열린다. 길은 걷는 일의 확장이고, 걷기 위해 만든 공간들은 걷는 일의 기념비들이며, 길을 걷는 일은 세계 속에 존재하면서 세계를 생산하는 일이다. 길을 걷는 몸은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들에 흔적을 남긴다. 거리와 공원과 보도는 길을 걷는 상상, 길을 걷고 싶은 욕망의 흔적들이다. 지팡이와 신발, 지도, 물통, 배낭은 그 욕망의 물질적 산물들이다. 몸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를 통해 몸을 인식한다는 것, 그것이 보행과 생산적 노동의 공통점이다." (67/704)



'길을 걷는 상상', 좋다. 안 가본 산티아고 순례길도 막 떠오르고. 안 가봤는데 왜 생생함? '지팡이와 신발, 지도, 물통, 배낭' 같은 단어들을 보면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러나 배낭 짊어지고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고 싶지는 않다. 여행을 생각하다 보면 나이를 헤아리지 않을 수가 없다. 보기에 따라 많기도 적기도 한 나이, 그 숫자 자체보다 여행을 대하는 내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 여전히 여행은 설레는 단어로 다가오지만 막상 실제로 여행을 가게 되어 어렵게 숙소를 찾고 교통편을 예약하는 데 골머리를 앓다 보면 그만 에잇 여행 같은 것, 이런 마음이 되어버린다. 이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고. 준비하는 과정 전체가, 시간을 엄청 잡아먹는 노동이었어도 좋았다고. 이제 힘들다. 그러면서도 여행지의 식당이나 까페, 기타 흔치 않은 장소들을 지도 위에서 헤집고 다닌다. 안 가본 장소가 이미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아직 두 발로 서 보지 않은 그 거리, 아직 들어가보지 않은 그 가게, 풍경, 평면 지도 위의 어슬렁거림과 기대, 실제로 그 거리에 섰을 때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풍경, 납작한 평면이 입체가 되는 순간. 기대와 욕망이 입체 속에서 사그라들기도 하고 채워지기도 하는 순간. 이 맛에 여행하기도 하지.

밤에 읽은 소설에 이런 구절이 나왔다.


"이후로 나는 종종 혼자 일본에 갔다. 그날은 오사카의 어느 골목에서 길을 잃었다. 역에서 십 분 거리라는 호텔은 아무리 걸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내가 가지고 있던 지도를 펼쳐 호텔을 가리켰다. 그 행위만으로도 그 사람은 내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한참을 두리번거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지도 밖 허공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우리가 서 있는 길을 한번 가리키고 다시 지도를 카리키더니 길이 그려지지 않은 지도의 테두리 부분, 여백을 짚었다. 그리고 조금 더 손가락을 옮겨 다시 또 허공을 짚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지도의 바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왔던 길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쭉 가라는 뜻 같았다. 그렇게 하면 다시 지도 위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도로만 살펴보던 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여전히 지도 속 일원들 같고 나도 아직 지도 속을 걷는 듯했다. 지도 속 사람들과 부딪치고 지하철 노선도를 따라 이동하고 편의점에 들러 생수를 사면서 서서히 나는 그 장소와 같은 축척을 갖게 되었다. 익숙해진 다음에야 어떤 실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낯선 골목을 걸으며 서서히 현실과 같은 축척을 갖게 되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길을 잃었지만 완전하게 안전하다고 느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나 안도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한참을 걷던 중에 너무 피로해졌기 때문에 지나는 버스에 그냥 올라타버렸다. 헤맸던 탓에 자리에 앉아 잠깐 졸았다."

(「작정기」 김지연, 《마음에 없는 소리》)


지도와, 거기 그려진 길과는 전혀 다른 것같은 현실 공간, 그 둘이 끝까지 불화(?)하는 경험을 자주 하는 나. 내 사고방식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공간을 떠올릴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그 기준은 어떤 기준에서 온 것일까? 가끔 그 기준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내가 메고 있는 배낭의 앞, 뒤, 안, 바깥,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의 전, 후. 나와 다른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기준이 달라 말만 듣고 엉뚱한 공간을 헤매게 되는 경험. 장소에 대한 생각이 계속되는 와중에 리베카 솔닛의 책을 읽고, 다음에 집어든 책에 또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경험이 어떤 느낌인지 너무 잘 알겠고, 그래서 이렇게 연결되는 지점들이 좋고. 책 읽기 만만세.

... 그런데 이젠 좀 미리 안 찾고 준비 안 하고 그냥 떠나는 여행도 하고 싶다. 성향상 아주 힘든 일이라 아직 실천해보지 못한 일이기도 하다... 좀더 귀찮아지면, 그러면 그럴 날도 오지 않을까? 캐리어에 여행 짐 쌀 때가 제일 설레는데, 어딜 가지는 않지만 짐이라도 싸봐? ㅋㅋ 매일 동네 산책이나 거르지 말고 하삼. 걷기를 위해 걷기단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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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06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이란 항상 자기가 갖지 못한걸 동경하는거 같아요. 제 삶에서는 공간의 이동이 거의 없어 정착민으로 쭉 살아왔는데 그러나보니ㅠ안제나 떠남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는듯해요. 어떤 삶이든 그 나름대로 의미도 있고 얻는것이 있다는 건 자명하니ㅠ나머지 하나를 꿈꾸는 삶으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듯하달까.... ㅎㅎ

난티나무 2022-07-07 21:27   좋아요 0 | URL
‘어떤 삶이든 그 나름대로 의미도 있고 얻는 것이 있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이동의 기회가 적거나 없을 경우도 있겠군요. 맞아요, 이동 역시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이 문제 역시 개인마다 다양한 조건과 이유를 갖게 되겠네요.
꿈꾸는 삶!!

- 2022-07-0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 저 사두고 앞부분만 보고 아직 안읽고 있어요. 이렇게 난티님 글로 읽으니... 참으로.. 미리 사두길 잘했다.. 보고 싶을 때 냉큼 꺼내 읽어야지!! ㅋㅋㅋ 솔닛은 정말 너무 좋죠 ㅜ 너무 좋음... 흑흑.. (저는 아마 현시점에서 제일 좋아하는 작가인 것 같아요. 솔닛이....)

난티나무 2022-07-07 21:28   좋아요 1 | URL
오 제일 좋아하는 작가!
<길 잃기 안내서> 읽으면서 깜놀 했잖아요. ㅎㅎㅎ 느무 잘 써서...
앞으로도 계속 솔닛 읽게 될 듯합니다.
공쟝쟝님 솔닛 책 다 갖고 계신 거예용?^^

- 2022-07-10 02:51   좋아요 0 | URL
아녀 ㅋㅋㅋ 다는 아니고 거의 다 갖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 솔닛의 산문은 진짜 …… 아 ㅜㅜ 그는 어렵지 않지만 충분히 심오하고 충분히 심오하지만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해요 리베카 솔닛!!!

난티나무 2022-07-10 06:14   좋아요 0 | URL
저도 벌써 다섯 권... 있었는데 한 권 누구 줘버려서 네 권이네요.^^
어렵지 않지만 심오하고... 완전 공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