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66%)



... '고통이 앎의 특별한 형태'라 하더라도,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통해서 무언가를 알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 경험해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알기 위해 그것을 경험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 그러나 이런 자기방어적인 생각과는 상관없이,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들이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 상황들 중에서 가장 잔혹한 것이 전쟁일 것이다. 아무리 상상해보려고 해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상상하기 싫은 마음이 훨씬 더 크겠다. 그럴 리가 없어, 가 얼마나 현실감각을 마비시키는지. 

전쟁(제2차세계대전)에 참가했던 여성들의 증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읽기는 그래서 아주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인물의 감정에 이입하는 순간이 두려웠다. 자칫 그 거리를 잊으면 눈물이 나왔다. 장소가 러시아라는 사실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지금 러시아는... 생각의 기준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헷갈린다. 그래서 더 읽기가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리뷰는 쓰지 못할 것같고, 얕디얕은 감상으로 숙제처럼 페이퍼를 쓴다. 





"이후에도 나는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이 두 진실과 적잖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의식 저 밑으로 쫓아버린 사실 그대로의 진실과 시간의 흔적이 스며든 공통의 진실. 신문 냄새가 폴폴 나는 공통의 진실. 첫번째 진실은 두번째 진실의 맹렬한 공격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예를 들어, 만약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가족이나 지인, 이웃들(특히 남자들) 중 누군가, 제3의 인물이 동석하면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와 단둘이 있을 떄보다 덜 진실해지고 덜 솔직해진다. 이미 대중을 의식한 대화가 돼버린다. 관객을 위한 대화, 당사자의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얻어낼 길은 요원해진다. 강력한 자기방어에 부딪친다. 자기통제. 끊임없이 이야기가 다듬어진다. 일종의 패턴까지 생겨난다. 듣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차분하고 깔끔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 신중하게 해야 할 말만 골라 한다는 것. 참혹한 일이 위대한 일로, 인간 내면의 불가해하고 어두운 면이 순식간에 이해가 되고 설명 가능한 것으로 둔갑한다. 나는 기념비들만 가득한 과거의 사막에 뚝 떨어지곤 했다. 공훈들만 가득한 황야에. 도도하고, 결코 속을 내보이지 않는 것들만 잔뜩 모여 있는 곳에. 니나 야코블레브나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나를 위한 하나의 전쟁을 들려주었다. "딸이라 생각하고 이야기할게. 어린애나 다름없는 우리가 겪어야 했던 그 모진 세월을 당신이 이해하기 쉽도록 말이야." 그리고 청중을 위한 또하나의 전쟁을 그녀는 준비해두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전쟁을. 신문에서 떠드는, 영웅들과 공훈이 주인공인 전쟁. 젊은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훈육용의 전쟁. 평범하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 불신에, 보통의 삶을 소위 이상이라는 것과 슬쩍 바꿔치기하려는 이 욕망에 나는 매번 충격을 받았다. 평범한 온기를 차디찬 광채와 맞바꾸려는 욕망에." 

33%


일상의 대화에서도 그러할진대, 온갖 인간의 면모를 바닥까지 보게 되는 전쟁에 대해서라면 오죽할까 싶다. 내가 아는 전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막연한 상상과 미디어가 보여주는 장면들에 국한되어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모습들이 깔려있는지, 알지 못했다. 군대와 병사들, 대포와 총과 칼, 참호와 병원, 총알들을 뚫고 '영웅적'인 행위를 하는 영화의 (남자)주인공들, 조연은 죽어나가고 주연만이 살아돌아오는 클리셰,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는 듯이. 





"...... 나는 집사람의 전쟁 이야기를 꽤 많이 기억해요. 요즘 말로, 집사람 이야기를 '슬쩍했거든'. 손자들한테 들려주려고. 그래서 내 전쟁보다 집사람의 전쟁을 녀석들에게 더 많이 들려줬을 거요. 사실 녀석들에겐 그게 더 재미있을 거야. 

사울 겐리호비치가 계속 말을 잇는다. 

-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

35%


전쟁 속에서도 성차는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럴 수밖에. 전쟁도 시간 속에 있고 사람들은 살아야 하니까. 삶의 연속이 아닐 수 없으니까. 구절들을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자주 숨이 막혔다. 생명을 위협받는 곳에서도 사회적 여성성을 강요받는 모습에. 너는 여자니까 남자들을 위로해야 해, 보살펴야 해, 부드러운 말과 친절한 웃음을 제공해야 해... 남자들 무리 속에 여자가 한 명 있으면 분위기가 얼마나 좋아지는지 모르지? 너희는 그런 존재인 거야. 남자들을 위한. '착한' 여자들은 대부분 마음에서 우러나 그렇게 한다. 부상병을 안아주고 키스해주고 토닥여주고 늘 살피고 가족이 없는 병사들에게 위로 편지를 쓰고... 그 모습이 감동적이긴 하지만 여자의 역할에 대한 슬프고 복잡한 감정까지 지울 수는 없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어. 좋은 사람이었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안 생기더라고. 하지만 몇 달 후에 그 사람 막사로 거처를 옮겼지. 달리 어떡해? 사방이 남자들인데, 그 남자들이 무서워 떨며 지내느니 한 남자랑 같이 사는 게 낫잖아. 오히려 전투에 나가는 건 무섭지 않았어. 전투가 끝나고, 특히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쉴 때가 무서웠지. 총탄이 빗발치고 포탄이 불을 뿜을 땐 나를 '누이! 누이!'라고 부르다가도 전투만 끝나면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다들 기회만 엿봤으니까....... 밤이면 막사에 틀어박혀 아예 나가질 않았어...... 다른 여자들도 이 이야기를 하던가?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아마 말하기 창피했을 거야...... 그래서 입을 다물었을걸. 다들 자존심은 세가지고! 하지만 그런 일은 정말 있었어. 왜냐하면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니까.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니, 억울하잖아...... 그리고 남자들이 4년이나 여자 없이 지낸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우리 군엔 매음굴이 없었어. 그래서 알약 같은 것도 나눠주지 않았지. 다른 부대에는 여자들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는 없었어. 4년 내내...... 지휘관들은 그래도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지만 사병들은 아니었어. 군율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선 다들 침묵하지...... 보통 그런 건 말하지 않는 법이니까...... 안 해......" 

72%


"만약 그 장교가 성폭행을 한 거였다면...... 글쎄...... 그런 일이야 당연히 있었지...... 사실 우리가 입 밖에 내질 않아서 그렇지, 그건 전쟁터의 법칙이나 마찬가지였어. 남자들은 몇 년씩 여자 없이 지내는데다 증오심까지 더해졌으니까. 소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면 처음 3일 동안은 약탈을 하는데...... 뭐, 당연히...... 그 짓도 헀지...... 당신도 모르진 않을 거야...... 하지만 3일이 지나서도 그 짓을 하다가 발각되면 재판에 부쳐질 수 있었어. 엄벌에 처해지기도 하고. 하지만 3일 동안은 마음대로 술도 마시고, 그리고......" 

91%


책 전체에 성희롱, 성푹행 같은 이야기는 드문 편이다. 내내 불안하게 '강간'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며 읽었지만 위의 증언이 보여주듯 침묵을 택한 여자들이 많았다. 이젠 이야기할 수 있다고, 여성이 어떻게 지워졌는지 고발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저 증언들 사이사이에, 그들의 주름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이 숨어있을 수밖에 없을까, 가슴 아픈 또다른 이유 중 하나다. 우리는 이미 '전시강간'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깊이 박힌 여성혐오는 여성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아래의 증언이 보여준다. 참전 여성들이 왜 입을 다물고 살아야 했는지를 보여준다. 



"조국이 우리를 어떻게 맞아줬을 것 같아? 통곡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4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뺨이 화끈거려. 남자들은 나 몰라라 입을 다물었고, 여자들은...... 여자들은 우리에게 소리소리 질렀어. '너희들이 거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 젊은 몸뚱이로 살살 꼬리나 치고...... 우리 남편들한테 말이지. 이 더러운 전선의...... 군대의 암캐들아......' 우리는 정말 온갖 말로 모욕을 당했어...... 알다시피 러시아어 어휘가 좀 많아야지......" 




"남편에 대한 원망은 없어. 오래전에 용서했거든. 딸아이를 낳고 누워 있는데...... 남편이 우리 모녀를 보더니...... 잠깐 있다 가버렸어. '정상인 여자라면 과연 전쟁터에 나갈 수 있을까? 총 쏘기를 배우고? 그래서 당신이 정상아를 낳을 수 없는 거다'라고 나를 비난하며 가버렸지. 나는 남편을 위해서도 기도해...... 

어쩌면 남편 말이 맞는지도 모르잖아? 그런 생각이 들어...... 다 내 죄라고......" 

76% 



'착한' 여자들은 자신들을 받아들기를 거부하는 사회에서 결국 '내 탓'을 한다. 너무 익숙하다. 떠난 남편도 같이 전쟁터에서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마지막 심문 후에 나는 벌써 세번째, 총살대상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어. 그런데 세번째 심문자로 나선 파시스트가...... 자기 전공이 역사라고 밝히더니 우리가 왜 그런 사람들인지, 왜 우리에겐 이념이 그토록 중요한지 알고 싶다는 거야. 생명이 이념보다 소중하지 않느냐면서. 당연히 나는 동의하지 않았지. 그러자 소리를 지르며 나를 때리더라고. 그러고는 또 물었어. '뭐야? 뭐가 너희들을 이렇게 만든 거야? 대체 그게 뭐라고 죽음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건데? 왜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가 전 세계에서 반드시 승리할 거라고 확신하지? 그는 러시아어를 아주 잘했어. 그래서 그에게 모든 걸 설명하기로 마음먹었지. 어차피 죽을 목숨, 헛일하는 셈 치고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 알려주고나 죽자 싶었거든. 그는 거의 네 시간 동안 질문해댔고, 나는 최대한 아는 대로 대답해줬어.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배운 마르크스-레닌주의까지 다 이야기했지. 그랬더니, 오, 그가 하는 행동이라니! 자기 머리를 움켜쥐고는 방안을 뛰다시피 서성이고, 한자리에 못박힌 듯 꼼짝도 않고 서 있고, 나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하지만 처음으로 매질은 안 하더군." 

77%


"나는 지금 건강이 좋지 않아. 신경이 많이 쇠약해졌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무슨 상을 받아왔느냐'고 물을 때마다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나한테까지 신경을 쓸 새가 없었다'고 털어놓기가 창피해. 하지만 아마 신경을 못 써서가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줬을 거야. 그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다들 죽을힘을 다했지...... 한두 명도 아니고 그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일일이 다 상을 주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최고의 상을 받았잖아? 5월 9일. 승리의 날!" 

94%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 나약한 정신소유자인 나도 저 심문자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어째서 저렇게 어린 나이에 전장으로 뛰어나갈 수가 있지? 무엇이 그렇게 만들지? 꼭 전쟁이 아니라도,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아니, 나에게 저런 이데올로기가 있기나 하나? 이런 뻔한 질문들. 얕다 얕아.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어...... 가족들도 모두 무사했지...... 엄마가 온 가족을 살리셨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살리고 여동생과 남동생을 살렸지. 그리고 나도 살아 돌아왔고...... 1년 후에 아빠도 돌아오셨어. 훈장을 여러 개 받아오셨더라고. 나도 훈장 하나와 메달 두 개를 받아왔지. 하지만 우리 가족의 결론은 그랬어. 우리집에서 진짜 영웅은 엄마라고. 엄마가 온 가족을 살렸으니까. 엄마가 우리 가족도 우리집도 구했어. 결국 엄마가 가장 가혹하고 끔찍한 전쟁을 치른 셈이지. 아빠는 단 한 번도 훈장을 달지 않으셨어. 훈장 약장도 달고 다니신 적이 없지. 아빠는 엄마 앞에서 훈장을 내놓고 자랑하지 않으셨어. 부끄럽다고 하셨지. 불편해하셨어. 엄마는 훈장도 메달도 없었으니까...... 

내 삶에서 우리 엄마만큼 내가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은 없어......" 

95% 


전쟁이 끝난 이후의 삶. '승리'했어도 모조리 파괴된 삶의 터전들, 사라진 사람들. 가족도 집도 직업도 학력도, 여자들에게 더 가혹한 현실. 생각만 하는데도 아득하다... 이 책을 읽는 것으로 전쟁의 이면을, 거기 어김없이 도사리고 있었던 성차별, 여성혐오, 사랑, 연대, 여성의 힘, 같은 것들을 새로이 엿보게 되었음에 일단 버거움을 잠재워본다. 분노를 충전한다. 





"이 일을 멈출 수가 없다. 매번 진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하므로." 

95%


"... 어떻게 이야기해야 해? 어떤 표정으로? 자, 이제 당신이 대답해봐. 대체 어떤 얼굴로 그 일을 회상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눈물부터 쏟아져. 하지만 반드시, 꼭 이야기해야 해. 우리가 겪은 일이 헛되이 사라지면 안 되니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니까. 이 세상 어딘가에 우리의 비명소리가 남아 있어야 하니까. 우리의 그 피맺힌 통곡이......"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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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09 2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익히 알고 있는 일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읽고 듣는 것은 또 다시 그것을 체험한다는 거 같아요. 제 3자로 읽는 것조차도 이런데 자신의 경험을 다시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일을 다시 겪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읽어나가기 쉽지 않겠지만 열심히 읽겠습니다. 먼저 읽으신 난티나무님 따라서요.

난티나무 2022-07-10 06:09   좋아요 1 | URL
맞아요,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기억을 되살려 말하는 건 엄청난 고통이겠죠. 전쟁 속에서도 이중삼중의 삶을 살아야 했던 여성들은 더 그랬겠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전쟁 이야기가 더 필요하고, 전쟁 후의 이야기도 역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레이스 2022-07-10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체르노빌...>과 함께 읽고 생각이 많았던 책!이예요. 리뷰 보니 다시 정리하고 싶단 생각이 드네요.
그때는 줄긋기와 태그, 발췌문 참조 정도만 했었어요

난티나무 2022-07-19 01:39   좋아요 0 | URL
엄훠나 제가 댓글을 못 보고 지나갔나 봐요.^^;;;
아아 체르노빌... 그것도 읽어봐야 겠어요. 모두 현재진행형인 일들이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