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릇의 밥을 푸면서

한 알도 흘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교사'

 

 

몇년 째 이 문장 하나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다. 구겨지고, 비뚤어지고, 막 나가고 싶은 마음을 일으켜 세워주는 문장이다. 그간 직업적인 양심을 생각하고 노력했다면 전적으로 이 문장 덕이다.

 

이 문장이 쓰인 원문을 드디어 찾았다. 늘 궁금했었다.

 

 

 

 

 

 

 

 

 

 

 

 

 

 

 

 

 

세월이 흘러서인지 시집 속의 시들은 소박하게 읽혔다. 무엇보다도 시인의 풋풋함이 정감있게 다가왔다. 수수한 생머리의 화장기 없는 얼굴 같은 모습이다. 전문을 옮긴다.

 

 

     한 그릇의 밥

 

                                    나 희 덕

 

집에 돌아와 한 그릇의 밥을 푸면서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지금쯤 보충수업에 자율학습에 지쳐

진밥처럼 풀이 죽은 아이들,

희고 고운 얼굴들이 형광등에 빛 바래고

조용히 밥 그릇에 담겨

귀가 시간을 기다리는 아이들.

빈 자리 몇 개, 누가 도망갔느냐고

욱박지르며 묻고 돌아서면

-몇 시간 일찍 간 게 왜 도망입니까

-무단외출 했다고 무기정학입니까

말없이 대답하는 눈동자들.

오늘은 가출한 두 아이를 찾아나섰다

어두운 레스또랑 구석, 오락실, 만화가게,

미성년자 출입금지 팻말이 붙은

여관 골목들을 찾아다녔지만

거리 거리 찬바람만 불어오는 저녁

두 아이를 담고 있는 그릇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그릇의 밥을 푸면서

한 알도 흘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교사,

더러는 발밑에 떨어진 것도 주워담아

제 입에 넣고 맛있게 씹을 일이다

내일이라도 두 아이가 돌아온다면

밥보다 반가운 아이들,

덥석 껴안고 감사의 눈물이라도 흘릴 것이다

따뜻한 한 그릇의 밥을 받은 것처럼 

 

 

       소 원                

                               나 희 덕 

 

네가 아들 몫을 하려면 법대에 가라,

힘없는 아버지의 힘준 목소리가

전봇대 위의 붙박이별처럼 빛나던 시절

저는 글을 쓰겠어요,

그때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너도 이제 졸업반인데 살 궁리를 해야지,

남들은 외국어학원이다 자격증이다 난리인데

밤늦게 쏘다닌다고 꾸중만 듣던 제가

아버지에 대한 시를 써서 문학상을 받던 날

그 시를 읽으시고 한참 생각에 잠기시던 아버지.

 

포탄이 남기고 간 기억 속에 평생 잠기어 사신 아버지,

총살당한 할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오던 날

멀찌감치 미루나무에 기대어 울기만 하셨다지요.

낯선 따에 내려와서도 몇번의 실패를 겪고

자식만은 결코, 마지막 밧줄처럼 잡고 계셨지만

새가 날아가듯 그 기대와 욕심도 기울어갔지요.

 

욕심이 날아간 후에는

그 자리에 소원이 둥지를 트는가 봅니다.

이제 교사가 되고 시인이 된 저에게

희끗한 머리카락 위로 손을 흔드시며 하시는 말씀

내 소원이 무언지 아느냐,

네가 진실한 입 하나 가지고 사는 거다.

 

아이들에게는 올바른 교사가 되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감싸주는 시를 쓰거나,

아버지의 이마 위로 피어오르는 이 소원이

얼마나 멀고도 아픈 길 끝에 나온 것인지

진정으로 살아남는 길이 무엇인지 저를 가르칩니다.

 

아버지의 폐허 위에도 풀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아버지의 돌부리 사이로 갈대 줄기가 자라납니다.

점점 높이 자라고 대가 굵어지고

그럴수록 아버지의 폐허에 더 깊이 뿌리내리면서

아버지, 이제 저는 떠나갑니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시는 아버지의 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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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6-10-13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91년에 나온 시집이니 시인이 아직 서른도 되기전 20대에 쓴 시인데 (저랑 동갑이라서 금방 계산이 나와요 ^^), 벌써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 같아요. 그래서 시인일까요.
좋은 시, 좋은 구절 또 얻어갑니다, 덕분에요.

nama 2016-10-13 19:40   좋아요 0 | URL
`더러는 발밑에 떨어진 것도 주워담아
제 입에 넣고 맛있게 씹을 일이다`

이제는 이 싯구가 마음을 먹먹하게 하네요. 발밑에 떨어진 것들을 무시하고, 버리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시인은 역시 다르지요?
 

 

잘못했을 때, 그 잘못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르고 올바른 방법은 우선 그 잘못을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잘못을 가리기 위해 혹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궁색한 변명을 할수록 더 초라해질 뿐이다. 더 구차해질 뿐이다. 개인도 그럴진대 한 나라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면 이건 해악이다. 이런 온갖 해악질에 사는 게 고달프고 새삼 국가의 의미를 묻게 되는데... 요즈음 해악질 리스트라도 작성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중 몇개, 훗날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강신명, 농민 백남기 씨의 사망 총책임자인 전 경찰청장.

 

"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해서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백선하, 농민 백남기 씨의 사망진단서를 작성하신 서울의대교수.

 

" 유족의 반대로 연명치료를 받지 못해 백 씨가 사망에 이른 만큼 사인을'병사'로 표기한 것은 문제가 없다."

 

 

어눌한 코미디언 같은 정치가 이정현의 단식.

 

"G20 국가 중에서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법을 안 지키는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일 거다. 선거제도가 정착된 그러한 나라들 중에서 단식투쟁을 하는 국회의원들이 있는 나라도 바로 아마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바로 우리 국회의원의 특권이 시작되고 있다”

 

 

호주에는 '국가 사과의 날'이 있다고 한다. 그 과정을 읽어보면 호주나 우리나 거기서 거기지만 그래도 잘못을 인정했다는 의미에서 호주가 선진국임은 확실하다. 우리도 국가 사과의 날을 제정한다면....2월? 4월? 10월?.... 너무 많다.

 

 

다음은 최유필의 <가만한 당신>에서 발췌한 글이다.

 

매년 5월 26일은 호주의 '국가 사과의 날 National Society Day'이라고 한다. '호주 정부가 과거 원주민에게 범한 야만적인 일들을 사과하고 잊지 않겠다는 취지로, 비슷한 잘못을 다 함께 경계하자는 취지로 1998년에 지정했다.'

 

1905년부터 1970년까지, '호주의 백인 정부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부모와 혈족의 품에서 강탈해 집단시설에 수용한 뒤 결혼과 교육과 노동으로 원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탈색하고 백인화했다'고 한다. 이 국가유괴로 최소 10만 명의 아이들이 수용소로 끌려갔단다. 이들을 '도둑맞은 세대 Stolen Generation'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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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배달되는 조간신문은 주로 주말에 몰아서 읽는다. 밥 해먹고, 치우고, 출근하고....신문 읽기는 사치다. 그런데 오늘은, 밤새 시름겨워 날밤을 새우다시피 하다가 어쩌다 시간이 남아 신문을 펼쳤다. 우선 김종철 칼럼 '불의한 나라의 전문가들'이 눈에 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4495.html

 

정신이 번쩍드는 문장에 아침잠을 깬다. 이런 '시름' 앞에서 간밤의 내 시름은 사치스럽기만 하다.

 

"최근 한국을 다녀간 한 일본인 지진 전문가는 지난 9월의 경주 지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지진이 경주 인근에서 3~4개월 후 발생할지 모른다는 충격적인 예측을 했다. 이 불길한 예측이 현실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규모 6.5의 지진까지 견딜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는 한국의 원전들이 조만간 붕괴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래서 떠오른 이반 일리치의 문장.

 

오늘날 위기란 말은 의사, 외교관, 은행가, 온갖 사회 공학자가 모든 상황을 접수하고 사람들의 자유를 유보하는 상황을 의미하게 되었다. 국가도 사람처럼 중환자 리스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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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미장원이나 이발소, 떡집, 약국, 국수집, 중국음식점, 분식집....이런 곳은 단골로 정해두어야 일상이 편하다. 특히 미장원이나 이발소는 내 마음에 맞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 일단 어떤 곳을 단골로 삼게 되면 한동안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남이 보기에는 그 헤어스타일이 그 헤어스타일로 보일 지 몰라도 내 딴에는 공을 들이는 곳이 머리카락이다.

 

우리 동네에는 남편이 단골로 삼은 남성전문커트가게가 있었다. 동네의 수많은 미장원과 이발소를 제치고 이곳을 단골로 삼은 이유는 단순하다. 가격 대비 솜씨가 출중한 미용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손이 야무져서 새로 이발을 해도 가위자국이 남지 않아 매우 자연스럽고 유행을 따르는 듯 아니 따르는 듯 손님에 맞게 적당히 머리를 다듬어주었다. 그 '적당히'의 참맛을 아는 아줌마 이발사가 있는 곳이었다. 재밌게 생각되었던 건, 이 30대의 이발사는 보통 생각하는 성실성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공휴일은 말할 것도 없고 평일에도 여의치 않으면 가게문을 열지 않았다. 손님들이 아쉬운 게지 이발사인 나야 아쉬울 게 뭐 있느냐, 는 식이었으나 그래도 가게는 늘 손님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친절하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는 이발사였으나 머리 하나는 똑부러지게 깎았고 가격도 성인컷이 7,000원이어서 머리를 깎으려면 우선 가게는 열었는지, 기다리는 손님은 몇명인지 살펴보는 게 일이었다. 모든 기다림과 불편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한동안 매우 흡족해했다.

 

그런데 어느날 예고도 없이, 유리에 붙이는 종이쪼가리 하나 없이 그 이발소가 문을 닫아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동네에 새로 들어선 미장원을 다니게 되면서 사유를 듣게 되었다. 문제는 임대료였다. 월세 60만원이었던 것이 갑자기 100만원으로 올랐다고 한다. 100만원이면 한 달에 (100만 원÷7000원= 142.86) 성인컷으로만 따져도 142명이다. 142명의 머리를 깎아서 그대로 가게주인에게 바쳐야 한다. 임대료라는 명목으로. 현대판 노예에 다름아니다.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평소에도 가게문을 성실하게 열지 않았던 (아마도 자존심 강한) 분이었기에 이런 상황을 참고 받아들일 수 없었으리라. 성실성에 억매이지 않고 배짱좋게 하고 싶을 때 일하는 그 분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는데, 매우 아쉽다. 그 가게앞을 지나갈 때마다 '꼭 성실하게 살아야 하나'를 늘 자문하게 했던 분. 어디에서건 무탈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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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출근할 때 차창밖으로 산책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쉬곤 한다. '나도 저렇게  아침에 산책하고 싶다. 저 사람들은 출근하는 나를 부러워할 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오늘 아침 산책길에 나섰다. 휴일모드에 젖은 몸은 무겁고 마음도 어지럽다. 퇴근할 때 걷는 습관이 몸에 배어서인지 아침산책은 참 낯설고 몸도 따라주지 않는다. 날씨 탓인가. 엇그제 완독한 스밀라의 여운인가. 그러고보니 겨우 몇장 찍은 사진도 스밀라에 나올 듯한 장면같다. 무거운 하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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