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읽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틈틈이 책을 읽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유혹도 물리쳐야 한다. 눈 앞에 애완동물처럼 늘 나만 쳐다보고 있는 인터넷을 이겨내야 하고, 처리해야 할 잡다한 일에도 눈을 감아야 한다. 허나 겨우 몇 줄 읽다보면 앞에서 읽은 내용이 벌써 가물가물한 가운데 겨우 흐름을 잡으려는 찰나 아쉬움을 달래며 손에서 책을 놓아야 한다. 그리고 책이 재밌기나 한가. 추리소설이라기에 단숨에 읽겠지, 했는데 그러기는커녕 어떤 문장은 읽고 또 읽어야 겨우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고 -직설적인 표현보다 에두르는 표현이 많은 건 번역체이기 때문일까 -  낯선 용어는 아무리 읽어도 낯설기만 하다. 견디다못해 와중에 다른 책에 손을 대기도 하는데 양다리 걸친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다.

 

온갖 유혹을 이겨내고 완독을 하고나니 내심 뿌듯하긴 한데, 무엇이 남았지? 주인공 스밀라가 강한 인상으로 남고, 덴마크와 그린란드의 관계에서 그린란드인의 강한 기질에 관심을 갖게 되고, 덴마크와 그린란드의 역사를 좀 더 알아야겠다는 호기심을 남기고, 가능하다면 그린란드에도 한번 가보고싶다는 열망을 남긴다. 소설 한 권이 이만큼 남기면 족하지 싶기도 하다.

 

이 책을 다시 읽고 싶다. 만사 제쳐두고 짧은 시간내에 오로지 이 책만 읽고 싶다. 그러나 읽지않은 책이 너무나 많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다음은 열심히 읽었다는 흔적. 덴마크인과 그린란드인의 특성을 비교한 문장이 종종 나오는데 메모해두지 않았더니 후회스럽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아주 적다. 성급한 성격 때문에 대화에서 빠져나오거나, 마음속으로 그 상황을 개선시키려 하거나, 언제 등장할지 준비하고 있다가 상대방이 입을 다물면 그때 무대위에 발을 내딛는다.

그 애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

느린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시간을 다 줘야만 한다.

오랫동안 물리적 폭력성이 인간 관계를 따라다니다 보면, 때로는 공개적으로 터뜨리는 편이 안심되기도 한다.

순록처럼 겁 많은 동물을 사냥할 때는 일부러 몇 번 씩 우리 모습을 보게 해야 해요. 일어나서 총개머리판을 흔드는 거죠.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뇌 속에서 공포와 호기심은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순록은 가까이 와요. 위험하다는 걸 알죠. 그래도 그처럼 움직이는 게 뭔지 와서 봐야 하는 거예요.

이름을 잘 지억 못한다는 거.....일종의 징후다. 진정으로 자기 중심적인 사람에게 주위 세계는 희미하고 이름이 없는 것이다.

썰매 여행에서 딱 하나 금지된 것이 있다면 징징대는 것이다. 징징대는 것은 바이러스로, 치명적이고 전염성이 높아 쉽게 감염되는 질병이다. 나는 징징대는 소리를 들어주는 것을 거부한다. 감정적 치졸함의 향연에 같이 엮이는 것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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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가만한 당신
최윤필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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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마운 책이다. 같은 인간이지만 인간의 품격을 한층 높여준 사람들의 인생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읽는 도중이지만 뭔가 읽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성급함으로 몇 문장 옮겨놓는다.

 

 

 

딘 포터(1972~2015) :익스트리머

돈이나 명성보다 스릴 자체를 중시하는 익스트리머들은 아무렇게나 입고 잘 씻지도 않는다. 오지에서 지내는 때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목숨을 반쯤 내놓고 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법이나 관습보다 중력에 얽매인다.....'더트백dirtbag은 한 발을 세상 바깥에 두고 사는 그들을 통칭하는 용어다. 돈벌이에 관심 없고 사회적 규범과 관습에 구애받지 않아 히피와 흡사하지만 구체적인 목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다.

"인간이 난다는 게 미친 생각이란 걸 나도 안다. 하지만 언젠가 그게 가능해지려면 생각이 허용하지 않는 곳으로 누군가는 나아가야 한다."

 

 

 

 

더글러스 톰킨스(1943~2015): 노스페이스 창업자. 환경운동가

톰킨스의 1980년대는 새로운 생태주의적 각성의 시기였다......인간은 생존의 필요와 무관하게 자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철학, 인구가 너무 많다는 각성, 자연을 살리자면 경제 패러다임을 근본부터 바꿔야 한다는 생각, 한마디로 자본주의의 미래는 없다는 깨달음.

더글러스 톰킨스는 몽상가였다 그의 꿈은 자연보호가 아닌 자연의 복원이었다...그는 뭇 생명을 자연으로서 사랑했지만 인간만큼은 反자연으로 여겼다. 자연과 항구적으로 공존하기에 인간은 못 믿을 존재였고, 또 너무 많았다. 그가 지구 끝, 인적 드문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광막한 숲과 초원, 화산과 습지와 강과 피오르해안에 제 꿈의 거처를 마련한 까닭이 그거였다. 220만 에이커(약 27억 평), 서울 면적의 열다섯 배. 그 땅은 자연의 피난처가 아니라 수복의 거점이었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훗날 사람들이 이 땅을 걸을 것이다. 무덤보단 이게 더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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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oo 2016-09-18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딘 포터 글 읽고 유튜브로 영상을 여럿 찾아 봤어요. 정말 대단한 사람들 많더군요.

nama 2016-09-19 07:41   좋아요 0 | URL
아하, 유튜브가 있었네요.
그런 사람들 덕에 삶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겠지요.

낭만인생 2016-09-20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네요.. 재미난 분들이 많군요.

nama 2016-09-20 20:10   좋아요 0 | URL
지구의 크기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감동을 줍니다.
 

 

 

두어 시간 전만해도 딸아이방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책상 위아래로 가득한 잡다한 물건하며 정리하지 않은 책더미하며, 제발 청소 좀 하라고 성화를 해도 소용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가보다. 그간 모은 인형이랑 장난감을 놓을 자리가 없어 고민하더니 드디어 제 방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거다. 인형과 장난감이라니...스무 살이 넘었는데 새롭게 인형과 장난감에 눈을 뜨다니...이것도 '때'가 있는데 이제야 도래했나? 하여튼 청소에 돌입하니 반가운 마음에 함께 책을 정리했다. 오렌지색 재활용바구니에 담긴 책은 학교벼룩시장에 기증할 책이고 나머지 묶음은 학급문고함에 넣을 책들이다.

 

그간 많은 책을 구입하고, 정리했다. 책장도 여러 번 비워냈다. 딸아이에게 무엇을 먹일까 보다는 무엇을 읽힐까를 더 자주 더 많이 고민했었다. 필요한 책은 무조건 구해주거나 사주었다. 진학정보에는 둔한 엄마지만 책정보에는 밝으려고 애썼다.

 

이제는 해방이다. 딸이 무엇을 읽건, 책장에 무엇을 꽂건 이제부터는 제 몫이고 제 인생이다.

 

저 책들을 학급문고에 넣을 일만 남았는데...학급문고는 참 초라하다. 말이 학급문고지 책도 몇 권 안된다. 물론 요즘엔 학교도서관이 훌륭해서 책을 읽고자 한다면 적어도 '책이 없어서 못 읽는다'란 말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든다. 내 자식을 위해선 아낌없이 책을 구입했지만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무언가를 아낌없이 바쳤는가를.....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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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데도 가지 않는 추석을 보내고 있다. 진심이 실리지 않는 관습을 저버렸을 때는 약간의 슬픔과 외로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꼭 결혼해서 직장 다니고, 애 낳고, 학부모가 되어 애면글면하고...이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 일단 세계여행부터 떠나보는 용감한 젊은 부부가 한없이 부러워지는 건, 나는 은퇴하면 세계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인데...에고, 벌써부터 관절 여기저기가 삐그덕거린다.

 

20대 철없는(?) 부부의 자전거여행기를 읽다보면 그들의 무모한 용기에 감탄과 부러움에 대리만족까지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기분이 든다. 아픔을 동반한. 은퇴를 꿈꾸면서도 은퇴하지 못하는 자의 부러움이며, 일찍이 그런 삶을 꿈꾸어보지 못한 자의 한탄이며, 근본적으로는 자전거라는 누구나 쉽게 이용하는 문명의 이기를 한번도 제대로 이용해보지 못한 자의 비겁함이 가슴을 치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배우고 있다'는 페이퍼를 쓰는 날이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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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6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6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6-09-16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 늦게 겨우 자전거 배웠는데, 이제는 그나마 안 탄지 오래되서 아마 다시 배워야할거예요. 자동차도, 자전거도, 저는 바퀴달려 굴러가는 것들은 다 무서워요 ㅠㅠ 제 두다리가 제일 믿을만한데 체력이 계속 받춰줄지 모르겠고요.
은퇴하면 세계여행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계시군요.

nama 2016-09-16 18:29   좋아요 0 | URL
저도 굴러가는 동그란 것들을 무서워해요. 바퀴달린 자동차, 자전거는 말할 것도 없고 배구공이나 축구공 같은 공들도 무서워해요. 굴러가는 것들은 도발적으로 보여요.
은퇴하면 맨먼저 머리를 삭발해보고 싶고, 그다음 한 일 년 천천히 세상구경을 하고 싶어요. 무엇가를 원할 때 입버릇처럼 노래하다보면 성큼 그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어 기회만 되면 입밖으로 뱉어내요. 꿈은 노래로, 노래는 현실이 되지요.^^
 

 

 

 

 

 

 

 

 

 

 

 

 

 

 

아침에 출근하려면 버스를 두 번 타야한다. 직장까지는 걸어서 1시간 30분 거리니까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다만 한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서 좀 불편할 뿐이다.

 

그렇게 6개월쯤 보냈을까. 드디어 한번에 가는 버스를 발견했다. 303-1번 버스로 종점이 인천공항인데 그간 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건, 인천공항으로 간다는 것만 알았지 그 반대방향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금도 일반시내버스보다 비싸다.

 

그러다가 7월30일을 기점으로 인천시내버스 노선이 전면 개편되어 버스노선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303-1번이 직장 근처를 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간 나와는 무관했던 이 버스가 드디어 눈에 들어오더니 차창 밑에 적어놓은 버스요금도 눈에 들어왔다. 1650원. 일반버스보다 400원이 비싸다.

 

좌석버스와 일반버스를 타면 11개의 정류장을 거치는데 이 공항버스는 3번 째 정류장에서 내리면 되는, 말 그대로 직선거리를 총알택시처럼 한달음에 달린다. 좌석버스는 승객이 많아서 입석으로 가는 사람도 많은데 이 공항버스는 마치 나를 위한 전세버스같다.

 

좌석버스엔 출근하는 사람들의 긴장감과 피곤함이 차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데 반해, 공항버스는 밤새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씻지 못한 부스스한 얼굴이 여행의 여독을 잔뜩 품고 있다. 그들 옆에는 막 여행을 끝낸 캐리어 따위가 덜컹거리고 있다.

 

40~45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이 공항버스를 만나기는 사실 쉽지 않다. 대강 시간을 파악하고 시간에 맞게 나가 있어도 만날 확률이 높지 않다. 10여분 후에 오는 공항버스를 타겠다고 당장 코앞에 온 좌석버스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좌석버스는 중간에 다른 버스를 갈아타야하지만 버스에서 내려 5분 정도만 걸어가면 되는데에 반해, 공항버스는 빠르게 도착하지만 10분을 걸어가야 한다. 아침마다 시간과 비용을 비교하며 버스를 타야하는 건 고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잔머리를 굴려가며 순간의 선택을 하지만 직장에 도착하는 시간은 별 차이가 없다.

 

그래도 선택을 해야한다면, 공항버스를 택하고 싶다. 이유는 단 하나,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온몸에 남아있는, 미쳐 떨쳐내지 못한 먼 이국의 냄새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내게, 목수정의 이 책은 너무나 잔인하게 다가온다. 반쯤 읽다가 책을 덮었다. 글솜씨도 좋고 읽는 맛도 참 좋은데...마음이 아파서 못 읽겠다. 파리에 가게 된다면 그때 읽어주리라. 기다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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